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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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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하프&울프
글쓴이: 이클립트
작성일: 11-07-10 21:21 조회: 1,935 추천: 0 비추천: 0
『… 그리하여, 성녀 루크레시아와 세 명의 성전사들은 저주받은 기사 크라우프스를 동쪽 땅 끝까지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이 강력한 어둠의 힘을 가진 기사는 그림자를 불러내고 시체들을 일으켜 세우며 저항했지만, 성녀가 발휘하는 신의 힘에는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크라우프스는 성전사들이 내지른 3자루의 성스러운 창에 찔렸고, 곧 성녀가 신의 의지가 담긴 성표로 심장을 찌르자 무릎을 꿇었다.
싸울 수 있는 마력도, 일어설 기력도 잃어버린 기사의 앞에.
성녀 루크레시아는, 슬픔을 담은 얼굴로 걸어왔다.


<당신의 야망은 끝났습니다, 저주받은 기사여.>
<어째서 모르는 겁니까. 빛이 사라지면 어둠 또한 있을 수 없고, 어둠이 없으면 빛 또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의 그 빛을 향한 분노와 증오는, 무엇 때문입니까?>


한탄에 가까운 성녀의 말을 듣고도, 기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침묵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곧이어 성녀가 가진 빛의 힘이 크라우프스를 둘러싼 성법진(聖法陣)으로 바뀌고.
어둠으로 이루어진 크라우프스의 몸을, 빛으로 뒤덮어 천천히 땅 속으로 가라앉혀갔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왕국을 위협하던 악마기사 크라우프스는, 성녀 루크레시아에 의해 그가 태어난 어둠 속으로 추방된 것이다.』


─성녀 루크레시아 전기 제 4장 <빛과 어둠의 장>에서 발췌.





어째서 자신은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겨버리고 만걸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움직였다. …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뒤로 돌아서서 도망치는 것 뿐이었지만.
그런 남자의 뒤를 쫓아, 새카만 '무언가'가 달린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럿이. 두셋 정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다섯. 어쩌면 열.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것들이 남자를 뒤쫓고 있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들이 내는 풀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지금까지의 일들을 생각했다.


남자가 살고 있는 이 근처의 마을은 객관적으로 보나 남자의 주관적으로 보나 별볼일없는 시골 마을이다. 아마 마을 바깥으로 나가면 모르긴 몰라도 이 마을의 존재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 쪽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전부 다 합쳐봐야 400명을 간신히 넘기고,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렇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은 사냥이나 과수원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마을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거나 하면서 살아간다. 아무튼 제국 구석에 박혀있는 이 작은 마을은 그렇게 풍요롭진 못해도 부족함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걱정거리라고 해봐야, 마을에서부터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고블린 부락 정도다. 수확기만 되면 여기에 살고 있는 고블린들이 마을로 쳐들어오는 일이 잦아지는데, 마을 사람들 대부분 억센 일을 하면서 살아왔기에 힘에는 자신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 덕분에 고블린들이 침입해와도 피해를 입은 적이 드물었다.
작지만 평화롭고 조용한, 조금 따분한 마을. 그것이 이 남자의 마을이었다.


그 마을의 평화가 산산히 깨져버린 것은 지금으로부터 3개월 정도 전의 일이었다.


맨 처음은 마을 처녀 한명이 근처 숲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복부가 갈라져 내장을 바닥에 쏟은 채 쓰러져있는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는데, 결국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고블린들이 의심을 받았지만, 그들이 했다면 '먹이'를 이런 식으로 팽개쳐둘리 없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번째로 마을 노파 한 사람이 희생되었다. 사지가 절단된 채 과수원의 나무에 매달려있던 것을 과수원 관리인이 발견했으며, 이때부터 마을 전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희생자가 계속 생겨났고,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했는가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온종일 떠들어댔다.
역시 고블린들이 한 짓이 틀림없다, 그보다는 마을 근처 숲 속 동굴에 살고 있는 늑대인간이 수상하다, 역시 얼마 전 마을 근처에 터를 잡은 마수들이 의심스럽다 기타등등 기타등등.
그런 와중에도 마을 사람들끼리는 서로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마을 사람들의 유대감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 유대감조차, '이번에는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없애주지는 못했다.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번의 희생자가 자신이 아니길 바라며 생업을 계속해나갔다. 그리고, 남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활과 화살, 작은 도끼를 챙겨 숲 속에 들어온 것인데…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다리에서부터 시작된 격통이 남자의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아프다. 남자의 허벅지에서는 무언가 날카로운 물건에 베인 것 같은 상처가 깊게 나있었고, 피가 끊임없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달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아픔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뒹굴어졌다. 뒹굴어버린 남자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도망치려고 했지만, 한번 멈춰버린 다리는 더이상 움직여주지 않는다.
바닥에 엎드린 채, 간신히 몸을 옆으로 돌려 지금까지 자신을 쫓아오던 '것'들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의 숲 속이었기에, 그'것'들의 모습은 확실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쫓아오던 조금 전과는 달리, 지금은 사방에서 포위한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마치, 너는 이미 다 잡은 먹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을 근처의 숲이라고는 해도 이곳은 지형이 꽤 험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숲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밤에는 함부로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는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묘한 사건도 있으니까, 자신처럼 생계가 걸린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간에 숲에 들어오진 않을 것이다.
즉, "때마침 누군가가 근처를 지나간 덕분에 살았다"던가 "때마침 누군가가 도우러 나타나준다"라는 꿈같은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남자는 상반신만을 일으켜 앉았고, 지금까지 허리에 찬 채로 잊어버리고 있던 작은 도끼를 꺼내 두 손으로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짐승들을 사냥해 먹고 살아온 몸으로, 사냥감에게 반격당해 죽는 일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냉정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이밍만 잘 맞추면, 한두마리 정도는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남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마침내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하나가 수풀 속에 숨어 다가오고 있고, 나머지는 양옆으로 갈라져서 천천히 접근해오고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남자들은 그'것'들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어떤 짐승들인진 몰라도 머리에 도끼를 맞추면 죽일 수 있겠지. 남자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기다렸다.


이윽고 그'것'들 중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달빛에 노출된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남자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이 괴이한 사건의 범인으로 온갖 것들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이고 있는 그'것'들은 지금까지 상상했던 어떤 괴물들과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각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빈틈을 보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것'들은 그 빈틈을 놓칠만큼 허술하지 않았고, 일제히 남자에게 달려든 그'것'들은 송곳니를 드러내 남자의 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남자의 비명소리가 한밤의 숲 속에서 울려퍼진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금 막 오른팔이 어깨에서 떨어지고, 왼발이 무릎에서 떨어져나갔으니까 보통 인간이라면 비명을 지르는 것이 당연하다.
가죽이 찢어지고 고기를 뜯겨지고 뼈가 부서져간다. 이제까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자신의 몸이 부서져가는 것을 보며 남자의 정신은 미쳐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어버리고는 비명조차 낼 수 없게 되버렸고, 앞으로 조금 있으면 목숨까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들에게 있어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그'것'들의 공복은, 인간 하나를 먹어치운 정도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식사를 마친 그'것'들은 또다시 숲 속으로 돌아가 몸을 숨겼다.
조금 전의 남자처럼, 겁없이 숲 속으로 들어오는 사냥감을 기다리기 위해서.








<제 1장 : 소녀와 늑대>


오늘은 아침부터 구름이 많이 낀 날이었다.
지금도 달과 별들은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공기는 비라도 쏟아질 것처럼 습기가 차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 있는 도시는 하늘과 달리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세워져있는 가로등과 건물의 빛들은 밤이 가져온 어둠을 몰아냈고, 도시의 거리를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밤이 만들어낸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거리에 늘어서있는 상점들 역시, 문을 닫은 곳보다는 열려있는 곳이 훨씬 많았다.
뭐, 밝고 시끄럽기로 말하자면 이 기차역도 만만치 않지만.


