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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 걸음
글쓴이: 일말의가능성
작성일: 11-07-15 23:59 조회: 3,866 추천: 0 비추천: 0
제목 : 앞으로 한 걸음

서장. 지상에서

“정부는 지하마을에 대한 진실을 밝혀라!”
지상에서 깃발을 펄럭이며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주변에서 “밝혀라!”라고 외치는 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 십여 명 즈음 되는 시위대가 고층건물들이 나열된 도심 한복판에서 시위를 하고 있던 것이다.
보는 사람은 없다. 도심이 내뿜는 인공적인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지만 지금은 밤이기 때문이다.
시위대 사람들은 잠시 쉬기라도 하려는 건지 다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피스라고 불리는, 시위대 부대장의 등을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저기…….”
피스가 몸을 돌려 그에 응한다. 피스는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인데도 샌님 같은 얼굴에 호리호리한 몸을 하고 있었다. 고생이라곤 하나도 안 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피스는 어렸을 때부터 시위를 해왔기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증거가 바로 시위대 부대장이라는 직위다.
“제가 이 시위에 처음 와서 그런데, 지하마을이 정말로 있나요?”
피스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질문은 지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봐도 이상하지 않다. ‘지하마을’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건 현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평등권을 짓밟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피스는 그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저랑 대장은 지하마을이 있다고 믿습니다.”
시위대에서 말하는 지하마을이란 육체파, 그러니까 구(舊)인류보다 육체적으로 진화한 사람들이 갇혀 있는 감옥이다. 참고로 육체파는 구인류보다 전반적인 신체능력이 우수할 뿐 아니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육체가 진화했다.
피스의 대답에 반문이 돌아왔다.
“두뇌파 사람들의 조사 결과, 지하마을은 발견하지 못했다는데요. 뭔가 확증이라도 있는 건가요?”
육체파를 생각해보면 쉽게 짐작하겠지만, 두뇌파는 구인류에 비해 뇌가 진화한 사람들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지능이 구인류보다 우수하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뇌가 진화했다.
“확증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하마을이 없다면 수많은 육체파들의, 의문의 실종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정부가 지하마을을 숨겼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인간사회를 전반적으로 유지, 관리하는 조직이 정부이며, 구성원은 모두 두뇌파다. 아무래도 머리를 쓰는 건 두뇌파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했던 사람은 “음~.”이라는 신음까지 내뱉으며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갔다.
“그렇군요. 그런데 밤에 이렇게 소란스럽게 해도 되는 건가요?”
“두뇌파의 기술로 이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지요. 정부 측 허가를 받은 시위니까 대비해뒀을 겁니다. 그 증거로 정부에서 내 준 허가서가…….”
피스는 말을 하며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흰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피스에게 수납공간이라고는 바지 주머니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유일한 수납공간에 분명히 있어야할 허가서가 없던 것이다.
“잠시만요.”
피스는 질문했던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시위대 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허가서 갖고 있어?”
시위대 대장이자, 피스가 아빠라고 부른 사람이 뒤를 돌아봤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턱수염과 입에 물고 있는 담배가 중년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게 했다. 허름한 로브를 입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거지로도 보인다.
“그걸 왜 나한테 찾아? 없어?”
“응. 이번엔 전자기판에 서명을 받았는데 기판 째로 없어졌어.”
대장의 눈이 조금 진지하게 바뀐다.
“전자기판?”
“왜 있잖아, 물리적으로 손상되지 않고 전기로만 분해시킬 수 있는 종이 같은 거. 하늘색이고 허공에 고정시킬 수도 있는데…….”
피스가 말을 하던 도중에 대장은 피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입을 열었다.
“알아, 인마. 서명을 왜 종이에 안 받았냐고.”
피스는 머리에 손을 얹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거기서 전자기판에 서명해준 걸 왜 나한테 물어? 때리기까지 하고. 폭력은 안 된다고 가르친 주제에!”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뭐, 어쨌든 알았다.”
대장은 깃대에 몸을 의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부대장은 대장이 뭘 안 건지 몰랐기에 또 다시 질문했다.
