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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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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금속유령(金屬幽靈)
글쓴이: 달지않은고구마
작성일: 11-07-15 23:57 조회: 5,589 추천: 0 비추천: 0
Prologue -


서서히 무더워지는 대신 금속바람이 가시기 시작하는 6월. 덕분에 밤바람과 달빛을 쬘 수 있게 되었지만 내겐 그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마을 정문을 제외하면 외부와 통하는 유일무이한 길인 이 외나무다리에서 희누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예리한 검날이 붙은 거대한 스패너를 들고서. 아주 잠시 달빛이 비춰 보였다.
저 스패너는 정신 나간 물건이었다. 인간의 완력으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데다가 쓸데없이 흉악한 부속까지 달려 있는 몹쓸 물건이지만, 희누는 그것을 마치 젓가락이라도 들듯이 가볍게 한 손으로 쥐고 있었다.
“오빠, 이 밤중에 어디를 가는 거야?”
뽑아든 은빛 스패너에 비치는 것은 이 황무지에 어울리지 않는 꽃잎의 환상. 뽑아든 스패너의 이름은 화무십일홍. 뽑아든 사람은 어느덧 꽃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자란 나의 의붓 여동생. 그렇다면 뽑아든 이유는? 스쳐도 치명적일 예리한 질량이 장난처럼 나를 겨누고 있었다. 희누의 살기가 내 목덜미를 훑었다. 예전에 비하면 부쩍 성장했지만 아직은 얼마든지 더 기대해도 좋다고 호언하는 듯한 작은 체구. 그러나 품은 기세는 포악한 육식동물 같다. 맨 몸에 멜빵 청바지만 입고 있는 터라 보는 족족 드러나는 하얀 피부가 달빛을 받아서 더더욱 희게 보였다. 멜빵이 조금 흘러내린 덕분에 드러난 가슴에는 그다지 음영이 없었다. 내가 심장박동이 빨라진 이유는 결단코 여동생의 가슴 탓이 아니었다. 화무십일홍이 이미 누군가의 피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누구의 피일까. 아마 희누의 어마어마한 완력과 화무십일홍의 묵직함을 보면 일격에 살해당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내가 한참 고민하는 있는 와중에 희누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 밤이 늦었으니 집으로 돌아가자.”
일부러 피에 젖은 화무십일홍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보여주는 이유가 있겠지. 저건 협박이 틀림없었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희누가 이미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면 앞으로는 더욱 수월할 것이다. 대체 누구를 죽인 걸까? 짐작 가는 사람이 몇 사람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중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들 중 누구라도 해를 끼친 희누와는 두 번 다시 과거의 관계로 되돌아 갈 수 없으니까.
“안 돌아가. 지금부터 자신을 찾는 여행을 떠날 거거든.”
“여행?”
마른 침을 삼키면서도 시치미를 떼기 위해 노력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희누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나도 같이 가. 어딜 가든 내가 평생 오빠를 지켜줄게. 테디베어로.”
“아니,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데.”
이건 숫제 프로포즈로군. 두 남매가 이 밤중에 만나서 서로 시치미를 떼고 있다니 참 우스운 광경이 아닌가.
“괜찮다고?”
그 때, 일순간 바람 소리가 뚝 끊어졌다. 이어지는 희누의 목소리는 피가 흐르는 소리가 연상되었다. 그 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오빠…… 괜찮을 리가 없지?”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었다. 피가 묻어나지는 않았다. 베였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허나 이대로는 시간문제일 테지. 흉흉한 기척이 노골적으로 눈앞의 희누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괜찮을 리가 없지.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 혹시 농담이었어? 미안해. 웃어주지 못해서. 하지만 이럴 때에 농담이라니, 분위기 파악 좀 해줘? 너무 재미없었단 말이야.”
“난 농담이라고 안 했거든. 어디까지나 진담이……. 크윽.”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살기에 말을 끝맺을 틈도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쳤지만 희누가 한 발 다가온 덕분에 간격이 변하지 않았다. 이 간격은 위험한데……. 베인다.
“뭘 그리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구는 거야?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거라면 상관없지만.”
“자신이 이제 괴물이라는 자각은 있구나. 희누.”
“아이 참, 농담은 그만 하라니까. 난 이렇게 진지한데.”
“농담이라고 생각해?”
나는 희누의 눈을 바라보았고, 희누는 내 시선을 피했다. 잘 되었군. 마주보면서 이 말을 할 용기는 없었으니까. 나는 힘을 주어서 또박 또박 선언했다.
”지금의 넌 괴물이야.”
시선을 피하던 희누의 눈동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슨 기계음이 들리는 듯 했다. 끼긱, 끼긱.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던 희누의 시선이 마침내 나를 향했다. 붉은 눈동자. 괴물이라는 나의 선언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붉은 눈동자였다.
그 날 이후로 붉게 변해버렸다. 모든 것이 피로 물들어 버렸다.
나는 다시 되찾고 싶다. 아직 그 눈동자가 붉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아직 괴물이 아니던, 내가 사랑하던 소녀를 되찾기 위해서.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면 다소 지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아직 우리가 끝나버리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희누의 눈이 아직 붉지 않고, 희누의 화무십일홍에 아무런 피도 묻지 않았고, 괴물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진짜 희누가 아직 살아있던 당시의 이야기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야기 하면 좋을까.
우선은 이곳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이곳의 이름은 더블 웨스트. 여기야말로 대륙의 끝이요 인간의 끝이다. 아니 뭐, 인간은 이미 옛날에 끝(Post-apocalypse)나 있었지만, 그 끝 말고 다른 의미로 말이다.
더블 웨스트는 그야말로 끝자락. 서쪽의 서쪽에 있었다.
희누와 나는 그 곳에서 살고 있었다.


금속유령金屬幽靈 제 1권
-For sister‘s apocalypse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혹독한 서부에 이골이 난 더블웨스트의 사람도 그 환경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이제는 돌아갈 계절이 되었고, 주민들에게 있어서 이맘때에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설탕구름이라도 휘감은 듯 달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평소보다 이른 아침을 만끽하곤 했다. 하지만 나, 산시는 어느 계절이든 변함없이 이 시간에 눈을 뜬다.
잠이 덜 깨서 멍해진 머리로 자기소개를 하자면 나는 기껏 사다 준 멀쩡하고 큼지막한 럭셔리 곰 인형은 베개로 사용하고 곰 인형 대신에 나를 안고서 쿨쿨 자고 있는 이 계집애랑은 다르게 감수성이 넘치는 청년이다.
이름은 산시. 성은 없다. 뭐, 나만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내 어깨 언저리에 놓여있던 검은 머리카락 뭉치를 쓰다듬었다. 희누는 그런 내 손이 이불자락이라도 되는 양 끌어당기며 자신의 뺨 위에 얹어놓았다. 그 광경이 우스웠다.
마침 그런 희누의 코끝을 아침 햇살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근질근질해지는 풍경이었다. 여기에 덤으로 자기 전에 목욕한 반라의 소녀가 내는 향기까지 합쳐지니 실로 정신을 안온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몽롱해지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떤 이유로든 하루의 시작을 미루는 것은 나다운 일이 아니다. 나는 몸을 붙잡는 게으름을 쫒아내기 위해서 과감히 이불을 걷어 차버렸다.
"우 씨……."
나와 이불을 공유하던 희누는 순간적으로 사라진 온기를 더듬으며 나를 툭툭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이 정도 위력이면 맞고 살아도 괜찮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지금의 공격은 차라리 포상에 가까웠다. 아니 딱히 맞는 게 좋다는 의미는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힐끔 침대 옆으로 떨어진 이불을 확인했다. 나를 휘감고 있는, 신체 사이즈에 비해서 쓸데없이 비례가 긴 희누의 다리를 붙잡아 휙 넘겨버리면서, 흰 셔츠 끝자락에 가려진 희누의 엉덩이를 무릎을 이용해서 살살 밀어냈다. 마침내 희누는 데굴데굴 구르며 침대에서 떨어졌다.
-쿠웅!
나는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며 성취감을 느꼈다. 떨어지는 소리는 작았지만, 희누 입장에서는 자다가 얻어맞은 꼴이니 체감 타격은 나름대로 크지 않을까. 이불에 떨어진 희누는 한동안 풀썩거리며 버둥거리더니 갑작스럽게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저렇게 갑자기 일어나도 멀쩡하다니 정말 건강하구만. 빈혈 안 걸리려나 몰라. 아, 몸이 쬐끄매서 괜찮은 건가?
잠시 동태눈을 뜨고서 뻐끔거리던 희누를 구경하며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숫자가 정확히 0이 되었을 즈음 희누는 나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외쳤다.
"그거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또 했지!"
버럭 버럭. 아침부터 기운도 좋군.
"억울하면 나보다 일찍 일어나던가?"
"크으, 다음에는 내가 안쪽에서 잘 거야."
"뭐 그러던가. 안쪽에서 자면 직접 들어서 던지면 되니까."
“보통 그렇게까지 하냐! 두고 봐!”
희누는 흥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건강함을 뽐내다가 다시 이불 위로 쓰러졌다. 내 그럴 줄 알았지. 희누는 저래 뵈도 아침 시동이 늦게 걸리거든.
묶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흰 이불과 흰 셔츠 위로 퍼져나갔다. 연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조차 잠결에 파묻혀서 옹알거리는 느낌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희누가 입고 있는 셔츠를 붙잡았다.
"자자, 만세 하라고."
순식간에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희누는 뚱한 표정으로 팔을 위로 들어 올렸고, 나는 옷소매를 훌쩍 잡아당겼다. 이윽고 희누의 껍질이 훌렁 벗겨져서 알몸이 되었다. 뭐, 원래 이 껍질은 내 것이지만.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면 희누의 긴 머리카락이 걸렸겠지만 이미 먼 예전에 그 참사를 여러 번 경험해본 희누는 이미 풀어둔 후였다. 덕분에 나는 마음 놓고 희누를 벗길 수 있었다. 이미 상당히 긴 시간을 함께 살아오면서 생겨난 무언의 약조들은 그런 조율을 일부러 하지 않아도 서로를 딱딱 맞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희누는 잠을 잘 때는 언제나 내 새 셔츠를 꺼내어 걸치고 자기 때문에 난 그냥 훌쩍 벗겨서 입으면 된다.