해가 완전히 떨어진지 1시간. 그럼에도 이곳 기차역은 아직까지 떠나려는 사람들과 지금 막 도착한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리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이 도시 레인폴리스는 제도(帝都) 엘타니아 다음가는 대도시인 동시에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비록 300년 전 제국의 황제가 엘타니아로 천도했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도시가 상업도시로서 대단히 크고 번성해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이런저런 위험도 있지만, 그만큼 매력적이고 활기가 넘치는 도시. 그렇기에 이곳에서 한몫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한몫 잡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물며 지금은 해변도시에 사람이 가장 몰리는 때인 여름철. 역에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한 사람의 소녀가 있다.
이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녀의 미모는 그 중에서 빛을 발했다.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연두빛 머리칼과 맑은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
여성용의 블라우스와 가죽 조끼, 움직이기 쉽도록 한쪽 옆이 트여있는 타이트 스커트 차림. 허리에 메고 있는 수수한 아밍 소드(Arming sword)는 그녀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런저런 기인(奇人)들이 많은 이 장소에서도 눈에 띄이는 훌륭한 미모를 지닌 소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긴 그녀의 귀.
이것은 틀림없이, 그녀가 오래된 숲의 종족 『엘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 이 장소에 다른 엘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과 비교해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뛰어났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아주 곤란한 얼굴로, 역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정말로, 어떻게도 안되는건가?"


평범한 인간은 커녕 엘프보다도 몇배는 긴 귀를 가진 이장족(耳長) 소녀 역원도 그녀만큼 곤란한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드리고 싶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철도 개통이 안된 역이라면 저희들로서도 어쩔 방법이…"


그 말을 듣고 한숨을 토하는 동안 또 한 사람의 역원이 다가왔다.
이쪽은 이마 한가운데에 긴 뿔을 가진 유각(有角)족의 청년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선배님. 이 분께서 지금 여기로는 갈 수 없느냐고 물으셔서…"


유각족 청년은 이장족 소녀가 내민 종이를 받아 내용을 읽었다.


"어디어디… 어라. 로카 마을? 여긴 어디입니까?"
"여기 이쯤."


지도를 꺼내 펼쳐보이며, 마을이 있다고 들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것을 본 유각족 청년은 대번에 혀를 차기 시작했다.


"우와아, 안되겠는데요, 손님. 개통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그런 마을이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들었어요."
"… 라고 하네요. 도움이 못되드려 죄송합니다."
"… 아니, 이쪽이 무리한 소리를 했으니까. 사과할 필요없어. 그럼."


고개를 숙이는 두 역원에게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역을 떠나는 그녀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역에서 나와 얼마를 걸었을까.


"믿기지 않아… 요즘 시대에 철도도 안 깔린 마을이 있다니."


터벅터벅 길거리를 걸어가며 소녀, 세라 블란델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한탄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로카 마을이라는 동네, 여기서 철도로 갈 수 있는 곳 중 가장 가까운 곳하고조차, 걸어서 3일이 걸릴 정도로 벽지에 있다. 철도가 깔려 대륙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됐고, 하늘에는 비공정이 떠다니는 지금 이 시대에 이런 촌구석이 아직도 남아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그녀로서는 어떻게든 여기까지 가야 했다. 일이니까.


아이언하트 길드 소속의 머시너리(용병). 그것이 세라가 가지고 있는 직업이었다.
아이언하트 길드는 현재 대륙 제일이라고 일컬어지는 인재 파견 길드로서, 미아 찾기에서부터 국가 레벨의 퀘스트까지 사람이 필요한 곳의 의뢰를 받으면 어디라도 인원을 파견한다. 기본적으로는 몬스터 토벌에 불려가는 일이 많지만, 드물게는 미결 사건 해결이나 국가의 의뢰까지 받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살인이나 강도 등 '악한 일'이라고 판단되는 의뢰는 받지 않는다.
이곳 레인폴리스에 본부가 있고, 그외 수많은 대륙의 대도시들에 지부가 있을 뿐 아니라 그외 여러 마을이나 소도시에도 어느 정도 길드원들이 파견되어있으며, 현재 시점에서 5만 4628명의 길드원이 등록되어있다… 고 한다. 세라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세라가 일부러 로카 마을까지 가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마을에서 길드에 의뢰를 넣었고, 그것을 세라가 따냈기 때문이다.


"랭크와 보수만 보고 따낸 게 실수였어…"


길드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세라가 받을 수 있는 의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은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의뢰 중 가장 보수가 높았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앞뒤 생각없이 의뢰를 받았는데, 이런 맹점이 있었을 줄이야.
의뢰를 받고 로카 마을이 어딘지 알아보기 위해 길드 접수처에서 지도를 받았다. 다행히도 지도에는 나와 있었다. 그러나 위치와 거리만 나와있을 뿐 어딜 경유해서 어느 길로 가야 도착할 수 있는지도 안 나와있고, 가는 길에 뭐가 있는지도 표시되어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지도에 딸린 그쪽 지방 가이드북을 살펴봐도 적혀있는 건 "애플파이가 맛있었다" 단 한마디 뿐. 이만큼 불친절한 가이드 문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렇게 좌절만 겪은 후 마지막 희망을 걸고 역까지 와서 알아봤지만 역시나. 철도마저 개통되어있지 않은 벽촌이었다.


한순간이지만 의뢰를 취소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위약금을 무는 일은 없어도 신용은 깎인다. 머시너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신용이고 둘째가 동료인만큼, 신용이 없는 머시너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물론 지금까지 수행했던 의뢰들은 모두 완벽하게 끝냈고, 신용도 약간이지만 쌓여있다. 오늘 막 받았을 뿐인 의뢰를 취소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패널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둘 새어나가다보면 결국 모래탑처럼 무너져버리고 마는 게 신용. 그리고 그렇게 한번 무너진 신용을 되찾는 것은 처음 신용을 쌓는 것보다 몇십배는 어렵다.
무엇보다 한번 받아들인 의뢰를 취소한다는 것은 그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짓이기도 하다. 결국, 그녀로서는 이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일단 기차로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역까지 간 다음 걸어가는 수밖에 없겠군. 그렇지만 길을 모르겠는데…'


지도에 의하면 로카 마을까지 가려면 숲을 하나 지나야 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엘프가 숲을 헤맨다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뭐니뭐니해도 엘프는 숲의 종족의 대명사라고까지 일컬어지니까.
하지만 수백년 전, 엘프들이 제국에 소속되고 난 이후에 태어난 자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물론 평범하게 숲에서 사는 엘프들도 있지만, 수많은 종족들이 힘을 합쳐 쌓아올린 제국의 문화에 매료되어 도시에서 살게 된 엘프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는 세라처럼 숲에 들어가본 적 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요점은, 세라는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가본 적 없는 '깊은 숲 속'에 들어가는 일에 미약하나마 공포마저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인간들처럼.


그렇지만, 가는 수밖에 없다. 의뢰를 파기하지 않는 이상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니까.
거기에, 의뢰를 파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신용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일을 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다소는 헤매는 것을 각오하고 도전하는 수밖에.


"… 좋아. 그럼 가볼까."


스스로 기합을 넣기 위해서,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양 뺨을 찰싹하고 가볍게 때렸다.
그렇게 각오를 굳힌 세라는 우선 준비를 위해 상점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능하면 필요한 물건은 현지조달하자는 주의지만 저쪽은 철도도 개통안된 벽촌. 식량이나 물같은 건 로카 마을에서 구해도 되겠지만, 그 이외의 장비같은 건 그쪽에 원하는 물건이 없을 가능성도 있으니 차라리 여기서 준비하고 가는 쪽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정을 했다면 행동은 빠른 쪽이 좋다. 세라는 상점가로 향하는 걸음 속도를 높였다.








