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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So Serious?
글쓴이: 잿빛은색
작성일: 11-07-14 18:33 조회: 2,373 추천: 0 비추천: 0
Why So Serious?


"아 시발.“
유신은 무심코 입을 비집고 나오는 욕설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황당무계한 상황에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이미지를 관리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이게 무슨 엿 같은 상황이지?”
나무, 숲 ,나무, 숲, 나무, 숲, 나무, 숲.
눈알을 죽어라 비벼대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21세기 문명의 흔적이란 찾아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 방금 전까지 서있었던 학교 운동장의 모습하고는 도저히 관계시키려 해도 관계시킬 수 없는 모습이었다.
“누가 이 상황 설명 좀.”
유신은 잠시 멍하니 서서 자신이 드디어 미쳐버렸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성이 있는지 생각했다. 결과는 Negative. 자신은 정신병 따위와는 일체 관계없는 정상인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인터넷의 폐해로 인해서 이런저런 좋지 못하고 옳지도 못한 인생에 하등 도움 될 것 없는 지식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판타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근데 이건 진짜 리얼 판타지잖아. 미친.”
유신은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데도 어두컴컴한 숲 속의 으스스한 느낌에 일부러 소리 내서 중얼거렸다.
이리저리 움직여서 나무들을 만져보거나, 미친 셈 치고 볼따귀를 오질나게 후려갈겨 봐도 꿈은 아닌지 도통 이 황당한 상황이 개선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여긴 진짜로 리얼 판타지인가보다. 라고 유신은 생각했다. 졸업여행에 가기 직전에 이상한 곳에 떨어져서 상황파악을 시도한지 약 30분 만이었다.
엎어져서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아 시발 꿈이구나.’라고 하면서 현실로 돌아갈 확률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리얼 판타지로 의심되는 이 어두컴컴하고 암울한 숲에서 목숨 걸고 수면을 취할 똥배짱은 없었다.
“나무 타고 올라갈까? 그런데 난 나무를 탈 줄 모르잖아. 떨어지면 시발 망했어요. 가 되는 거고. 안될 거야 아마.”
대략 십 미터는 넘게 솟아있는 나무를 보고 유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떨어지면 필시 케첩이 되리라.
“보통 이런 상황에선 마을을 찾아야 정상인데. 내가 마을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여기가 판타지인지도 모르겠는데 젠장. 원래 이런 상황에선 진짜 무서워서 벌벌 떨어야 하는데 하도 기가 막혀서 무섭지도 않네.”
유신은 씨발씨발거리며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약간 경사가 진 것으로 봤을 때, 이곳은 산일지도 몰랐다. 정상에 가서 주위를 둘러봐도 좋겠지만, 어느 세월에 정상까지 갈지도 모를 마당이라 유신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산 아래로 방향을 잡았다.
“더럽게 무겁네. 이걸 진짜로 들고 가야하나? 그냥 버릴까?”
어느 정도 등에 매고 있는 가방에는 졸업여행에 가기 위해 잔뜩 싸놓은 짐들 뿐. 이런 숲 속에서 살아남을 서바이벌 용구 따윈 없었다. 하지만 멀쩡한 물건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유신은 채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짐 다 싸매고 하루에 몇 시간씩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고딩놈들은 다 훼이크였어. 빌어먹을 양판작가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신은 작은 계곡을 발견했다. 유신은 생각보다 빨리 계곡을 찾은 것이 참 나이스하다고 중얼거리며 계곡물을 꿀꺽거리며 마셨다.
“죽음의 대지 어쩌고 하면서 썩은 물이 흐를 지도 모르지만 여긴 아무리 봐도 평범한 숲이니까 먹어도 괜찮겠지 아마.”
썩은 물이라도 이미 마셔 버렸으니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쉬던 유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리얼 판타지로 추정되는 이 세계에 떨어진 지 어언 한 시간 삼십 분. 아마 다시 원래 살던 세계, 대한민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판타지에 갔다가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신은 언 수 외 1, 1, 2라는 우월한 수능 성적표가 너무나도 아깝긴 했지만 어차피 대학가면 학점 관리하랴, 군대 가랴, 취업 준비하랴 고생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21세기 지구의 인생에 놀 때가 얼마나 되겠는가. 유아 때는 영재교육 해야지. 초등학생 때는 중학교 공부 선행학습 해야지. 중학생 때는 남들 다 하는 특목고 준비를 해야지. 고등학생 때는 어차피 수능이다 내신이다 하며 새벽까지 학원에 처박혀 있고, 대학생이 되어서 조금 놀려고 하면 군대가 부른다. 군대에 이 년쯤 갔다 오면 사회적응 할 틈도 없이 학점 관리하랴 자격증 따랴 대학원이다 취업이다 정신이 없는데다 백수에서 막 벗어나 사회생활 시작하면 이제 자기 살 돈 벌어야지, 내 집 마련해야지, 결혼자금 마련도 해야 한다. 그 판에 연애도 하면서 사회기반을 다져나가고, 삼십대가 되어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면 이제 다시 교육비를 벌기위해 등골 휘는 고생의 시작. 그 판에 틈틈이 노후자금까지 챙기는 건 정말이지 설렁설렁 놀 일이 아닌데, 알고 보면 현실의 인생은 정말이지 쉴 틈 없이 죽어라 일만하다 골병들어 간다는 말이 딱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에 비해 판타지는 얼마나 판타지한가? 머리 잘만 굴려서 상인이나 귀족만 되어도 한평생 떵떵거리며 사는데 문제없다. 물론 노동자 계급은 죽어라 착취당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은 절대로 평민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목표는 귀족! 닥치고 귀족! 고자가 되어도 귀족! 엄마, 아빠. 난 판타지서 잘 먹고 잘 살게. 내가 없어도 잘 살아.”
집 생각과 가족 생각이 나자 괜히 코가 시큰해졌지만 유신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형도 있고, 동생들도 있으니까 자신의 빈자리 정도는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암울한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보다는 부모님이 걱정이었다. 자신이야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치더라도 부모님이 충격을 받을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니까.
“내가 두개로 분리되어서 한쪽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라는 전개면 그나마 부담이 덜 될 텐데 말이지.”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해 봤지만 이내 누군가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기분이 더러워졌다. 유신은 다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젠장, 그쪽 생각은 그만둬야겠다. 도저히 좋은 방향으로는 생각이 나질 않네.”
Positive. Positive. 긍정적인 생각을 하자. 유신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한때 판타지를 동경했던 적도 있었으므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 판타지 하면 먼치킨! 그리고 하렘! 엄마, 아빠. 걱정 마세요. 난 차원이동 됐으니까 분명히 주인공 보정을 받고 성공할 것이 분명해!”
그러나 유신은 이내 현실을 자각하곤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계곡에 집어던졌다.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어쩔 수 없는 현실. 현실은 그저 어딘지 모를 숲에 떡하니 떨어진 일개 고딩에 지나지 않았다. 더러운 현실 같으니. 유신은 새로 정착하게 된 빌어먹을 현실에 대고 길쭉하게 잘 빠진 중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이 차가운 현실에 대한 선전포고, 반드시 살아남아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유신은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을 찾기 위해…….