나나 희누나 피차 직업이 직업인지라, 새 셔츠를 입고 나가봤자 작업을 벌이고 나면 시커먼 기름투성이가 된다. 일감이 없어도 취미로 찾아 해치우니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빨랫감은 매일 매일 쌓일 수밖에 없었고, 어차피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절약하자는 의도였다. 희누는 언제나 잠옷으로 새 셔츠를 입어서 좋고, 난 귀찮게 꺼내지 않아서 좋고,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겐 전반적으로 빨랫감이 줄어서 또 좋았다.
어쨌든 희누는 그나마 입고 있던 부실한 복장에서 셔츠마저 날아가 버린 탓에 팬티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녀석은 투덜투덜 거리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을 둘둘 말아서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나는 그런 희누를 구경하며 아직 미지근한 셔츠를 입고서 아랫자락을 바지 안으로 쓱쓱 밀어 넣었다. 그 다음, 희누가 다량 함유된 이불말이를 들어 올려서 다시 침대 위로 던져 넣었다. 희누는 침대의 매트리스를 괴롭히며 통통 구르며 상반신만으로 이불을 휘감았지만, 나는 희누가 이대로 다시 잠들지 않는다는 것을 희누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내버려두면 잠시 후 일어난다.
희고 검은 줄무늬가 이불에서 삐져나온 희누의 하반신을 휘감고 있었다. 나는 희누가 입고 있는 한 벌(?)뿐인 복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매일 그 삼각지를 이용해서 길운을 점치곤 했다.
“오늘은 소길(小吉)인가. 무난한 하루가 되겠군.”
색의 종류가 많고 주름이 적을수록 길하다…… 라고 정했지만, 애초에 진위나 근거는 전혀 없다. 내가 마음대로 정한 거니까.
동거하는 소녀의 누드라는 것은 섬세한 건강 청년에게 있어서 언제나 머릿속에 상처처럼 남아서 오랜 시간 번뇌를 부여하는 법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희누와 나는 친 남매는 아니다. 진짜 여동생이라면 아마도 이런 고민도 없겠지. 나도 한 때는 머릿속이 자연스럽게 무척 불건전하면서도 동거인인 희누의 신변과 나의 도덕성에 지극히 안 좋은 방향으로 한도 끝도 없이 흘러가려던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내 나이 열일곱, 아직도 충분히 질풍노도의 시기이지만 덕분에 나는 조금 일찍 어른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 내가 좀 더 건전무해한 어른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팬티점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걸 희누가 알았다간 오누이가 서로 짜고 치는 사기도박이 될 터이니 희누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나는 방 한 구석의 의자에 걸려있는 희누의 멜빵 청바지를 침대 위의 이불말이에게 집어 던져주고는 방을 나섰다. 안온한 향기와 온기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으니까. 여러 가지 의미로.


오늘도 평소와 똑같은 시작이었다. 이 조용한 마을에서는 매 하루하루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딱히 주말도 없고, 공휴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평일이 있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지. 어떻게 보면 매일이 휴일이고, 반대로 생각하면 매일 매일 평일이었다. 뭐 가능하면 좋게 생각하는 편이 낫지만. 일 할 때는 평일, 놀 때는 휴일로.
나는 세면장에서 적당히 눈곱을 떼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내가 령이네 아저씨도 아니고 아침 식사부터 열을 올리는 것도 허무한 짓이라고 생각 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희누와 내가 할 수 있는 직접 만들어 먹는 식사 역시 아침밥뿐이었다. 그 생각을 하면 의욕이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앞치마에 손이 간다. 이 앞치마는 희누와 내가 같이 쓰는 공용 앞치마다. 내가 쓰면 좀 볼품없고, 희누가 쓰면 좀 크다.
냉장고를 열어서 남은 재료를 확인 해보니(물론 정크샵의 것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내용물이 안전한 냉장고다), 충실하진 않아도 몇 끼 챙기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적당히 재료를 꺼내서 주방에 섰다. 당근과 양파를 썰어서 물에 넣어 삶고는, 그 사이에 밀가루를 반죽한다. 모양이 흩어지지 않을 정도로 삶아진 녀석들을 꺼내어 산미가 가미된 소스에 넣어두고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며 깨를 뿌리고 누른다. 적당히 깨가 섞였으면 칼로 죽죽 썰어다가 반죽을 물속에 밀어 넣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지만, 그 어렵지 않은 공을 받아먹고도 충분히 맛있는 식사가 되어줘서 고마운 음식이다. 그 사이에 희누가 나타났다.
“안녕.”
희누는 아직 충실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예의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는 언제나처럼 일방적으로 인사를 하고서 세면장으로 사라졌다. 대충 돌아올 즈음에는 시간이 딱 맞아 떨어지겠지.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데이터는 허투로 쌓인 것이 아니니까. 언제나 우리의 아침은 이런 패턴이었다. 물이 끓는 사이에 찬 물을 한잔 따라 마시고, 다시 한 컵을 담아다가 희누를 위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적당히 냄비가 부글거릴 무렵에 희누가 돌아와서 의자에 앉아서 냉수를 들이킨다. 우리의 일상은 이처럼 퍼즐 조각마냥 착착 맞아 떨어졌다.
퍼즐 하니까 말인데, 평소와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군. 돌이켜보면 뭔가 꿈자리가 사나웠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깨고 나면 순식간에 휘발되어버리고 말았다. 기억나는 것은 붉은 눈동자. 그리고 지독한 악몽이었다는 사실뿐.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인데.
나는 희누의 눈이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서 힐끔힐끔 쳐다봤다. 희누의 시선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향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잠시 후, 자신의 얼굴에 뭐라도 묻은 줄 알았는지 희누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세면장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희누의 눈동자는 검은 색이었다.
당연히 붉은 색이 아니었다. 묘한 안도감을 끝으로 나는 꿈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잠시 후 돌아온 희누가, 이번에는 거꾸로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용무는 끝났다. 내가 눈을 돌리며 하품을 하자 희누는 굉장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오빠, 왜 쳐다봤어?”
“무슨 소리야?”
“방금 계속 봤잖아. 얼굴에 뭐 묻은 줄 알았네.”
“그랬나? 잘 모르겠는데.”
“분명히 그랬다고…… 뭐, 오빠라면 봐도 상관없지만.”
시치미를 뗀 것이 잘 먹혔는지 희누는 투덜거리면서도 관심을 돌렸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희누가 다시 고개를 휙 돌려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오빠, 물 끓는데.”
“어라. 이크크.”
희누의 지적을 받은 나는 꿈 생각을 접고 잽싸게 움직였다. 이건 반성해야겠군. 직화가 아니라 전열로 플레이트를 달구는 형식인지라 넘쳐도 사고가 날 염려는 없지만, 잘못해서 음식이 눌어붙기라도 하면 청소가 귀찮아진다. 서둘러서 물을 조금 따라낸 뒤, 그대로 볶은 소스와 당근, 양파를 들이붓고 휘휘 저어서 나눠 담아내었더니 희누는 내게 찬사를 보냈다. 뭐, 얻어먹는 입장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수준의 인사지만 기분은 좋다.
“역시 잘 하네……. 하지만, 왜 매일 내가 당번인 날까지 아침식사 준비를 해버리는 건데? 솔직히 편하지만.”
“취미니까.”
나는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참았다.
“혹시 불만이 있다면, 그리고 아침부터 걷어차여 떨어지기 싫으면 얼른 일어나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란 말이야.”
“윽, 두고 봐.”
희누는 발끈하면서 자기 몫의 식사를 가져갔다. 근데 희누, 그 말은 아까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니. 과연 두고 보자는 놈 치고 무서운 놈 없다는 옛말이 딱 맞는구나. 옛말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언제 쯤 되는 말인지 나 자신도 잘은 모르지만 늘 감탄하곤 한다.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말이다. 아마 어디 책에서 읽었겠지.
나는 굳이 희누에게 말은 하지 않고, 속으로 번영했던 과거 인류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식탁의 내 자리에 앉았다.
서로 마주보고 앉은 우리는, 잠시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본 후 동시에 젓가락을 짚고서 잘 먹겠다고 말했다. 역시 맛있었다. 포인트는 면이나 보통 국물보다도 맛이 강한 당근과 양파다. 보통 면 요리는 면이 가장 포인트고, 국물이 다음이고 건더기는 우려먹은 느낌이 강한데 이 조리 방식대로 하면 오히려 그게 반대가 되어서 신선하다. 내가 만든 거지만 맛있구먼.
“으, 역시. 오빠 나한테 시집 와라. 령이한테 가지 말고.”
“아직 잠이 덜 깨었냐.”
훗, 아침에는 묘하게 다정해지는 희누의 생활 리듬 따위는 이미 완벽하게 꿰고 있다. 남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헛소리를 하는 희누에게, 젓가락을 내리쳐서 녀석이 집은 면을 떨구게 하는 것으로 응징해 주었다. 그러자 희누는 투덜거리며 국물을 들이키더니, 주방 한 구석에 뚫린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문인지라 잠가두고서 큰 창문 취급하는 문이었다. 거기엔 흔하게 볼 수 있는 파란 하늘이 있었다. 희누와 나는 그렇게 하늘을 잠시 함께 바라보았다.
“오늘도 날씨가 좋겠네. 언젠 안 좋았냐만 서도.”
“그래, 언제나랑 똑같겠지. 좋다는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기준이라. 굳이 말하자면 미학적인 기준이지. 하늘이 예쁘잖아?”
