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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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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노벨리스트 - 부제 : 좀비 인펙션
글쓴이: 초한월
작성일: 11-06-21 23:48 조회: 2,139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 Novelist & Novel List







28일후, 28주후, 새벽의 저주, 레지던트 이블, 데드 셋, 워킹데드 등등.
대로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찢겨져 나풀거리는 넥타이,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 구두를 잃어버린 추한 꼬락서니가 딱 어디서 한바탕하고 온 취객의 행색이었다.
‘대낮부터 술인가.’ 그러다 벌레라도 튀어나올 듯한 썩은 면상이 시야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시체? 별 멍청이 같은 생각을 다 한다고 생각하며 아픈 머리를 쥐어 잡고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그대로다.
뭔가 잘못됐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딘지도 모르겠다. 현재 상황에 내가 완전히 무지하다는 걸 깨닫자 극심한 공포와 혼란이 밀려들었다.
캬아아아!!!
곳곳에서 괴성이 울려 퍼진다. 나는 깜짝 놀라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절뚝거리며 힘든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거리 도처에 널려있었다. 썩은 내와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현장, 결코 정상은 아니었다. 아니, 정상이 아닌 수준을 떠나 최악이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좀비의 형상이 녹아있었다. 헛것을 보고 있을 뿐이라는 논지를 펼치려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협적인 몰골들이 이성보다는 본능을 자극했다.
그러니까 일단 도망치라고 이 자식아! 생각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어!
나는 감에 의지해 아무 곳으로나 내달렸다. 기다렸다는 듯 빌딩 사이사이에서 수많은 좀비들이 출몰했다. 반복되는 위험에 어찌어찌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미로에 갇힌 것처럼 탈출로를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헤매는 시간이 계속됐다.
빌어먹을! 지옥이야 뭐야!
그렇게 온 몸이 땀범벅이 되었을 쯤, 여태까지와는 다른 우렁찬 괴성이 고막을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소리는 저 사람의 비명이었나?
달리는 것을 보고 동지가 아닐까 하고 반색하다가 이내 표정을 구겼다. 경계심의 추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혼자 쫓기기 싫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끔찍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극한의 위기로 직접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부패가 덜 진행된 몸뚱어리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좀비를 보며 나는 비명과 함께 달리기 속도를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으아아아아!!!”
도망갈 수 있어! 저쪽보다 살아있는 세포가 많은 내가 더 강한 출력을 낼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던 나는 곧 그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세포가 살아있는 대신 지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폐활량이 바닥나자 몸이 뜻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다리가 굳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면을 주시하는 것도 힘들 만큼 눈 근육에 힘이 풀렸다.
허억- 허억······ 살려줘.
타앙! 타앙!
그때, 총성이 울렸다.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구세주의 부름을 받은 신자처럼 정신없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고기뷔페와 호프, 생선요리 전문점, 불닭집 따위들이 보이는 먹자골을 달려 일직선으로 네 블록을 주파. 다시 한 번 총성을 귀담아 듣고 이번엔 왼쪽으로 전력 질주했다.
아아-!
저기 좀비들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무리가 보인다. 일반시민 같은 차림새였지만 총으로 주변을 엄호하는 그 모습이 여느 특전사 못지않았다.
가능하면 빨리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그들의 위치는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있을지언정 서로의 정체를 단번에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물론 나야 저들이 정상적이란 걸 알아볼 수 있다지만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손을 흔들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내 뒤에 따라오는 좀비들을 떼어달라고 외쳤다.
근데······ 왜 도와주지 않지?
간간히 이쪽으로 총을 쏘고는 있었지만 그건 결코 나를 돕기 위한 발포가 아니었다. 식별이 안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좀비들의 행동양식과 내 제스처는 엄연히 달랐으니까.
마치 나를 못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봐요!!! 저 안 보이십니까아!!! 제발, 여기 좀 도와-””
철푸덕!
설상가상. 나는 멍청하게 넘어져버렸다. 도움을 요청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가 도로 위에 넘어져있던 입간판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탓이었다. 입간판이라니, 내가 여기서 곤란을 겪을 거란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누군가 미리 설치해놓은 함정 같았다.
“크윽! 제, 젠장·····!”
가차 없이 바닥에 고꾸라진 탓에 골이 다 띵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삭힐 시간 따윈 없었다. 평소에 번화가에서 넘어졌을 때 느꼈던 그런 쪽팔림 때문이 아니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엄살 부릴 생각이냐고 일갈하고 있었다.
극도의 불안감이 날 떠밀어 일으킨다. 무릎이 쓰리고 팔꿈치가 욱신거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좀만 더 가면 저 앞의 사람들과 합류할 수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당할 수는 없었다.
캬아아악!
하지만 바로 등 뒤에서 울리는 괴성은 내 각오와는 별개였다. 안 그래도 지척에서 쫓아오던 한 좀비가 어느새 날 물어뜯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끝장이다. 이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비명을 지르는 대신 가슴만 덜컥 내려앉았다. 진정한 공포 앞에 나는 멍청하게 굳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예상하는 순간, 어이없게도 좀비는 내 곁을 지나쳐갔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수많은 다른 좀비들도 나를 못 본 척하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먹잇감답게 벌벌 떨고 있는데도 단 한 차례의 공격도 받지 않았다.
“뭐, 뭐냐고.”
다행이건 아니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긴장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남아있는 걱정과 달리 나를 노리고 있는 좀비는 없었다. 행여 이쪽을 노려보고 있더라도, 조금만 옆으로 물러서서 보면 그 시선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내가 멋대로 도망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난 이 상황에서 배제돼있는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일단 좀비들의 진행로에서 빠져나왔다.
후우- 사, 살긴 살았지만······.
잠시 시간을 가지고 생각에 잠긴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위험에서 빗겨나 있는 듯했다. 안심이 됐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제까지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니까. 뭐가 어떻게 됐든 간에 정상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뛰어와요!!!”
