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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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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스칼렛
글쓴이: 이클립트
작성일: 11-07-15 23:46 조회: 1,771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마녀(Witch).
설화나 민화, 전설같은 '옛날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며, 흔히 마술을 사용하며 저주를 내리거나 수상한 약을 만들거나 한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저주로 농작물을 말라죽게 하거나 인형에 바늘을 찔러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 혹은 마술이나 약초로 만든 약으로 병을 고쳐주고 한 해의 풍작을 위해 하늘의 신들에게 비는 일을 하는 사람 모두를 '마녀'라고 총칭한다.
Witch라는 단어가 주로 여자를 가리키긴 하지만, 반드시 "여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엄밀히 말해 Witch의 번역인 '마녀'에는 문제가 있다.








그날은 유독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이었다.
아침의 일기예보에서는 맑을 거라고 했지만, 점심 때부터 갑자기 구름이 끼며 날씨가 흐려지더니 해가 질 무렵이 되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미처 우산을 준비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느닷없는 비에 불평을 하면서도 사람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비를 뚫고 가지 않으면 어디로도 갈 수 없으니까.
그것은 여기에 있는 이 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아무리 비가 안온다고 했어도 장마철이라 혹시 모르니 작은 우산이라도 챙겨가라"던 어머니 말을 듣는 거였는데 같은 불평을 속으로 내뱉으며, 그는 빗속을 뛰어가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우산을 쓰고 돌아왔겠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이 소년과 같은 처지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폭우의 양은 심상치 않았고, 결국 소년은 견디다 못해 학교와 집의 중간에 있는 편의점에 들려 비를 피하기로 했다.


소년이 편의점에 들어서자, 흠뻑 젖어버린 소년의 몸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려 바닥을 더럽혔다. 그것을 바라보는 점원의 눈빛은 곱지 않았지만 소년은 그것을 애써서 무시했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시간도 떼우고 몸도 말릴 겸 컵라면과 음료수를 고르고 계산한 후, 그것을 편의점 식탁에서 먹어치웠다. 다 먹고 난 후에도, 소년은 한동안 편의점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쏘아보듯 하는 점원의 시선에서 등을 돌린 채, 가방에 들어있던 MP3를 꺼내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후 전원을 켰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시계를 올려다보자 벌써 6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이미 편의점 안에 들어온지 1시간 째. 바깥을 보자 아무래도 금방 그칠 비는 아니었는지, 아직까지도 쏟아지고 있었다.
한숨을 쉬고, 소년은 MP3를 끄고 가방 안에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 여기 죽치고 있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계속 내릴 비라면 여기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을테니까.
점원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소년은 편의점에서 나와 집을 향해 달렸다.


그의 집은 주택가에서도 조금 구석진 곳에 있었다. 문을 찾으려면 골목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평소에는 그런 사소한 일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지금처럼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데 뱅뱅 돌아서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없던 불만도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이 날은 단지 '평소보다 운이 없었던 날'로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년은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기 위해, 평소에는 지나가지도 않았던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하며 작은 선택 하나가 소년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게 된다.


"…… 어?"


골목길의 저 앞쪽. 워낙 빗발이 굵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곳에 '무언가'가 있다.
저게 뭘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기에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줄어들자, 그제서야 소년은 그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으며, 눈대중으로 봐도 얼마전 신체검사에서 175Cm가 나온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의 키가 아니다. 소년이 문제삼고 싶은 부분은 바로 저 사람의 복장이었다.


검다. 정말로 검다. 머리에도 검은 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몸에 두르고 있는 코트도 새카만데다 그 안에 입고 있는 옷조차도 검어보였다. 하여튼 검은색 이외의 다른 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 제정신이야?'


장마철이라고는 해도 더울 때는 덥다. 소년이나 소년의 친구들도, 하복을 입고 있음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더위를 호소할 정도니까. 설마 이 계절에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아니, 보는 것만으로도 이쪽이 더워지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인진 몰라도 얽히고 싶지 않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몇걸음 채 걷기도 전에, 소년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것을 과연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조금전까지 희미하게 느끼고 있던 더위가 깨끗이 사라졌다.
무언가 이상하다. 뭐라고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굳이 말한다면… 발을 디뎌선 안되는 곳에 들어와버리고 말았다는 느낌. 그런 것이 전신을 감싸고 있다.
도대체 왜? 뭣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걸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소년은 봐버렸다.


남자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이윽고 몸까지 완전히 돌렸다.
그 너머. 남자의 어깨 너머에 있는 광경이, 한순간이지만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
온통 새빨간 색으로 물든 채, 벽에 기대어있는 사람.
머리카락이 긴 것을 보면 여자일까. 하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머리카락이고 얼굴이고 몸이고 옷이고, 전부 빨간 색으로 물들어있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소년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어떤 사건이나 사고에 휘말렸다는 이야기같은 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것을 자세히 본 적도 없고, 어쩌다 보는 일이 생겨도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 없잖아"라고 생각해버리고는 기억 한구석에 묻어버렸다.
이런 일은 나와 상관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 그렇게만 생각했기에,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혹시 지금 이게 뭔가 나쁜 꿈인 건 아닐까. 정신을 차리면 자기 방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게 아닐까. 그러면 너무 늦게 일어났다고 어머니한테 야단맞고, 아침 식사도 대충 건너뛴 다음 학교로 달려가는… 그런 '평소와 같은 하루'가 시작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잃어버렸던 현실감이 돌아온 것은, 눈앞의 남자가 발걸음 소리를 낸 다음이었다.
남자가 한걸음 앞으로 나오자,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 자신은 살인사건─혹은 그 비슷한─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저 남자는 그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당연히,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다.
도망쳐야 한다. 여기서 도망치고, 집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평소'로 돌아갈 수 있다.
몸을 뒤로 돌려서 달리는 것과 동시에, 입을 벌렸다. 이곳은 집들이 모여있는 주택가니까, 아무리 골목이라고 해도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면 사람들이 듣지 못할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목덜미를 잡히고, 공중으로 떠오른다. 무시무시하게도 남자는 소년을 한손으로 붙잡고 위로 들어올린 것이다.
잠시간의 부유감이 끝난 후, 소년은 곧 얼굴부터 바닥에 쳐박힌다.