보다보면 질릴 만도 하지만, 더블 웨스트에서 볼만한 것이 있다면 사시사철 높고 푸른 하늘뿐이었다. 사물에 대한 미추는 개개인의 주관에 따라 달라도, 하늘에 대한 희누의 미학은 나와 공유할 만 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우리는 집을 나섰다. 하루가 시작되었다.


Chapter 1 -


과거의 붉은 향취가 코를 찌르는 서부. 한 때는 대박을 원한다면 서부로 가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도 어느덧 옛말이 되고 말았다. 한 때 트레져 헌터들의 고향이라 불리던 이곳도 시들해지고 있었다. 아직도 금속가루가 섞인 모래바람이 몰려다니건만.
헌팅붐은 예전에 끝나버렸다. 그런 서부의 가장 서쪽 끝에 더블 웨스트라는 마을이 있었다.
원래 더블 웨스트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그저 처음에는 오아시스가 있었을 뿐이었다. 서부는 기본적으로 사막 지대인지라 물이 귀했고, 덕분에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서부의 헌터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나름대로 한몫 벌어들인 헌터들이 동업자들을 위한 술집이나 상점들을 차리기도 했다. 전형적인 개척마을의 정경이었다.
그렇게 해서 더블 웨스트는 ‘옛 전쟁’의 흉터인 금속바람이 이리저리 배회하는 하는 지옥 같은 사막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마지노선이 되었다. 이 이상 서쪽으로 가도 금속바람만 심하게 불 뿐, 식수 공급조차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트레져 헌터들은 모두 이 더블 웨스트를 자신들의 보급기지로 삼았다. 나름의 꿈과 희망을 안고 출발하여 희비가 엇갈리는 결과물과 함께 돌아왔다. 재회한 그들은 서로의 꿈과 자신이 이번 원정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자랑한 후 함께 술자리를 벌였다. 숙취를 앓으면서 다시 더블 웨스트를 떠났다. 자랑했던 그 꿈을 이번에야 말로 손에 넣기 위해서. 그리고 개중 몇몇은 사막에 먹혀서 돌아오지 못했다.
무사 귀환한 이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결코 사라진 이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더블 웨스트를 떠난 것이다.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게 그들의 암묵적인 규정이었다. 그저 조용히 자리에 없는 이들을 위한 건배를 한 번씩 더 돌릴 뿐.
그래도 더블 웨스트에는 사람이 줄어들지 않았다. 각기 나름의 꿈을 가진 외지인들이 끝없이 몰려왔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헌터들이 새롭게 자신의 꿈을 풀어놓는다. 사라지는 이들보다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더블 웨스트는 번영했다.
서부의 트레져 헌터들에게 있어서 더블 웨스트의 불빛은 고향의 그것과도 같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귀환을 환영하는 동료들이 있고, 그들과 함께 취할 수 있는 술이 있었다. 몸을 쉴 수 있는 잠자리와 맛있는 식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꿈이 있었다. 더블 웨스트에는 뭐든지 있었다.

뭐, 그것도 이제는 옛날이야기이지만.

아직도 이곳에 찾아오는 이들은 한가한 전직 모험자들 뿐이었다. 그들도 미화된 추억의 현 모습에 좌절하며 마을을 떠나곤 했다. 그 시끌벅적한 모험자들의 낭만이 가득하던 더블 웨스트는 더 이상 없다.
몰려든 트레져 헌터들의 경쟁적인 활약으로 영원한 보물창고일 것 같았던 서부도 몇 십 년 만에 거덜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의 더블 웨스트는 과거의 빛나는 칭호들을 모두 잃어버리고서, 그저 퇴물들의 마을. 비어 버린 금광의 입구, 희망이 고사한 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도 그런 것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불명예스러운 칭호들은 대부분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술에 취해서 낄낄거리면서.
이 마을에는 퇴물들이 살고 있다. 자신의 청춘을 보물찾기에 전부 투자하고서, 한순간에 인생의 성공 여부를 결정 당해버린 왕년의 모험자들 말이다. 트레져 헌팅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었지만 그 이외의 삶을 모르는 이들.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하나. 삶이 끝장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퇴물들인데. 그들에게 죽음보다 조금 더 일찍 끝을 선고한다고 해도 어느 누가 불평을 하겠는가.
그런 노인들이 그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서 자주 발걸음을 옮기는 장소가 바로 더블 웨스트 정크샵이었다.
더블 웨스트 정크샵은 말이 정크샵이지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어지간한 물건들은 제각각 전문 매장에서 판매하는 도시와는 다르게, 싹 몰아서 전부 잡화점에서 판매하는 시골 특유의 풍물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곳은 그야말로 골렘에 관한 모든 서비스를 대충이나마 때려 맞출 수 있는 대단한 곳이었다. 물론 모든 시골에 이런 거창한 정크샵이 존재할 리는 없다. 잡화점과 비교할 수야 있나. 아마 이 세상에서 이런 곳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더블 웨스트뿐이리라. 물론 그렇다고 너무 호들갑을 떨기에는 상당히 궁상맞은 곳이었지만.
헌팅 붐이 한창이던 당시에 세워진 이 정크샵은, 발굴해내었지만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판단된 잔해들과 헌터들이 은퇴하면서 떠넘긴, 그들의 수발이었던 골렘들이 수북하게 쌓여서 썩지도 못한 채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정크샵의 주인은 그 역시 트레져 헌터였던 노인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더 이상 납땜질도 못 할 정도로 눈이 나빠지고 말았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정크샵을 물려주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그 아들은 정크샵을 물려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몹쓸 병에 걸려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가르쳐주었던 자식이 죽은 후 정크샵의 문을 닫아버렸다. 노인의 동료나 라이벌, 친구였던 이들은 자신들의 추억이 문을 닫아버렸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정크샵이 부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일등공신이 바로 이 몸이다.
“휴우, 부활한 건 좋지만 그런 주제에도 일감이 없는 건 역시 짜증스러워. 빌어먹을.”
또다시 무심코 기름때가 잔뜩 묻은 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어버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닌지라 이미 신경도 안 쓴다. 희누는 이 꼴을 볼 때마다 ‘오빠는 영감님들과는 다르게 뒷머리부터 대머리가 될 거야.’ 따위의 재수 없는 소리를 하지만, 오히려 난 머리카락이 좀 쓸데없이 많은 경향이 있었다.
“역시 오빠는 영감님들과는 다르게 뒷머리부터 대머리가 될 거야.”
“시끄럽구만. 감히 일등공신에게 대들다니 무례하다 이등공신.”
“이등공신?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바보 아냐?”
쥐알만한 주제에 불쾌함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막강한 한숨을 뿜어내며 맨 어깨를 으쓱하는 나의 의붓 여동생, 희누. 방금도 말했지만 이 녀석이야말로 이 정크샵을 부활시킨 가장 큰 이등 공신인데…… 뭔가 말이 이상한 것 같구먼. 나는 멋쩍음은 김에 여동생에게 욕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라는 녀석도 참으로 격조가 없다.
“또 벌거벗고 기계랑 놀아난 거냐. 정말 뭐랄까, 변태도 이런 변태가 없다니까.”
“짖고 싶다면 돌리지 말고 '멍멍'이라고 한 번 중얼거리면 충분하잖아? 뭐 그리 힘들게 사람 말로 떠들어?”
희누는 노동자의 상징과도 같은 푸짐한 멜빵 붙은 청바지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덤으로 커다란 스패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나 악담을 투덜투덜 떠든다. 이 꼬맹이는 내가 오빠 된 자격으로 아무리 태도를 고치라 거듭 떠들어도 그냥 개 짖는 소리 취급해버리곤 했다. 애가 나름대로 성실하고 돈 계산도 꼼꼼하고 일도 잘하는지라 아무리 봐도 까진 건 아닌 것 같은데 저놈의 얼굴 붉어질 복장은 도무지 고칠 생각을 안 했다. 본인 말로는 일하다 보면 더워져서 그렇다는데, 저 녀석의 에너지 확보 수단은 단순한 소화 작용으로 인한 생물학적 메커니즘 외에 다른 것이 끼어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된다.
아침에는 조금 더 다정한데 말이야.
"오빠, 뭔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지?"
째진 눈초리가 이쪽을 관통하지만, 이미 난 너덜너덜하게 익숙해졌는지라 저런 거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마주보며 당당하게 말 해주었다.
"당연하지."
말을 마친 나는 조금 후회하며 희누를 보았다. 손에 낀 육중한 장갑을 구동시키며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는 꼴이, 사단을 내도 대 여섯 번은 더 낼 조그마한 흉적의 태동을 알려왔다. 참고로 저 장갑은 죽은 영감의 유품인데, 그가 생전에 발굴 해 온 유물(Artifact)이었다. 원리는 짐작도 안 가지만 정신력을 이용해서 착용자에게 놀라운 완력을 선사했다. 그 덕분에 저 녀석은 저런 조그마한 몸으로 저런 커다란 스패너도 휘둘러서 사람을 살해할 수 있었다.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덤으로 저 살인 스패너의 이름은 화무십일홍. 희게 빛나는 은빛 동체 측면에 분홍 꽃잎 문양이 흐드러지게 붙어 있는 아름다운 흉기였다.
흉기 외에도 저 스패너에게 다른 용도가 있다면 아마도 메카닉 정비? 수리? 개조? 가끔 막강한 물리적 타격으로 인해 기계뿐만이 아니라 인체의 구조도 바꿔버리곤 했다. 대부분 그 강제 인체개조의 피해자는 내가 된다. 이 타이밍에서 나의 건강과 안녕을 위한 공작을 벌이지 않으면, 골육이 상잔하는 참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뭐, 녀석과 나는 친 혈육은 아니지만 말이다.
일단 이 몸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기로 했다. 나쁘게 말하면 꼬리를 내렸다고도 표현할 수도 있지만 좋게 좋게 가자고. 나는 시원하게 물방울이 맺힌, 냉각된 맥주를 한 캔 집어 던져주며 말했다.