“뭘 알았는데?”
대장은 피스를 바라보며 씨익 웃더니 시위대 전체에게 명령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우린 정부의 함정에 걸렸다. 지상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도망쳐라. 우리 시위대는 나 빼고 전부 육체파니까.”
하지만 갑작스레 떨어진 지시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무언가 보였는지, 대장은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잡히면 지하마을 행이다.”
“그게 무슨…….”
피스가 또 다시 물어보려는 순간 대장의 배에 일직선의 섬광, 레이저가 닿았다. 처음에는 가느다랬지만 금세 사람 팔뚝 정도로 굵어진 레이저는 곧 대장이 입고 있던 로브에 구멍을 냈다. 그 섬광이 사라지자, 대장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대장은 입에서 피를 쏟았고, 바닥에도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시위대 사람들은 요란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오직 피스만이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빠!”
피스의 아버지는 깃대에 체중을 싣고 힘겹게 서있었다. 피스는 그런 아버지를 부축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빠, 정신 차려! 뭐야, 이거. 정부의 함정이란 게 이런 거야?”
피스는 섬광이 번쩍였던 곳을 한 번 노려보고는 다시 아버지를 바라봤다. 피스의 아버지는 상당히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은 움직였다.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피스가 윽박지를 동안 피스의 아버지는 숨을 몰아쉬더니 말을 이었다.
“최소한이라면, 폭력도…….”
피스는 ‘더 이상 말하지 마!’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까지 내뱉진 못했다. 또 다시 일직선의 섬광이 번쩍였기 때문이다. 그 섬광은 대장의 머리로 향하고 있었다. 피스는 그걸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몸을 당겼고, 그 덕에 아버지의 머리는 무사했다.
하지만 피스가 안도하는 틈에 불길한 총성이 울렸고, 피스의 아버지는 더 이상 피스의 외침에 답할 수 없었다.


1장. 제자리에.

1

새우잠을 자고 있던 피스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남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벽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벽 사이사이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언제나 대낮처럼 밝은 곳에서 살던 피스는 더 그렇게 느꼈으리라.
피스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기 직전에, 뒤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만하세요.”
꾸짖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들리는 희한한 목소리였다.
“내버려 두게.”
조금 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피스의 귀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꽤 기합이 들어가 있는, 기품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피스는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자는 척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니 피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피스는 방금 전까지 시위를 하고 있었다. 도중에 어떤 사람이 “저기…….”라고 말을 걸어온 것까지는 피스도 기억하고 있다.
“읏!”
하지만 피스는 더 이상 기억을 더듬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리려 하자, 망치로 얻어맞은 듯 머리가 아파왔다. 그 때문에 피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고, 입에서는 의도치 않은 신음까지 흘러나온 것이다.
그 짧막한 신음 탓에 피스가 깨어났다는 게 들켰는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피스를 향해 울려 퍼졌다.
“깨어난 듯하네요.”
“그런듯하네.”
이 목소리들은 피스의 귀에도 또렷이 들려왔다. 피스는 더 이상 누워있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피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벽, 바닥, 천장은 온통 남색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주변에는 침대, 수납장, 책상 등 평범한 가구들이 놓여있었다. 여기는 지극히 평범한 방이다.
평범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피스의 눈앞에 서있는 두 사람뿐이리라.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피스를 등지고, 허리까지 닿는 긴 흑발을 내보이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메이드에게 가려져 피스가 자세히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 사람이 손에 쥐고 붕붕 휘두르는 노트북만은 피스에게도 잘 보였다.
“비키게.”
“그만두세요, 희빈 양.”
희빈이라고 불린 사람은 메이드의 뒤에서 노트북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드도 팔을 들어 필사적으로 희빈을 저지했다. 키 차이가 있는 건지, 메이드의 손끝과 노트북의 끄트머리는 같은 높이선상에 있었다. 다소 차이는 있어도, 이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마치 농구선수들 간의 신경전을 연상케 했다.
이런 희한한 장면이 눈에 들어오자 피스는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지금 피스의 얼빠진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두면 평생 놀릴 수 있으리라.