유신은 두 시간 정도 줄 창 계곡을 따라 걸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몬스터라도 튀어나올지 두려워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잡고 조금씩 내려왔었지만 두 시간동안 괴물은커녕 다람쥐 한 마리도 나오지 않자 이제 간이 부어버렸는지 유신은 노래까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힘들면 가방을 내려놓고 휴식. 온 몸에 땀이 차는 것이 너무나 답답했다. 잘 때 입기 위해서 챙겨온 반팔 셔츠가 없었다면 아마 웃통을 다 벗고 혼자 상반신 누드쇼를 펼치며 내려왔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계곡물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콸콸 흐르는 계곡물에는 맥주병인 유신이 들어가자마자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 정말이지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얼마나 위대한 물건인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존나덥군? 에어컨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부채라도 하나쯤 이었으면 좋겠는데.”
11월 말에 가는 졸업여행이기 때문에 당시 한국은 겨울. 유신은 자신이 입고 있는 청바지가 사계절 공용이라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덥긴 하지만 아주 무더운 것도 아니고, 봄 날씨라고나 할까? 어느 정도는 참아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유신은 힐끗 계곡을 바라봤다. 조금씩 느려지는 유속. 이제 계곡의 아래쪽에 왔다는 증거이리라.
“으음, 계곡물이 점점 느려지는 걸 보니 슬슬 마을이든 몬스터든 뭔가 하나쯤은 나올 때가 됐는데 말이지……. 물론 후자는 죽어도 사양하겠지만. 아 진짜. 제발 사람 좀 나왔으면 좋겠다. 엘프면 더 좋고.”
유신은 계곡을 내려오며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니 이제 거의 버릇이 될 수준이라고 궁시렁 거리며 걷는 속도를 조금 더 빨리 했다. 얼마 안 있어 해가 질 것 같았기에 등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제기랄. 몬스터가 안 나오는 걸 보니까 근처에 사람이 살긴 할 것 같은데. 도통 보일 기미가 안보이……빙고.”
유신은 여기저기 둘러보다 눈에 보인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자신은 아직 신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다. 개울가 옆으로 작게 나 있는 조그마한 오솔길, 분명 사람이 자주 지나다닌다는 증거였다. 그러고 보니 계곡가가 적당히 넓적한 것이 식수보급이라거나 빨래터 같은 용도일 듯 했다.
처음엔 이곳이 진짜 판타지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사람이 살 지조차 의심스러워서 애써 판타지라고 믿으며 무작정 걸어왔지만 정말 이렇게 인간의 흔적을 보니 유신은 희망이 한 두어 배쯤 커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리얼 판타지 원주민을 목격하는구나. 명성치 같은 거 오르면 좋겠는데.”
유신은 기대에 부풀어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얼마 걷지 못하고 멈춰서고 말았다. 중요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양판의 주인공들이 이계진입하자마자 겪는 첫 번째 문제.
“아 씨바. 그런데 말 안 통하잖아. 니미. 어쩌지?”
언어.
언어의 장벽이 높고도 높다는 것은 이미 영어를 통해 겪어봤다. 이 언어란 문제는 양판에서처럼 한두 장 내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현실에선 가장 크나큰 장벽이라는 것.
생각해 보니 자신은 동양인. 생김새도 상당히 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말만이라도 통하면 좋을 텐데, 이계진입 깽판 고딩들이야 어찌어찌 한두 달 만에 언어 마스터라지만 유신에게는 그런 언어습득능력 따윈 없었다. 수능 때 삼 년간 외국어를 죽어라 파서 2등급이 나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죽어라 배워도 족히 몇 년은 걸릴 게 분명했다.
“원어민들 사이에서 몇 달만 지내서 언어 마스터면 고딩 왜 해먹나. 유학 갔다 오면 장땡인데. 더러운 양판 퀄리티 같으니.”
생각 없는 전개의 양판작가들을 저주하며 유신은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아티팩트? 그런 비싼 물건을 자신 같은 듣도 보도 못한 떠돌이에게 줄 리가 없다. 애초에 이런 산골짜기에 법사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다 필요 없어. 그냥 부딪혀 보는 거야.”
뭐 다른 대안이 없다. 그냥 대놓고 앞으로 부딪혀보는 수밖에. 유신은 남자라면 때때로 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정찰은 해야겠군. 나는 건실한 일꾼이니까.”
유신은 마을로 가타부타 쳐들어갈 정도로 생각이 없는 학생은 아니었다. 산적이라면 최하 사망에 운이 좋아야 평생노예계약이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무리라면 그냥 얄짤 없이 먹이 날아갈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사람 비스무리한 것이 산다는 것은 확인했으니 이곳이 리얼 판타지에 걸맞은 중세시대인지 알아볼 차례였다.
얼마 걷지 않아 금세 조그마한 촌락 하나가 유신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촌락의 모습에 유신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모험가 전용 초보자 마을이라 해도. 이건 좀 심하지 말입니다.”
유신이 발견한 것은, 마치 고대시대마냥 낙후된 화전민 마을이었다. 나무로 만든 뼈대에 나뭇가지와 흙을 얽어 만든 흙집. 게다가 통나무 몇 개를 엮어 만든 후줄근한 목책은 리얼 판타지에 대한 유신의 기대를 처참하게 짓밟았다.
“뭐 이리 비루먹은 마을이 다 있어? 마을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네. 스무 가구도 안돼 보이는데?”
마을 입구에 있는 망루-차마 망루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낮은-에는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장정 한 명이 있었다. 척 봐도 자신은 마을청년A 입니다. 라는 듯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는 남자는 후줄근한 옷에 후줄근한 갑옷-만약 가슴부위에 달아둔 철판때기를 갑옷이라 부를 수 있다면-을 입은 채로 꾸벅거리면서 졸고 있었다. 그나마 창만은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지만, 현재 그 창의 쓰임새는 쓰러질듯 비틀거리는 청년의 몸을 지탱해주는 것뿐이었다.
“우와……. 진짜 촌스럽다. 아니, 촌 그 자체잖아. 진심 소름 돋아. 어떻게 이고깽을 이따위로 낙후된 시골구석에 처박을 수 있는 거지?”
유신은 피부에 직접 느껴지는 양판소와의 괴리감에 좌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을에 들어가야 한다. 마을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면 오히려 경계하기 마련. 유신은 자연스런 마을입성을 위한 컨셉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랑상인……. 이라기엔 너무 어린데. 의심 섞인 눈으로 노려볼 게 뻔해. 떠돌이도 마찬가지로 각하. 여행자? 무기가 없잖아. 이런 후진 마을에 거지로 들어갈 수 있을 리도 없고 말이지. 으음…….”
그러나 이미 머릿속엔 한 가지 컨셉이 잡혀 있었다.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무난하게 마을에 입성하는 방법이. 하지만 너무나 천편일률적이고 보기에 심히 모양새가 나지 않는 방법이었기에 어지간해서는 더욱 기발하고 깔끔한 방법을 찾으려 했었다. 하지만 당장 해가 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구만. 그럼 해볼까나.”



“하암-”
코사인 산맥의 끝자락, 이름 없는 작은 화전민 마을에 살고 있는 마을청년, 에이는 마을 입구에 서서 연신 하품을 해댔다. 아마도 어젯밤 마을 처녀들이 목욕하는 것을 훔쳐본 탓이리라. 마을에도 세 명 밖에 없는 파릇파릇한 이십대 젊은이인 에이는 한창 힘 좋을 때라서 그런지 그 힘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들어가게 된 마을 자경단. 총 인원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단체를 가지고 사람들은 자경단보단 ‘마을 수비대’라는 뭔가 김빠지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에이는 자신이 마을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부심은 자부심이고, 지루한 것은 지루한 것이다. 한 달에 한 사람 방문하는 광경도 보기 힘든 이 조그마한 마을에서 몇 시간이고 교대할 때까지 마을 외곽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죽치고 않아있는 것-요즘은 농사일이 없는 때다-은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에이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었다.