"그러게 그 조그마한 몸으로 뭘 골램을 뜯어고친다고 날뛰는 거야? 무리를 하니까 힘들고, 땀나고, 열이 나는 것은 당연하잖아? 다른 평범한 사람도 아닌 튜너가, 그렇게 기본 스펙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 넘으려 들어서 쓰겠냐. 그러니까 무리는 그만두고 옷이나 좀 입어라."
희누는 날아드는 맥주를 두 손을 모아서 받았다. 애들 마시기에 좋은 건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정크샵에서는 일반적인 물을 냉각시킬 방법이 없었다. 골렘의 냉각기를 개조한 냉장고에 보통의 유리 물병 따위를 처넣어봤자 좋은 꼴은 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뭐 어차피 저 계집애는 척 봐도 보통 계집애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먹여본 적은 없지만, 이런 맥주는 많이만 있다면 하루 안에 서른 개는 집어 먹고도 트림 한 번 하고 멀쩡할 거다. 그런 주제에 불평하지 말라고.
"아, 나 맥주는 싫은데. 찬물 없어?"
"능력 있으면 알아서 구해 먹던가. 이 더블 웨스트에서 찬 음료수를 먹고 싶다면 선택의 폭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냐."
"옌장, 이 짜증나는 시골 깡촌."
그 시골 깡촌에서 자란 깡 처녀……. 아니, 깡 소녀. 여튼 그런 거시기한 무언가가 이렇게 거시기한 말투로, 거시기한 내용의 말을 떠드는 꼴을 보면, 누구라도 새삼스럽게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인류는 그 다른 무엇보다도 하루빨리 어서 체계적인 인성교육을 복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취소다. 희누 같은 녀석이 체계적인 교육씩이나 받고서 거창한 일을 저지르려고 작정하면, 그야말로 '옛 전쟁'이 다시 터져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무서운 생각은 그만 두자.
찬 맥주의 냉기를 목으로 넘기며, 미처 그만두지 못한 무서운 생각이 아직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괴로움에 떨 무렵이었다. 희누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싫어 엄마, 나 잡아먹혀요. 공포에 떨면서 뭘 보냐는 투로 아니꼽게 마주 바라보았더니 녀석은 빈약한 전신에서 유일무이하게 그럴싸한 부위인 얼굴 낯짝에 달린 주둥이로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귀엽지 않은 말을 내뿜었다.
"또 뭔가 밉살스러운 생각을……. 아니, 오빠라면 당연한 건가."
이런, 패턴을 읽혔군. 게다가 저 녀석은 언제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바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무언의 한숨으로 내뱉을 수 있는 신묘한 기술을 익힌 모양이다.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것이 이상하게 나에게 직접 하는 욕설보다 아팠다. 이런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뭔가 이 녀석에게 해줄 말은 없을까.
"이 건방진 녀석.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말로 안 좋은 생각을 했다면, 넌 거기서 날 마주보며 그런 건방진 말을 감히 중얼거릴 수도 없었겠지……. 큭큭큭."
"멍청이."
그 순간, 섬광이 일었다. 내가 바보였군.
난 잠시 저 녀석이 파워 글러브를 구동시킨 상태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휘둘러진 스패너-화무십일홍-는 내 손에 들린 캔 맥주의 윗부분을 썰어버렸다. 옆에 그려진 꽃잎문양이 한 순간 실제로 흐드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꽃잎이 아니라 맥주 캔 조각이었지만 말이다.
아니, 저게 무슨 칼 토막이라도 되는 줄 아나? 도대체 얼마나 세게 치면 스패너로 맥주 캔을 썰어버릴 수 있는 거지? 물리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로 어이가 없는 일인지 생각해보는 것조차 따분할 만행이다. 나는 몸을 떠는 척하면서 말했다.
"말 그대로 '미친놈에게 칼'이구만."
"이 경우는 '미친놈에겐 매가 약'이겠지. 약 좀 줄까?"
“사양할게.”
난 고개를 돌리고 찬 맥주를 들이켰다. 깔끔하게 잘려버린 캔 가장자리에 입술이 베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빙글빙글 귀엽게 웃으며 쓸데없이 최상급의 미소를 낭비하는 이 녀석과 함께 살아가고 있도록 만든 운명이라는 녀석이 있다면, 조금 때려주고 싶어졌다.
말이 오누이지 사실상은 피도 안 섞인 생판 남남이었다. 운명이라는 녀석이 없었다면,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만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릴 수 있을 확률은 없음에 가까우리라. 세상이 개판인 덕분에 빌어먹고 있던 나를 영감님이 주워왔을 때, 이미 이 녀석은 영감님에게 주워져서 호사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세상의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매 순간을 간신히 연명하던 나에 비하면 말이다.
하여간 그렇게 생판 남남일 두 사람이 오누이가 되어 버렸으니, 그야말로 역동적인 세상의 흐름이 느껴지는 장대한 사연이 아닌가? 아니라고? 운명이라는 놈도 참 웃기는 놈이다. 기껏 인연이 전혀 없을 우리를 만나게 해 놓고서 오누이로 만들다니, 이래서야 결혼을 못 하잖아!
아니 뭐, 당장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골이라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결혼 아니겠는가. 희누 이 녀석이 톡톡 튀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나쁘다 나쁘다 겉으로는 그리 표해도, 실상 속마음은 그 모든 게 너무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물론 죽어도 입 밖으로 말은 못 하지만. 나는 대신 다른 말을 하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의식해버릴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뭘 건드려서 그 꼴이야?"
덕지덕지 묻은 검은 기름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희고 깨끗한 피부를 새까만 가죽점퍼로 가리기 시작한 희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언제 봐도 아슬아슬한 복장이다. 일단 벗은 여자애를 준비한다. 알몸으로. 거기에 큼지막한 멜빵 청바지를 입힌다. 이상한 장갑을 끼운다. 낡은 운동화를 신긴다.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틀어 묶어준다. 거기에 낡은 가죽점퍼를 입히면 희누가 완성된다. 되나? 디테일이 좀 부족한 것 같으면 다시 알몸으로 벗겨서 기름을 끼얹으면 되려나. 성공적으로 상상을 했다면 박수라도 쳐보자. 아마 그 상상한 모습 보다는 희누가 좀 더 예쁘겠지만. 아, 그리고 아마도 좀 덜 성숙하겠지만. 어쨌든 민망한 복장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시는지.
뭐, 녀석이 평소에는 저렇게 야시시한 몰골이지만, 저 모습으로 당당하게 사람 앞에 나서지는 않는다. 저런 식으로 말투가 칼날처럼 각이 진 주제에 의외로 사람을 피하는데다가 일 할 때는 저 멜빵 청바지 하나만 달랑 걸치는지라…… 아 물론 글러브는 장비니까 패스하고, 신발도 기본적으로 넘어가자. 속옷은 위는 안 걸친 게 확실한데 아래는 안 벗겨봐서 모르겠다. 설마 노팬티로 돌아다니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 집에서는 분명 입고 있긴 했는데. 어쨌든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일하는 모습은 죽어도 안 보이려고 한다. 기쁘면서도 복잡한 것이, 역시 남자 취급은 안 받는다는 의미겠지. 제길.
희누는 점퍼를 입던 도중에 어깨 즈음에 묻은 검은 오일을 발견하고 물에 젖은 수건으로 쓱쓱 닦으며 답했다. 그래, 난 ‘오늘은 뭘 건드려서 그 꼴이야?’라고 물었었다.
"그냥, 테디베어를 강화할만한 파츠를 찾다가 그럭저럭 괜찮은 게 발견되어서."
”허어.”
테디베어, 그 살육의 마곰이 또다시 강화되는 건가. 테디베어란 희누가 취미 삼아서 이 썩어 넘치는 부품의 산을 야금야금 갉아서 정크 파츠들을 이용해 만들어낸 골렘이다. 이 계집애는 전생에 어디서 굴러먹던 녀석인지 궁금할 정도로 천재인지라, 이런 거지같은 환경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흉악한 흉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그 이름만큼은 깜찍하기 그지없는지라, 나는 녀석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 부조리한 작명 센스에 대한 야유를 퍼부었다.
"쯧쯧, 아주 이 정크샵의 정수를 빨아먹는 구나 그 곰탱이는."
"어차피 누구도 안 쓰고 썩어 없어질 거라면 나라도 써주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렇게 부품 빼 쓰는 거, 주인영감에게 허락은 맡았냐?"
"당연하지. 내가 누구랑 같은 줄 알아?"
별로 안 다를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영감도 이 녀석이 만들어 낸 것이 어떤 녀석인지 안다면 절대로 이런 허락은 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영감은 눈이 워낙 떡이 되어서리, 직접 눈앞에 뵈여줘도 모르겠지.
주인영감이 가지고 있던 기술은 상당했고 실제로 우리가 가진 기술의 상당부분은 주인영감에게 시사 받은 것이지만, 암만 그래도 튜너가 눈이 망가져서야 간판 내리는 수밖에 없다. 지금의 주인영감은 거의 장님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걸 허락하다니. 설마 주인영감, 우리가 잡동사니와 ‘졸업품’을 구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 거고…… 주인영감도 이제 힘이 빠졌구만. 난 인생의 허무를 느꼈다. 세월은 흐르고, 강한 것은 꺾인다. 먼 옛날, 아직 희누가 이 일을 배우기 시작하기 전의 추억을 조금 떠올려보았다. 그때 나는 ‘졸업품’을 분해하려다가 신나게 얻어맞았는데 말이지.
왕년에 잘 나가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전직 트레져 헌터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어떨까? 이곳은 지금이야 조용한 마을이 되었지만, 이곳은 한 때 꿈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자신의 운을 시험하고 운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메워낸 트레져 헌터들의 도시. 더블 웨스트다. 작게는 과거의 영광, 크게는 그 과거의 영광에서 찾아낸 새로운 지식으로 인류의 미래를 열기 위해 모험하던 진짜 모험가들의 도시였다. …아니, 도시라는 것은 정정. 깡촌이다. 별로 멋이 없어지는구먼.