"갸, 아아아아악……!!"


아프다.
친구와 주먹다짐을 했을 때라거나, 동네 깡패들에게 맞았을 때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아팠다. 이빨이 부러지고, 찢어진 입 속에 피가 고여 쇠맛이 멤돈다.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 숨을 쉬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를만큼 어지러웠다.
남자는 소년을 들어올리고, 몸을 뒤로 틀면서 내리찍었다. 그 결과 소년은 달려가려던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떨어진 것이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간신히 '벽에 붙어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까 본 것처럼 '사람'이었지만, 그 모습은 구토가 나올만큼 흉하게 망가져있었다.


머리카락이 길고, 스커트를 입고 있다. 그것만이 그'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사람을 이렇게까지 '변형'시켜놓을 수 있는건지, 소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여자의 손목에 채워져있는 은빛 뱀 모양의 팔찌와 목에 걸려있는 뱀 머리 형상의 목걸이는 지금도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이 그렇게 생각하건말건 남자는 소년의 머리칼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생각에서 깨어난 소년은 발버둥치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무언가가 자신의 목을 훓고 지나가는 듯한 차가운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목에서 피가 뿜어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 ……!!"


숨을 쉴 수도 없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다. 그저,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허우적거리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신은, 죽는다. 그 잔혹하기까지 한 현실이 소년의 코앞에 닥쳐왔다.
이런 게 아닌데. 소년이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해왔던 자신의 '죽음'이란, 앞으로 60~70년은 지난 후에 찾아와야 하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맞이하는 평안한 것이었지 결코 이런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죽음'은 소년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집에 빨리 오고 싶어서, 이쪽 길을 택했다.
단지, 그것 뿐이었는데.


마침내 소년의 눈이 뒤집어지고, 움직임을 멈춘다. 그것을 확인한 남자는 소년을 한팔에 끼운 채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장식'을 하던 여성의 시체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바닥에 흐른 두 사람분의 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에 씻겨 내려갔다. 어쩌면 이 자리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도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일련의 모든 일을 한 남자의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살인의 희열로 웃고 있는지, 자신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도 아니면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인지.


이 이후로.
소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남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챕터1 : 하얀 소년


『희대의 연쇄 살인 사건 피해자, 마침내 32명으로…』
『멈추지 않는 인간 도살, 공포에 떠는 사람들.』
『현대판 잭 더 리퍼,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 '현대판 잭 더 리퍼' 좋아하고 자빠졌네. 공통점이라곤 '예리한 흉기'로 했다는 거 밖에 더 있냐고."


시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탁자 위에 내던졌다. 반도 채 읽지 않았지만, 더이상 읽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는다.
애초에 잭 더 리퍼라고 하는 건, 19세기 말 영국 런던에서 최소 5명의 매춘부의 빼앗은 연쇄살인마를 말한다. 범행 성명을 신문사에 보내는 등 범행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알리려고 한, 최초의 '극장형 범죄'를 저지른 자이기도 하다. 그를 잡지 못한 당시의 영국 경찰들은 수사를 종료하여 사건 자체가 영구미제로 남았으며, 그 미스테리어스함 때문에 아직도 '연쇄살인마'라고 하면 잭 더 리퍼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가장 큰 살해 특징은 살해 후 '외과 수술용 칼'같은 예리한 날붙이로 해부하여 장기를 적출하는 것으로, 확실히 이 부분만 본다면 지금 신문에 나온 예의 '녀석'과 흡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잭 더 리퍼가 노렸던 것은 어디까지나 '매춘부' 뿐이었고, 살해 방식도 차이점이 있다.
… 물론, 잭 더 리퍼든 '녀석'이든 희대의 변태이자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라는 점에 있어선 똑같지만.


"하여간 뉴스나 신문이나, 뭔가 조금만 비슷하다 싶으면 유명한 거에다 갖다붙인다니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사람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제목을 내걸어야 기사가 팔릴테고, 그 사람들도 먹고 살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별로 비슷하지도 않은 것에 막 갖다붙이는 건 읽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오히려 흥미를 잃어버리게 만들수도 있다. 바로 지금의 시연처럼.
시연은 의자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캔 하나를 꺼내 뚜껑을 딴 후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몸을 앉히며 한손으로는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고, 다른 한손으로는 리모컨을 들어올려 TV를 틀었다.
… 틀자마자 뉴스가 나오고, 방금 신문을 덮게 만들어버린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보도가 방송되고 있자 그대로 영화 채널로 돌려버렸지만.


한참 동안 영화에 빠져있다가, 담배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동생은 몸에도 나쁜 거 왜 피우냐고, 제발 좀 끊으라고 잔소리를 심하게 하고 있지만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으면 이 세상에 니코틴 중독자는 한명도 없을 것이다.
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바지 주머니와 셔츠의 윗주머니까지 뒤져보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 입었던 윗옷까지 모조리 살펴본 결과 지금 이 집에 담배가 없다는 사실만 재확인하게 되었다.
결국 편의점까지 나가야 되는건가. 시연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며 재킷을 걸쳤다. 오늘은 더이상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흡연은 몇안되는 낙 중 하나. 그걸 잃어버릴 수는 없다.


'아직 9시도 안됐고… 시하는 야자때문에 늦게 들어온다 그랬으니까… 나갔다 와도 들킬 일은 없겠네.'