“제기랄!!! 우측에 화력 좀 지원해줘!!!”
“더 버티긴 어려워! 빨리 퇴로로!”
이동을 시작한 그들의 입에서 쉴 새 없이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간신히 그들과 합류한 내가 혹시나 하는 심정에 여기저기 말을 걸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누가 말을 걸어대는 것이 귀찮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냥 나를 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 다 왔어요! 다들 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돼요!”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한 복합상영관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적합한 장소였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좀비들이 충분히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자세히 말해 1층 벽의 대부분이 유리였다. 약한 유리는 아니겠지만 제 몸이 부서지는 것조차 상관 않고 부딪혀올 놈들을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지만 인솔자들은 여전히 내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어차피 뭘 따질 입장도 아닌지라 조용히 시선을 돌리다가, 복합상영관의 외벽에 붉은색 페인트로 휘갈겨 쓴 글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난소······?
그 글씨를 읽은 나는 복합상영관의 지척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섰다. 그런 나를 두고 여태까지 같이 달려오던 사람들이 무심하게 제 갈 길만 재촉했다.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좀비들의 괴성에 휩싸이며 나는 무심코 인상을 찌푸렸다.
피난소라고 써진 영화관, 부패 정도에 따라 신체능력에서 차이를 보이는 좀비들, 내가 달리면서 거쳐 온 먹자골.
잃어버린 퍼즐조각을 찾아 맞춘 것처럼 나는 길게 탄식했다.
“이건····· 내가 쓴······.”
투두두두두-! 투두두두두-!
순간, 거친 격발소리에 놀라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생존자 무리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좀비들을 피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인솔자 중,
유독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아, 정말 잠이 쏟아지는 날이네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의 불평이 내 잠을 깨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전기펜스에 닿은 것처럼 전신이 찌릿찌릿했다. 책상에 상체만 기대고 잔 탓에, 오랫동안 불편한 자세를 지탱하는 역할로 전락했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렇게 졸릴 때나 몸이 찌뿌듯할 때는 스트레칭을 해주는 게 좋은데-》
알아. 손을 뻗어 책상에 놓여있던 라디오를 꺼버린다. 입가로 살짝 흘러내린 침을 닦아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책상, 화이트보드, 몇 개의 책장과 부기프레임 책꽂이가 실내를 꾸미고 있는 이곳은 내가 매일 같이 찾아오는 문예부의 부실이었다. 나는 방금 전의 꿈을 상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꼴에 문예부 부원이라고 악몽도 참······.”
중얼거림을 멈추자 정적이 계속된다.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메모라도 해뒀을까 하여 벽에 붙은 작은 게시판을 살펴보았다. 거기 붙어있는 쪽지에 부장의 글씨체로 다들 일이 생겨 일찍 돌아간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아니 그럼 난 왜 안 깨워준 거야! 잔다고 골탕 먹인 거야?!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게시판을 붙잡고 힘없이 늘어졌다. 잔다고 이런 짓을 하다니······ 다들 실망이야.
그렇게 울분을 삭히고 있으려니 게시판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압정에 꽂혀 있던 한 장의 공책종이였다. 들어서 확인하자 손으로 그린 울퉁불퉁한 표가 보였다.
“후우······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제목을 너무 유치하게 지었다니깐······.”
부원들이 각자 집필하고 발표할 작품들의 제목을 적어놓았던 목록. 첫줄에 ‘강서준’이라는 이름과 함께 적혀있는 ‘좀비시티’는 올해 내 첫 장편소설이었다.


1. Zombie City
* Novelist & Novel List







토요일. 5 : 25 PM
일어난 지 30분이나 지난 지금, 다시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무심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던 내 입에서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1주일에 딱 토요일 하루만 자습이 없는 서린 고등학교 2년생의 입장으로서는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해탈해버릴 것만 같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냐······.”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것도 이젠 지쳤다. 나는 책상에서 습득한 FM 겸용 단파 라디오를 들고 한숨을 내지었다. 네 주인 보고 빨리 오라고 텔레파시 좀 보내봐. 수신만 잘하지 보내는 일엔 묵묵부답이다.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거칠게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부실 구석에 설치된 정수기로 향했다.
“집에 가버린 거 아냐?”
일회용 종이컵을 빼내며 잠시 의문을 갖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남매라도 서로에 대해 신경을 끄고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세상이지만, 그 녀석만큼은 내가 혼자 남게 될 걸 알면서도 무심하게 놔두고 가는 짓을 절대 하지 못한다. 여기 놓여있는 라디오가 보증을 서지 않더라도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졸음이나 쫒자는 생각에 정수기 옆의 찬장을 열어보았다. 마차, 녹차, 홍차····· 정말 많은 종류의 차가 있었지만 커피만 없었다. 부원들이 야자할 때 퍼마시는 커피를 부실에서 다 조달한 모양이었다.
젠장. 다른 차를 마셔봤자 잠만 오겠지.
벌컥!
입맛을 다시면서 찬장 문을 닫는데, 마침 커피를 가지고 부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 오라버니, 일어나셨어요?”
내 속도 모르고 생글거린다.
“부실에 있던 커피가 다 떨어져서 잠깐 사러 나갔다 왔어요.”
그러면서 들고 있던 커다란 인스턴트커피 한 박스를 내밀어 보이는 여동생. 포니테일 풍으로 머리를 묶어 내린 녀석은 특유의 귀여운 인상으로 부드럽게 미소하고 있었다. 나는 쪽지라도 남겨두고 가지 그랬느냐고 한 마디 하려다가, 그 모습을 보고 결국엔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문예부의 잡무를 도맡고서도 표정 한 번 구기지 않는 동생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라버니가 늦게까지 안 일어나시길래 나갔다 와도 되겠다싶었는데, 혹시 많이 기다리셨어요?”
나는 깜짝 놀라며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어? 뭐, 아니······ 그렇지는 않고.”
“하아- 다행이에요. 그럼 화 안 나신 거죠?”