어쩌다가 마을 꼬맹이들 두세 명과 놀아주거나, 아니면 이제 좀 자랐다고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니는 소년들에게 창 휘두르는 법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이 요새 에이의 생활이었다.
“나도 언젠간 도시로 나가서 한몫 잡으면 좋겠는데…….”
후줄근한 차림새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에이는 중얼거렸다.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하는 마을 수비대라. 남들이 볼세라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마을에서 세 명 뿐인 아가씨들을 어떻게 꼬셔볼지 이리저리 궁리하던 에이는 앞쪽에서 방앗간 집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을 보고 굽은 허리를 다시 폈다. 에이는 남들 보는 눈을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바로 눈앞에서 게으름을 피울 정도로 뻔뻔한 남자는 아니었다.
“아주머니, 무슨 일이세요. 아까 빨래하러 가신 거 아니었어요?”
방앗간 집 아주머니가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왔기에, 에이는 혹시 산짐승이 마을까지 내려온 게 아닐까 싶어 창을 고쳐 쥐었다. 이전에 마을 아저씨와 함께 사냥을 나가서 사나운 늑대도 잡아본 적 있는 에이였기에 어지간한 산짐승은 두렵지 않았다.
“에그머니나. 에, 에이! 어서 저쪽 개울 쪽으로 좀 같이 가자. 글쎄 사, 사람이 쓰러져 있지 뭐니!”
방앗간 집 아주머니는 생각보다 많이 놀랐는지 말을 더듬었지만, 에이는 산짐승이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이내 이런 산맥 근처에 혼자 쓰러져 있는 사람이라니, 뭔가 수상한 냄새를 감지한 에이는 일단 방앗간 집 아주머니를 진정시켰다.
“자자, 아주머니, 진정하세요. 제가 있잖아요.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고요?”
“그, 그래. 어떤 이상한 옷을 입은 아이가 개울가로 가는 길 한복판에 쓰러져 있더구나. 나 혼자 들만큼 어린애도 아니어서 이렇게 바로 달려온 거야.”
“혹시 숲의 정령이 장난을 친 것 아닐까요?”
에이는 그녀의 말을 듣고 혹시나 가끔 나타나는 장난꾸러기 숲 정령이 장난을 친 것이 아닐까 하고 말했다. 하지만 방앗간 집 아주머니는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직접 만져봤는걸. 상처 없이 단지 정신을 잃은 아이였어.”
“으음, 뭔가 수상한 점은 없었나요? 칼 같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거나, 마법사처럼 로브나 스태프를 가지고 있었다던가.”
“아, 아니. 그런 것 까지는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커다란 무기 같은 건 없었단다. 다만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어.”
하긴, 놀라서 바로 달려온 아주머니가 그런 자세한 것 까지 볼 리가 없지. 에이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손을 멈췄다.
“검은 머리카락이요? 그런 머리카락은 이 근방에서 태어나는 머리카락이 아닌데……. 혹시 여행자가 아닐까요?”
“모르겠구나. 하지만 여행자 치고는 좀 어렸어. 기껏해야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던데, 잘 봐 줘야 성인식을 치른 지 오 년도 넘지 않아 보이더구나. 그대로 두면 밤늦게까지 깨어나지 않을 것 같던데, 아무래도 정신을 차릴 때까지 마을에 들여와야 하지 않겠니? 빨랫감도 거기다 두고 와서 한 번은 다시 가 봐야 하는데…….”
어쩔 수 없군. 하고 한숨을 내쉰 에이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방앗간 집 아주머니를 지나쳐 개울가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주머니가 빨랫감을 두고 왔다는 말에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이제 막 성인식을 거친 정도로 어린소년이라지 않은가. 멀쩡하게 돌아온 아주머니를 보면 몬스터 같은 괴물은 아닐 것이었다. 에이는 살짝 긴장한 상태로 창을 잡고는 천천히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 진짜. 더럽게 늦네.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적당히 누운 상태에서 기절한 척 하며 칭얼대던 유신은 빨랫감으로 보이는 바구니에 있는 옷이 현대적인 옷의 형태와는 아주 다른, 중세시대에나 입을 법한 디자인으로 보이자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반신반의하던 ‘리얼 판타지 차원이동’이라는 전개에 대해서 미미하게나마 확신이 생긴 것이다. 물론 뭔가 이종족 이라거나, 마법이 없다거나 하는 좀더 현실적인 판타지일 확률은 높았지만.
적당히 쓰러진 기억상실증 소년A라는 캐릭터를 모토로 잡고 연기했다. 쓰러진 채 의식이 없는 사람을 연기하는 것은 상당히 쉬웠다. 그저 몸에 힘을 축 빼고 눈을 감은 채 미약한 숨소리만 내면 그것으로 끝. 어지간한 사람은 그 정도로도 쉽게 속일 수 있었다.
물론 그 방법은 그다지 검증 된 내용은 아니었으나, 어릴 적에 자는 척으로 잠꼬대를 하여 부모님에게 장난감을 얻어낸 적이 있는 유신은 이 방법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다.
사박- 사박-
유신은 이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눈을 감았다. 의외로 시간이 조금 지났는지 몸이 뻐근했지만 유신은 ‘본격 촌구석 진입’이라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에 유신은 너무나도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여기라고요?”
“으응, 이 길만 돌아가면 돼.”
이내 들려온 너무나도 익숙한 언어. 그것은 바로 한국어였다. 유신은 갑자기 나타난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양판소처럼 진짜로 말이 통할 줄이야. 이런 전형적인 양판소 상황에 유신은 설마 자신이 진짜로 이고깽 보정을 받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어느 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두 사람을 보고 유신은 잠시 생각을 접어두고 ‘뭔가 이상하고 신비로운 기절한 소년 A’를 연기하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으음……. 옷차림이 좀 많이 수상한데요? 아주머니, 저런 옷 본 적 있어요?”
이제 어른 티가 나기 시작하는 청년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신은 아까 전 마을 앞에서 졸고 있던 그 청년일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조그마한 마을인 만큼 그다지 경계가 심하지는 않겠지. 유신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나도 처음 보는 옷인데. 어디 전통복 같은 게 아닐까?”
“글쎄요. 너무 수상한데. 마을에 들여서 좋지는 않지 않을까요.”
남자가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통에 유신은 몸이 반응하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특히 허벅지 부분을 더듬을 때는 ‘내가 왜 이런 성적 수치심을 느끼면서까지 기절한 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별달리 수상한 건 없는데요. 으음, 이 가방은 도대체 어떻게 여는 거지?”
어리석은 리얼 판타지 시골마을 청년 따위가 지퍼와 플라스틱 고정 장치라는 하이 테크놀러지로 철저히 무장된 가방을 열 수 있을 리가 없지. 유신은 속으로 어리석은 리얼 판타지 원주민을 비웃었다. 하지만 곧 들려온 청년의 목소리에 유신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갈라서 내용물을 봐야할 것 같은데…….”
초장부터 이렇게 계획이 꼬이다니! 판타지에서 단 하나뿐인 하이 테크놀러지 가방을 잘라버리겠다는 말에 기겁한 유신은 저 청년이 자신의 소중한 가방을 잘라버리기 전에 재빨리 기지를 발휘했다.
“으, 으음…….”
“아, 정신을 차리나 본데요?”