“저기…….”
드디어 피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러자 메이드가 옆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요.”
메이드는 깊이를 알 수 없을 듯한 진하고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런 메이드의 얼굴에 곤란하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가 드러났다.
메이드의 주의가 소홀해진 이 짧은 시간을 희빈은 놓치지 않았다. 희빈이라고 불린 소녀는 메이드를 제치고 옆으로 뛰어나왔다. 작은 키 덕분인지 희빈의 몸놀림은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희빈의 금발 쪽머리는 숟가락으로 단단히 고정돼있어서 흩날리지 않았다. 흩날리고 있는 건 희빈이 입고 있는 옷이자, 피스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한복뿐이었다.
피스는 순간적으로 뭔가에 홀린 것 마냥 한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볼 수 없던 오묘한 색감이 피스를 사로잡은 것이다. 피스가 주변을 경계하는 걸 잊을 만큼.
“피해요!”
메이드가 급하게 소리쳤지만 늦었다. 노트북은 이미 희빈의 손을 떠나서 날아가고 있었다.
퍽.
노트북이 피스의 이마에 보기 좋게 명중했다. 피스의 고개가 뒤로 젖혀진 걸 보면 그 위력이 상당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아니, 그 위력은 파지직 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구르는 고철덩어리(노트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장금이의 몫일세!”
희빈이 피스를 향해 소리 질렀다. 하지만 피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았다. 피스의 온 신경은 자신의 머리로 향한 무자비한 폭력행위에 쏠려 있었다.
“폭력은 안 됩니다.”
피스가 고개를 바로하며 말하자, 밝은 청록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눈동자의 주인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분노의 아우라가 몸에서 뿜어져 나올 듯한 기개다.
“으겍.”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스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빼버렸다. 당당하게 폭력은 안 된다고 말한 모습이 무색해질 정도로 말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 건지 피스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피스는 장금이가 누군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전에 이 상황 전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주먹을 편 희빈은 상의에 손을 집어넣더니 단검을 빼어들었다. 하지만 희빈이 단검을 칼집에서 빼내자마자 그 앞을 가로막는 팔이 있었다.
메이드는 웃는 얼굴로 희빈에게 말했다.
“자, 여기까지예요.”
“이제부터일세.”
희빈은 메이드를 째려보며 답했다.
저지하려는 메이드와 부딪치려는 희빈 때문에 주변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걸 느낀 피스는 “앗.”하고 작은 소리를 낸 뒤, 잽싸게 몸을 일으켜 소리쳤다. 자세한 상황까지는 몰라도 둘이 충돌하려는 것만은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만두세요!”
피스는 메이드나 희빈에게 달려가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피스가 무조건 달려갈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둘을 막을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어느샌가 메이드의 손에는 둥글고 길쭉한 회색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막대기 끝은 희빈의 어깨에 닿아있었다. 막대기는 메이드의 손에서 갑자기 생겨났다. 몸의 어딘가에서 빼온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생겨난 것이다.
회색 막대기는 잠시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
터무니없는 장면을 목격한 탓인지 피스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확실히 놀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검이 바닥과 부딪쳐 수차례, 시끄러운 소리를 울린다.
적어도 피스가 보기에 희빈은 어떤 공격도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희빈은 손에서 단검을 떨어뜨린 것이다.
“또, 그런, 비겁한…….”
희빈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결국 희빈은 일어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졌는지, 털썩 무릎을 꿇고 양팔로 몸을 지탱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조그마한 소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안쓰럽지 않을 리가 없다.
“뭘 하신 겁니까, 지금!”
피스가 소리치며 희빈에게 뛰어갔다. 하지만 메이드가 다가와 피스의 어깨를 잡은 탓에 피스는 희빈에게 다다를 수 없었다.
“기다리세요, 피스 군.”
피스는 이를 뿌득 갈고는 고개를 돌렸다.
메이드는 그 누구보다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피스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게 됐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 때문에 화를 못 낸 건 아니다. 그저 그 미소를 보자 괜찮다는 안도감이 피스의 머리를 강하게 지배했을 뿐이다.