났지만 없던 일로 하자. 나는 화가 났었던 사실을 지우겠다는 의지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그 모습을 보고 더 활짝 웃어 보이더니 이내 내 손을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오라버니, 빈 종이컵은 왜 들고 계세요?”
“아, 이거. 물 마시려다가 혹시 커피 좀 남아있으면 커피 마시려고······.”
“아! 컵 저 주세요. 제가 탈 테니까 앉아서 쉬고 계세요.”
괜찮다고 하는데도 기어코 컵을 빼앗아간다.
“저 있을 땐 저한테 시키세요.”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렇게 가만히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자연스레 아까의 감정을 반성하게 됐다. 평소에 저렇게나 잘해주는데 조금 기다리게 했다고 화를 내려고 했다니.
진짜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부장과 그를 따르는 무리란 걸 잊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이 어떠했는지는 너무 자명해서 상상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나를 자는 채로 놔두고 나가면서 서준이가 절대 깨우지 말라고 했으니 가능하면 건들지 말라는 얘기를 남겼을 테지.
융통성의 구비여부를 떠나 내가 ’절대‘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면 쉽게 어길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게 굉장히 한스러웠다.
어쨌거나 오빠가 깨기를 기다리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 불쌍한 동생에게 말도 안 되는 죄를 물을 뻔했다니 너무 미안해졌다. 아까 거칠게 내려놓았던 라디오를 가져다가 옷깃으로 닦아주었다. ‘강세영’이라는 사랑스러운 동생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한다.
“오라버니, 여기 커피······ 아! 뭐, 뭐하시는 거예요?”
놀라 묻는 세영이를 보고 이번엔 내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 라디오가 조금 더러워졌길래 닦아주느라.”
“그, 그러지 마세요. 오라버니 옷 더러워져요.”
세영이가 거의 애원하다시피 그만두라고 종용했다. 처음엔 못 들은 척했지만 점점 녀석이 울상이 돼가는 것을 보며 나는 할 수 없이 옷깃을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동생에게 건네는 라디오가 이제 보니 참 낡아보였다. 바꿔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안타깝게도 내가, 아니, 우리가 얼마나 궁색한 처지인지 떠올랐다.
“······커피 살 돈은 어디서 났어?”
받아든 커피를 마시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부장님이 통장 입출금 카드를 하나주셨어요. 잡무 볼 때 필요한 돈이 있으면 꺼내서 쓰라고 하시면서 비밀번호도 알려주시고·····.”
“부장이? 언제?”
“꽤 됐어요.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요. 오라버니한테도 카드 얘기하고 가끔씩은 융통성 있게 사용하라는 말도 전해달라고 하셨는데. 근데 융통성 있게 사용하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해선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 간다. 돈 많다고 유세를 부리는구나. 나는 한숨을 내쉰 뒤 커피를 한 번 홀짝였다. ······미워하지 못하게 꼭 수를 쓴다니까. 망할 녀석.
나는 성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언으로 대답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세영이는 왜인지 눈치를 살피다가 천천히 화이트보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주위를 서성이더니 바닥에 떨어져있던 지우개를 찾아내 화이트보드에 적혀있는 내용을 지우기 시작했다.
또 잡무인가. 정신이 돌아온 나는 문득 무슨 내용을 지우는지 궁금해져 물었다.
“거기 적혀있는 것들은 뭐야?”
“아····· 이번에 부원들끼리 조를 짜서 릴레이 소설을 쓰기로 했던 거 기억나시죠? 여기 적혀있는 건 2조가 쓸 소설 기획의 일부예요. 참고로 2조는 부장님하고 오라버니, 그리고 저예요.”
“내가 잘 동안 회의를 했단 소리군. 날 쏙 빼놓고.”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세영이가 허둥거렸다.
“부, 부장님이 예전에 오라버니랑 얘기했던 소재로 기획한 거라고······ 딱히 불만은 없으실 거라고 하셔서······ 아무튼 죄, 죄송해요.”
예전에 얘기가 오갔던 소재?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향하자 영국의 작가 ‘윌리엄 서머싯 몸’이 남긴 말이 붉은색 마카로 써져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 때문에 쓴다.』
아····· 그러고 보니 부장이 저 말을 멋대로 작가의 강박관념이라고 표현하면서 자기가 만든 세계관 하나를 떠들어댄 적이 있었지.
기억을 더듬는데 세영이가 기획서를 갖다 주었다. A4용지에 깨끗이 직접 필기한 것으로 보아 회의가 끝나고 정성들여 정리해놓은 것 같았다. 나 때문에 그럴 시간이 났을 거란 생각에 살짝 미안함을 가지며 기획서를 들여다보았다.
············이승과 사후세계의 사이에는 빈틈이 있다.
그 빈틈이란 광활한 공간은, 사람들의 의식에 떠오른 모든 상상의 이미지를 받아먹는 세계다. 끔찍하게 생긴 괴수, 세상에는 없는 보석, 현존 불가능한 우주선 같은 개인의 흥미와 바람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그냥 보고 들었던 것을 무의식적으로 재구성한 특색 없는 사고의 산물이라도 가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분출된 이미지라면 모두 복제해와 제 몸속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찌 보면 행성 쓰레기들이 떠다니는 우주의 검은 면 같은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차적인 특징만 보고 이곳을 정의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이따금씩 어떤 상상들이 결속해, 이 빈틈이란 공간을 할애해서 특유의 규칙이 존재하는 장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강박관념이 관련된다.
“작가는 특정 세계관을 오랫동안 떠올리고 그에 걸맞은 구성요소를 모순 없이 짜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의식적인 노력을 투자한다. 그 결과가 퍼즐처럼 특유의 결속력을 가진 상상의 요소들이고, 그 요소들은 빈틈에서 재결합해 작가가 견지하던 세계관을 그곳에 부상시킨다.”