원래는 마을까지 운반되었을 때 즈음 천천히 일어나서 기억상실증처럼 행동하면서 언어를 습득하면서 넉넉하게 몇 년 정도 썩는다. 라는 계획이었지만 언어가 같은 이상, 몇 년간 마을에서 썩을 필요는 없을 테고, 무엇보다도 여러 번 강조하는 하이 테크놀러지 가방의 안전이 우선사항이었기에 유신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으으……. 여긴……?”
“이봐. 정신이 좀 들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완벽한 연기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초점을 약간 흐렸다. 그 모습은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영락없이 기절했다가 일어난 상태였다. 애초에 정신을 잃은 사람을 보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연기인 것도 어지간히 어설프지 않은 이상 걸릴 일이 없었지만, 유신은 그것이 온통 자신의 연기력 덕분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아아……. 당신들은 누구신지…….”
너무나도 형식적인 말을 던진 유신.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말이야 말로 형식적인 상황을 타파하는 데에는 가장 유용한 무기였다. 남자는 정신을 차린 채로 힘겹게 나무에 몸을 기대는 척 하는 유신에게 경계가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말이야. 어디서 온 사람이지? 그리고 어린애가 이런 산골까진 무슨 일이고.”
유신은 거짓말과 연기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천연적인 것인지 보통 사람으로서는 제대로 속내를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와 나름대로 잘 돌아가는 머리를 가졌고, 일 년에도 수차례씩 촌철살인이 특기이신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성적표를 보여드리며 그럴듯한 화술을 터득했다. 그것들이 바로 콩알만 한 간을 가진 유신이 험난한 학생생활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편안하게 살게 해 준 유신의 무기였다.
그리고 현재, 그 무기는 유신에게 있어서 이계에서 살아갈 가장 큰 무기가 되어주고 있었다.
“으음……. 저는 코리아에서 왔습니다만. 이곳은 도대체 어디지요?”
“이곳은 코사인 산맥의 작은 마을이야. 그나저나 코리아라니……. 처음 듣는 이름인걸. 사실대로 말해라. 어디 노예상 같은 곳에서 도망친 거라면 그냥 보내줄 테니까. 차림새가 깔끔한 걸 보니 더 수상해지는데.”
유신은 창을 들이대며 점점 수상하다는 듯 물어오는 남자의 말에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유신의 머리는 어떤 태도로, 또 어떤 말을 택하느냐에 따른 이득을 이리저리 계산하고 있었다. 반면 유신의 행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남자를 이리저리 훑어보는, 흡사 남자에게 사실을 말해도 될 지 이리저리 탐색해 보는 모습이었다.
그러기를 십여 초. 남자가 정적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기 직전에, 한발 앞서 유신이 먼저 말했다.
“코사인 산맥이라고요……. 들어본 적 없는 지명입니다. 이곳이 대략 어디 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근처에 다른 사람이 발견되지는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 발견된 건 너 뿐이야. 그나저나 머리가 검고 생긴 것도 특이한 걸 봐서는 이 지방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코리아라는 곳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 지방이지?”
“아……. 코리아는 아시아 대륙에 있는 지방입니다. 아시아 대륙은 들어보셨죠?”
남자의 직접적인 말에 유신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남자의 얼굴은 유신의 말에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시아 대륙? 이 세상에 우리 대륙 말고 다른 대륙이 있었던가?”
‘대륙이 하나인 건가? 좋았어.’
대륙이 몇 개이냐에 따라서 유신의 대답의 선택지가 결정된다. 대륙이 여러 개라면 적당히 멀리 떨어진 대륙. 지구처럼 전 세계가 밝혀졌다면 외계인. 그리고 대륙이 하나뿐이라고 알려져 있으면…….
점점 더 유신을 수상하게 바라보는 남자. 유신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당신들은 아직 우리 대륙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군요.”
“너희 대륙? 우리 유클리드 대륙 외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건가? 바다 저편엔 영원한 낭떠러지가 있다고 들었는데.”
‘유클리드 대륙?’
유신이 괴이한 대륙 이름에 잠시 정신이 잠시 나갔다 들어오는 듯한 체험을 하는 사이, 남자는 여태까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 점점 더 의구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영원한 낭떠러지? 그거 도대체 어느 시대 세계관이야. 중세시대냐?’
하지만 금세 남자의 말에서 이 세계에 대한 힌트를 대충 파악한 유신은 굉장히 허탈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도 대지는 평평하다 같은 고대시대적인 발상 따위를 가지고 있다니. 이놈의 판타지란 정말……. 이 세계는 유신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평가절하 당했다. 어쨌든 이정도로 문명수준이 모자란다면 구워삶기는 더없이 쉽다. 유신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MP3를 꺼내들었다.
“역시 믿지 못하는군요.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인간이란 원래 직접 느끼는 것만을 믿는 생물이니까.”
남자는 어쩐지 거만해 보이는 듯한 유신의 말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유신이 꺼낸 물건을 보고 조금 경계하는 기색을 띄며 손에 든 창을 고쳐 잡았다.
“그건 뭐냐. 아티팩트인가? 수상한 짓을 하면 바로 네 목숨이 날아갈 거야.”
아티팩트라는 말에 유신은 자신이 떨어진 이곳이 바로 리얼 판타지라는 것을 실감하며 MP3를 켰다.
“아니오. 이건 노래와 음악을 들려주는 신비한 기계입니다.”
“노래와 음악? 그 조그만 물건에서?”
유신은 자신의 MP3에 있는 곡 몇 안 되는 클래식 음악인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틀었다. 외장 스피커를 통해 월광 소나타의 음악이 들리자 남자와 중년의 아줌마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유신의 손 위에 놓여 있는 MP3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정도면 믿으시겠습니까?”
“신기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네가 다른 대륙에서 왔다고는…….”
거참 사람 말 지지리도 못 들어먹는 아저씨네. 유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저희 대륙의 기술의 결정체를 보여드리지요.”
“기술의 결정체……?”
유신이 가방에서 꺼낸 물건은 다름 아닌 디지털 카메라. 인간은 눈으로 인식하는 사항을 그 어떤 오감의 인식보다도 우위에 두는 경향이 강하다. 라고 하는 어떤 심리학책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리며 유신은 디카를 꺼내든 뒤, 손 위에 올려두고 분위기를 잡았다. 이럴 때 뭔가 있어 보이듯이 행동하는 것. 상대적으로 어린 자신이 상대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모델명 디카. 통령의 법전에 의거하여 승인작업 개시.”
띠리링-
아무렇게나 대충 지어낸-최대한 뭔가 있어보이도록 노력한- 주문과 함께 뭔가 분위기에는 잘 맞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시골 촌사람인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은은한 빛과 함께 카메라 렌즈부위가 지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앞쪽으로 죽 늘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상당히 놀랍고도 대단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유신은 카메라를 자신만만하게 들어 보이며 뭔가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실제로 리얼 판타지 원주민에게 선진 세계의 문물을 전해준다는 사실에 살짝 들뜬 것도 사실이었다.
“이것은 바로 디지털 카메라. 우리 대륙 기술의 집약체이지요. 이것은 바로, 모습을 훔치는 기계입니다.”
“모습을 훔친다고?”
모습을 훔친다는 말에 기겁하는 두 사람을 보며 유신은 피식 웃었다. 역시 미개한 리얼 판타지 원주민은 이런 추상적인 말에 굉장히 겁먹는군. 이라고 생각하며 유신은 카메라를 자신에게 들이댔다. 청소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즐긴다는 셀프 카메라, 소위 셀카를 찍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아, 걱정 마시지요. 이건 어떤 사악한 일도 행하지 않으니. 당사자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습니다. 저 자신에게 직접 사용해 보지요.”