형사과에 있을 당시 무장강도와 대치했을 때도 그렇게 큰 공포는 느껴본 적 없었지만, 그런 그녀도 여동생의 잔소리는 무섭다.
TV를 끄자 집안이 조용해졌다. 평소에도 자매 둘이서만 살고 있는 집이라 넓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처럼 조용해지니 그것이 더 심해졌다.
잠시 동안 그런 감상에 잠겨있던 시연은 곧 쓴웃음을 지으며 현관을 나섰다.
그녀가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은 5층 맨션의 맨 꼭대기였다. 엘리베이터도 없어 걸어서 오르락 내리락해야 했지만, 원래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것이 힘들다고 느껴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동생은 꽤 불평을 했지만.


집을 나선 후 10분 정도 걸어 편의점에 도착한 그녀는 곧 즐겨피우는 브랜드의 담배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지만, 그런 그녀의 눈에 진열대에 놓여져있는 인스턴트 식품들이 들어왔다.
맥주는 아직 냉장고에 많이 남아있으니까 먹을 것만 좀 고르면 될텐데. 그렇게 잠깐동안 고민한 끝에, 그녀는 앞에 있는 상품들 중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성치고는 결코 작지 않은 체구에 원체 운동량이 많은 그녀로서는 동생과 비슷한 정도의 식사로는 배가 다 차질 않는다.


당장 집에 가져가서 먹을 것들을 챙기고, 나중에 밤에 생각나면 먹을 것들도 챙긴다. 덕분에 처음 예정과는 달리 짐이 상당히 커져버렸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없을까 둘러보며, 시연은 지금부터 뭘 할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는 길에 비디오 가게나 들릴까. 모처럼의 휴일이니까 제대로 쉬어야지.'


요 몇일 계속 야근을 하며 남아있는 잔업들을 모조리 해결해버렸기에, 오늘은 정시에 퇴근할 수 있었다. 덕분에 오늘 하루만큼은 그 동안 쉬지 못한 것까지 몰아서 쉴 생각이었다. 동생은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서 잠들어버릴테니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 물론, 그런 모처럼의 '휴일'에 할 일이 집에 틀어박혀 비디오나 보는 것 뿐이라는 건 꽤 서글픈 일이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은 지금쯤 산이니 바다니 놀러갔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얼마 전 연락을 해온 악우(惡友) 한명은 남자친구와 함께 동해안으로 놀러간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또 한명의 친구는 남편과 아이들을 동반해 황해안으로 가족 여행을 떠난다거 자랑해왔다. 그 소식을 듣고 손에 힘을 너무 줘버린 나머지 휴대폰을 부숴먹을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놀러가면 놀러가는거지 왜 나한테 자랑질이냐고. 솔로 앞에서 염장 지르냐.'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
시연의 나이 올해로 28세. 많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나 연인은 커녕 만나고 있는 남자도 없는 것은 그녀 자신이 택한 길이지만,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 하나둘 독신 생활을 청산하기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아니, 적어도 이런 식으로 자랑하거나 하지 않았더라면 신경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기들이 사귀는 거면 사귀는 거고 결혼했으면 한거지 도대체 왜 뭘 할 때마다 자신에게 연락을 하면서 일일이 화를 돋구는 걸까.


그런 친구들에 대한 분노를 품으며, 시연은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이 계산을 하는동안, 시연은 무의식 중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계산대의 옆에 있는 잡지칸에서 낯익은 제목을 발견했다.
그것 자체는 별 거 아닌 가십거리들을 담은 잡지였지만,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제목은 심상치 않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희대의 연쇄살인마, 그 진실을 파헤친다!』


'… 이런데서까지.'


점원이 알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쉰다.
신문에서도 보고 뉴스에서도 보고 이제는 담배와 먹을 것을 사러 나온 편의점 잡지에서까지. 여기까지 오면 누군가가 일부러 자신에게 이걸 보라고 태클을 걸고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여기 있습니다. 전부 해서 18300원 되겠습니다, 손님."


영업용 미소를 띄우는 점원에게 방금 들은 금액 만큼의 돈을 건네주고 물건들을 넣은 비닐봉투를 손에 들었다. 들은 것이 많다보니 상당히 묵직했지만 매일 이것보다 무거운 아령으로 1시간 이상 운동을 하는 시연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대단한 무게도 아니다.
이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시연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잡지─그 살인마에 대한 확실하지도 않은 입소문이나 추측같은 걸 막 집어넣었을 것이 분명한─를 향하고 있었다.
계속 고민하던 시연은 결국 점원에게 말했다.


"저것도 하나 챙겨주세요."


점원에게서 잡지를 받고, 돌아오던 길에 한손으로 읽었다.
길거리를 걸으며 책을 읽는다. 일반적인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위험하기도 한 일이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이러고도 집에 가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없으니까. 예의같은 것은 처음부터 신경쓰지도 않고.


읽기 전에 예상했던 그대로, 잡지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인터넷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소문들을 그저 모아놓기만 한 통에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았고, 결론도 애매모호하게 끝내놨다. '살인마의 심리 상태에 대한 전문 심리분석가와의 인터뷰'라는 것도 있었지만, 아마 어디 할일없는 정신과 의사와 대충 나눈 이야기를 실어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바로 다음 장에 작게 실려있는 병원 광고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인간 도살자라…'


비록 생활질서과라 그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경찰. 관심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전까지 애써서 머리속에서 지워버리고 관련되지 않으려 한 것은, 역시 자신의 담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동네에서 일어난 일도 아닌 이상 자신이 사건에 투입될 일도 없고.
1년 전 수도권 경찰서에서 형사과에 소속되어있었던 때라면 몰라도, 이런 곳으로 내려와 내근으로 돌려진 지금 자신이 신경써야 할 것은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실종아동 및 가출인 찾기 같은 일들이지 이런 강력 범죄 사건이 아니다─시연을 위해 변명하자면, 그녀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가볍게 본다거나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처음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것들이 얼마나 성가시고 심각하며 골치아픈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까─. 이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 그렇게 스스로에게 몇번이고 되뇌고 있으면서도 결국 이렇게 관심을 가져버리는 것은 자신이 아직도 사건 수사 일에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뭐,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지.'