“으, 으윽……. 흑, 흐윽, 흑. 훌쩍.”
희빈이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소리가 겹쳤다.
꼬르르꾸륵꾸르르르르륵
바로 피스의 배에서 난 소리다. 피스가 얼굴을 붉히며 마주보고 있던 메이드에게 눈을 뗐다.
“피스 군, 배고픈가요?”
“…….”
꾸르르르륵꼬로록크뤡크뤠렉크롸라라락
이미 인간의 배에서 날 수 있는 소리는 넘어섰다. 순간적으로 희빈의 흐느낌이 피스의 배에서 나는 괴물의 포효에 묻혀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피스는 부끄럽다 못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드는 비웃지 않았다. 피스가 메이드를 힐끔 쳐다보자, 조금 전과 같은 온화한 미소가 보였다.
“그럼 밥이라도 먹으러 가죠.”
메이드가 식사를 제안했지만 희빈의 울음소리가 피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래도 저기…….”
피스가 희빈을 바라보자, 메이드가 약간이나마 피스를 안심시켰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신경 쓰지 말고 따라오세요.”
피스는 아무래도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메이드의 다음 한 마디를 듣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피스 군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고 싶죠?”
이 말을 남긴 채 메이드는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피스 역시 희빈에게 눈길을 한 번 줬다가 메이드를 따라갔다.


2

바깥에 나온 피스는 그제야 여기가 지상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낮은 물론이고 밤마저 대낮처럼 느껴질 정도로 환한 지상과 여기는 너무나도 다르다. 여기는 조금 전에 있던 방처럼 사방이 남색 금속으로 돼 있고, 그 금속 사이사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피스는 부지런히 걸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 다음으로 위를 바라보고 양 옆, 그리고 정면을 바라봤다. 정면에는 약 50~60미터 앞부터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면을 제외한 나머지만으로도 피스는 이 공간이 대략 직사각형 모양의 단순한 형태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피스가 두리번거리는 걸 눈치 챘는지, 앞에서 걷고 있던 메이드가 말했다.
“여기는 지하마을이랍니다. 정확히는 지하마을 D구역이에요.”
“아…….”
얼핏 짐작한 사실이라도 뚜렷한 말로 들으면 역시 놀라기 마련이다. 메이드는 피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지하마을은 지상에서 문제가 될 거 같은, 혹은 문제가 된 육체파를 모아두는 장소예요. 피스 군이 여기 오게 된 이유는 ‘지상에서의 난동 행위’라고 돼있고요.”
“난동행위, 인가요?”
“예. 피스 군은 불법 시위를 하고 있었고, 거기에 무력행사까지 해서 여기에 끌려오게 된 거예요.”
피스는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시위대는 지상에서 난동을 부린 적이 없다. 언제나 정부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인 시위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증거로 언제나 서명도 확실히 받아뒀다. 적어도 피스가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거기까지 생각한 피스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서명…….”
서명이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피스의 안색이 나빠지더니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괜찮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피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뒤이어 여러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한 줄기의 섬광, 아버지에게 머리를 쥐어 박힌 것, 그리고 총성. 마치 악몽 같은 광경들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피스에게 가볍게 부딪혔다.
“응?”
피스보다 머리 두 개만큼 키가 큰 사내가 피스를 내려다봤다. 꽤나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피스는 부딪힌 것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그대로 서있었다.
“어이, 꼬마야.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앙?”
일단 피스는 17살이고 키는 174cm이기에 꼬마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건 언제나 상대적인 문제다. 키가 2m는 돼 보이는 사내는 긴팔, 긴 바지를 찢어내 억지로 반팔과 반바지로 변화시킨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메이드는 덩치 큰 사내에게 다가왔다. 메이드가 그 남자를 건드리자, 그는 귀찮다는 듯이 뒤를 돌아봤다. 물론 메이드를 보자마자 그 표정은 바뀌었지만 말이다.
“음? 한나 양이잖아, 볼 일이라도 있어?”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 꽤 부드러운 표정이 드러났다. 한나라고 불린 메이드도 그에 응하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볼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사과는 해야겠네요.”