나는 세영이에게 시선을 옮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대충 2조 릴레이 소설의 세계관이란 말이지? 스토리는 이 빈틈이란 곳에 의식을 잃은 사람들의 영혼이 갇히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거고.”
“네? 네·····.”
한숨이 터져나간다.
“자기가 생각한 걸 거의 그대로 밀어붙였네. 보나마나 네가 선호하는 장르는 고려하지도 않았겠지.”
이 망할 자식은 역시 욕을 해줘야 한다. 속없이 자기의견 한 번 말해보지 못했을 동생이 또 한 번 불쌍해졌다.
“오, 오라버니 전 괜찮아요.”
“괜찮기는······.”
안 괜찮다고 말하는 법도 좀 배워. 나는 미지근해진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는 것으로 답답함을 달랬다. 내가 아무리 얘기해봤자 성격을 시원스럽게 바꾸지는 못할 거다. 여태까지 내가 부단한 노력을 해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걸 생각하니 조금은 암울해졌다. 내가 챙겨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늘 남에게 휘둘릴 텐데······ 이것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라버니······?”
세영이가 불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내가 자기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호칭을 자발적으로 높여서 부를 정도로 세영이는 나를 진심으로 존대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나를 단순한 오빠 이상의 지위로 인식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나에게 밉보일 것 같으면 지레 겁을 집어먹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 안 났으니까 그거나 빨리 지워.”
그러면서 시계를 한 번 슥 쳐다본 뒤, 부실 구석에 내던져놓은 가방을 챙기러 걸음을 옮겼다.
“기획이고 뭐고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으니까.”
그 말에 세영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기억해내라는 의미로 부실 문에 붙은 한 장의 사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병상 위에 앉은 한 소녀가 다크서클이 드리운 얼굴로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으면 빨리 하도록.”
“네? 네! 아, 알았어요.”
세영이가 화들짝 놀라며 화이트보드를 광속으로 지워나갔다. 은근슬쩍 명령을 내리는 나도 나지만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세영이를 보자니 한 번 더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7 : 00 PM
동쪽병동의 중환자실 면회가 시작됐다.
미리 보호자 확인절차를 거쳐놓았던 나와 세영이는 시간에 딱 맞춰 방금 전까지 진입이 불가했던 공간으로 건너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같이 탄 몇몇 사람들이 층수를 입력하는 버튼을 눌러댔다. 3층, 5층, 6층······ 기다려도 아무도 최상층을 누르지 않았다. 내가 직접 최상층, 10층을 입력하자 주변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무시하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자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엘리베이터에서 하차했다. 그렇게 조금 더 기다려서 우리 둘만 남게 되자 곧 엘리베이터가 10층에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누구 찾아오셨나요?”
진입통로에 설치된 공간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가 물었다. 내가 환자의 이름을 말해주자 그녀는 별도의 방문기록을 남겨야 한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원하는 대로 몇 가지를 작성하고 나서야 우리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할 수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닌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최상층에서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더 곤란하니까요. 출입자의 신분확인을 철저히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세영이의 말대로다. 이 동쪽병동의 최상층은 VVIP실, VIP실, 특실 등이 늘어서 있는 특수독립병동이다. 출입자들의 신분을 다시 파악하고 확인하는 추가적인 절차가 있다고 해도 불만할 게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매번 납득을 하고 나면 어쩐지 씁쓸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세상은 언제나 돈 많은 사람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보호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치면 일반 병실에 입원해있는 것도 부담이 될 나로선 뭔가 자격지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가난한 처지인 내가 이곳에 면회라도 올 수 있게 된 건 그래도 행운이었다. 일반 중환자실은 제한적으로 친인척이 아닌 지인도 방문이 가능하지만 돈 많은 환자가 몰리는 이곳은 예외였다. 병원 관계자나 가족이 아니면 출입이 철저히 불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부장에게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다. 병원 관계자이자 이 병동에 입원한 환자의 가족인 그 녀석의 도움이 없었다면 신분을 위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 왔다.”
나는 나지막이 한 번 중얼거리고 복도 끝 쪽에 있는 한 병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통의 병실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TV와 소파는 기본이고 러브 체어와 스몰 테이블, 여러 엔티크 풍의 가구가 있다. 여느 집의 거실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올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고 유일하게 이곳이 병실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병상 옆으로 다가갔다. 마침 그곳에 놓여있던 의자에 몸을 앉힌다.
“잘 있었냐?”
병상 위에 누워있는 건, 부실 문에 붙어있던 사진 속의 여자아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와 예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수려한 이목구비는 사진과 똑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눈 밑의 다크서클이 말끔히 없어졌다는 것 정도?
“부장이 쓴 건가?”
대답 없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협탁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이 보였다. 언니가 학원 때문에 저녁 면회는 못 할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적혀있었다. 병실의 풍경으로 치부하고 넘겨버리려는데 본 내용 밑에 달려있는 추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추신은 다름 아닌 나를 향하는 메시지였다. 추신이라는 것은 보통 본문에 언급된 사람에게 남기는 말이지만 너무 자주 오지 말라는 문장이 적힌 것을 보아 나를 겨냥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포스트잇에서 그 부분을 찢어버렸다. 병원 면회를 올 수 있게 해준 주제에 이제 와 못 마땅한 거냐? 어림없어요. 뭣 하면 면회를 못 하게 방지를 하던가.
속으로 농담을 하는 사이 세영이가 다가와 두유를 건넸다.
“오라버니, 이거 마실래요?”
“어? 함부로 마셔도 되나?”
세영이가 또 하나의 포스트잇을 내미는 것을 보고 나는 한 번 더 웃었다. 거기에는 처치곤란인 두유 좀 마셔달라는 말이 있었다. 부장은 두유를 싫어한다. 우리보고 처리하라는 얘기다.
“야, 갈 때 몇 개 싸가자.”
“네? 그래도 될까요?”
“마셔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진짜 우리 말곤 마실 사람이 없는 모양이니까.”