이왕이면 셀카를 찍을 때 필수적이라는 귀여운 척을 하고 싶었으나, 자신의 얼굴이 칙칙한데다 노숙하기까지 한 남정네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유신으로서는 그런 간 큰 짓을 할 자신이 없었기에 적당히 각도를 잡아서 셔터를 눌렀다.
찰칵-
“읏……!”
디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두 사람이 움찔거렸지만 유신은 태연하게 카메라를 들고 저장된 사진의 모습을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자, 이 정도면 되겠지요.”
“우, 우와아…….”
사진에 찍힌 유신의 얼굴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유신은 미묘한 우월감에 젖었다. 자신도 마법이란 것을 목격하게 된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지도 모를 테지만 지금 당장은 자신이 21세기의 지구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유신은 금세 무표정한 포커페이스로 표정관리를 하며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이제 제가 다른 대륙에서 왔다는 것을 믿어 주시겠습니까.”
“아……그, 그래.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
이 정도까지 했는데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거겠지. 유신은 한껏 긴장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살짝 비틀거리는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굳은 얼굴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유신의 천성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제 거의 다 넘어왔다는 생각을 한 유신은 입가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소개하지요. 제 이름은 유신. 게이머즈 대륙에서 워프 항해 중, 이 대륙에 추락했습니다.”
“게, 게이머즈 대륙? 워프 항해?”
SF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대책 없는 거짓말과 공갈의 향연. 유신은 낯빛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네, 보아하니 워프 항해에 대해서도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워프 항해는……으윽.”
“이, 이봐. 괜찮은 거야?”
유신은 이대로 말하다가는 끝이 없겠다 싶어 살짝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 않았다. 예상대로 청년은 쓰러진 유신을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신은 다시금 준비했던 대사를 시작했다.
“으음……. 워프 항해로 인한 부작용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기, 에이. 아무래도 이……사람을 마을로 옮겨야 하지 않겠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나이스 어시스트 아줌마! 유신은 속으로 외쳤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의 중년 여자의 말에 에이라고 불린 청년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워프 항해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탈출한 노예 같은 건 아닌 것 같고……. 일단 마을로 데려가 보죠.”
그렇게, 자칭 이고깽 유신의 첫 마을진입 퀘스트는 사기와 기만, 공갈로 인하여 미묘하게 해결되었다.



“원래 인간이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일이 일어나면 어떠한 말을 하여도 전부 받아들인다……라고 했던가. 아오. 불편해 씨바.”
유신은 마을의 한 흙집 안에 있는 간이침상 위에 누워서 중얼거렸다. 이 저급한 리얼 판타지 원주민의 침대는 지랄 맞게도 딱딱했다. 나무 몇 개에 흙으로 덮은 다음 담요를 덮어둔, 그냥 조금 높은 땅바닥 수준. 현실의 유명 메이커 침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달랑 담요 한 장 뿐이라 등에 모래가 여기저기 배기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유신은 의외로 마을사람들에게 크게 경계 받지 않았다. 삭막하고 인정 없는 현대 도시민들과는 달리, 자연에서 나고 자란 농민들이야 그 인심의 스케일 자체가 다른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후덕한 인심을 이용하여 유신은 여행 중 표류하는 사람 역할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연기했다.
어디서 왔냐는 말에는 적당히 전문적인 용어와 생소한 말들로 정신을 빼 놓고, 디카와 MP3를 보여주며 눈앞을 현혹시켜 주는 정도로 자신이 다른 대륙 사람이라는 것 정도를 인식시켰다. 사람들의 반응은 약간 경계하지만 크게 배척하진 않는 정도. 워낙에 신기한 존재다 보니 오히려 적대감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같은 인간이지 않은가. 거기다가 유신의 얼굴은 뭔가 만만해 보일 것 같은 정도로 경계심이 들지 않는 앳된 얼굴이기까지 하다.
덕분에 유신은 며칠 정도 마을에서 머물며 대륙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문화나 화폐, 단위체계, 사회체계 정도는 알아둬야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이 약간 꺼리는 눈치였으나, 맘 착하신 촌장 덕택에 어찌어찌하여 촌장 집의 남는 방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촌장이 대충 이야기해 준 대로라면 유클리드 대륙, 즉 유신의 입장에선 ‘쓸데없이 리얼하면서도 판타지한데다 기하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륙’이란 곳은 알면 알수록 한숨만이 나오는 대륙이었다.
어쩌면 이리도 양산적인 세계가 다 있는지. 유신은 너무나도 진부한 세계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사전지식 같은 것이 없다 하더라도 판타지를 애용하는 청소년이나 일반인이라면 무난하게 세계관을 이해할 수준이었다. 물론, 머리가 덜 여물어서 영웅이 되겠답시고 위험한 일에 대가리를 들이미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일단 어떻게는 황제랑 만나서 일대일로 면담을 까야겠군.’
유신은 촌장과 방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머릿속에 스스로 ‘본격 사기 귀족 육성 프로젝트’라고 이름붙인 플랜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정보와 지식은 존중받는다. 원시인 수준의 문명이 아니라면 지식인은 대우받는 것이 당연한 관례.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 유용한 지식들을 가지고 국가의 수뇌부와 만나서 써먹은 다음, 한 자리 꿰차는 것이다. 나머지 세부계획이야 상황 봐가며 짜면 되고, 결국 핵심은 그거다.
괜히 로봇을 만든다거나, 총을 만든다거나, 혹은 최첨단의 이기를 만든다거나 하는 분에 넘치는 얼간이 짓을 하지 않더라도, 사소한 아이디어와 사소한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한밑천 잡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과유불급이라. 유신은 과연 옛 성현 말에 틀린 것은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니 검술이니, 유신에겐 다 딴 세상 이야기였다. 머릿속이 곧 자원창고인데 뭐하려고 고생하며 힘을 기를까. 옛말에 ‘아는 것은 힘’이라는 진리의 속담이 있는데 말이다. 제국 중심부에 짱 박혀서 머리 좀 굴리고 지식 좀 뽑아내 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데 전쟁터나 몬스터 토벌 원정에 가서 투닥거리며 싸움질을 할 정도로 유신은 돌대가리가 아니었다.
“모험? 로망? 최강? 대륙정벌? 좆 까라 그래.”
유신은 쓸데없이 그런 곳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정도로 현실감 없는 멍청이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혹시 마법이라면 모를까, 검술같이 노력해 봐야 써먹을 데도 없는 것은 남들 보다 수백 배 재능이 뛰어나지 않는 한은 절대 익힐 생각이 없었다.
신분 또한 꿇릴 것이 없다. 대한민국은 만민이 평등한 평등사회. 비록 돈이 곧 신분인 엿 같은 사회지만 어쨌든 법적으로는 평등한 존재다. 고로, 자신은 사회 층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다. 라는 궤변도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따지고 들면 단군의 후손이자 조선왕조의 후손이 아닌가? 왕족, 혹은 황족이라고 해도 전혀 거리낄 게 없는 신분상의 가호를 받는 셈이다. 본인이 살던 곳에서 왕족이라고 하는데 그걸 확인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전혀 모르는 대륙인이라고 해도 일단 왕족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좋아. 왕족으로 밀고 가자. 유신은 결심했다. 내가 왕족이라는데 지들이 무슨 수로 알겠어? 어떻게든 최소한의 허세만 유지한다면 문제는 없으리라. 혓바닥만 잘 놀리면 대우가 달라지는데 굳이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귀족으로 컨셉을 잡든 왕족으로 컨셉을 잡든, 길거리 강도 앞에서 부릴 수 있는 허세에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이제 문제는 황제랑 어떻게 일대일 면담을 하느냐 인데…….”