어쨌든 그런 모험가들의 동반자라면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골렘이라 할 수 있다. 마나 제너레이터로 구동 되는 그들은, 먼 과거에는 전쟁을 위한 파괴병기였지만 지금은 새 시대를 열어가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인류의 멋진 친구였다.
그래, 멋지긴 참 멋지다. 그렇지만 그렇게 귀한 친구는 아니었다. 여기 이 정크샵에도 그 인류의 친구님들의 잔해 찌꺼기들이 오라지게 널부라져 깔려있지. 여기저기 시체마냥 까마득하게 쌓여 있다. 여기만 보더라도 정말로 이 서부가 헌터들의 보물창고였다는 것을 사무치게 느낄 수 있다. 헌터들은 자신들이 가다 주운 어지간한 기계 파츠는 죄다 여기다 처 버렸다고 한다. 만약 그 파츠 중에서 유용한 것이 있었다면 이곳의 주인장이 알아서 뽑아 다시 넘겨준 듯하고.
헌터들과 이 정크샵은 거 뭐라고 할까. 신용관계라고나 할까. 이 마을 자체가 그들의 낭만으로 세워진 곳인 만큼 그들 간의 유대는 장사꾼과 손님 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곳 영감이 신용이 있고, 소신껏 좋은 파츠를 뽑아준다고 해도, 영감은 한 명이고 무수한 헌터들이 쏟아 붓고 가는 기체들은 그야말로 아찔하게 많았으니… 그 결과가 이 엄청난 스케일의 골렘 무덤이다. 그 덕분에 아직도 열심히 찾으면 어이없을 정도로 훌륭한 부품이 툭툭 나와 준다. 완전 깡촌이 된 더블 웨스트의 정크샵이 그런 보물 창고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겠지.
이 정크샵이 얼마나 어이없는 곳이냐 하면…… 필요 없다는데도 자신이 몰던 골램을 대충 여기다 떠넘기고 째 버리는 것이 서부 토박이 헌터식 은퇴 행사였다고 한다. 졸업식이라며 그렇게 경력을 끝낸 헌터는 그들 나름대로 상당한 영예를 얻었고, 한편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변변찮은 피라미들의 기체는 받아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런 녀석들은 정히 기체를 받아주지 않으면 아예 억지로 헐값에 넘겨버렸다나 뭐라나. 세상에, 돈을 받지 않고 공짜로 자신과 함께하던 애기를 떠넘기는 것이 영광이고 그걸 못 하면 떨이로라도 처 넘기다니! 마음으로는 이해해도 머리로는 이해 못 할 일이다.
좌우지간 그런 헌터들이 싹 빠져나간 지금, 헌터들의 졸업 장소이자 그들의 동료이자 전우였던 골렘들의 무덤인 이곳이 얼마나 혼잡스럽고도 아찔하게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겠지? 어쨌든 슬슬 서부 붐이 시들해질 무렵, 주인영감이 늙어서 그의 아들이 혼자 이곳을 떠맡게 되었는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주인영감이야, 이 영감이 기억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아서 발굴품과 졸업품을 머리로 꿰고 있었다.(실제로 정크샵 관리를 배울 때, 이건 누구의 무슨 골렘이고 저건 누가 언제 가지고 온 거라는 둥, 들어도 절대 기억하지 못할 이야기를 잔뜩 들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지식은 다른 이에게 전달해 주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고 막연했다.
외워 볼 시도도 안 하고 포기해버린 나와는 다르게, 이미 죽은 주인아저씨(주인영감 말고, 아저씨. 주인영감 아들.)는 기를 쓰고 외우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다. 곧 병이 나서 죽어버렸으니까. 덕분에 우리 오누이가 이 정크샵에서 일을 하게 되기 전 까지는, 딱하게도 자식을 잃은 노인장이 또다시 현장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 현재로 이어진다. 주인영감은 이제 많이 늙어서 당장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다. 주인영감뿐만이 아니라, 이 정크샵도 죽어가고 있었다. 사실 더블 웨스트 전체가 그랬다. 한 십 년 전 정도까지만 해도 은퇴했던 헌터들이 자신의 애기와 함께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어슬렁거렸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어쨌든, 그 노인네도 갈 때가 다 되었나. 주인영감은 모두의 추억이 여린 이곳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싶어 했지만…… 희누에게 당당하게 떨어진 허가를 보니, 노인장도 슬슬 옛 추억이 덧없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슬프구만.
“오빠?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뭘 그리 뚫어져라 보는 거야.”
희누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생각 내내 희누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방금 같은 우울한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떠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자니 희누는 자신의 얼굴을 글러브로 문질렀다. 저 파워 글러브도 주인을 조금 더 잘 만났으면 유물 대접 고스란히 다 받으며 편하게 지냈을 텐데,
어쨌든 이 정크샵의 현재 관리자는 나다. 주인영감이 우리 영감님과 친분이 있었던 터라(착각할 까봐 말 해두는데, 정크샵 주인 영감과 희누와 나를 거두어 키워준 영감은 서로 다른 사람이다. 잊지 말라고.) 아직 주인영감 눈이 멀쩡하던 당시에 이것저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결국 지금처럼 되고 말았다. 이게 내 본래 의도는 아니었다.
내 꿈은 한 때, 죽은 우리 영감님처럼 트레져 헌터가 되는 것이었다. 헌터라면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골렘 아니겠는가. 골렘을 뜯어고치는 법을 배우면 언젠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정말로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그 결과가 이거지만.
아, 망했다 망했어. 우리 영감님이 죽고, 이곳의 주인영감도 눈이 거의 완전히 가버리고, 겸사겸사 아들인 아저씨까지 죽어버린 덕분에 명목상 아르바이트생이자 실질적인 관리자로서 발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우중충하구먼. 사실 희누도 거의 내가 가르쳐준 거다. 이제 몇몇 부분은 청출어람 당하긴 했지만.
-꾸우욱
그 때, 갑자기 이마를 으깨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잠시 멍해 있는 사이에, 하필이면 자기 생각을 할 때 희누가 남의 이마를 스패너 끝으로 찍어온 것이다.
“크억, 아파.”
나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물러섰다. 저 녀석은 내가 자기 친구들(골렘)과 맞먹는 내구력을 지녔다고 착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망할 것.
“오빠, 사람 앞에 두고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계속 말도 없이 쳐다보면 기분 나쁜데.”
“난 아픈데!”
격통이 스며드는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에게 고작 하는 말이 저거라니. 아아 정말, 뉘 집 자식인지는 몰라도 정말 남에게 신경 쓸 줄 모르는 계집애구나. 하지만 희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정말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뭐, 말 안 해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변변치 않은 생각이겠지? 오빠니까.”
“난 충분히 변변하거든! 넘겨짚지 말라고!”
“으엑, 변변하다니, 왠지 더러울 것 같아.”
“실례로다! 무례하구먼!”
“그것도. 우웩.”
“이 실례가 그 실례가 아니잖아! 지금 변변치 않은 건 어딜 봐도 네 머리 쪽이야!”
화를 내봤지만 일말도 동요하지 않은 희누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저놈의 한숨은 비쥬얼 적으로 상당히 사람 심리를 헤집어놓는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리를 찌른 스패너는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이쪽이 한 걸음 물러서야만 했다. 난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에휴. 이 계집애가 요리사가 안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랬다면 식칼에 찔렸을 거 아냐?”
“그런가?”
갑작스럽게 고도를 올리는 녀석의 스패너-화무십일홍-를 피해서 그 사정거리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저딴 것이 파워 글러브를 착용한 저 계집애에게 쥐어졌으니 확실히 식칼보다도 흉악하군. 어쩌면 요리사가 되어서 식칼을 휘두르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저 글러브 말인데, 지금은 그야말로 미친놈에게 칼을 쥐여 준 꼴이지만, 그 당시의 희누가 영감님에게 저것을 받은 데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의 저 흉악한 꼴을 봐서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테지만 예전의 희누는 상당히 몸이 약했다.
나는 아직도 희누가 저 글러브를 선물 받고서 혼자 스튜가 가득 담긴 냄비를 들고 오면서 웃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그 웃음이 사신의 미소가 되고, 그 냄비는 은빛 둔기가 되고 말았으니, 시간의 흐름은 이토록 잔인하다.
“지금의 너에게는 암만 영감님도 그 장갑을 안 넘겼을 테지. 그런 위험한 물건은 어린애의 손이 안 닿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고. 좀 더 분별 있는 사람이 써야 해.”
“하, 열여섯 살이 어린애냐?”
희누는 여김 없이 스패너를 휘둘러 왔지만, 예상했던 내가 미리 한 걸음 물러서 둔 덕분에 풀스윙이 헛스윙으로 되어버렸다. 어정쩡하게 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던 희누가 미묘하게 균형을 상실한 희누가 이쪽으로 넘어졌고, 나는 황급히 뛰쳐나가서 붙잡았다. 그 덕분에 희누의 어딘지 허전한 복장의 가장 큰 문제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훌러덩.
알몸에 멜빵 청바지만 입고 있자니 당연한 일이지만, 가슴의 그…… 뭣이냐. 확실히 여자 나이 열여섯이면 슬슬 어린애가 아니긴 하네. 키는 덜 자랐지만. 허허. 저런데도 신경을 안 쓰는 건 역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모처럼이니 타일러보자.
“저기, 역시 그 복장으로 있는 건 그만두는 편이 좋겠다..”
“왜?”
희누는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앵글과 자세와 기타 경치에 비해서 빌어먹게 순진무구한 얼굴이었다. 기가 막혀서 급살 맞을 지경이구먼. 아무래도 눈먼 어린아이에게 ‘이건 물이라고 한단다.’라고 설명 해주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말을 해줘야겠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건 가슴이라고…… 가 아니지.”