“사과?”
“예, 일행이 실수를 한듯해서요.”
“아~, 그런 거로군. 요 꼬맹이가 이번에 새로 온 녀석이구만? 그 소문 자자한.”
사내는 피스의 머리에 손을 얹어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사내는 쪼그려 앉아 피스를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두세 번 정도 피스를 위아래로 훑더니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예상 외로 약골 체형이네. 나사가 풀린 것 같기도 하고.”
“겉모습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사내는 피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옆으로 지나갔다.
“뭐, 그렇긴 하지. 사과는 필요 없어. 적응이나 잘 시키라고.”
“예.”
사내는 어깨 위로 손을 들어 흔들어보였고, 한나도 사내의 등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피스 군?”
한나가 피스를 불렀다. 하지만 피스는 멍하니 서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나가 피스의 어깨를 가볍게 치자, 그제야 피스는 현실로 돌아왔다. 물론 피스의 표정은 아직도 굳어 있었지만 말이다.
“피스 군, 이런데서 자면 안 돼요.”
“예에……. 죄송합니다.”
피스는 순순히 대답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나는 피스의 뺨을 살짝 두어 번 때렸다. 마지막으로 한나는 피스의 양쪽 뺨에 손을 올려둔 채 두 눈을 응시했다.
“정신 차려요. 피스 군.”
한나가 말을 마치자 피스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피스의 입은 자동 반사 수준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뺨에서 느껴진 아픔에 반응한 것이다.
“폭력은 안 됩니다.”
그 말을 들은 한나는 가볍게 미소 짓더니 뒤로 돌아 발을 내딛었다.
한나와 피스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피스는 어느새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걷고 있었다.
지상의 건물들은 전부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인데 비해, 이곳의 건물은 아무리 높아봤자 3층 정도였고 대부분이 1층짜리 건물이었다. 물론 건물들도 모두 남색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이런 건물들에 흥미를 가질 사람은 아마 몇 없을 것이다. 그건 피스도 마찬가지였다.
피스는 자신의 기억을 계속해서 정리해나갔다. 분명히 시위를 하던 도중 총성이 울린 것까지는 피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뒤의 기억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건지는 모른다는 말이다.
이번에는 피스가 먼저 메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절 아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아직 제 소개를 안 했네요.”
한나는 몸을 반 바퀴 돌려 피스를 바라봤다.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있는 메이드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지하마을 D구역의 유지, 관리를 맡고 있는 이한나에요. 21살이니까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잘 부탁해요.”
그러자 피스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둘 다 고개를 들자, 한나가 말을 이어갔다.
“일단 저는 정부 관계자이고, 두뇌파에요. 피스 군에 대한 정보는 정부로부터 전부 받았고, 그래서 피스 군을 알고 있는 거예요.”
한나는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피스는 한나가 정부 관계자라는 소리를 듣자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럼, 제가 여기 오게 된 경위도 전부 알고 계신 겁니까?”
피스의 손에 땀이 쥐어졌다. 방금 전에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은 피스에게 너무나 괴로운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어요.”
“저희 시위대가 어찌 됐는지도 말입니까?”
“예.”
한 건물 앞에서 한나가 발을 멈췄다. 한나는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뒤로 돌아 입을 열었다. 한나의 입에는 아직도 온화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여기가 식당이에요.”
피스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피스는 한나에게 시위대가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려했지만 입만 뻥긋 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일을 확인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리라.
한나는 얼굴 표정으로 피스의 마음을 꿰뚫어봤는지 다시 몸을 돌려 피스를 등지고 말했다.
“시위대는 말이죠.”
피스의 동공이 커진다. 한나의 이 한마디에 피스는 침을 한 번 삼켰다. 한나의 다소 무거워진 목소리도 긴장을 더하는 데 한 몫 했으리라.
“부대장과 대장이 행방불명되면서 해체됐어요. 그 이외의 대원들은 지상에서 교육을 받는 정도로 끝났습니다.”
“행방불명이요?”