슬슬 저녁이 지나가고 밤이 깊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지만, 그런데도 거리는 아직까지 활기차있다.
본래는 준비를 마치는대로 출발할 생각이었지만, 곤란하게도 오늘은 이미 1차 목적지로 가는 기차가 끊긴 다음이었다. 그렇기에 세라는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이 도시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일단 깨끗한 여관에 방 하나를 잡은 후, 그녀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들을 구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물건들을 정리하는 중이고.
하지만.


"… 생각보다 싸게 구한 건 다행인데…"


세라는 구입한 물건들을 앞에 쌓아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것을 살지 미리 정해두지 않고, 가게를 돌아보며 구입하기로 한 것이 문제였던가. 예상했던 것보다 가격이 쌌기에 이것저것 여러가지를 사버렸고, 결국 쇼핑 기분이 되버리는 바람에 가게 순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산더미에 가까운 짐가방이 눈앞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이 가방은 1미터 정도의 크기에 무게는 50Kg 가까이 되는, 문자 그대로 '짐덩어리'가 된 상태다.
원래는 이렇게 많이 살 생각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세라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할 수 없나. 이제와서 환불하러 갈 수도 없고."


이딴 물건을 들고 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다 빠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자.
미래의 자신에게 귀찮은 일을 떠넘겨버리고, 세라는 짐가방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그녀는 잠을 적게 자도 되는 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만큼 일찍 자야 한다. 오늘은 더이상 다른 생각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서 샤워를 한 다음 바로 잠자리에 들 생각이었다.


─무겁다.


당초의 예정과는 달리 엄청나게 커져버린 가방을 들어올려 짊어지자, 상당한 중량감이 어깨를 통해 전해져왔다.
세라는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50Kg 가까이, 가 아니다. 50Kg 정도는 훌쩍 넘기고 있다. 확실히 여관까지 가는 정도는 문제없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과연 이 물건을 짊어지고 내일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을까.
약간 우울해졌지만, 아까도 생각했듯이 이제와서 고민해봤자 할 수 없다. 내일 하루는 각오하고 고생하는 수밖에.


세라는 짐을 단단히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어렸을 때부터 수업으로 단련된 세라는 왠만한 인간 남자보다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적'인 근력의 이야기이고, 오랜 시간동안 지속시키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정도에도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리. 이것이 다 순간적인 구매 충동을 이기지 못해 생겨난 자업자득이니 그 책임도 자신이 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어느 사이엔가 여관까지는 한 블록 너머가 되었다.


세라는 방향을 꺾어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이쪽 길을 이용하면 블록을 가로지를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대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몇분은 더 빨리 여관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뒷골목의 치안이 별로 좋다고 하기 어려운 이 레인폴리스에서 골목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세 종류밖에 없다. 이 도시에 온지 얼마 안되서 아무것도 모르거나, 아니면 골목을 이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혹은 양쪽 모두이거나. 세라는 그 중 세번째였다.


무엇이 숨어있을지 모르는 골목을 걸으며, 세라는 귀를 곤두세웠다. 숲의 일족, 엘프의 피가 흐르는 그녀의 청력은 보통 인간의 그것을 월등히 능가하며, 그 힘은 숲 속이 아닌 도시에서도 문제없이 발휘된다. 이 청력 덕분에 그녀는 지금까지 '기습'이라는 것을 당해본 적이 없다. 설령 고스트같은 비실체형이라고 해도, 청력을 최대한 집중시키면 그들 특유의 음산한 '소리'를 포착하여 미리 대비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니까.
그리고 그것은 이 골목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그녀는 이 골목 안에서 움직이는 쥐가 몇마리인지까지 감지할 수 있고, 골목 건너편이라도 왠만큼 작은 소리가 아닌 한 들을 수 있다. 하물며 사람 크기의 생물들이 서로 치고 받고 있는 소리 정도라면 문제없이─


'… 지금 뭐라고?!'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에는 소리를 듣고 싸우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아니다. 이것은 '서로 치고 받는' 소리가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는' 소리다. 그것도 상당히 강하게.
거리는 지금 그녀가 있는 곳에서부터 20m 정도. 골목 건너편이다. 세라는 들고 있던 무거운 짐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골목을 벗어나 현장에 도착한 세라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자마자 그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요, 용서해주십쇼 나으리! 저,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몰랐다고 다가 아니잖아, 이 늙은이가! 이걸 어떻게 할 거냐고!!"


필사적으로 용서를 비는 노인과, 그런 노인에게 화를 내며 마구 소리치는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노인을 사정없이 걷어차고 있었고, 그 뒤쪽에서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지켜보기만 하는 남자도 있었다.
맞는 사람이 겪을 고통에 대한 생각같은 것은 조금도 담겨져있지 않은 것처럼, 무자비하기 그지없는 발길질. 하물며 상대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약한 노인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노인은 한대 맞을 때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몸을 꿈틀거렸다.


그 무도한 행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세라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주변의 반응이었다. 이곳에는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이 여기를 보고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노인을 도와주러오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더욱 빨리 걸으며 이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직접 도와주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경비대에 신고를 하는 것 정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세라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잠깐! 지금 뭐하고 있는건가!!"


노인을 걷어차던 남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노인을 때리는 것을 그만두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갑자기 끼어든 세라를 험악한 얼굴로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유야 어쨌건 세라는 상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노인을 걷어차고 있는 남자는 세라의 2배는 될법한 체구에 등 뒤에는 커다란 배틀 액스를 짊어지고 있었다. 만약 피부색만 초록색이었다면 오우거라고 해도 믿었을지 모를만큼 험악한 얼굴과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이 남자는, 딱 보기에도 강한 전사처럼 보였다. 반면 전사와 일행처럼 보이는 남자는 보통 키였지만 허리 양 옆에는 두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고, 지극히 예리하고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 사람은 아닌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넌 또 뭐야? 이 영감하고 아는 사이냐? 왜 끼어들어?"
"그 노인이나 당신들하곤 오늘 처음 만났지만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는데. 다시 한번 묻는 거지만, 당신이야말로 지금 뭐하는거지?"


세라의 말을 들은 전사는 코웃음을 치고는 세라를 향해서 말했다.


"이봐, 꼬마.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된다고 부모한테 교육 못받았어? 쓸데없이 참견말고 조용히 가던 길이나 가라고."
"꼬……?!"


세라도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체격이, 같은 나이대의 소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작은 축에 속한다는 것 정도는. 그녀의 작은 체격은 기사 수행 당시에도 애를 먹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살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면전에서 '꼬마' 소리를 들으면 화나지 않을 리가 없다. 안그래도 신경쓰고 있는데. 그렇기에 전사의 말에 대답하는 세라의 목소리는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부모님으로부터는 불의를 보면 결코 도망치지 말라고 배웠다. 특히 지금의 당신처럼 힘없는 노인을 때려눕힌 것도 모자라 발로 마구 걷어차는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고.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 최저한의 예의도 없는 듯한 행동을 보아하니 당신의 품성이 어떤지 잘 알겠군."


조금 전까지 세라를 향한 비웃음이 담겨져있던 전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분노의 기색이 떠오른다.


"…… 뚫린 입이라고 아주 멋대로 지껄이는데. 너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는 아는거냐?"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게다가 지금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으니 그다지 대단한 인물인 것 같지도 않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대답하면서도 세라는 곁눈질로 노인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이야기로 시간을 끄는 동안 도망쳐주면 일이 편해지련만 노인은 엎드린 채 경련만 일으킬 뿐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저 두 사람의 분위기로 보건대 상당히 험악하고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실력 행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직접 떠들고 있는 것은 전사 한명 뿐이었지만, 그 뒤에 있는 검사도 지금은 명백히 불쾌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으니까.
어지간한 남자라도 겁을 먹을 상황에서도, 세라는 약간의 두려움조차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힘 자랑을 하고 싶으면 어디 공사장에라도 가보는 게 어때? 이런 곳에서 다른 사람 괴롭히지말고."