“가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늦게 옷을 정리하는 희누를 마주보며, 스스로 해야 할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음음, 준비 완료.
“조금만 뭐하면 가슴이 훤히 보이잖아. 그건 좋지 않아. 여동생이여.”
“어차피 작으니까 상관없잖아. 남자나 나나. 별 차이 있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차이는 생기고 있습니다. 실시간으로. 성장기니까!
“너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다 큰 처녀가 가슴을 심심하면 드러내면 안 되지, 네가 무슨 작부야?”
“하, 그럼 애 취급을 말던가. 이럴 때만? 정말 지 편한 대로만 떠드네. 나처럼 공업용 기름투성이에 작업복 입고 스패너 든 작부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
저 녀석, 희누는 일부러 빤히 바라보면서 이쪽이 보기 편하도록 각도를 적절하게 조절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벽과 주머니의 중간선상에 위치한 흰 가슴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끝의 핑크 포인트도. 물론 x2다.
당연히 볼 수 있는 아침과는 다르기 때문인가? 어째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하지만 눈을 돌려선 안 된다. 이런 일에 일일이 눈을 돌려서야, 지금껏 살아온 우리 삶의 여러 스타일이 무너지고 말 테니까. 어디까지나 나는 오빠로서 희누를 대해야 한다. 오빠로서 타일러야 한다. 나는 가급적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태연함을 연기하며 말했다.
“그게…… 대도시에 가면 있을지도 모르지. 토끼 복장을 한 술집 여급도 있다 하잖아.”
“그거야 엄청 야한 토끼 복장이지. 이게 야해?”
속옷도 안 입고서 작업용 멜빵 청바지 하나만 달랑 입고 있는 꼴이 그럼 안 야하겠냐? 내가 큰맘 먹고서 그 어깨에 걸린 멜빵이라도 끌어내리면 넌 순식간에 상의 누드 확정이라고! 내킨 김에 좀 더 끌어내리면 팬티 한 장 빼놓고 전부 훌러덩 벗겨질 거다! 라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참았다. 덕분에 할 말을 뿌리까지 뽑혀버린 나는, 애꿎은 깡통에 화풀이를 했다. 우지직 우지직.
내가 화풀이로 깡통을 으깨자 잠시 이쪽을 바라보던 희누도 나를 흉내 내서 자신의 캔을 으깨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표정은 싱글벙글이었다. 판판히 으깨는 나와는 다르게, 희누는 파워 글러브의 괴력으로 조그마한 금속 완자를 만들어버렸다. 이번에는 내 쪽이 역으로 희누가 만들어낸 금속 완자를 흉내 내기 위해서 힘겨운 노력을 시도해야 했다. 별 소용은 없었지만.
"쳇. 이것도 해 줘."
나는 내 깡통도 희누에게 건넸고, 희누는 별 어려움 없이 그 깡통 역시 완자로 만들어 버렸다.
"대단하군."
"뭘, 새삼스럽게."
“아니, 네가 대단한 게 아니라 그 장갑이 대단하다는 건데.”
“나도 오빠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조금의 자랑도 아니라는 듯이, 두 개의 금속 완자를 굴리는 희누의 표정은 실로 담담했다. 과거의 문명은 정말 대단하다. 인간의 정신력을 물리력으로 바꾸는 도구라니, 지금의 우리가 저 글러브를 재현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예전에는 마나 제너레이터의 구동 근간인 마나를 응용한 부품이라던가, 그 마나를 이용해 증식, 활성화되는 생체 부품 등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지금 이 세상에 그런 녀석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체 부품은 관리 없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썩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마나 부품 역시 끝장이 난다. 남은 기계적 부품만으로는 마나를 컨트롤할 수가 없기에. 과거의 문명에 비하면 지금 인류의 문명은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걸음마 수준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재현하는 자들이 바로 튜너들이다. 희누와 나는 일단 그거인 셈인데…… 그렇다고 저런 글러브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전문 분야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골렘이지.
전쟁 병기였던 골렘은, 마지막 전쟁의 치열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이 널려 있었다. (이 정크샵은 좀 그게 심각하긴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쉽게 골렘을 찾아볼 수 있었다. 누구라도 조금만 노력이면 어지간한 골렘을 장만할 수 있다. 뻥 좀 섞어서 땅만 파면 나올 정도였다. 이 땅에서 ‘옛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던 곳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우리 시대의 골렘은 그저 좋은 부품으로 도배를 한다고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부품을 써도 군살 없이 철저하게 튜닝 된 기체에는 이길 수 없었다. 지금 움직이는 모든 골렘은 이전의 마법 공학과 생체 공학의 잔재를 거의 잃어버리고 기계 공학만 남아버린, 바퀴 두 개가 펑크가 난 3륜차와 같은 것이니까. 그러니 처음부터 벨런스가 잡히지 않는 것이 당연한 거다. 잡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두 다리로 걷던 인간이 당장 다리 하나만 날아가도 걸어갈 수 없게 되는데, 세 다리로 걷던 녀석이 한 다리로 걷게 되었으니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서 튜너는 이 시대에서 가장 예술적인 직업이었다. 세 다리로 걷다가 두 다리가 날아간 녀석을, 그 한 다리만으로도 걷고 뛰고 날 수 있도록 만드는 일. 굉장하지 않은가? 애초부터 트레져 헌터가 되기 위해서 배우기 시작한 일이지만, 튜너라는 직업은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매력적이었다. 문화라는 것을 거의 상실한 이 시대에서 새롭게 피어난 예술이 있다면, 튜너야 말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튜너의 예술을 이해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져만 갔다. 튜닝과 조립, 수리가 아닌 설계 단계부터 모든 공정을 홀로 이뤄내는 '제작'에 대한 욕망이 커지고 있었다. 짜 맞추는 것도 예술적이긴 하지만, 점점 더 처음부터 만들어내고 싶어졌다. 튜너로서 이보다 더 큰 욕망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튜너라는 직업에 빠져들수록, 나는 다시는 트레져 헌터가 되겠다는 꿈을 꿀 수 없게 됨을 느낀다. 희누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음?
나는 문뜩 떠오른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잠깐 있어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 어째서 내가 트레져 헌터가 되겠다는 꿈을 안 꾸면 희누가 화를 낸다는 거지? 전혀 이해를 못 하겠는데. 나는 자신이 한 생각의 원인조차 모를 정도로 바보였단 말인가?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고작 두 개의 금속 완자로 허무한 저글링을 시도하는 희누에게 질문을 던졌다.
"희누, 잠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음, 그게. 내가 트레져 헌터가 되지 않겠다고 하면 네가 화가 나나?"
금속 완자 두 개가 마침 희누의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각 떨어졌다. 딱히 툭툭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왠지 들린 기분이 들었다.
뭐야……. 이 분위기는 뭐야.
갑자기 조용해진 정적이 아프게만 느껴졌다. 희누는 잠시 손의 금속 완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째 뭔가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상당히 심상치 않게 되어버렸군.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한참 전전긍긍하고 있자니, 마침내 희누가 입을 열었다.
"안 될 거야? 트레져 헌터."
"아니, 그러니까…… 왜 네가 화를 내는데?"
"응? 나 전혀 화 안 났는데. 하려던 말이나 계속 하시지?"
표정, 몸짓, 태도. 어느 것 하나를 봐도 거짓말이 분명했다. 희누의 분위기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변화하였기에 나는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어, 음, 미안.”
"왜 사과하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다.”
“그게 사과하는 태도야? 이 바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요. 나는 추가적인 추궁을 각오했지만 희누는 조용히 옆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희누는 무척 퉁명스럽고 여전히 공격적이기는 해도, 어딘지 그 속은 이전의 아프던 당시의 그녀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진한 후회를 느꼈다.
노닥노닥 거리던 분위기가 갑자기 식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문뜩 이 자리에 있기 무척이나 곤란해져서, 슬며시 다시 내게 향하는 희누의 시선을 피해서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희누 역시 책상 앞 의자에 걸어두었던 낡은 점퍼를 집어 들고는 말없이 나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이래서야 도망을 나온 보람이 전혀 없다.
으, 역시 내가 뭔가 실수했나? 아니, 분명히 했겠지. 한 것 같다. 뭔지는 몰라도. 오금이 저리는 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로 무신경한 태도를 연기하며 몸 풀기 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희누도 역시 흉내 내기 시작한다.
하나 둘, 하나 둘.
몸을 움직이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한 번 굳어버린 마음은 쉽게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용하게 우리는 골렘들의 잔해가 엄청나게 널린 사방을 보면서 목운동을 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경으로 잠시 동안 희누가 보이고, 이내 다시 골렘으로 가득 찼다. 다시 잠깐 희누, 그리고, 골렘. 희누, 골렘. 희누. 골렘. 희누. 희누. 희누. 희누가 날 부르고 있었다.
"……빠. 오빠?"
나는 그대로 허리를 비틀어 어깨를 내리며 희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침 희누는 다리를 쭉쭉 찢으며 무릎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얼굴을 서로 볼 수가 없었다.
"오빠, 내 말 듣고 있어?"
"응. 왜?"
몸 풀기도 따분해졌는지, 희누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뒷걸음 처서 관리실 앞의 나무 턱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내겐 희누의 얼굴이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들린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오빠는 오빠 골렘 언제 만들 거야?”
“엥? 뭐 주문이 오면 만들겠지.”
“아니, 오빠의 골렘 말이야.
“내 골렘?”
“응. 튜너건 트레져 헌터건, 골렘은 필요하잖아? 적어도, 타고 다니지는 않더라도 이게 내 실력이라며 자랑할 만한 간판은 있어야지."
무의식적으로 희누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무실 바로 옆의 공터에 희누가 만든 골렘, 테디베어가 서 있었다.