이런 일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저 높으신 분들이나 현장에서 직접 뛰는 사람들이다. 간섭할 권한도 없고, 그 근처에 갈 일도 없는 자신이 고민해봐야 아무 쓸모도 없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는 자신에게도 좀더 '열정'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우울해진다.
슬슬 집이 가까워지자, 시연은 읽고 있던 잡지를 덮고 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 뭐야, 이건."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올린 시연은 그제서야 맨션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집, 복도 할 것 없이 1층부터 5층까지의 불이 모조리 꺼져있다. 설마 이 맨션 사람들이 다 함께 어디 나갔을 리는 없을테니 정전인걸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전에도 몇번인가 '전기 공급이 불안정' 어쩌고 하는 이유로 정전이 됐던 것이 생각났다. 이 맨션 자체가 새로 지은지 얼마 안된 물건이라 더더욱 그렇다고 하던가.
이곳으로 이사올 때에는 생각보다 싼 값이었기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결정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성급했던 것 같다. 직장에서 가깝기 때문에 빠듯한 시간까지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것 하나를 제외하면 그다지 좋은 점이 없으니까. 동생의 학교에서도 멀고.


'하여간 이놈의 건설업자 놈들하고 전력공사 놈들을 싸잡아 잡아족치던지 해야지. 게을러 터져가지곤.'


성실하게 일했을 건설업자들과 전력공사 사람들이 실제로 들었다면 진심으로 억울해할 생각을 하며 시연은 걸음 속도를 높였다.
불이 모조리 꺼진 맨션은 밤하늘보다도 더욱 새카만 색으로 보였다. 마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검은 거인과도 같은 모습으로.
지금까지는 한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한번 의식하고 나니 묘하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이 맨션이 아니라 거대한 괴물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람. 어린애도 아니고.'


한숨과 함께 쓴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어렸을 때의 그녀는 '겁이 없다'던가 '사내 아이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정도로 용감했다. 또래의 남자애들과도 거침없이 주먹다짐을 했을만큼 과격하기도 했고,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말썽꾸러기였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그리 다를 건 없다고 했지만, 시연은 그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의젓하고 얌전한데.


지금의 자신은, 그때의 자신과는 다르다.
다부지면서도 귀신이나 유령같은 것을 무서워했던 어린 아이도 아니고.
커서 경찰이 되면 악당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정의를 지킬 수 있을거라 믿었던 순진한 소녀도 이젠 없다.
있는 것은 자신에게는 한계라는 게 있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명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어른' 뿐이다.


묘하게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시연은 집으로 향했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려니 평소보다 몇배는 길게 느껴졌다.
… 단지 그것 뿐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만.


'… 여기가 원래 이랬던가…?'


어째서일까. 어둡다는 것을 빼면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계단일 뿐인데도, 어쩐지 추운 것 같다.
지금은 여름. 아직 열대야가 올 시기는 아니라고 해도, 추울 리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은 평소와 다른 풍경으로 인한 기분 탓에 지나지 않는다. 시연은 그렇게 결론을 지었다.
그러자마자, 무언가가 등골을 훓고 지나가는 듯한 오싹함을 느꼈지만.


'안되겠다. 빨리 돌아가던가 해야지.'


아무래도 철야로 일했던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럴 리가 없으니까.
역시 오늘은 들어가서 적당히 먹고 일찍 자는 것이 좋겠다. 원래는 오늘 그 동안 보지 못했던 TV프로와 영화들을 밤새워 볼 생각이었지만 더이상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았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어둡고 조용한 계단에서, 오직 시연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한번 의식하고 나자 이 조용함이 오히려 기분나빠지기 시작했다. 정전이 됐기 때문인지, 언제나 들려오던 TV 소리나 사람들의 웃음 소리도 전혀 들려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마치 맨션 전체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까 전, 자신이 내려올 때와 전혀 다름없어야할 장소.
하지만 불빛이 없고 묘한 한기가 느껴진다는 것만으로,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버린 것 같았다.


'…… 어?'


2층을 지나고, 3층에 올라와서 슬슬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무렵.
시연은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계단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단에 주저앉은 채로 옆으로 누워,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 다가가서 살펴봤지만 다행히도 죽은 것은 아니었기에 숨을 조용하고 고르게 쉬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연이 놀란 것은, 이 소년이 계단을 뒤덮고 있는 어둠 속에서도 보일만큼 '하얀' 색이었다는 것이다.
머리카락도, 그리고 피부도. 불빛이라곤 들어오지도 않는 계단 속에서, 마치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일만큼 하얗다.
거기에……


'예쁘잖아, 이 녀석.'


만약 얼굴밖에 보지 못했더라면 영락없이 '소녀'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시연은 커녕, 어쩌면 그녀의 동생보다도 더 예쁠지도 모르니까. 시연이 그를 '소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얼굴 이외의 다른 부분을 순간적으로 관찰했기 때문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형사과에서 강력 범죄들을 취급하던 그녀는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반사적으로 주의깊게 관찰하는 습관이 있었다.
설마 형사 시절에 갖고 있던 관찰력을 이런 곳에서 써먹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시연은 무심코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어쨌거나 이런 곳에서 자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시연이 보아하니 기껏해야 고등학생인 그녀의 동생 또래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이런 곳에서 자고 있다간 감기에 걸리는 정도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무엇보다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소년을 깨우기 위해서 가까이 온 시연은 보면 볼수록 더더욱 하얗게 변해가는 것 같은 피부와 모발을 보고 숨을 삼켰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알비노라고 하는 걸까. 조심조심 손을 뻗은 시연은 소년의 어깨를 붙잡고 작게 흔들었다.