유신은 슬슬 밤이 슬슬 서늘해지자 고등학생의 영원한 친구, 패딩을 몸 위에 덮었다.
처음에는 가방 속에 있는 나머지 옷가지나 이런저런 물건들을 꺼내려고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이곳처럼 가난한 곳에서 척 보기에도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 옷가지를 꺼내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운이 나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운이 좋아야 발가벗겨져서 몰매 맞고 내쳐지겠지. 아무리 당장 친절하다고 해도 결국 생판 본 적 없는 타인일 뿐이다. 당장의 이익 앞에서 선의란 금세 무너지기 마련. 패딩 자체도 워낙 특이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입을 생각을 안 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슬슬 자야지…….”
유신은 불편한 침대에서 애써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잠은 전혀 오지 않았다.
아직도 심장의 두근거림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난생 처음, 일생에 겪어볼 수도 없는 황당한 사건. 차원이동을 한 것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피부로 직접 느껴지는 현실감에 유신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지구로 돌아갈 가능성도 희박한 지금 상황에선 이곳에 정착하는 수밖에 없다. 유신은 자신이 집에 돌아가겠다고 별 멍청한 짓을 해대는 이고깽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칼 한번 휘두르면 검기를 삼 미터나 뽑는 초인이 되어서 집에 가는 방법을 내놓으라고 드래곤에게 협박을 할 것이 아닌 이상, 이제 이곳은 또 다른 자신의 세계라는 것이다.
일종의 난민일까?
유신은 자신의 신세가 나름대로 처량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뒤집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자신의 몸은 흥분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유신은 그 사실을 딱히 부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판타지를 읽는 사람 중에 그곳을 동경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소설과는 백팔십도 다른 현실적인 세계지만 그럼에도 마법과 낭만이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은 자신이 현실과 판타지도 구분 못하는 멍청한 얼간이 주인공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단 판타지가 판타지이니 만큼, 현실보다 훨씬 위험성이 컸다. 생각해보니 이 마을 사람들도 그다지 믿을만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잘못하면 잠든 새에 모두 털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신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유신은 순박한 표정의 마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애써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내일 당장이라도 마을을 떠나고 싶었다.
눈 깜짝할 새에 기대감과 흥분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온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웅크리니 자신이 혼자라는 외로움만이 더 심해졌다. 참을 수 없는 고독감. 그리고 불안감.
그날 밤 유신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을 해야 한다. 유신이 내린 결론이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옛 성현의 말씀이었다. 물론, 꼭 그 말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일단 유신은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일단 이 쓸데없이 리얼한 판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촌장의 집에 묵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이유 정도야 금세 예측할 수 있었다. 아침이랍시고 나온 묽은 수프 한 접시와 말라비틀어진 쬐끄만 빵 한 조각, 그리고 딸기만한 나무열매 두어 개. 척 보기에도 가난에 찌든 것 같은 낙후된 시골 화전민 마을에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을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유신의 실수였다.
간에 기별이나 갈까? 유신은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식탁을 바라봤다. 한 칠십 대 쯤 되어 보이는 전형적인 시골 할아버지 이미지의 촌장이 그를 쳐다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차린 건 없지만 이거라도 드시게. 유신 군.”
네. 정말로 차린 건 쥐뿔도 없네요. 유신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표정관리. 표정관리. 그나마 먹을 거라도 주는 게 어디인가. 유신은 여기서 뭔가를 더 원할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뇨. 괜히 신세지게 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격식을 차려서 말하자 촌장은 뭔가 흐뭇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유신은 직접 깎은 듯이 투박한 나무숟가락을 집어 들면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촌장의 아들내외는 유신이 껄끄러운 모양인지 그다지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그도 그런 것이, 아무리 유신이 신비한 분위기와 연출로 이미지를 희석시켰다 하더라도 무일푼에 식량만 축낸다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이득 없이 입이 하나 늘었는데 그것을 좋다고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유신은 이대로 있다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저 억척스럽게 생긴 촌장의 아들내외한테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뭔가 일을 하던지, 아니면 여길 재빨리 뜨던지 해야 한다. 하지만 사방의 지리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마을을 떠났다간 길을 잃기 딱 좋다. 운이 좋으면 아사, 반대로 운이 없으면 몬스터라던가 뭔가 무시무시한 것들을 만나서 일용할 양식으로 변해버릴 테지.
유신은 결국 며칠만이라도 마을에 머무르는 동안 일을 하기로 했다. 촌장의 아들내외는 뭔가 일을 하려고 하는 유신을 보며 약간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밭일은커녕 곡괭이도 잡아보지 못한 것 같은 유신의 팔뚝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신 나름대로 축구나 농구도 즐기면서 적절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밭일을 하는 농사꾼의 입장에서 본 유신의 몸은 일은커녕 공부만 한 샌님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신은 어떤 일을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도통 괜찮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는 일이라곤 컴퓨터와 공부밖에 없는 학생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런 그를 구원해준 것은 다름 아닌 촌장 할아버지였다. 전날, 마을 사람들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다른 대륙의 학자라고 소개한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고민하는 유신을 향해 아이들을 가르쳐 보지 않겠냐고 말했던 것. 촌장아들내외는 아직 어린 유신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을 영 탐탁치 않아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른 대륙에서 학자라고 불렸다던 사람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는 신뢰하는 듯 했다.



그렇게 되어서, 유신은 자신의 앞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십여 명의 사람을 바라보곤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졌을까…….”
내 팔자가 매번 그렇지. 유신은 머리를 부여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마을 옆의 작은 공터. 번듯한 교실 따위가 이런 촌에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는 칠판도 없다. ‘칠판? 그게 뭐에요?’라고 말하는 정도면 말 다 한 셈이다. 그뿐인가. 의자나 책상조차도 없어서 사람들은 그냥 서 있거나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있기까지 하다.
거기다가 연령도 각양각색.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있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 나이대도 몇 명. 거기에 유신보다도 나이가 많은 청년이나 처녀들도 있다. 어제 자신을 데리고 온 에이라는 이름의 몰 개성한 이름의 청년조차도 있을 정도였다.
유신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에게 뭘 가르치지? 수학? 과학? 사회? 도통 가르칠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섯 살 어린애에게 사회나 과학을 가르칠 수는 없고, 수학이라는 것도 농민에게 가르칠 만한 내용이 아니다.
결국 유신이 택한 것은 문학.
사실 문학이라고 보기보다는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말해주는 수준이었지만, 유신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본 어떤 판타지 소설에서 말했듯이 판타지에서 가장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의 많은 명작들을 책으로 내어서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안전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며, 명예까지 뒤따라온다.
물론 사상불순물로 취급당한다면 희망이고 나발이고 없겠지만.
하지만 유신의 목표는 귀족. 일단 판타지라는 것에 조금 들뜬 것도 사실이지만, 봉건제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귀족은 권력의 중심이다. 부와 명예와 권력. 욕심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리라. 이왕에 판타지에 떨어져서 한평생 살게 된 마당인데, 귀족 정도는 노려볼만하지 않겠는가.