세라가 그렇게 말한 직후,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뒤쪽의 검사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쪽의 사정도 모르고 그냥 끼어든 것 같은데, 좋게 말할 때 신경쓰지 말고 그냥 가는게 이로울거다. 저 녀석도 말했지만, 남의 일에 끼어들어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그거야 당신들 생각이지. 무슨 사정이고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지금 당신들의 행동은 그냥 보고 넘길 수 없다. 당신들이야말로 그만둬."


양쪽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감에 따라, 지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숨을 죽였다.
얼핏 보기에는 세라가 압도적으로 불리해보인다. 상대편인 두 사람은 보기에도 강해보이는 전사들이고, 그에 반해 세라는 가녀린 소녀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평범하게 생각하면 '싸움'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 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들끼리의 싸움에서도 겉모습만 보고 얕보다가 크게 다치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하물며 인간이 아니라면 더더욱 겉으로 보이는 연약함은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구경꾼들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라도 두 사람의 남자도, 더이상 입을 열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구경꾼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침묵을 지킨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정적.


그것을 가장 먼저 깨트린 것은 세라도 아니고 두 남자도 아니었다.


"잠깐. 양쪽 모두 멈춰주지 않겠어?"


느닷없이 제 3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세라도 두 사람도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세 사람의 사이에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서있을법한 그는 낭랑한 목소리에 어울리는 미려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비록 복장은 수수한 여행자의 것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중성적인 외모는 충분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는 세라와 두 남자 양쪽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겨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것을 본 전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넌 또 뭐야? 이 늙은이나 그쪽 계집하고 한패냐?!"
"전혀. 난 이 사람들 이름도 몰라."
"그럼 방해하지말고 저리 꺼져! 이 도시에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일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녀석들이 많아진거야!"


그것을 들은 소년은 작게 고개를 내젓고는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당신들이 그 노인에게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끼어든 것 같은데. 그리고 당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 이유도 없이 노인을 두들기는 것 같진 않고. 무슨 이유인건지 이야기해줬으면 하는데."
"… 내가 왜 그걸 너같은 녀석한테 말해주지 않으면 안되는거지?"
"지금이라도 이 소란이 원만하게 해결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면 나도 더이상 이 시끄러운 꼴 안봐도 되고, 당신들한테도 좋은 이야기일거야. 무엇보다 이 이상 일이 커져서 더 큰 소란이 벌어지면 아무리 게을러터진 이 도시의 경비대라고 해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될걸."


소년의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닫고 생각하던 전사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원만하게 해결되긴 이미 글렀어. 이 늙은이가 우리 일을 망쳤다고."
"일?"


전사는 분노로 가득한 얼굴을 하며, 마침 일어나기 시작한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일으키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노인은 사색이 되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래! 이 영감이 멋모르고 헛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의뢰받은 일이 다 틀어졌어!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위약금을 물어야할 처지가 됐다! 그런데도 이 늙은이를 돕겠다고 나서는거냐!!"


으르렁거리듯이 소리치는 전사를 보며, 세라 또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이 두 사람도 자신과 같은 직업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녀석들을 아이언하트에서 본 적은 없으니 다른 길드 소속일테고.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머시너리가 의뢰를 실패했다는 것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그 머시너리와 의뢰인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큰일인 것이다. 머시너리는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것은 물론 신용이 깎이게 되고, 의뢰인은 의뢰인대로 일이 실패한 것에 대한 손해를 입어야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흥분해서 날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지금 당신들 행동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하지. 게다가 변명으로 삼을수도 없고."
"뭐?!"
"그렇잖나. 당신들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면 사람이 하나 잘못 휘말린 정도로 일을 망치진 않았겠지. 설령 저 노인으로 인해 일을 실패했다고 해도, 그것은 머시너리로서의 능력이 모자란 당신들의 책임이다. 그게 '이쪽 일'의 규율이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리고 폭력을 행사하다니, 자격 미달이라고밖엔 할 수 없지."


이제는 전사만이 아니고 그 뒤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검사까지도 분노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수습되기는 커녕 더더욱 험악해지고 있자, 구경꾼들은 천천히 한발짝 두발짝 물러났다. 자칫 잘못해서 싸움이라도 일어난다면 거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때, 소년이 다시 한번 끼어들었다.


"양쪽 다 진정해줘. 이래가지곤 언제까지고 평행선이잖아."
"알게 뭐야. 어이, 너.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데, 더이상 괜한 소리 지껄이지 말고 어서 비켜."


전사의 반응을 본 소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잠시 동안 입을 닫고 가만히 있던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인데?"
"…… 뭐?"
"당신들이 물어야될 위약금이 얼마냐고."


소년의 말에, 두 사람만이 아니고 세라와 쓰러져있던 노인까지도 떨떠름한 얼굴로 변했다.
무슨 의미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지켜보던 사람들의 의사를 대변하듯이 전사가 말했다.


"…… 잠깐만. 설마 네가 대신 물어주기라도 하겠다는거냐?"
"금액에 따라서는. 아무튼 얼마야?"
"하! 웃기는구만. 야, 꼬마. 아무래도 넌 이게 어린애 지갑에 있는 돈 정도로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
"얼마인지 물었어. 도대체 몇번이나 같은 질문을 해야 대답해줄건데?"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소년. 그때문에 한순간 움찔했던 전사는 곧 이를 갈면서도 똑바로 대답했다.


"금화 500닢이다."
"뭐, 어……?!"


전사의 말에 반응한 것은 소년이 아니라 세라였다.
작은 범선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을 들은 세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도대체 어떤 의뢰였길래 위약금이 그 모양이야?! 아니, 당신 지금 사기치는 거지!!"
"거봐, 너도 열내잖아! 이 영감때문에 의뢰에 실패해서 지금 우리가 그 돈을 내게 생겼다고! 그런데도 화가 나지 않게 생겼냐!!"


확실히.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의 말에 납득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런 거금을 물어내게 생겨서 화가 나는 것과 사람을 두들겨패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세라가 그런 생각을 하는동안 전사는 소년에게 소리쳤다.


"이제 알았겠지! 우린 이제 저 영감을 두들겨패고 위약금만큼 긁어내야겠어! 네놈이 그 돈을 낼 게 아니라면 어서 비켜! 안그러면…"
"아, 그래."


짤그랑, 하고 묵직한 금속 덩어리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가방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그것을 두 남자 쪽으로 집어던진 탓에 난 소리다.


"…… 어, 어이 너. 이거 설마…?"
"당신들이 원하는 거. 그거 가져가."


전사는 쭈뼛거리면서 소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조심조심 주머니를 들어올린 전사는 그것을 열어보았고, 곧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표정으로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10닢 금화 50개. 의심나면 세보던가."


그 말을 듣자마자 전사는 곧바로 자신의 뒤에 있는 검사에게 주머니를 넘겼다. 그것으로 보아, 이 두 사람 중에서는 검사 쪽이 약간이나마 우위에 있는 입장인 모양이다.
검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머니를 살폈고, 1분 정도가 지난 후 소년에게 말했다.


"…… 확실하군."
"그럼 이제 이 일은 끝난거지? 이제 그 할아버지 놔주고, 더이상 소란피우지 말아줘."


검사는 잠시동안 말없이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곧 가죽주머니를 챙기고 전사에게 손짓을 했다.


"네 말대로다. 더이상 쓸데없이 시간낭비할 필요는 없지. 가자, 칸."
"어, 어어? 잠깐만, 덴츠. 진짜로 이대로 가게? 저 뒤에 있는 계집이 한 소리를 그냥 넘길 생각이야?"
"돈은 챙겼다. 게다가 네가 꼴사나웠던 것도 사실이고."