나는 스트로우에 빨대를 꽂고 팩에 담긴 두유를 들이켰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계속 꿀꺽거리면서 병상 위에 얌전히 누워있는 녀석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이 병실에 왜 아무도 안 먹는 두유가 가득 쌓여있었는지는 이 녀석이 아주 잘 알고 있을 거다. 냉장고에 두유만 꽉 채워놓을 정도로 두유를 좋아했던 사람은 이 녀석 한 명뿐이니까.
“서은하, 두유 우리가 좀 가져간다. 어차피 너 금방 일어날 것 같지도 않으니까.”
화를 유발시켜보지만 녀석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통사고에서 팔다리 하나 안 부러지고 신체가 온전했던 건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축하했던 게 지금으로부터 딱 세 달 전이다. 그렇게 몇 가지 검사만 더 해보고 퇴원할 예정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깔리더니 그게 없어질 쯤,
이 상태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몇 군데 부러진 게 낫지······.”
내가 한숨을 내쉬자 덩달아 세영이의 표정도 안 좋아졌다. 기분은 전염되기 마련이라고 했던가. 나는 억지로라도 웃어보려고 했지만 원치 않는 헛웃음만 튀어나갔다.
하아. 또 한 번의 한숨과 함께 쓸데없는 짓을 집어치웠다. 그렇게 할 일없이 두유나 빨고 있다가 메이드처럼 가만히 서 있는 동생을 위해 의자를 하나 끌어다주었다.
“앉아. 왜 멀뚱멀뚱 서 있냐.”
이제야 우물쭈물 앉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기가 막혔다.
“야. 난 네 오빠지, 네가 섬길 대상이 아니야. 너무 불편하게 굴지 말란 말이야.”
“죄, 죄송해요.”
망설일 것 없는 사과. 자기가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걸 보니 더 이상 뭐라 할 마음이 없어졌다. 나한테만 이러면 그나마 다행이다. 나를 대하는 것보단 덜 하지만 세영이는 남들 앞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유순했다. 그래서인지 바보같이 자기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도 많고.
만날 희생할 줄 아는 녀석. 안쓰럽게 생각하는데 돌연 부실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부장이 기획했던 거 말야.”
내가 소설 기획 얘기를 꺼내자 세영이의 얼굴이 더 나빠졌다.
“저, 전 별로 상관없는데요.”
“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안심해.”
“네? 그럼·····.”
“혹시 누가 결말을 맡게 되건 해피엔딩으로 끝내달라고 주문하지 않았나 해서.”
세영이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까, 깜박하고 말씀 안 드렸네요. 죄송해요.”
“겨우 그런 걸로 또 사과냐.”
따지는 게 아니라 걸리는 게 조금 있을 뿐이다. 부장 녀석, 원래부터 릴레이 소설을 쓸 때마다 독선적으로 굴었으니 그 점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녀석이 쓰고자 하는 소설의 장르와 스토리 엔딩방식이 평소와 다른 건 별개의 문제였다. 녀석이 쓰는 소설은 언제나 SF에 새드엔딩이었다. 갑자기 그런 기획을 낸 데에는 이유가 필요했다.
오래 생각 안 해봐도 안다. 은하를 이번 릴레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쓰고 싶다는 소리겠지. 물론 이해는 하지만 요즘 부장의 모습을 보면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예를 하나 들기 위해 가장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건 2주 전의 사건. 밤 12시가 넘어서 그 녀석이 우리 집에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받는데 우는 소리가 들려서 얼마나 놀랐던지. 자기 동생이 어디 갇혀있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 헛소리가 이번 소설 기획에 관련된 거라면 정신이 망가져가는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피엔딩이면 뭐가 잘못됐나요?”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냥······ 뭐랄까.”
생각해보니 이런 얘기를 해서 세영이가 같이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적당히 얼버무려버린다.
잠시 궁금한 표정을 짓던 세영이는 내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억지로 관심을 끊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두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저, 근데 오라버니. 곧 있으면 요 앞 마트에서 타임세일이 있을 예정인데······.”
“타임세일······? 웬 타임······ 아! 맞다아!”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이벤트인가 뭔가로 이 근처의 마트에서 몇 가지 식재료를 초특가로 판다고 했었다. 꼭 이때 사기로 한 것들이 있으니 시간이 거의 다 됐다면 서둘러야 했다. 나는 짜증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황급히 가방을 챙겨들었다. 그 와중에 두유 몇 개를 챙겨 넣는다.
“아무래도 오늘 면회는 이만 해야겠다. 얼른 가자. 미리 가 있어야지 안 그러면 늦어.”
부실을 나설 때처럼 급한 발걸음. 문을 열고 세영이를 먼저 내보내는데 나도 모르게 시선이 뒤로 향했다. 그렇게 병상이 눈에 들어오자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죄책감인가?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 아닌 인사를 남겼다.
“금방 돌아간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진 마.”
나, 타임세일 같은 거 놓칠 수 없을 정도로 궁색 맞은 거 알잖아.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은하는 나와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다. 나는 자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7 : 40 PM
밖에 나오니 세상이 잿빛으로 우중충했다. 해가 질 시간이 거의 다 되긴 했지만 조금은 이른 어둠이었다. 다 저 하늘에 떠 있는 검은 구름 때문이다. 주변이 습한 것을 보아 곧 있으면 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아침 일기예보에서 저녁부터 날씨가 안 좋아질 수 있으니 유의하라는 말을 전해 듣긴 했지만 세영이도 나도 깜박하고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던 터라 상황이 심각했다.
“벌써 빗방울이 떨어져요.”
손바닥을 위로 한 세영이가 말했다. 나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음····· 역시 타임세일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으려나? 무거운 짐 들고 비까지 맞기는 좀·····.”
“버스를 타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 집은 정류장하고 좀 거리가 있으니까. 뭐, 네가 괜찮다면 마트 들렀다 가고.”
“저는 괜찮아요.”하고 곧장 대답하는 걸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조건 내 뜻대로 할 테니 알아서 하라는 거지? 본의는 아니겠지만 세영이가 책임을 나에게 일임해버린 꼴이 됐다.