한번, 두번, 세번. 그리고 손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크게 흔들자, 감겨져있던 눈이 천천히 떠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계단은 어두웠지만, 적어도 소년의 눈동자가 붉은 빛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갈색인지 흑색인지까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알비노인들에게 많이 나타난다는 적색 눈동자는 아니었다.
잠깐동안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시연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눈이 붉지 않은 알비노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더이상 그쪽으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까.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 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소년의 입에서, 여성인 시연이 순간적으로 질투할 정도의 미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시연이 인상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확히 세번을 그렇게 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뒤를 돌아본 후, 소년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또 이렇게 되버렸네."
"…… 또라니?"
"네. 빈혈기가 좀 있거든요. 그래서 가끔 정신을 잃어버리는데,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에요."
"그런가…… 너 상당히 운이 좋았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계단에서 정신을 잃어버렸다면 그대로 굴러떨어져 버렸을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잘못해서 머리처럼 다치면 큰일날 부분부터 넘어졌더라면 지금쯤 이 소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보니 단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을 뿐인 모양이고, 굴러떨어졌을 경우 생겼을 일에 대해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시연은 소년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어설 수는 있겠어?"
"네. 자는 동안 증상은 사라진 것 같으니까, 문제없어요."


소년은 시연이 내민 손을 잡으려다가 갑자기 흠칫거리더니,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손이 아닌 난간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아주 약간 비틀거리긴 했지만 결국 별일없이 일어설 수 있었다.
소년의 행동때문에 미묘하게 기분이 나빠져서 손을 거둔 시연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파보이는 어린애를 상대로 화낼만큼 막되먹진 않았기에 그것을 문제삼진 않았다.


"혼자 일어서는 걸 보니까 이젠 괜찮은 것 같고…… 혹시 너, 여기 살아?"
"503호에요."


503호라면 시연네의 바로 앞집이다.
앞집에 이런 녀석이 살고 있었던가, 가만히 생각해보던 시연은 그 집이 빈 집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고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거기에 누가 이사왔다는 소리는 못들어봤는데."
"아마 그럴 거예요. 밤에 조용히 이사왔으니까."


그 말을 들은 시연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야반도주를 해온 것도 아닐텐데 왜 하고 많은 시간 중에 밤에 이사를 온 것일까. 시연 자신이야 보통은 야근때문에 남아있으니까 상관없지만, 다른 이웃들에게는 밤중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것은 상당히 폐가 되는 일일 것이다.
시연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소년은 작은 미소를 띄우면서 말했다.


"보다시피 이런 몸이라서요.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밖을 돌아다니기 힘들어요."
"아……"


처음봤을 때부터 신경쓰였던 하얀 피부와 하얀 모발. 소년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역시 알비노?"
"네."


조심스럽게 나온 시연의 질문에, 소년은 별 거리낌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비노라는 것은 멜라닌 세포에서의 멜라닌 합성이 결핍되는 선천적인 유전 질환이다. 멜라닌 색소가 없기 때문에 자외선에 완전히 노출되버려 피부암에 걸릴 가능성이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높다. 거기에 눈도 햇빛에 포함된 자외선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시각장애자 취급을 받을 정도다. 해가 떠있을 때 밖으로 나오려면 선글라스와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 경우에 따라서는 피부를 전부 가리기 위해 한 여름에도 코트같은 옷을 꽉꽉 껴입기도 한다.
만약 자신이 그렇게 해야한다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한 시연은 얼마 못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안나오고 말지.'


확실히 그런 신체적인 문제점이 있다면 자신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소년은 몸 여기저기를 툭툭 털더니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고 있었다.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쓰러지면 혼자서는 일어나기 힘든 체질이라서, 아침까지 그대로 자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됐으면 확실히 곤란했겠네. 뭐, 신경쓰지마. 집에 가는 계단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던 것 뿐이니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소년에게,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는거지?"
"네. 혹시 지금 몇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시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대답해주었다.


"이제 9시 32분인데."
"…… 슬슬 돌아가야겠네요. 평소보다 오래 있었으니까, 가족들이 걱정할 것 같고."


그야 물론 걱정하겠지. 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소년의 가족이 어떤 사람들인진 알 수 없지만, 아픈 아들이 늦게까지 바깥을 돌아다니면 당연히 걱정할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시연 역시 동생이 사전통고없이 늦게 들어올 때는 안절부절 못하니까. 물론 그녀는 동생을 믿고 있고,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생각도 하고 있지만 가족으로서 걱정하는 마음은 그런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럼 올라가자. 데려다 줄테니까."
"혼자서 갈 수 있는걸요. 거기까지 폐를 끼치는 건 좀."
"신경쓰지 말라니까. 다 죽어가는 것처럼 창백한 녀석을 혼자 보내기 꺼려져서 그래. 게다가 너희 집 바로 앞이 우리 집이고, 어차피 가는 길이야."


시연의 말을 들은 소년은 두어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으실대로."


소년은 약간 쌀쌀맞은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고, 시연은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걷기 시작한지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시연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의 어두운 계단을 혼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꽤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희 집 말야. 밤에 이사를 온 것까진 그렇다쳐도 이웃한테 인사도 안 오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거리가 거리이니만큼 소년이 시연의 말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소년은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위로 올라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연이 대답을 듣길 포기했을 무렵 그제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에 그렇게 오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 무슨 소리야, 그건."
"집안 사정 이야기예요. 이사를 자주 다니거든요. 오랫동안 같이 있을 것도 아닌데 일부러 인사를 하러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시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야기 자체는 알아들었다. 시연도 부서가 옮겨지면서 자주 자취방을 옮겨야 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시연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말을 하는 소년의 태도였다. 미안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겸연쩍다거나 언짢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오늘의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담담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저렇게 말하고 있다.
이사를 자주 다니면 이런 성격이 되기도 하는건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시연은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너는 몇살인데?"
"열 여덞 입니다."