칸이라고 불린 전사는 그 말에 한순간 욱하는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은 반박하지 않았고, 조용히 덴츠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두 사람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구경꾼들도 하나둘씩 흩어져갔다.
소년은 아직까지 주저앉아있는 노인에게로 다가와 손을 뻗었고, 노인은 그 손을 붙잡아 몸을 일으켰다.


"아, 저기…… 저, 정말로 고맙습니다……"
"신경쓸 필요없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세요. 걸을수는 있나요?"


노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손을 떼자 조금 비틀거리며 불안하게 걸었지만, 곧 조금 전 험한 일을 겪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똑바로 걸어서 어딘가를 향해 사라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소년 역시 몸을 돌렸지만, 아직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라를 보며 움직임을 멈췄다.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
"……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세라의 말에는 미약하지만 소년에 대한 반감이 섞여있었다.


"그런 짓이라면 방금 내가 한 일 말하는거야?"
"그래. 도대체 왜 그런 무도한 자들에게 큰 돈을 지불하면서 막은거지? 그런 자들은 용병은 커녕 인간으로서의 도리마저 내다버린 자들이다. 한번 정도 크게 혼내주지 않으면 나중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때도 지금처럼 해결할 수는 없을텐데."


그런 작자들에게 돈을 줘봐야 일시적일 뿐이며 시간이 지나면 금새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적어도 이번 기회에 혼을 내줬더라면, 다음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해도 됐을텐데. 세라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세라의 말을 들은 소년은 시간을 두고 두어번 눈을 깜빡인 후, 몇걸음 걸어와 세라의 앞에 서서 말했다.


"과연. 너는 그런 사람이라는 거구나. 상관도 없는 일에 끼어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뭐라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뜻이야.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넘어갈까."


세라를 칭찬하면서 잠시 미소를 지었던 소년이었지만, 그 직후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져버린다.


"너 이 도시에 온지 얼마 안됐지?"
"그건, 그런데."
"그리고 아까 전의 두 사람 앞을 망설임없이 가로막았던 거나 그 이후의 언동들을 보면 자신의 실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고, 실제로도 실력이 있는 편이겠지. 맞아?"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성급했어. 네가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그쪽도 마찬가지였거든. 두 사람 중에 덩치가 큰 쪽은 '오버레이더'였어."
"……"


소년의 말을 듣는 순간 세라는 작게 숨을 삼켰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거지?"
"코가 좋거든. 약물 냄새가 진동하는 걸로 알아차렸어."


오버레이더(Over Raider). 통칭 '강화인간'.
그것은 약물 투입, 유전자 조작, 각종 강화 시술 등 인간 그 자체를 병기로 만드는 작업을 거친 끝에 탄생하는 이들을 뜻한다.
그들은 근력, 순발력, 지구력, 회복력, 그리고 감각을 비롯한 신체 기능이 일반적인 인간보다 월등하며, 맨손으로 곰을 목졸라 죽이고 표범보다도 빠르게 움직이는 등 문자 그대로 '인간형 생체 병기'라고 불러야할 존재들이다.
제국의 국가 연구소에서 만들어지는 이들은 대부분이 제국군에 소속되어있으며, 그들에게 맞서 싸우는 자들에게는 인간이건 인간 외 종족이건 관계없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기억해낸 세라는 조금 질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가, 제국군 소속이라는 건가?"
"그거야 모르지. 원래 제국군은 겸업 못하니까, 제대를 한건지 아니면 불법시술을 받은건지. 아무튼 싸우기에 위험한 상대였다는 건 사실이야. 그리고 그 뒤의 검사도, 그 덩치 큰 남자가 꼼짝못하던 걸로 봐선 그보다 더 위험한 사람인 거겠지."
"…… 그 남자도 오버레이더였나?"
"아니. 그쪽은 달라. 금속 냄새가 강하게 풍기던 걸로 봐서, 강화장갑복을 사용하는 기어솔져(전동기갑병) 아니면 사이보그(기계인간)였겠지. 어느쪽이던간에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아."


확실히 그렇다. 오버레이더도 기어솔져도 사이보그도, 지금은 제국 정규군에서 사용될만큼 능력이 검증받은 것들이니까. 가능하면 소년의 말처럼 싸우는 것보다는 피하는 것이 나은 인종들이다.
설마 상대가 그런 자들이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세라는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치면 이 녀석도……'


엘프의 피가 섞인 자신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이 소년은 금새 알아차렸다.
아까 말하기를 '코가 좋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라이칸슬로프(늑대인간)인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세라는 곧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분명 내가 상대를 얕봤었다는 건 인정하지. 그렇지만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그 폭거를 그냥 놔두는 건 옳지 않아. 하물며 돈으로 해결할 문제도─"
"주위 사람들이 다치는데?"


소년은 세라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세라가 놀란 얼굴을 하거나 말거나, 소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았다.


"네가 강하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나 그 노인까지 너처럼 강한 건 아니지. 엘프와 오버레이더, 거기에 기계인간. 그런 사람들이 한데 뭉쳐 싸우는 것만으로 주위의 뭐가 부서지고 누가 다칠지 몰라. 그렇게 됐다면 경비병들도 움직였겠지. 확실히 그들은 게으르지만 그만큼 눈에 띄는 사태를 묵과할만큼 허술한 건 아니니까."
"으, 음……"


자신의 검술과 마법이, 그 두 불한당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의 말대로 만약 그 상태에서 싸움이 났더라면 어떤 피해가 나왔을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세라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 작은 미소를 띄우면서 말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난다면 그게 제일 좋은거야. 명예나 돈을 사람하고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 뭐, 지갑이 굉장히 가벼워진 건 사실이지만."


소년의 마지막 말은 거의 푸념에 가까웠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 이 소년은 그렇게 부자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금화 500닢이라면 보통 여행자에게는 엄두도 내기 힘들만큼 거금이니까. 아마 이 소년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큰 희생이었을 것이다.
세라는 소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조금 전 내가 한 말은 잊어줘. 그리고 고마워. 당신이 아니었으면 큰 실수를 할 뻔 했어."
"신경쓰지마. 그렇게 치면 이쪽도 멋대로 끼어든 것 뿐이니까."


세라의 인사에, 소년은 약간 쑥스러운 듯이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세라는 그런 소년에게 마주 미소를 짓다가…… 안색이 창백해졌다.


"…… 왜 그래?"
"…… 아, 아아아아아아!! 잊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되버린 세라를 본 소년이 입을 열자, 세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토하고는 몸을 돌려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소동이 벌어지기 전, 이곳으로 빨리 오기 위해서 골목 안쪽에 내던지고 왔던 짐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소년은 노인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을 때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는 세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진짜 최악이야……"


그녀가 황급히 가방을 던진 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다음이었다. 몇번이고 강조했다시피 이 레인폴리스의 골목은 좀도둑들과 깡패들로 인해 상당히 위험한데, 그런 그들이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가방을 내버려둘 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 많은 짐을 고스란히 잃어버린 세라는 터덜터덜 여관으로 돌아와서는 침대에 몸을 눕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오늘은 정말로 나쁜 일 투성이였다. 의뢰 때문에 가야 할 목적지는 기차로는 갈 수 없지, 노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두들겨패는 불한당들을 만났지, 몇시간을 고생하면서 구입한 짐까지 잃어버렸지. 되는 일이 없다.
잃어버린 짐이야 내일 아침 일찍 나가서 다시 사면 되지만, 그렇더라도 거기에 들어간 금액을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지금까지 입고 싶은 옷도 무시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봐도 꾹 참으면서 돈을 모아왔는데 이런데서 생각지도 못하게 큰 지출이 생길 줄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진 세라는 크게 한숨을 토했다.


'…… 그러고보니.'