“그럼 내가 사갈 테니까 넌 먼저 집에 들어 가.”
부담을 갖고 고민하다가 운 좋게 명안을 내놓았다. 이러면 행여 비가 내리더라도 내가 다 감당하면 그만이었다. 더 날씨가 악화되더라도 동생을 고생시키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사서 고생하는 동생이 곧장 반대의사를 던져왔다.
“아, 안 돼요.”
“뭐? 왜 안 된다는 거야.”
“날이 이렇게 어두워졌는데 혼자 가라는 말씀이세요?”
투정 따위가 아니다. 그런 건 할 줄 모르는 녀석이니까. 함께 고생하자는 뜻을 피력하는 세영이를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못 말리는 동생 같으니. 이런 면에서는 유일하게 고집을 보이기 때문에 나는 할 수 없이 동행을 결심했다.
그렇게 함께 걸어가 도착한 마트 근처의 교차로.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빗줄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 두 방울의 수준을 벗어났으니 사실상 폭풍전야나 다름없었다. 조금 있으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겠구나. 살짝 후회가 밀려오는 동시에 원인모를 오한이 들었다. 6월 중순의 이른 더위가 벌써 저 검은 구름에게 잡아먹혔나 하고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리 빨리······.”
어쨌든 마트에 가기 전부터 홀딱 젖고 싶진 않았다. 주문이랍시고 현 상황에 걸맞은 특정 부사를 연달아서 중얼거렸지만 신호는 쉽게 도로횡단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오······ 빨리! 빨리 좀!”
지면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을 때쯤에야 내가 건너야 할 곳을 달려오던 차들이 각기 제한선 앞에 멈춰 서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졌다.
기다렸다는 듯 강렬한 폭우가 쏟아졌다. 나는 기겁하며 든 게 별로 없는 가벼운 내 가방으로 세영이의 머리부터 가렸다. 녀석이 이러지 말라며 선의적인 반항을 해왔지만 실랑이를 할 시간이 없었다.
“세영아, 뛰어! 일단 건너자!”
나에게 손을 붙잡힌 세영이가 엉거주춤하게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억지로 빨리 뛰게 만든 내 행동이 일생일대의 후회로 남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으아아아!!! 다 젖겠-”
물기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비명을 지르는 순간이었다.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내 몸에 원치 않는 제동이 걸렸다. 세영이가 맞잡은 손을 역으로 끌어당긴 것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것도 잠시, 내 귓속으로 엄청난 굉음이 쑤셔 박혔다.
콰앙!!!
천둥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위를 향했다. 검은 구름만 잔뜩 보일 뿐, 연속되는 번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천둥을 들은 것만으로도 날씨가 얼마나 험악해졌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영이가 왜 움찔거리며 날 잡아당겼는지도 알 것 같았다.
타임세일이고 뭐고 역시 식재료를 사는 건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낫지 않을까? 비를 맞는 문제 이전에 나는 번개를 무서워하는 동생을 데리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단은 마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지만 발이 허공을 휘젓는다. 시선도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 돌아가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고 할까,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다고나 할까.
콰직.
어딘가에 쳐 박히는 순간 기분 나쁜 울림이 머릿속까지 타고 흘렀다. 신음과 함께 간신히 숨을 뱉어내자 순식간에 온 몸이 달아올랐다. 지면을 훑는 내 두 눈에 붉은색 물감이 섞인 빗물이 보였다.
“끄어아······.”
입을 열자 정체불명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로 배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붉은색 빗물의 양이 많아질수록 현기증이 심해졌다.
겨우 돌린 시선에 미끄러져 넘어져있는 화물차 하나가 포착됐다.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원근법이 뭔지 모르겠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조금 더 정신을 붙잡고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작동을 멈춘 목뼈를 놔두고 눈알만 힘겹게 회전시켰다.
픽- 하는 소리가 났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어져도 이렇게 허무한 소리가 날까? 눈꺼풀이 닫히자 나는 노이즈조차 없는 새까만 화면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 * *

-뽀! 삐뽀! 삐뽀!
갑자기 싸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선명하지는 않은 것을 보아 소리는 외부를 향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어딘가의 내부에 있단 얘기겠지. 하얀 빛이 감지되길래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겨우 안구를 드러낸 눈꺼풀은 채 1초를 못 버티고 다시 주저앉았다. 정신을 집중해보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의식이 어둠에 잠기더니, 어렵사리 눈을 떠보자 편집적으로 내가 있는 공간이 바뀌어있었다. 여전히 나는 환자 운반차에 실려 있는 상태였지만 이번엔 어느 건물의 복도로 이송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더니 또 다시 시야가 점멸.
주마등이라고 해야 할지, 의식만 간신히 붙들고 있는 틈을 타 초등학교 때 배운 안전수칙이 떠올랐다. 횡단보도 신호등에 초록불이 떴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고. 그게 안전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그렇기 때문에 길을 건널 때는 언제나 주위를 살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배운 건 잊어먹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을 잊은 대가는 늘 불시에 찾아온다. 나는 뒤늦게야 그 불시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절감하며 신음을 흘렸다.
“으으으······.”
동시에 내가 받았던 충격을 상기하는데 갑자기 정신이 맑아졌다. 사고능력이 회복수순을 밟자 문득 세영이 생각이 났다. 내가 이 꼴이면 당장 달려와서 펑펑 울 아인데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 예상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참혹하게 느껴졌다.
부모가 없어 가난한 게 내 불운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니 신을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 친구도, 동생도, 내겐 너무 과분했나?
“젠장····· 윽?!”
짜증이 치솟아 머리털을 부여잡던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고, 상체가 기립했다.
어떻게 된 거지? 멀쩡하게 움직이는 손을 가지고 몸 이곳저곳을 만져본다. 생각 외로 어디 한 군데 잘못된 부위가 없었다.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눈꺼풀을 마음대로 개폐하지도 못했는데.