물론 지금의 상황처럼 당장의 배가 주린 마당에는 그런 것 따위보단 식사 한 끼가 훨씬 중요했다.
뭐, 사실은 뭔가를 가르친다 치더라도 사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할 일 없이 마을 안에서 노는 사람들이다. 일을 할 사람이라면 일찌감치 자기 일거리를 찾아간 지 오래. 아이들을 가르친다곤 하지만 그래봤자 화전민에 평민근성이 몸에 박힌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배움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유신에게 아이들을 맡긴 진짜 이유는 보모 역할인 것이다.
뒤늦게 그걸 알아챈 유신은 적당히 이야기나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쓸데없이 머리 짜내서 수학이나 과학을 가르칠 바에는 이야기나 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 전략이나 실행하는 편이 백 배는 효율적이었다.
“그럼, 먼저 어떤 이야기를 해 볼까.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이 좋을까. 아니면 백설공주?”
잠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생각하던 유신은 이내 마음을 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구연동화를 본 적이 있기에 나름대로 제스처에 신경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말이다.
“옛날 옛날에…….”



“쩝. 이제 어쩌지…….”
유신은 마치 어린애들 마냥 초롱초롱한 눈을 한 채로 그를 바라보는 남녀들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효과가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혹시 반응이 싸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안감은 기우였던 걸까. 오히려 너무 반응이 좋아서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유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신데렐라. 그야말로 판타지다운 이야기로 옛날이야기의 왕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진 공주와 그런 공주를 구하는 백마 탄 왕자. 거기에 전형적인 악역인 마녀까지. 완벽하게 권선징악에 해피엔드인 클리셰다. 문학의 문자도 모를 우매한 화전민 마을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어쨌든 대략적인 호감도가 올라갔다. 개별차이야 있겠지만, 아마도 저 사람들은 유신을 솜씨 좋은 이야기꾼 정도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신은 얼른이라도 이 마을을 떠나고 싶었다. 원래 작은 마을이란 건 그만큼 결속력이 강해서, 그들이 맘만 먹으면 순식간에 유신의 물건을 전부 뺏고 어디 땅속에 묻어버리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이 그럴 리는 없었지만, 유신이 어젯밤 떠올린 불안감은 밤새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반쯤 피해망상의 수준까지 확대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단 사람이 많은 대도시로 가야지.”
대도시라면 적어도 한밤중에 칼침 맞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미개한 중세 판타지라 할지라도 그만큼 치안 상황이 갈 데 까지 갔을 리는 없지 않은가.
대충 이야기를 마치고 촌장의 집으로 돌아온 유신은 촌장에게 간단한 상식을 몇 가지 물어봤다. 촌장은 수업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귀찮아하지도 않고 유신의 물음에 하나하나 답해줬다.
어쩌면 늙어서 적적했는지도 모르지. 유신은 속으로 꽤 그럴 듯한 답을 내놓았다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촌장은 꽤나 열성적으로 유신의 상식개선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아는 거 많던 촌장이라 할지라도 지리에 대한 것에서는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코딱지만한 화전민 마을이라 그런지 지도 한 장도 없던 것이다. 그나마 걸어서 반나절 정도 거리에 꽤 큰 마을이 있고, 한 사흘 정도 더 걸어가면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를 볼 수 있다는 것 정도라도 알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아직도 지구는 평평하다. 같은 한숨만 나오는 상식수준에 뭔가 제대로 된 지리정보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영원한 낭떠러지가 나온다니. 그걸 진지하게 말하는 촌장의 모습은 유신에게 있어 한 편의 코메디 영화였다.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래야 자신도 제대로 한 밑천 잡을 것 아닌가. 촌장이 모를 법한 정보들에 대해서는 따로 도시로 나갔을 때 알아보기로 한 유신은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어차피 겨우 반나절 거리에 있다면 도시 쪽이 좀 더 지내기 편하리라.
이런 시골 마을에선 뭔가 일을 도모할 수가 없다. 가난에 찌든 화전민 마을이라니. 돈과 정보를 얻기 위한 곳으로는 최악인 곳이다. 어떻게든 도시로 가서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도 하면서 기회와 돈을 노려야지, 이런 곳에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물론 유신이 떠나는 데에는 촌장 아들내외의 눈치도 한몫 했지만 말이다. 눈칫밥이란 그만큼 무서웠다.



“이런 시발.”
유신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유신은 아무 생각 없이 안전하다는 말만 듣고 덜컥 길을 떠난 과거의 자신에게 욕이라도 한바탕 해주고 싶었다. 한밤중이 아닌 이상은 늑대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존장의 말에 너무 쉽게 안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적어도 두어 번은 더 생각을 해 봤어야 했다.
떠나기 전에 그 길이 안전한 길인지, 몬스터나 짐승 따위는 나타나지 않는지 하는 것을 물어본 유신의 대처는 분명 잘 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리. 다름 아닌 거리가 문제였던 것이다. 화전민 마을과 작은 도시와의 거리는 걸어서 반나절. 언뜻 보면 별 것 아닐 거리였다. 판타지 소설에도 주인공이 며칠씩 잘만 걸어 다니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전부 다 거짓말에 페이크였다. 실제로 겪어본 바로는, 속된 말로 남근이 빠지도록 힘들었다.
걸어서 반나절이면 적게 잡아도 15킬로미터가 넘는다. 그 점을 유신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한참 두어 시간 쯤 행복한 미래와 허세부리기 계획에 대해서 고민하며 걸음을 옮기던 유신은 천천히 지쳐갔다. 운동이라곤 학교 쉬는 시간에 축구하고 농구 정도를 한 것이 다인 고등학생의 체력으로 반나절이 넘도록 산길을 걷는 것은 꽤나 무리한 일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도시까지 가는 길은 거의 외길이나 다름없었기에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었지만,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유신을 지치게 만들 뿐이었다.
“미치겠네. 이놈의 길은 대체 언제 끝나지.”
유신은 페트병에 들어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아아. 시원한 음료수 한 병만 마셨으면 좋겠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페트병에 물을 가득 채워왔지만 그래 봐야 미지근한 물이다. 편의점에서 사 마시는 차가운 음료수에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냉장고와 얼음의 중요성을 몸으로 실감하게 된 유신이었다.
물론 가방에 음료수가 있긴 있다. 하지만 아마도 세상에서 하나뿐 일지 모를, 이 귀한 음료수를 고작 이런 곳에서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맹물을 마시면서 땅바닥을 걸어 다니는 게 아니던가.
“으아. 진짜 죽겠네.”
한 시간 쯤 더 걸었을까.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이 빠진 유신은 근처의 나무 밑에 주저앉았다. 지금까지야 혹시 모를 산짐승이나 몬스터 따위가 무서워서 억지로 걸어왔지만, 이제는 다리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평평한 도로도 아닌 산길을 세 시간동안이나 걸은 것만 해도 고등학생인 유신에겐 상당한 힘이 드는 일이었다.
“이래서 학교는 체육 수업을 해야 합니다.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모른다니까.”
새삼스레 예체능 수업의 부재에 개탄스러움을 느낀 유신이었다.



“아 미친. 힘들어 뒈지는 줄 알았네…….”
유신이 그래도 그럭저럭 규모가 있어 보이는 마을에 도착한 건 거의 하루가 다 지난 뒤였다. 반나절은 개뿔이. 유신은 이름 모를 촌장을 향해 씨근덕거렸다. 벌써 하늘은 해가 져서 컴컴하게 변해 있었다. 아침만 대충 때우고 왔으니 거의 하루 종일 걷기만 한 것이다.