강렬한 붉은색과 주황색 도장. 저 기체가 완성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완성 후 마지막 도색작업은 나 자신도 도와주었었는데, 그때 손에 묻은 도색용 도료가 아직도 작업복 한 구석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굵지만 둔한 느낌은 없는 조형. 얼핏 봐서는 외장갑에 가려져서 각부가 어떻게 나뉘고 어떻게 변하는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는 저 테디베어가 얼마나 정교하게 짜 맞춰진 골렘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도색을 제외하면, 그 외에는 모두 희누 혼자서 만들었고, 나는 그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저 녀석이 얼마나 강력한 녀석인지 희누 다음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육중하기 이전에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 균형은 탑승자가 탑승했을 때에 최적화된다. 평소에는 미묘하게 앞쪽으로 균형이 쏠려있기 때문에 세워둘 때는 어쩔 수 없이 상체를 뒤쪽으로 하게 되는데,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상당히 거만하게 보였다. 부품은 넘쳐도, 탄약 등의 소모품은 부족한 우리 정크샵에서 만들어진 녀석답게 운용 효율이 좋은 격투중심의 기체였다. 그 스타일이 파워 글러브를 착용하고 다니는 희누와 무척 잘 어울린다. 한편으로, 그러면서도 관제 장비에 여유가 무척 많아서, 장비들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룰 수 있었다.
어딘지 둔하게 보이는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저 뒤의 백팩 부분은 전쟁 당시에 비행용 골렘 부스터를 개조한 녀석인지라, 전력으로 돌격하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속도가 나온다. 실험 운행을 구경했을 때, 후부의 장갑부가 변형되어 푸른 섬광을 뿜어내며 급 가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던 기억이 있다. 희누와 나는 서로의 미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다. 아직 무장은 전혀 없지만, 저 견고하면서도 강력한 돌진력을 지닌 골렘은 단순한 격투만으로도 무서운 위력을 낼 것이다. 풍족하면서도 열악한 환경에서 저런 괴물을 만들어 낸 희누는 분명 천재였다. 그게 내 여동생이었다.
“쿡, 후후후.”
희누의 비웃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희누를 돌아보니 녀석은 내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마주 바라보았다.
"오빠, 설마 저 테디베어에 주눅이 들어서 만들기를 포기한 거야? 그거라면 이해가 가는데. 이 희누님의 천재성에 주눅이 들어버렸어?"
나는 희누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지금까지 테디베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웃음과 함께 대답이 튀어나갔다.
"하, 재밌냐 꼬맹아?"
허세인지 진심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희누의 말을 인정해버릴 생각이 없었다. 나는 몸을 쭉 펴고 일어나서 아직 쪼그리고 앉아있는 희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희누는 앉은 채로 물러서며 내 손을 피하며 말했다.
"전혀 재미없거든? 더군다나 오빠, 아까는 내 가슴 보고 눈을 피한 주제에 또 꼬맹이라고 부르네?"
"꼬맹이가 꼬맹이인건 변함이 없어. 삼류 조종사가 일류 기체를 탄다고 일류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
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속으로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다. 아, 아, 아, 아! 실수했다. 이 녀석이라면 분명히 내 말실수를 알아차리고 거칠게 후벼올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희누는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일어나서 말했다.
"아항, 난 이제 일류 기체구나. 오빠 나 예뻐? 귀여워?”
"속은 삼류 싸구려 조종사야. 시끄러워."
"안 들립니다. 칭찬해줘서 고마워 오빠."
일부러 이쪽을 놀리기 위해서 고개까지 꾸벅 숙여 보이는 희누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면서 기묘한 예지를 느꼈다. 뭔가 부딪혀 올 것을 지나쳐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지나쳐버린 것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같이 마주보고 웃기로 했다.
"이로운 것만 듣는 귀냐. 정말 주인을 닮아 비겁한 귀로구만."
"안 들려요. 방금 무슨 말 했어?"
"어이구, 파워 글러브로는 부족해서 파워 보청기도 필요하냐?"
"그런 거 착용했다간 시끄럽게 구는 누군가가 더 시끄러워질 테니까 필요 없어."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웃고 떠들었다. 난 이 순간의 평온이 사랑스러웠다. 트레져 헌터의 꿈 따위, 평온한 지금에 비하면 덧없기 짝이 없는 소년의 몽상이다.
하지만, 희누는 왜 내가 트레져 헌터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던 것일까. 난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아니, 잊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6시가 되었다. 시계 정도는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그래도 이 정크샵에 있는 이 시계는 유물이었다. 트레져 헌터들의 고향과 같은 곳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나는 저 시계를 볼 때마다 그 모습의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곤 했다.
물론 서부의 서부라 불리는 더블 웨스트인 만큼,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벌써부터 어두워질 리는 없었다. 이 주변은 거의 황야이기도 하고. 하지만 희누와 나는 언제나 이 시간에 꼬박꼬박 퇴근하곤 했다.
오늘도 여전히 손님은 커녕 도둑놈도 들어오지 않은 정크샵이지만 퇴근에는 나름의 절차가 있다. 희누는 스패너를 등 부분의 벨트에 비스듬히 찔러 넣고는, 낡은 점퍼를 대충 걸치고 주머니에 두 손을 꽂은 채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잊은 것이 없는지 점검을 하고서 냉장고의 스위치를 껐다. 점점 잦아드는 엔진소리와 함께 안에서 팝콘이 터지는 듯이 투둑투둑 흔들리던 맥주의 캔들도 조용히 침묵했다. 이것으로 오늘의 일과는 끝이 났다.
밖으로 나오니 희누가 벌써 저편에서 손짓을 하고 있었다. 희누와 나는 언제나 이 시간엔, 퇴근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정크샵을 한 바퀴 함께 돌아보곤 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걸 하라고 시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미 일상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떠올려 봐도 언젠가부터 라는 답 말고는 꺼낼 수가 없는 그런 습관 말이다. 나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정하고, 조용히 함께 걷는 지금의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평소 같으면 쉽게 스패너를 휘두를 희누도 이 시간만큼은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더블 웨스트에는 황혼이 길다. 덕분에 석양이 걸쳐진 붉은 하늘을 오래 볼 수 있었다. 혼자 보면 사막의 붉은 바람을 연상시켜서 괴로운 저 하늘도, 둘이서 보면 그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둘 밖에 없는 이곳에 나의 발소리와 희누의 조금 더 작은 발소리가 함께 겹쳐서 퍼졌다. 나는 묵묵히 느긋한 태도로 걸어가고, 키가 작은 희누는 나에 비해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나를 따른다. 나는 최대한 보폭을 희누와 맞추었다. 그때, 희누가 내게 말했다.
"오빠, 요전에 저 어딘가에서 어떤 녀석을 봤는데."
여기서 희누가 말하는 ‘녀석’이란 아마도 골렘을 의미하겠지. 이 녀석은 다른 데에는 조금의 감수성도 발휘하지 않는 주제에 묘하게 골렘에 대해서는 상당히 소녀적으로 변하곤 했다. 남이 기껏 돈 모아서 선물한 정말 비싼 왕 곰 인형은 베개 겸 쿠션으로 취급하는 주제에 말이다. 지금 말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녀석은 제 가치에 비해서 상당히 학대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정작 곰이 차지해야 할 자리는 내가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봤는데?"
"거의 멀쩡하더라. 일단 겉보기에는."
희누는 꽤 흥분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희누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시큰둥한 기분이었다.
"그런 녀석이 여기 한둘이야? 멀쩡하다 못해서 아예 버젓이 활약하던 녀석들도 졸업식이라는 명목으로 떠맡겨지는 곳인데."
"아니 그런데 그런 거랑은 조금 달라. 엄청 예쁘다니까? 어쩌면 전 시대의 물건일지도 몰라."
“전 시대의 물건?”
나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고 희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야기가 좀 다른데.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하군.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이 녀석의 골렘 한정 감수성이라면 충분히 ‘오늘 나 천사님을 만났다?’라는 식으로 ‘오늘 나 장갑이 무지무지 두터운 골렘을 봤다?’라고 말해버릴지도 모르잖아. 나는 희누의 눈을 살폈다. 희누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곧았다.
전 시대의 기체들은 현 시대의 기체들과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전 시대의 기체들은 대부분 이름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고블린, 오우거, 그리폰, 픽시 등등. 이런 녀석들은 이전 시대에선 말 그대로 공장에서 자동으로 마구 쏟아지던 양산품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요즘 골렘이나 이전 골렘이나 그냥 전부 싸잡아서 골렘이라 할 지 몰라도, 튜너들은 그런 이름들을 암기하는 것 정도는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어차피 골렘들의 재료는 대부분 그 녀석들의 시신(잔해)이고, 당연히 그런 녀석들의 이름 정도는 외워주는 것이 예의이자 도리인 것이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고 희누 역시 그랬다. 그런 희누가 이름을 못 대고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전 시대의 기체라니, 그런 물건은 어지간하면 존재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수상하기는 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본 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지 않는가?(원숭이가 무슨 동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내가 회의적인 이유는 또 있었다.
"잠깐만 희누. 저런 식으로 쌓여있는 녀석들이 아직까지도 멀쩡할 리가 없잖아.”
정크샵 사정상 아무래도 관리가 소홀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온갖 정크 파츠들이 잔뜩 널리고 쌓인 주변을 손으로 휘젓듯이 가리켰다. 빙 둘러보면 이곳은 말 그대로 골렘의 무덤이다. 아직까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전 시대의 물건을 찾아보려면 못 찾을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은 잘못 본 경우다. 가끔 외부 장갑을 뜯어보면 내부는 사실상 똑같은 경우도 있었다.
흐음, 하지만, 희누가 저런 식으로 말을 할 녀석이라면 아마도 정보가 유실되었거나…… 아니면,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기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그런 가능성을 부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이 정크샵이 정신 나간 곳이라고는 해도 말이야. 미심쩍다구.