돈, 하니까 생각난 것이 있다. 오늘 있었던 딱 하나 뿐인 좋은 일.
느닷없이 자신과 그 두 머시너리 사이에 끼어들고는 터무니없이 큰 돈을 선뜻 내놓으며 사태를 진정시켰던 소년. 아니, 라이칸슬로프는 성장이 인간보다 느린 편이니까 실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겉모습은 세라와 별 차이도 없기에 계속 '소년'이라고 기억해두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그 소년도 꽤 이상한 축에 속했다. 자신 역시도 아무 연관도 없는 남의 일에 참견한 것이지만, 그 소년은 그런 자신보다도 더했다. 아무런 연관도 없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금화 500닢이라는 돈을 내놓다니. 이것은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 건달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정도의 일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건달들을 때려눕힌다고 해서 손해가 생기는 일은 없을테니까.
어쨌거나 그 소년은 자신이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을 감수하고서 남을 도운 것이다. 노인은 물론 세라와 구경꾼들까지도.


'인사도 못했는데. …… 혹시 나중에 만나게 되면 그땐 제대로 인사해야지.'








"크, 그아, 아아아악……!!"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소년의 손에 붙잡힌 채, 남자는 그 커다란 몸을 바둥거렸다. 그러면서 휘둘러진 남자의 주먹이 소년의 몸을 두들겼지만 소년은 끄떡도 하지 않은 채 남자의 목을 졸랐다.
마치 바이스처럼 조여오는 손으로 인해 호흡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 아닐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둑은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소년이 남자를 집어던졌을 때 짧게 비명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으로 다섯명째. 남은 것은 한 사람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둑은, 오늘이 평소보다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멍청한 여행자가 골목길에 두고 가버린 커다란 짐가방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지트로 가져와서 동료들과 나누려고 했지만, 그 순간 저 괴물같은 소년이 나타나 자신들을 때려눕히고 있는 것이다.


"도, 도대체 넌 뭐야!! 왜 우리한테 이러는거냐고?!"


도둑은 얼마 남지 않은 용기를 쥐어짜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혹시 이 가방이 이 소년의 것인걸까. 한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곧 도둑은 고개를 저었다. 이 가방의 주인은 분명 엘프 소녀였으니까. 그녀가 골목에 들어왔을 때부터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틀림없다.
가방을 주운 것 이외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기에, 달리 이런 일을 당할만한 이유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상대 조직의 자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랬다면 자신들은 벌써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저 소년은 지금 자신들을 때려눕히고는 있어도 목숨을 빼앗진 않고 있으니까 자객인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없어. 당신들한테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 뭐?!"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때문에?
도둑이 그 의문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보다 먼저 소년이 말했다.


"평소라면 이런 일같은 걸 하지도 않았을거고, 할 생각도 안했을거야. 노리는 게 내 지갑이 아니라면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던가 관심없고, 누가 당신들에게 지갑을 도둑맞았는지 알지도 못했겠지."


소년이 한발짝 앞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알아버렸단 말이지. 아는 사람'이 물건을 도둑맞았다는 것, 그리고 그게 여기에 있다는 것도."


몰랐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설령 그들이 도둑질을 했어도 그것이 모르는 사람의 물건이었더라면 모르는 척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의 물건을 훔친 것까지 봐줄만큼, 소년은 호인이 아니다.
비록 그 '아는 사람'이 오늘 처음 만난 사이긴 하지만 소년에게 있어서는 그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내가 볼일이 있는 건 거기 있는 짐가방 뿐이야. 지금이라도 도로 내놓는다면─"
"죽어라아앗!!"


조금전까지 바닥에 쓰러져있던 남자들 중 하나가 일어서서 소년의 뒤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일어나면서 들어올린 쇠막대로 있는 힘을 다해 소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강한 금속음과 함께 소년의 고개가 앞으로 수그려졌고, 쇠막대를 휘두른 남자는 자신이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해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의기양양한 말투로 소리쳤다.


"하, 하하! 어떠냐! 애새끼 주제에 함부로 골목에 들어오니까 그런 꼴을 당하는거라고! 감히 누구를 얕보고─"


남자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쇠막대로 머리를 직격당한 소년은 단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그 이외의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선 채로 기절했다고 믿을 정도로 낙관적이진 않은 남자는 그 모습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이 움직였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방금 맞은 뒤통수를 슬쩍 훓었다.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손에는 피 한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꽤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년이 입을 열자, 남자와 도둑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말하던 것과는 달리, 소년의 목소리에 냉기가 서려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일도 힘은 쓰지 않고 해결하고 싶었어. 그런데 아까 그 두 사람한테 줘버리는 바람에 돈이 그렇게 많이 남질 않았거든.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힘으로 해결하기로 한 거였지."


우둑, 우둑, 우둑, 우둑.
소년이 양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면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골목에 울려퍼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도둑과 남자에게는, 그것이 마치 초시계 같은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렇게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이 좀 변했어."


고개를 들어올린 소년의 눈이 변해있었다.
바다를 떠오르게 하는 푸른 빛의 눈에서, 흑색으로 물들어버린 자위와 적색의 눈동자를 한 섬뜩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그제서야 쇠막대를 휘두른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똑같은 '고양이'끼리의 싸움이라면, 어느 한쪽이 쇠막대와 같은 '발톱'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유리해진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호랑이'라면 고양이가 어떤 무기를 갖고 있던 간에 소용없어진다.
지금의 자신은, 조금 긴 발톱으로 호랑이를 할퀸 고양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일단 기절시키고, 그 뒤에 다시 깨워서 몇대 더 때려주지."


송곳니를 드러낸 소년은 먹이감을 덮치는 맹수와도 같이 달려들었다.








─똑똑똑.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고 세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세라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아침 7시 30분. 확실히 일어나야할 시간이긴 했지만, 그녀가 자기 전에 맞춰둔 알람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녀를 깨운 것은 다른 소리인 것이다.
하지만 방에는 달리 소리를 낼만한 물건이 없다. 게다가 마치 무언가를 두들기는 듯한 소리 같기도 했고.


─똑똑똑.


다시 한번 같은 소리가 들리자, 세라는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등으로 창문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는 어제의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니 잠깐 기다려봐.


"당신……?! 여기서 뭐하는거야?!"
<아, 겨우 일어났네. 너 엘프 맞아? 10분 전부터 두들겼는데.>


둔해서 미안하군. 세라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다.
창밖에 있는 소년은 오른팔을 창가에 걸친 채 매달려있었다. 이곳이 여관 2층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팔 하나로 체중을 지탱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소년의 정체가 라이칸슬로프라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놀랐다. 어쨌거나 인간이 하긴 어려운 일이니까.
세라는 가까이 다가가 창문을 열면서 말했다.


"내 질문에 아직 대답 안했는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
"이거 돌려주려고."


그 순간 소년은 늘어뜨리고 있던 왼팔을 움직였다. 그 왼손에 쥐어져있던 '무언가 커다란 것'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바닥에 떨어졌고, 그 행동에 놀라서 뒤로 물러났던 세라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건…… 내 가방이잖아!"
"아, 역시 네 거 맞구나. 혹시 착각한 거면 어쩌나 했는데."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소년과는 달리 세라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어제 골목에서 잃어버리고 다시는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가방. 조금 전 바닥에 떨어지면서 들린 소리와 무게감으로 판단하건대, 내용물도 손상되지 않은 것 같다.
세라는 가방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거…… 도대체 어디서 찾은거지?"
"어쩌다보니."


대답이 되지 않잖아. 한순간 그렇게 생각하고 분노를 터트리려고 한 세라였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어쨌든 자신의 물건을 찾아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물론 사실은 이 소년과 가방을 훔친 누군가는 한 패거리였고 무언가를 빌미로 삼기 위해 돌려주러 왔다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찾아줘서 고마워. …… 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이게 내 물건이라는 건 또 무슨 수로 알았고?"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코가 좋으니까. 가방에 남아있는 향기가 너하고 똑같길래 네 물건이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여기에 온 것도 네 향기를 따라서 온 거고."