대충 시계를 보니까 출발한 지 딱 열여섯 시간하고도 삼십 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침에 새벽닭이 울자마자 억지로 일어난 다음, 대충 식사 같지도 않은 식사로 배를 채운 후에 촌장 집에 인사만 하고 바로 왔으니 해 뜬 시간을 대충 여섯 시로 잡더라도 지금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일 것이다.
“아……. 다리아파 죽겠다. 거기다 배고파.”
이곳까지 오는 데 작은 산을 하나 넘었다고 하면 믿겠는가. 화전민 마을도 산 중턱에 있었는데 중간에 산이 하나 더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유신이 느낀 허탈함이란…….
산을 넘고 간신히 마을을 찾아낸 것 까지는 좋았다. 근데 문제는 그 마을이 너무 멀리 있었다는 것이다. 중간에 꽤 큰 벌판까지 있어 그야말로 까마득히 먼 곳에 위치한 마을. 족히 십 킬로미터는 되어 보이는 그 거리에 유신은 울고 싶을 정도였다. 자동차를 탔다면 십분도 안돼서 도착했을 짧은 거리였지만, 걷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
게다가 벌판도 평평하지 않고 굴곡이 있어 오르막 내리막이 있었으니 마을에 도착한 유신의 진이 빠지는 게 당연하다. 헬스장에서 한 시간 걷는 일 따위는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군대에서 야간 행군하는 시간이 대략 열 시간에 대략 사십 킬로미터. 유신이 걷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을 감안해도 열여섯 시간이라면 군대 행군보다도 한참 넘어선 거리다. 군장만큼은 아니지만 꽤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걸었으니 평범한 고딩인 유신은 그야말로 죽을 맛인 것이다.
차라리 중간에 노숙이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아무도 없는 조그만 오솔길-화전민 마을로 가는 길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옆에서 노숙을 했다가 길 가던 산적이나 강도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쓱싹 당할 생각을 하니 도저히 노숙할 엄두가 나지 않는 유신이었다.
“특히나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올 땐 아주 그냥……!”
누가 리얼 판타지 아니랄까봐. 해가 떨어지자마자 늑대 소리가 아주 리얼하게 스테레오로 울리니 힘없고 무기도 없는 노멀한 현대인인 유신이 버틸 재간이 없었다. 무슨 늑대새끼들이 단체로 발정이라도 났는지 저쪽에서 아우~ 하고 울면 이번엔 이쪽에서 다시 아우~ 라고 울어댄다.
공포영화하고 현실은 정말 지방주택하고 강남아파트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뭐랄까. 위압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었다. 분명 멀리 떨어진 거리일 텐데도 식은땀이 나면서 등 뒤가 쭈뼛거릴 정도의 공포. 리얼 늑대 울음소리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침착한 인간이 이상한 거다.
“들짐승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랄, 똥을 싸고 있네. 길가다 본 큼지막한 발자국만 다섯 번이 넘는다. 시발.”
만약 운이 나빴다면 늑대하고 마주쳐서 리얼 약육강식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었으리라. 물론 자신의 판타지 라이프도 거기서 끝장나는 것이었겠지. 새삼 신에게 감사하게 되는 유신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몬스터는 무슨 얼어 죽을. 하도 연약해서 양판소엔 잘 등장하지도 않는 늑대의 포스가 이정도인데 제대로 괴물 취급받는 몬스터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초반에 오크나 오우거를 때려잡는 이고깽 놈들은 진짜 말도 안 돼는 개소리였음을 직접 몸으로 체득한 유신은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걸었다. 특히 해가 질 때는 초조함과 공포가 한층 심해져서, 차라리 땅굴이라도 파고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마을에 거의 다 도착한 유신은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긴장한 채로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왔다. 당장에라도 건들면 쓰러질 정도에,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서 걸을 때마다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차라리 등산화였으면 좀 나았을까. 보통 운동화 가지고는 험한 비포장 길바닥에서 유신을 발을 보호하는데 한참 부족했다.
그래도 어쨌든 도착은 도착. 벌써 머릿속의 판타지에 대한 환상은 말 그대로 개 박살이 나서 너덜너덜하게 되어있었다. 이젠 어떻게든 마을 안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잠깐.”
어째 이 판타지 세상에 오고 나서부턴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었지만 이번 트러블은 좀 심각했다.
“……이제 어쩌지?”
마을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 척 보기에도 제법 규모가 되는 마을인데다가, 목책 가운데 있는 작은 입구에는 경비병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보였다. 먼 거리라서 제대로 확인은 안 되지만 그래도 무슨 동네 거지마냥 철판 쪼가리 하나 걸친 화전민 마을과는 달리 제대로 모양이 잡힌 갑옷-비록 흉갑뿐이었지만-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화폐도 없다. 어찌저찌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손 치더라도 돈이 없는데 뭘 하란 말인가.
“아 시발 망했어요.”
처음엔 그래도 어떻게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해결책이 보일 것 같았다. 당장 화전민 마을을 나오기 바빠 자세한 해결책은 걸어오다 보면 생각나겠지. 하고 무작정 걸어온 것이다. 물론 걸어오느라 지쳐 그런 걸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말이다.
결론은 지금 적절한 해결수단이 없다는 소리. 정 안된다면 무슨 배낭여행처럼 아무 집이나 무작정 쳐들어가서 하룻밤 재워줍쇼.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시민의식은커녕 도덕관념조차도 의심스러운 중세 리얼 판타지 원주민들께서 과연 몸 성히 하룻밤을 재워주실 지가 의문이었다.
“어쩌지. 큰일 났네.”
그냥 저 경비병 아저씨들과 노가리를 까면서 하룻밤 마을 밖에서 때울까. 하지만 지금 유신은 당장에라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용하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수면부족에 영양부족, 경비병들과 이야기하던 와중에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누가 낙후된 시골 깡촌 아니랄까봐 먹을 건 쥐뿔도 없어서 안 그래도 시큼한 위액 냄새가 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거기에 하루 종일 평소 운동량을 한창 오버히트 하는 느낌으로 파워워킹을 했더니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 고갈된 느낌이었다.
어찌나 배가 고프던지 가방에 있는 초콜릿 바 같은 간식거리를 먹고 싶은 마음이 하늘을 찔렀지만 아름다운 내일, 밝은 미래를 위해 간신히 참아낸 유신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쯤 폐인이 된 얼굴이었다. 쑥 들어간 볼 살에 잠도 못자고 지쳐서 퀭하게 파인 눈가, 썩은 동태마냥 멍한 눈동자 등 그야말로 길거리에 자리를 깔면 지폐까지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불쌍한 모습이었다.
“와……. 이건 뭐 진짜 답이 안보이네.”
하다못해 경비병 앞에서 노숙이라도 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까지 하는 유신이었다. 워낙 소설에서 경비병이란 인간들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리가 많은 존재인지를 강하게 어필했지만, 그래도 나름 마을을 지키는 경찰 같은 존재들인데 설마 눈앞의 불쌍한 여행자 물건까지 털어가겠냐 싶은 생각이었다.
“결국 밤을 새야 하나. 미치겠네.”
밤을 새는 것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유신은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당장에라도 편안한 숙면이 시급한 상황. 결코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처에서 자다가 눈 먼 들짐승이나 근처를 배회하던 강도 따위에게 길가의 차려진 밥상 취급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방법이 없는 이상 하책이라도 강행돌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남근 같은 세상에 경의를 표한다. 진짜로.”
유신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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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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