“여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살펴보자 수많은 병상이 보였다. 병원에 실려 온 건가? 치료를 받아서 몸이 괜찮아진 거고? 아니, 애초에 별로 다치지 않았던 건가? 나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서면서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떠올린 질문들은 안타깝게도 굉장히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제대로 된 해답을 내릴 수 없을 뿐더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에 혼란만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쌓인 먼지와 용도모를 기자재들이 쓸려나갔다.
“뭐야, 이거·····.”
어째서인지 병상이 아니라 더러운 바닥에서 회생한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버려진 병실의 모습이었다.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기막힌 환경에 인상을 찌푸리는데, 가까운 곳에 세영이의 가방이 떨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걸어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여기저기 뜯어진 상태였지만 젖어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걸까?
나도 모르게 병실에 있던 벽시계로 시선을 향했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된 듯 보이는 그 낡아빠진 벽시계엔 시계바늘이란 것조차 없었다.
나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치직- 치이이익-』
순간, 가방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가방을 떨어뜨렸다.
『치직- 주의하십- 치이이-』
사람의 목소리. 소리의 근원지는 세영이의 라디오였다. 내팽개친 가방에서 흘러나온 그것을 조심스럽게 주워들었다.
『그것들은- 치익- 인데-』
말투가 좀 이상한데? 보통의 라디오 진행자들과 뭔가 느낌이 달랐다. 전파수신이 잘 안 되는지 여기저기 잡음이 섞여 들어가고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짜증이 났지만 끄진 않고 스피커를 귀 부근에 가져갔다. 기묘한 분위기에 잠시 이끌렸던 것 같다.
『당신을 죽이려 할 겁니다.』
섬뜩. 갑자기 들려온 또렷한 한 마디가 심장을 찔렀다. 라디오 공포 드라마인가? 더 이상 보류할 없이 전원을 꺼버리고 뭐라도 건지기 위해 계속해서 눈을 돌렸다. 그러다 병실 구석에서 내 가방을 발견했다. 세영이의 것과는 달리 멀쩡했다. 불안감이 치솟는 대목이었다. 역시 나는 괜찮았던 건가? 그럼 세영이는·····.
라디오를 내 가방 안에다 넣고 병실 문으로 걸어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을씨년스러운 장소를 벗어나야만 했다.
문을 나서자 기다란 복도가 보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병실 안은 그래도 전등시설이 잘 돼있었지만 복도는 수명이 다 된 듯한 형광등 몇 개가 흐린 빛으로 길을 안내할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복도로 발을 내디딘다. 가능한 아무 소리도 내고 싶지 않았지만 전진할수록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병원용품들. 괴기스러운 주위환경이 내 가슴을 짓눌러서인지 호흡이 부자연스러웠다.
제기랄. 진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복도는 양 옆에 병실을 두고 있는 구조여서 밖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있던 병실은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만 치우면 바로 밖이 보일 것 같았는데······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만큼 돌아가서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파직!
계속 걷고 있는데 유리조각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내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그아아아아아······.
노쇠한 노인의 목에서 가래가 끓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그런 괴상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중앙계단 쪽을 서성이고 있었다. 몸에 문제가 있나싶을 정도로 계속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딱히 불편해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질적이었다. 낯설고 이상한 장소에서 발견한 결코 정상인 것 같지는 않은 남자. 그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뒷걸음질이 쳐졌다. 중앙계단이 코앞이지만 도저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복도에 설치된 형광등이 점멸을 반복하면서, 내게 뒤통수를 보이고 있는 남자의 명암을 계속해서 반전시켰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아. 직감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그런 내 심정을 아는 것인지 남자가 한 번 더 울부짖으며 내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차, 창문으로 나가자.
나는 뒤돌아 처음에 있던 병실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모르면서 창문을 이용하겠다고 하는 건 상당히 무모한 결심이었으나, 내 생각엔 중앙계단을 이용하는 것도 만만치 않게 무모해보였다. 저 남자에게 들켰다간 왠지 감당치 못할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가는 길에 다른 병실이 보였지만 한 눈을 팔지는 않았다. 문에 작은 창문이 달리긴 했지만 먼지가 잔뜩 껴있어 결과적으론 안을 확인할 수도 없는 병실을 열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안 쫒아오지······?
열심히 걸어가면서 뒤를 돌아보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남자에게서 멀어질수록 불안감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러던 차에-
-쾅!
정면을 주시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복도중앙에 놓여있던 휠체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으로 밀려났다. 상처가 생긴 무릎을 감싸 쥐는 것도 잠시, 나는 목적지로 삼은 병실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해야만 했다.
-크아아아아아!!!
쫒아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정확히 날 노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넘어질 뻔한 고초를 겪은 끝에야 간신히 목표한 병실 안에 도달한 나는 황급히 문고리를 붙잡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크아아아!!
쨍그랑! 문에 달린 자그마한 창을 깨고 면상을 드러낸 남자를 보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젠장!!!!”
썩어버린 왼눈과 살기 가득 찬 나머지 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맹수처럼 으르렁 거리는 입 안엔 출처불명의 고기조각 몇 개가 달라붙어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부가 썩어 들어간 얼굴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확신하건대 지금 유리창을 깬 것과는 다른 이유로 저렇게 된 게 분명했다.
“다, 당신 뭐야!!!”
대답해줄 리가 없다. 나는 문에서 떨어지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부서진 병상의 잔해로 보이는 쇠로 된 봉 하나를 주워들었다.
“꺼져! 안 그러면 공격할 거야!”
창문이 워낙 작아 머리밖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지만 곧 있으면 아예 문을 부숴버릴 기세였다. 나는 협박이 안 먹힌다는 것을 깨닫고 문과는 반대편에 있는 창문으로 뛰어가 커튼을 열어젖혔다.
밖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 병실의 층수는 2층인 것 같았다.
망설일 것 없이 창문을 열었다.