세라의 얼굴이 화악하고 붉어진다.
그러니까 뭐냐. 지금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너, 너는 지금 어제 처음 만난 처녀의 냄새를 따라서 쫓아온거라고 말하는 거냐?!"
"…… 아.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그 말을 듣고 소년은 마치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것처럼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뭐 어때. 그렇게 안했으면 이게 네 짐인줄도 몰랐을거고, 여기까지 가져오지도 못했을텐데."
"그건, 그렇지만……"


소년의 말은 사실이고 세라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감정은 다른 문제다. 비록 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의젓한 성격이라곤 하지만 세라 역시 아직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녀. '그런' 쪽의 일에는 경험도 없고 면역도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볼일도 끝났고, 난 가볼게."
"아, 잠깐만!"


그대로 아래로 내려가려던 소년을 붙잡으며 세라가 소리쳤다.


"…… 뭔가 볼일이라도 남았어?"
"아니, 그게……"


일단 급한 마음에 붙잡긴 했지만 막상 소년이 다시 물어보자 대답할 말이 궁했다.


'어쩌지…….'


이대로 그냥 보내버리는 것은 간단하지만 이 소년에게는 어제와 오늘에 걸쳐 2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도 아무 보답도 없이 보낸다는 건 예의도 아닐 뿐더러 그녀 자신도 내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던 세라는 결국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당신한테는 어제부터 신세만 졌어. 보답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아침 식사 정도는 사도록 하지."
"별로 신세라고 생각할 것도 없는데. 어제도 말했지만 어제 일은 내가 멋대로 끼어든 것 뿐이니까. 그리고 이걸 가져온 것도 마침 그게 있던 장소 근처를 지나가다가 찾았기 때문이지 딱히 의식해서 찾은 건 아냐."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 덕분에 일이 잘 풀렸다는 건 사실이니까. 나로서는 두들겨패서 끌고 가서라도 보답을 하고 싶거든."


그 순간 소년은 세라를 보며 멍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뭐야, 그거. '보답'이라고 하기엔 너무 폭력적이잖아."
"물론 실제로 그러겠다는 소린 아니지. 그 정도로 나는 당신에게 '빚'을 느끼고 있다는 거다."


할 말을 모두 끝마친 세라는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소년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소년 역시 입을 열지 않은 채 세라와 눈을 마주보았다.
한 사람은 방 안에 있고 한 사람은 창문 밖에서 팔 하나로 몸을 지탱한 채 서로를 마주본다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소년은 자유로운 오른손을 가볍게 위로 들어올리며 항복했다.


"알았어. 계속 거절하는 것도 실례일 것 같으니까 받아들일게. 뭣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포기할 것 같지도 않고."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했군. 바로 맞췄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은 웃음을 그쳤지만, 그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로 말했다.


"말해두는데, 나 꽤 많이 먹으니까 각오해두는 게 좋을걸."
"상관없다. 오히려 당신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많이 먹어주는 게 기쁘지."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세라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기분 탓일까. 지금 소년의 웃음이 굉장히 장난기가 섞인 걸로 변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글쎄, 어떨까나. 조금 있다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두고 볼게."








결론부터 말하겠다. 소년의 '꽤 많이 먹는다'는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겸손하게 말한 것임이 틀림없다.
아래 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곧바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 아침 식사 시간이고, 집에서 미처 식사를 하지 못하고 나온 사람들이 식당을 찾아와 밥을 먹고 있었기에 꽤나 붐비는 상태였다.
자리에 앉은 세라는 테이블 위에 있는 버튼을 눌렀고, 10초 정도 기다리자 웨이트리스 중 한 사람이 메모지를 들고 이쪽으로 왔다.


"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세라는 곁눈질로 소년에게 먼저 주문하라고 신호를 보냈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메뉴판을 보며 웨이트리스에게 말했다.


"이 집에서 제일 큰 스테이크 세개요. 그리고 여기 구운 감자하고 프렌치 프라이도 하나씩. 아, 미트 스파게티랑 포치드 에그도 1인분 씩."


거기까지 들은 세라는 약간이지만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이 소년은 자신의 신호를 잘못 알아듣고 자신의 것까지 시켜버린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너무 많은 양이고.
웨이트리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메모지에 주문을 받아적은 후 말했다.


"저, 일행분들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일행?"
"네. 일행분들이 내려오는 시간에 맞춰서 음식을 내오면 식지 않을테니까요."


이 웨이트리스 역시 주문받은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질문한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저희 둘 뿐인데요."
"…… 두 분이오? 하지만, 이걸 두 분이서 다 드실 수 있나요?"


웨이트리스의 질문에,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오. 이거 저 혼자 먹을 건데요. 이쪽은 아직 주문도 안했고."


세라의 눈이 크게 떠졌고, 웨이트리스도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할 반응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소년은 그렇게 많이 먹을 것처럼 보이는 체구가 아니니까.
결국 웨이트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세라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께선?"
"아, 아아. 전 과일 샐러드 하나랑 팬케이크로."


세라와 소년의 주문을 전부 받아적은 웨이트리스는 한 차례 고개를 숙이고 "조금 기다려주세요."라고 말한 후 자리를 떠났다. 시킨 음식이 많은만큼 금방 나올 리는 없고, 소년과 세라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그러고보니."
"응?"


음식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세라였다.


"어제도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했던 건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거지?"
"이를테면?"
"생판 모르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거금을 내놓는다던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의 짐을 찾아주기 위해서 도둑을 쫓아간다던가."


소년은 입을 다물어버렸고, 세라는 그런 소년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날 바보로 알면 곤란하지. 내 짐은 그 근처에 있던 골목길 깊숙한 곳에 있었어. 그런 곳에서 사라졌다면 어떤 친절한 사람이 주워서 분실물 센터에 가져다줬을 확률같은 건 한없이 0에 가깝지. 틀림없이 골목길의 건달이나 도적이 가져갔던 걸텐데, 그런 것을 '마침 근처를 지나가다가 찾아왔을' 리도 없어. 이건 내 예상이지만 틀림없이 짐을 가져간 도적, 혹은 그 패거리들과 싸웠던가 했겠지."
"……."
"그리고 어제의 일도 그래. 금화 500닢은 왠만한 사람도 선뜻 내놓기 어려운 돈이야. 이런 말하긴 미안한데, 당신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자로 보이지 않거든. 그런데도 어제 당신은 거의 주저도 하지 않고 그걸 지불했어."


적어도, 세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약 돈으로 밖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경우라면 세라도 어쩔 수 없이 돈을 내놨겠지만 그러기로 결심하기까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어제같은 경우라면 돈을 지불하기보단 폭력에 호소하는 방법을 썼을 것이다. 이 소년의 심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들은 소년은 아주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언짢게 생각한다기 보다는 소년 자신도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눈치다.


"…… 어떻게냐고 물어도, '그냥 그렇게 해야된다'고 생각해서 한 것 뿐인데."


자신의 깨끗한 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소년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인상은 여전히 찌푸린 채였다.


"네 말이 맞아. 짐을 찾아오려고 그 도적들하고 한판 붙었지. 다행히도 실력은 별볼일 없었어. 그래서 찾아올 수 있었던 거고. 만약에 도적들 숫자가 많았다거나 강하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짓 안했을지도 모르지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야. 실제로도 별 거 아니었고."


그것은 세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세라의 짐 가방 속에 있는 물건은 없어진 것도 없이 그대로였고, 소년의 몸에도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으니까. 소년이 말한 것처럼, 짐을 되찾는 것 자체는 꽤 수월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제의 그 일이라면…… 일종의 사회 환원? 그런 느낌으로 한 일인데."
"…… 잠깐만. 짐을 찾아온 건 그렇다쳐도 지금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걸."
"응. 그럴거야. 이건 순전히 내 사정이거든."