그녀의 동생과 동갑이다.


"그러면 학교같은 건 어떻게…… 못 다니겠구나."
"아침에 등교를 해야한다는 것만으로도 저한테는 독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리고…… 전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동물원의 원숭이.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은 아차하는 느낌이 들었다. 외국인과 한국인의 혼혈이라는 것만으로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 쉬운데, 하물며 이 나라에서는 희귀한 알비노라면…… 이런 말하긴 미안하지만 정말로 구경거리가 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과연 이 아이가 지금까지 어떤 대우를 받으면서 자라왔을까. 적어도 이 소년의 가족들은 그를 걱정해줄만큼 친절한 모양이지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사람들은 얼핏 보기엔 관용적으로 보여도 상당히 편견이 심하니까.
이 화제 괜히 꺼냈다. 그렇게 생각한 시연은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애를 쓰기 시작했다.


"아, 저, 그…… 그러니까 뭐랄까…… 지금까지 고생 많았겠네. 하, 하지만 말이지. 그런 건 신경 안쓰는 사람은 안쓰니까……"
"동물원 원숭이처럼 저한테 시선이 집중되는 건 사양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별로 신경안써요. 물론 당신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일부러 그렇게 신경써서 화제 수습하려고 애쓸 필요없어요."


어린 소년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시연의 필사적인 노력은, 시작도 채 해보기 전에 당사자인 소년 자신에 의해 박살났다. 결국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언짢은 기분으로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입을 다문채 생각해보자, 슬슬 부아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사정을 몰랐다고는 해도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화제를 꺼낸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사과하려고 했던 것 뿐인데 이렇게까지 말할 건 없지 않나. 시연은 속으로 계속 그렇게 투덜거렸다. 본래 그녀는 신중하다기보다는 행동파라는 말이 어울리는 성격이다. 만약 그녀의 동생이나 직장의 동료들이 지금까지의 대화를 봤다면, 이런 말을 듣고도 겉으로나마 얌전히 있는 시연을 보고 놀랐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마침내 두 사람은 5층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에도 결국 전기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제 곧 집으로 들어갈테니까 더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평소엔 전기가 나가도 제깍제깍 고치더니, 오늘은 왜 이래.'


소년으로 인해 평소보다 몇배는 기분이 나빠진 시연은 애꿏은 전기공사 사람들을 원망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며, 약간의 미소와 함께 소년에게 말했다.


"이제 다 올라왔네. 그러면 나는 이쪽이니까……"
"……"
"…… 저기 말야. 내가 아까부터 말을 잘못한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 얼굴 마주보고 살지도 모르는 이웃인데 그렇게 무시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


뭔가 이상한데.
시연이 그렇게 생각한 것과, 시연의 앞에 서있던 소년이 뒤로 쓰러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어, 어?!"


시연은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소년을 받아들었다. 거의 놓칠 뻔 했지만 어떻게든 받아내는데 성공한 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직후, 시연은 놀란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아야 했다.


넘어지는 걸 받아들려다가 붙잡아버린, 여자인 시연보다도 부드러운 손.
겉으로 봤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체중.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차가운 소년의 몸.
순간적이긴 했지만, 시연은 오싹함마저 느꼈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차거운거야?'


알비노라고 해서 체온까지 낮을리는 없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시연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보다도 이 소년을 다시 깨우는 것이 급했기에, 그 의문은 묻어두기로 했다.
곧바로 시연은 소년을 안아올린채 소년의 집 현관 앞까지 걸어갔고, 거기에 소년의 몸을 눕힌 후 그를 깨우기 시작했다. 시연이 작게 소년의 몸을 흔들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감겨져있던 소년의 눈이 열리고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일어났어?"
"…… 여긴?"
"너희 집 앞.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 집 앞이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올라왔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버렸는데 혹시 기억하고 있어?"


시연의 말에 소년의 고개가 아주 작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이윽고 소년은 시연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시연은 그것을 돕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소년은 그것을 거부하고 혼자 일어섰다.


"두번이나 신세를 졌네요. 감사합니다."


말과는 달리 소년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도와준 시연이 오히려 무안해져버릴 정도로.
하지만 일단 감사인사를 받긴 한 것이기에, 시연은 언짢은 얼굴으로나마 대답했다.


"아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니까 신경쓸 필요"


없다, 라는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소년이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괜찮으니까, 더이상 도와주실 필요없어요. 그럼 이만."


그 말만을 남긴 채 몸을 뒤로 돌린 소년은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쾅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황망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던 시연은 분노보다도 기가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 도대체 뭐야, 저 녀석."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알비노는 크게 3가지, 전신성, 국한성, 안성으로 분류된다. 전신성은 피부암의 위험과 시각에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 이외에도 안진, 이의발육장애, 사시, 난청, 정신박약등의 증상이 수반되는 경우도 있으며, 상염색체성 열성유전이 된다. 국한성은 피부, 머리털에서 부분적으로 알비노 현상이 나타나고 상염색체성 우성유전이 되는 피부형과, 눈에서 부분적으로 알비노 현상이 나타나며 X염색체성 열성유전(일부는 상염색체성 열성유전)이 되는 눈형이 있다. 안성은 피부, 모발에는 이상이 없고 눈의 색소 결손만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알비노의 대우는 결코 좋지 못했는데, 운이 좋아서 눈 색이 붉지 않을 경우에는 별의 아이라고 칭송받았지만 붉은 눈을 가졌다면 악마의 아이라고 멸시받고 마녀사냥을 당한 경우도 있다. 또한 운이 좋아서 살아남아도 햇빛에는 약하기 때문에 흡혈귀라고 멸시받은 사람도 있다. 혹자는 흡혈귀들의 이미지가 은발, 적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추측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알비노의 고기를 먹으면 에이즈가 낫는다"는 잘못된 미신이 퍼져서 많은 알비노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연이 읽고 있는 글들을 뒤에서 훔쳐본 그녀의 동료는 곧 질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느닷없이 의사가 되고 싶어지기라도 한거야? 왜 갑자기 이런 걸 찾아봐?"
"그냥 좀. 특별히 이유같은 것은 없어."