외벽에 배수관이 있다. 요즘은 미관과 범죄방지를 위해 벽에 밀착시키거나 아예 벽에 넣어서 시공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행히도 내가 맞닥뜨린 건 붙잡을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봉을 아래 보이는 화단에 내던지고 바로 배수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느새 문을 부수고 병실에 들어온 남자가 창문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다. 뛰어내리기라도 할 모양새라 나는 봉을 집어 들고 얼른 거리로 달려 나갔다.
밖은 어두웠다. 어째서인지 비구름이 하늘에서 완전히 사라져있었지만 빛을 되찾아줄 해도 이미 내려앉은 상태였다. 곧 있으면 완전한 밤이 찾아오겠지. 아마도 10여분 이내로 지금 보이는 미약한 빛도 없어지고 주변이 짙은 어둠에 잠길 것이다.
그런데, 그 짙은 어둠이 찾아오면 필시 문제가 될 터였다.
“번화가 같은데 왜······.”
주위의 상점들 불이 전부 꺼져있었다. 가로등은 점등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번화가 특유의 빛이 없으니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잠시 생각을 해보면서 느낀 건데 여기는 내가 살던 도시와 아예 관련이 없는 곳인 것 같다. 지리를 파악하겠다는 것부터가 사리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왜, 어떻게 이런 곳에 온 건지 영문을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괴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 남자가 쫒아온 건가 하여 급하게 사방을 살피던 나는 드디어 상황을 깨닫고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꿈인가?”
나는 그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뒤늦게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꿈속의 대로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처음 내가 정신을 차린 장소가 병원인데다 시간대가 달라 인지하는데 시간이 걸린 것뿐이었다.
시시각각 나를 향해 다가오는 무리들을 보고 있자 자연스레 꿈에서 봤던 내용이 오버랩됐다.
“젠장, 꿈인가? 꿈이야?”
그런데 이 감각은 꿈에서 느껴지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오감을 지배하고 있는 신경이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사납게 일갈하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는 지독한 현실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제발 꿈에서 깨게 해달라고 빌면서도 나는 부동자세로 일관하지 않았다. 무작정 두 다리를 움직여 아무 곳으로나 달려 나갔다. 어떻게든 숨을 만한 장소를 찾아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이대로 완전한 어둠이 내리면 나는 이도저도 못하고 죽어버릴 게 뻔했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설사 진짜가 아니더라도 당장 중요한 건 피신뿐이었다.
투득-!
제기랄! 또 이런 식이야! 거칠게 튀어 올라있는 아스팔트 잔해에 바짓가랑이가 걸렸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은 잠시였지만 그때를 틈타 바로 뒤에 있던 녀석 하나가 달려들었다. 병원에 있던 녀석과 마찬가지로, 꿈과는 달리, 명백히 나를 노리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쇠 봉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콰직-!
“으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도 쉽게 부서져버린 머리. 손에 남은 기분 나쁜 감촉 때문에 정신이 망가질 것 같았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봉을 집어 든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다시 달린다.
“으아아-! 누, 누가 좀 도와줘-!”
꿈속에서처럼 총소리가 들리길 기대했지만 고막을 울리는 건 오로지 내 비명과 녀석들의 괴성뿐이었다.
이동할수록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진다. 아직 포위당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도 가도 녀석들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재빨리 주위를 스캔했다. 이대로 더 가다가 병원에서처럼 멀쩡하게 달릴 줄 아는 녀석을 마주치게 된다면 피할 자신이 없었다. 숨을 장소, 숨을 장소······ 숨을 장소가 필요했다.
-그아아아아
너무 방심했나?! 그새 좀비 수십 마리가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날 압박해오고 있었다. 당황했지만 그대로 멍청하게 굳어버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퇴로를 뚫어야만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방금 전에 했던 것처럼 봉을 휘둘렀다.
퍽! 퍽! 몸뚱어리를 가격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봉의 타격점을 높여 잡았다.
콰직! 뇌수가 튀고 눈알이 튀어나간다.
콰직! 목뼈가 부러지며 살점이 뜯겨나간다.
“으아아아!!! 제발 좀 비켜!!! 이 새끼들아!!!”
콰직! 콰직!
더 이상 이런 기분을 체험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숫자였다. 내가 죽어야만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푹-!
“크윽! 젠장! 안 돼! 제발·····! 제발 빠져!”
그 와중에 봉이 한 녀석에게 박혀 빠지지 않았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봉을 포기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마침 근처에 버려져있던 철제 로커를 발견하고 그 안에 몸을 쑤셔 넣었다. 따라 들어오려는 한 녀석의 명치에 가까스로 유효한 발차기를 먹이고 문을 닫는다.
그것으로 내가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방도도 사라졌다. 나는 통발 같은 로커 안에서 비참하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끝났어·····! 갇혔어!! 갇혔다고!! 빌어머그을!!!”
덜컥! 덜컥!
괴성과 함께 로커가 흔들렸다. 문을 박차고 나가면 아직도 희망이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할 뿐 몸은 굳어서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커가 손톱에 긁히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그에 따라 로커의 흔들림도 커지고, 나는 대응할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채 좁아터진 공간에서 거친 숨소리만 내뱉었다. 호흡을 너무 빨리해서 그런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렇게 기절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볼을 꼬집어본다. 잠에서 깨지 않는다. 더 세게 볼을 꼬집는다. 소용이 없었다.
아니,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던 건 아니었다. 갑자기 로커의 흔들림이 줄었다. 그러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섰다.
“어떻게 된 거지······?”
-덜컥!!!
갑자기 로커 문이 열렸다.
“끄악!! 웁?!”
놀라 비명을 지르는 내 입에 부드러운 손 하나가 포개졌다. 나는 정면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으로 도끼와 칼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곧바로 내 입을 틀어쥔 사람을 쳐다보았다.
“쉿-!”
나를 구하러 온 구조인원.
그 중 한 명의 인솔자. 칼을 거꾸로 쥔 손으로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포개고 있는 은하가 매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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