소년은 약간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털어놓았다.


"확실히 큰 지출이긴 했어. 지금까지 모아뒀던 돈을 전부 다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그렇게 쉽게 낼 수 있긴 했지만."
"모아뒀던 돈을 전부 가지고 있었다고?"


그건 또 형편이 좋은 이야기다. 때마침 '그런 순간'에 딱 알맞은 돈을 갖고 있었다니.
하지만 세라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모르고, 소년은 세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일하는 걸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거든."
"아……."


그제서야 세라는 조금 전의 이야기를 납득했다. 이 소년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그것을 그만두고 귀향길에 오르던 중이었다면 당연히 전 재산을 몸에 지니고 있었을테니까.


"게다가 내 고향은 조금 특이한 곳이라서. 돌아가면 인간의 화폐는 더 이상 쓸 일도 없어. 가져가서 집에다 모셔놓느니 차라리 아무렇게나 써버리는 쪽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에 그런 일을 만난거야. 이거면 대답이 됐을까?"


소년의 말에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칸슬로프(수인)의 부족들 중에는 아직도 제국에 소속되지 않고 깊은 계곡이나 산 속에 자신들의 마을을 만들어 생활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만약 이 소년도 그런 경우라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돈 같은 것은 장식용 이외엔 쓸 곳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미련도 보이지 않고 그 두 불한당에게 돈을 내고 노인을 구한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모든 의문이 풀린 세라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그런 사정이 있는데 함부로 캐물어서."
"넌 몰랐잖아. 그리고 지금 알았으니까 됐어."


세라의 말을 듣고, 겨우 소년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띄워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했던 식사가 도착했다. 그리고 소년은 지금까지 봤던 것 중 가장 즐거워보이는 얼굴로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1인분의 미트 스파게티를 포크 하나에 전부 휘감아 그대로 한 입에 먹어치우고, 200g의 스테이크는 포크로 정중앙을 찍더니 통째로 틀어올려서는 역시 한 입에 집어넣고 우걱우걱 씹어넘겼다. 포치드 에그에 이르러서는 아예 접시를 들어올려 털어넣듯이 입에 부어버렸고, 구운 감자와 프렌치 프라이 또한 결코 두 입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자신이 겨우 과일 샐러드를 다 먹을 동안 그 많은 음식을 먹어치운 소년을, 세라는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정말로 다 먹었군."
"당연하잖아. 음식을 남기는 건 죄야."


그 의견에는 동감이지만, 그래도 정도라고 하는 게 있을텐데. 세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아있는 팬케이크에 손을 가져갔다.


"맞다. 그러고보니까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뭘?"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소년이 입을 열자, 한창 팬케이크를 씹던 중이던 세라는 고개를 들어올려 대답했다.


"내가 주워온 짐 말야. 암만 봐도 그거 여행짐으로밖엔 안보였거든. 너도 어디 가는 길이야?"
"아아. 일 때문에."


그러고보니 세라 자신은 소년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는데, 소년이 자신에 대해서 물어온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대답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곤란하지 않은 질문을 던져왔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
"물론. 이래뵈도 머시너리거든. 길드에 온 의뢰를 받고 가는 중이지."
"…… 머시너리라. 그러고보니 어제도 그런 이야길 했었지."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소년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때 세라는 남아있는 팬케이크를 나이프로 자르던 중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무슨 일이고 어디로 가는 길인데?"
"시골 마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해결하러 가는 거야. 로카 마을이라고, 기차도 안 통하는 진짜 시골이지."


어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적어도 제국령 안에 있는 곳이라면 기차가 갈 수 없는 곳보다 갈 수 있는 곳이 월등하게 많은데.
세라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지도를 꺼내 펼쳤고, 그 중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여기 이쯤. 보다시피 도로도 연결안되어있어. 정말로 성가시게 된 거지. 이동하는데만도 시간을 잡아먹게 생겼으니까."
"아아, 여긴 원래 그래. 그래서 별로 부자 동네는 아니라고 알고 있어. 교통이 워낙 불편해서 애플 파이가 맛있었는데도 그걸로 장사도 못하고. 게다가 근처에 고블린 부락도 있어서 상당히 괴롭힘 당하고 있기도 했거든."


그 말에 수긍하려던 세라는 번개같이 고개를 들어올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지금 소년이 말하고 있는 투로 봐서는, 마치……


"당신, 여기 어딘지 아는거야?!"
"응. 가는 길도 아는데. 예전에 잠깐 들린 적 있어."


세라에게 있어서 그 말은 천사의 복음이나 다름없이 들렸다.
세라가 로카 마을까지 가는 길을 어렵게 생각한 것은 단순히 기차가 가지 않고 도로도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 이유들도 포함되어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를 따지고 든다면 역시 가는 길이 어떻고 도중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지금, 어쩌면 그 문제들이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그…… 미안한데."
"……?"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아니, 굉장히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이야기라는 건 알아. 그렇지만……"


이것을 정말로 말해야할까 말아야할까. 망설이던 세라는 곧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고개를 팍 숙이면서 소리쳤다.


"거기까지 길 안내 좀 해줘! 나중에 사례는 할테니까!"
"응, 좋아."
"물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건 들었고, 힘든 부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 좀 어떻게…… 지금 뭐라고?"


세라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 부탁을 하려고 마음먹기까지 그녀가 한 마음고생과는 상관없이,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승낙한 것이다.
소년은 탁자 위에 놓여져있던 물을 마시면서 이야기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하루나 이틀 정도도 여유가 없는 건 아니거든. 게다가 로카 마을이라면 그렇게 멀리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일이 얽힌 것도 인연인데 그 정도는 해줄게."
"그런가…… 고맙다."


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순수하게 감사의 의미가 담긴 인사. 그것을 받은 소년은 손을 내저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고보니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


식사가 완전히 끝날 무렵, 세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세라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보니 우리들, 아직까지 서로 이름도 이야기하지 않았었지."
"…… 아, 맞다."


벌써 2번이나 큰 도움을 받았고, 지금부터는 당분간 함께 다닐 길동무가 될텐데 이름도 모른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이제서야 생각해낸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세라는 자신부터 이름을 밝히기로 했다.


"나는 세라 블란델. 열 여덞 살이고, 아까도 말했듯이 머시너리다.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잘 부탁한다."
"시아칼. 네가 짐작했다시피 라이칸슬로프. 지금은 무직이지만 불법적인 직업을 가졌던 적은 없어. 나야말로 잘 부탁해."


세라와 시아칼은 식탁 너머로 손을 맞잡아 악수했다.


"하나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뭘?"


그 순간 시아칼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띄워졌다.
아까 전 식당으로 내려오기 전에 보여주었던, 장난기가 섞인 웃음.


"열 여덞이랬지? 난 스물 다섯이거든, 올해로."
"아, 그렇구…… 뭐?"


이 녀석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세라가 기억하기로, 자신이 말한 '열 여덞'이라는 숫자는 자신의 나이에 대한 것 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는 것은 시아칼도 지금 자신의 나이를 말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스물 다섯'이라는 숫자를 댔다.
…… 그러니까, 뭐냐.


"아, 아아. 하하하하! 농담이구나! 상당히 재밌었어. 꽤 등골이 오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농담하는 거 아닌데."
"……."


세라의 얼굴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잊고 있었다. 인간에서 전화(轉化)한 것이 아닌 순종의 라이칸슬로프들은 소년기와 청년기가 매우 길다. 라이칸슬로프마다 개인차는 있지만, 실제 나이보다 5~6살 정도 어려보이는 것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설마 자신보다 7살이나 연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세라는 신음을 흘렸다.


"…… 그런가. 확실히 어제도 말의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요."


무심코 조금전까지 하던대로 반말을 썼다가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시아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신경 안써도 돼. 네가 먼저 자기 나이를 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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