어제 만난 이웃집 소년을 생각하며, 시연은 익스플로러를 종료했다.
진짜 여성인 자신이 질투가 날만큼 예쁘고, 또한 놀랄만큼 가벼운데다 하얗던 소년.


외국에서도 알비노는 드물지만, 한국에서는 더더욱 희귀하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잘해봐야 '불쌍한 환자', 혹은 '장애인' 정도. 더더욱 유감스러운 일은, 이 나라는 그런 사람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외국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자라났으니 가족들은 둘째치고 주변에서 고운 눈길을 보내주진 않았을테고, 그렇다면 저 나이에 그 정도로 삐뚤어진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의 편견이라고 하는 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차갑고 냉정하니까.


'어제는 머리에 열이 올라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머리가 식자, 역시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그래도 불편한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정상인처럼 살기 힘든 아이일텐데,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을 했던 것이 화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와서 생각해보니 입맛이 씁쓸했다.


'나중에 시간내서 찾아가볼까. 바로 앞집이기도 하고.'


비록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적어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정도는 자신도 할 수 있다.
'오래 있을 것 같지 않다'라는 소년의 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사를 자주 다니는 집안인 것 같다. 어쩌면 아들에게 쏟아지는 편견의 시선이 원인일지도 모르고, 만약 그렇다면 편견없는 이웃이 하나 정도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이 부분은 순전히 시연의 추측이었지만, 그녀 본인에게는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녀가 지금 일하고 있는 부서가 부서다보니 '사람의 편견'과 자주 부딪히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시연은, 이미 '시간내서 찾아가볼까'가 아니라 '시간내서 찾아가봐야지'라고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아, 맞다. 시연 씨. 이 소식 들었어?"


동료인 같은 부서 소속 이수미. 평소에도 이런저런 잡다한 소식을 들고와서 과장에게 혼나는 그가 오늘 시연에게 내민 것은 오늘 아침 날짜로 찍혀있는 신문이었다.
그리고, 수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제목을 본 시연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수수께끼의 살인마, 그 끝은 도대체 어디인가>
'또 이거냐……'


어제 그런 일을 겪고 나서 간신히 잊고 있었건만. 시연은 한손으로 이마를 감싸쥔 채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그런 반응을 보지 못한 수미는 평소처럼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거 봐봐. 도대체 얼마나 미친 놈이길래 이런 짓을 하는건지 짐작이 가? 32명이 뭐야, 32명이. 난 말이지, 이런 건 저 미국이나 유럽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나라나 치안이 엄청 어지러운 동네에서나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구. 물론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같은 걸 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이만큼 그림자도 안잡히는 사건은 찾기 어렵지. 게다가 이 녀석은 사람을 난도질한 것도 모자라서 그걸──"


떠벌, 떠벌, 떠벌, 떠벌.
시연은 수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대꾸해주었다. 원래는 상당히 잘 나가는 집안의 장녀였는데 여러가지 우여곡절로 인해 집을 뛰쳐나와서 이런 곳까지 굴러들어온 것도 모자라 인생의 낙이라곤 수다밖에 없다고 본인 입으로 공언한 동료에게 제발 그 입 좀 닥치라고 할만큼 시연은 무신경하지 않았다. 물론 속으로야 50번도 더 소리치고 있지만서도.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수미의 말이 끝나간다 싶자, 시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요. 그거, 이 동네에서 일어난 일도 아닌데다가 생활질서과하곤 인연이 없는 일이잖아요? 그런 걸 처리하는 건 강력범죄 담당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라구요. 게다가…… 이런 짓을 하는 놈이면 진짜로 괴물같은 놈일텐데 나타나면 잡기라도 하게요?"
"…… 그래서 문제지. 솔직히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시연의 말을 듣고 기운이 빠졌는지, 수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겠군. 그렇게 안심했던 시연이지만, 수미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도, 나야 그런 거 못하지만 시연 씨는 할 수 있잖아."
"…… 뭐요?"
"나는 전에 다 봤지롱~ 회식 자리에서 시연 씨 엉덩이를 더듬으려던 술취한 남자 하나를 날려버리는 거."


예전부터 느꼈던 일이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사람이 기억도 하기 싫은 과거 일을 강제로 끄집어내 되새기게 만드는, 참으로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재주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 엄연히 정당방위였건만 시연은 그때 그 일 때문에 징계까지 받아야 했으니까.


"확실히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요. 치한 하나 퇴치하는 거랑 연쇄살인마를 잡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죠."
"어머? 그거 말고도 많잖아. 손자 병원비 때문에 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오던 할머니의 지갑을 낚아채간 오토바이 날치기를 따라잡아서 두들겨패고는 지갑을 돌려받은 일이라거나, 길거리에서 삥뜯던 불량배들 4명을 혼자 쓰러트린 일이라거나, 태권도 좀 한다고 거들먹거리던 그 느끼 경사를 공식 대련에서 완전히 짓밟아버린 이야기라거나."
"…… 그런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거예요?"