희누는 그런 내 태도가 무척이나 못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하, 내가 잘못 봤다는 거야? 내 눈과 두 손과 이 스패너에 걸고 말하겠어. 만약 아니라면 그 순간부터 내가 오빠에게 하는 것처럼 오빠도 날 바보 놈이니 멍청이니 불러도 괜찮아."
"넌 이미 날 그리 불러도 괜찮은 거냐. 최소한 안 부른다는 선택지 정도는 좀."
“오빠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 않았어.”
“이룰 수 있어. 포기하지 마. 포기하지 말라고……. 제기랄.”
난 뒷머리를 긁으며 딴죽을 걸었다. 뭐, 농담이지만. 희누는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헤실헤실 웃었다.
하지만, 저런 말까지 할 정도로 희누는 나름 확신이 있는 것 같군. 저건 아무래도 따라가 줘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어차피 이 시간이야 어딜 보든 상관없는 시간이고, 내가 가는 방향으로 말없이 희누가 따라올 뿐이니 가끔은 이쪽이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럼, 잠깐 들릴까.
"응, 이쪽이야."
희누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런데 이 방향은 어째 좀 이상하다? 희누가 나를 이끄는 곳은 이 넓은 정크샵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공터였다. 이 방향에는 '컨테이너'가 있었다. 나는 다람쥐마냥 쪼르르 달려 나가려는 희누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컨테이너는 조금 곤란하다니까.
"야, 설마 너, 컨테이너를 뒤진 거야?"
컨테이너란, 졸업품도 아니고 정크도 아닌 ‘보관중인 물건’들이다.
주인영감은 헌터들이 부탁하면 어떤 물건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컨테이너 째로 그냥 맡아주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물건을 맡긴 헌터들 몇몇은 사막에 먹혀서 돌아오지 않았고, 몇몇은 그냥 맡긴 체로 떠나버렸다. 때문에 컨테이너의 물품들은 명목상 정크샵의 소유가 아니었다.
게다가 추억을 먹고서 연명하는 퇴물이 된 주인영감도, 아직 까지는 종종 컨테이너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오곤 한다. 이것마저 없으면 주인영감은 살아갈 의미가 없어져서 바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진 않을까. 남의 무덤 파기는 이제 질렸다. 나로서는 영감이 될 수 있으면 오래 살아주면 좋겠다.
"너 그거, 주인영감의 역린이다? 알면 정말로 화낼지도 몰라."
"어차피 열쇠도 우리가 맡고 있잖아. 그리고 어차피 살짝 구경만 했는걸."
실질적인 이곳의 관리자가 되면서 영감에게 받은 열쇠 꾸러미에는 분명히 컨테이너들을 열 수 있는 열쇠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다만, 어느 게 어느 건지는 정리가 전혀 안 되어 있는 것이 문제지만. 정크샵을 그럭저럭 오래 관리했던 나도, 자주 쓰는 몇몇 열쇠를 제외하고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무수한 열쇠 꾸러미를 잠긴 문에 일일이 맞춰보는 것도 공허한 짓인지라, 나는 열쇠들의 사용처를 태반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희누보다 연상이긴 해도, 아무래도 스스로 이런 말하기도 뭐하지만 다소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어서 열쇠의 관리는 희누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랬는데 결국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고 말았다. 희누가 먼저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속담, 의미는 알겠지만 부뚜막이 뭔지는 모르겠다. 더군다나 이 녀석이 도대체 어디가 얌전하냐. 나는 이 얌전하지 못한 녀석에게 조금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누야, 아무리 영감이라도 이건 정말 화낼 거야. 묘한 구석에서는 정말로 완고한 양반이니까."
"으으, 안 들키면 상관없잖아? 어차피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를 텐데. 묘한 구석에서 정말 완고한 만큼,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볼 생각도 안 해봤을 걸. 내 말이 틀려?"
"그거야 뭐……."
그야, 맡긴 물건을 보관하는 것뿐이라면 그 맡긴 물건이 무엇인지 일부러 열어볼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영감 성격상 필요 없는 일은 아마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을 거고.
나도 모르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희누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의붓 여동생 겸 소꿉친구 겸 좋아하는 소녀에게 설득 당해버리는 기분은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위치가 역전되어서 이번에는 내가 희누의 뒤를 졸졸 따라가게 되었다. 아아, 내가 사랑하는 시간이 망가져버렸군, 이 사고뭉치 계집애. 지루할 일상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는 점이 이 녀석의 유용하고도 사랑스러운 점이었다. 그리고 주인영감님 죄송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정크샵 중심의 공터, 컨테이너 박스들에게 도착했다. 제각기 다른 문양이 그려진 각양각색의 박스들. 크기도 모양도 전부 달랐다. 그런 무질서함이 트레져 헌터들의 성질을 꼭 닮아 있었다.
“씁,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아까는 희누를 말리긴 했지만, 정작 이 놈들을 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나도 꽤나 지조가 없는 녀석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까지 컨테이너 안에는 기껏 해야 여행짐 정도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골렘이 들어있었을 줄이야. 맹점이었다. 워낙 골렘 천지인 이곳인지라 이런 컨테이너 안에도 골렘이 있을 것이라고는 오히려 생각하지 못했지 뭔가.
"아, 여기 어디쯤인데……. 맞아 저기. 그 컨테이너야."
희누는 개중에 한 컨테이너로 쪼르륵 달려갔다. 확실히 각양각색의 크기를 자랑하는 컨테이너 박스들 중에서도 그 컨테이너는 골렘이 들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특별 사이즈의 녀석이었다. 컨테이너들 중에서도 가히 군계일학이라 할 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컨테이너의 정말 특별한 점은 따로 있었다. 다른 컨테이너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 컨테이너의 특징은 다름이 아니라…….
"희누, 자물쇠는 어디로 간 거야?"
"……헤헤."
“웃지 마.”
그 컨테이너의 문에서는 자물쇠가 경첩 째로 사라져있었다. 마치 강력한 무언가로 두들겨 패서 떨어트린 느낌이었다. 예를 들면 강력한 고대의 아티팩트 파워글러브와 흉악한 거대 스패너 화무십일홍이라던가.
"아니 그게, 맞는 열쇠를 찾느라 엄청 고생을 하다가 신경질이 나서 그만, 다른 열쇠를 써버렸지 뭐야. 아하하."
이 녀석이 말한 열쇠는 바로 저 뒷 허리춤에 꽂아 넣은(차라리 매달아 놓았다는 표현이 적당하다) 스패너-화무십일홍-를 의미했다. 보통은 기계나 큰 도구를 이용해야만 열 수 있는 골렘의 외부 장갑도 저 녀석은 파워 글러브와 저 화무십일홍을 이용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내곤 했다. 그래서 희누가 저 거대한 흉기에 가증스러운 별명이 바로 Key이다. 희누는 오히려 화무십일홍이라는 정식 명칭보다도 Key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문제는 저 녀석이 그 때문에 그 만능열쇠를 너무 아무데에나 남용하는 경향이 생겨버렸다는 점이다. 골렘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스트레스, 기타 잡상의 대부분을 저 스패너로 해치워 버리는 것이다. 무엇을 숨기랴, 저 스패너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나였다. 옛날 저 녀석이 아파서 침대 위에서 살고 있을 때, 이리저리 친한 척을 하면서 너무 강한 척 허세를 부렸기 때문일까? 그 덕분에 저 녀석은 내가 무슨 초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저 소년다운 귀여운 허풍을 조금 떨었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이제서 그걸 후회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의 희누는 내가 건강하게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고, 나 역시 희누가 즐거우면 기뻤으니까.
나는 그 당시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침대에 누워 지내던 희누가 자신도 오빠랑 나가서 놀아보고 싶다고 했던 일 말이다. 그리운 광경이었다. 그 당시는 희누의 성격도 참 귀여웠지. 뭐랄까, 보는 이들에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들게 만든다고나 할까? 지금은 보는 이(나)가 스스로 몸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녀석이 되었지만.
어쨌든 나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현실의 희누는 컨테이너의 자물쇠를, 열쇠로 열기 귀찮아서 거대 스패너로 후려 패서 박살내는 소녀가 되어버렸다. 인생은 유구하고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웬지 모르게 내 눈물도 흐른다. 그래, 개구쟁이어도 좋으니까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잘도 박살냈군. 뒷수습은?"
"하으으, 희누를 차갑게 대하지 말아줘. 응? 오빠."
“나를 부른다고 수습이 되냐?”
“아마 반 정도는. 도와줄 거지?”
희누는 나에게 두 손바닥을 맞붙이고서 굽신굽신 고개를 숙였다. 희누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옆으로 묶어 올린 말총머리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에휴, 아무리 갈 날이 멀지 않은 영감이지만 이 광경을 보면 진짜로 노발대발 하겠지.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영감의 눈이 이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의외로 아무 일도 없을지도 모르겠군. 뭐,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 고처두긴 해야겠지. 어느덧 시간도 꽤 지나서 하늘도 어둑어둑해졌으니 내일 용접해둬야겠다.
“희누, 그런데 박살낸 경첩이랑 자물쇠는 챙겨두었어?”
“네 오빠. 헤헤.”
희누는 마치 자신이 언제 굽실거렸냐는 듯 어깨를 으쓱 했다. 난 그런 희누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고 싶었지만, 진짜로 쥐어박았다간 한번 뽑히면 반드시 피를 봐야만 하는 무서운 스패너가 이 세상에 뽑혀버리고 만다. 희누와 나의 전력차이는 명확하다. 불리한 싸움은 피하는 것이 좋지. 그래서 나는 적당한 응징을 포기했다..
“다음에는 이러지 마.”
나는 희누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고서 문을 향해 걸었다. 희누는 내 눈치를 살피며 뒤를 따랐다. 희누는 분명 안하무인에 난폭하고 입에 칼을 심고서 틈틈이 독설을 휘두르는 녀석이었지만,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으면 확실하게 얌전해진다는 정도의 장점은 있었다. 지적하는 입장에서는 왠지 모르게 득을 보는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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