속으로 혀를 차며 물어보는 시연을 향해, 수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본인은 몰랐나보네. 시연 씨는 이미 유명인이라구. '귀신같은 철인여경찰'이라더라.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시연 씨한테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안해?"
"생각안해요. 그 이전에 그 별명 지은 인간 만나면 한대 먹여버릴거예요."


빠득빠득 소리가 들린만큼 이를 갈며, 시연은 그렇게 대답했다.
물론 지금 그녀가 느끼는 분노의 절반은 수미가 원인이었지만.


"그래, 그래.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난 시연 씨라면 이 연쇄살인마가 나타나도 때려잡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는건데, 난 시연 씨같은 사람이 왜 생활질서과에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니까. 아, 물론 이 일을 얕보는 건 아냐. 단지 시연 씨는 내근보다는 외근 체질로 보인다는거지."
"……"


시연은 수미의 말에 보일듯 말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시연 자신조차 자기가 이런 자리로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시연은 여기서 대화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동료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이야기해줄거야?"
"…… 예?"
"시연 씨가 왜 이런 곳에 있는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싶은건지. 시연이 고개를 들어올려 수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지난 1년 간 한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을 한 동료가 있었다. 순간적이지만, 이 여자 누구냐고 착각할 뻔했다.


"나는 시연 씨가 여기 왔을 때부터 같이 일한 사람이야. 그래서 시연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안다고 생각해. 일부러 안해도 되는 야근까지 자진해서 하고, 어떤 일을 해도 대충하는 걸 못봤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건성으로 한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주 세심하게 뒷정리까지 해놓는 것도 알고 있지. 게다가 일을 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 그 이외의 다른 걸 보면 시연 씨는 여기 사람들하고 많이 달라."
"……"


언제나 수다만 떨어대고 실속없는 웃음이나 흘리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은,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얼핏 듣기로, 여기 오기 전에는 수도권 형사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며? 사실이야?"
"…… 글쎄요."
"사실인가보네. 뭐, 별로 놀랄 것도 없어. 시연 씨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서서히, 서서히.
수미의 말은, 시연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내가 도저히 모르겠는건, 왜 시연 씨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느냐는 거야. 수도권 형사과에서 일하던 사람이 이런 시골 동네의 생활안전과로 전속됐다는 건, 이런 말하긴 미안한데 아무리 좋게 표현하려고 해도 좌천으로밖에 안보이거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1년 전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시연에게 있어서, 앞으로 평생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수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채 시연을 바라보았고, 시연도 무표정한 얼굴로 수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마주본 채 시간이 흘러가고.
결국 먼저 한숨을 토하며 손을 든 것은 수미 쪽이었다.


"아무래도 안 가르쳐줄 모양이네……"


당연한 일이다.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던 수미지만, 곧 원래의 방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오며 말했다.


"뭐, 상관없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곳에 오래 있지 말라는거야. 물들기 전에 냉큼 나가서, 시연 씨가 있어야될 곳으로 돌아가."
"…… 그렇게 말하는 수미 씨도, 이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시연의 말을 들은 수미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이래뵈도 나는 이 일이 꽤 좋거든. 애들하고 만나는 것도 즐겁고."


얼핏 들으면, 마치 시연을 이곳에서 내쫓으려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연은 수미의 말 속에서, 걱정이 담겨있는 그녀의 진심을 느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시연은 그녀의 말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한직으로 내려오게 된 이유.
그녀가 한없는 무기력감에 빠져있는 이유.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됐던 날로부터,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지금의 그녀는, 과거를 돌아볼 각오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위로 들어올려지고, 아래로 떨어진다.
오른쪽으로 날아가고, 왼쪽으로 쳐박힌다.
이유도 모른 채 여기저기로 날려가던 소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크, 쿠, 쿨럭……!"


입에서 피가 토해진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엉망으로 망가져있었다.
원래는 꽤나 예쁘장했을 법한 생김새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반쯤 부서진 광대뼈, 부어오르다못해 찢어져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이마, 반대 방향으로 꺾여져있는 왼팔, 쥐어뜯어진 머리카락.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본 종류의 고통.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픈데, 오히려 그 때문에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소녀의 앞에.
하나의 인영(人影)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지만, 주위에는 조명이 없는데다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에 대한 공포 뿐.
지금 이곳은 어두운 밤길이고, 지나가는 통행인도 없었다.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소녀는 전율과 함께 몸을 떨었다.


"히익……!!"


도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도대체 이 사람은 무엇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는걸까.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고, 이런 일을 당할만한 죄를 지은 기억도 없다.
그런데도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소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소녀는 '그런 이유'로 목숨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영은 소녀의 머리칼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 직후, 소녀는 무언가 굉장히 '차가운' 물건이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칼에 의해 절단된 목에서는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캬, 가아, 가아아아악……!!"


불과 수초.
소녀의 눈이 위로 돌아가버리고, 이윽고 절명해버리기까지는 그 정도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영은 생명을 잃어버린 소녀의 머리칼을 붙잡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질질 끌려가는 소녀의 몸에서는 당연히 피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인영은 전혀 개의치않는 듯 했다.
문득 인영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무슨 이유에선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고, 인영은 다시 소녀의 몸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좀더 '작업'을 하기 편한 곳으로 가기 위해서.








인영이 소녀를 끌고 가버려, 핏자국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골목.
그리고 이곳에, 새로운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카락도 피부도 온통 분으로 칠해진 것처럼 새하얀, 백색의 소년.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떠한 감정 표현도 없이.
핏자국이 이어진 저 어둠 속을 향해,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로부터 12시간 뒤.
경찰은 인근 주민으로부터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골목길에 뿌려진 대량의 혈액과 그 근처 공원의 나무에 '장식'되어진 소녀의 유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 작은 도시 전체를 공포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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