“지상에서 행방불명이라는 말이에요. 부대장인 피스 군은 지하로, 대장인 카렌은 하늘로 갔으니까요.”
피스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고 땅을 바라보며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몇 없으리라.
그 때 식당 문이 열리면서 네 명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한나 누나잖아?”
“어라, 언니가 희빈이랑 같이 안 있다니 의외네?”
“희빈이는 어쩐 거야?”
한나를 보자마자 사람들이 말로 폭격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이미 원래의 부드러운 느낌을 되찾았다.
“희빈 양은 조금 말썽을 부려서 재워뒀어요. 지금은 새로 온 피스 군이랑 같이 다니는 중이랍니다.”
피스 군은 이름이 불리자 찌푸렸던 인상을 억지로 펴고 인사했다.
“피스라고 합니다. 17살이고 지상에서는 시위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네 명도 각자 신원을 밝히며 인사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자기소개를 잽싸게 마치더니 성큼성큼 피스에게 다가왔다.
“오오, 피스란 놈이 이렇게 생겼구나!”
피스에게 다가 온 소년이 말했다. 소년은 키가 피스보다 조금 작았으며 어깨까지 오는 긴 흑발을 하고 있었다. 그 소년은 피스가 신기한 볼거리라도 되는 양, 피스를 가운데 놓고 이리저리 돌아가며 보고 있었다.
피스의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역력히 드러났다. 기껏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런 자극이 오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물럭 주물럭.
한술 더 떠, 소년은 피스의 다리나 팔까지 만지기 시작했다. 물론 바로 저지당했지만 말이다.
“컥.”
촐싹대던 소년의 입 밖으로 고통이 표출됐다. 소년이 목에 날아온 손날치기를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진 것이다.
이어서 댕기머리를 한 소녀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참고로 조금 전 손날치기를 날린 것도 이 소녀다.
“뭐하는 거야, 이 변태가!”
피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폭력은 안 됩니다.”
“죄, 죄송합니다!”
소녀는 불끈 쥐었던 주먹을 펴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것도 몇 차례나.
그런 모습을 보니 피스의 안색에서도 떨떠름한 표정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상대방 쪽이 미안해지기 십상이다.
풀썩 쓰러졌던 소년이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려고 했다. 그리고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소년의 입이 열렸다.
“크윽…….”
이 소리를 들은 소녀가 다리를 들어 올려 다시 한 번 소년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소년이 소녀에게 걷어차이는 일은 없었다.
“폭력은 안 됩니다.”
피스가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내뱉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소녀는 다리를 내리고는 다시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반쯤 몸을 일으킨 소년까지 소녀에게 머리를 잡혀 강제로 고개를 조아리게 됐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녀의 사죄와는 달리, 소년의 불만 가득한 투정이 주변을 메웠다. 소년의 신음소리와 함께.
“난 별로 잘못 안 했으가아아아아아악 자, 잠깐! 머리머리머리머리, 깨진다, 깨져깨져 깨진다고오오오오오오?”
소녀는 소년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허둥지둥 피스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피스가 자세히 보니 소녀는 조금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아, 그러니까 이건 폭력이 아니라 제 파트너가 엄살이 심해서…….”
“엄살일까 보냐아아아아아아아악!”
소년의 머리를 소녀가 다시 한 번 쥐자 말끝에 쓸데없는 울림이 붙었다. 소녀는 그 울림을 지우려는 듯이 재빨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실례했습니다. 다음에 뵈요.”
“예, 다음에…….”
소녀는 피스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옷을 잡고, 소년을 질질 끌고 갔다. 끌려가고 있는 소년은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호기심이 죄냐! 소문 확인 좀 하자고! 피스라잖아? 피스라고!”
“조용히 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머지 두 명도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앞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쫓아갔다. 한나는 그 뒷모습에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피스는 폭풍처럼 몰아치고 간 무리를 보고 대체 지금 뭐가 지나간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몰아친 덕분에 피스는 우울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 우리도 가볼까요?”
한나가 말을 하면서 식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3

“크흐윽, 흐윽, 크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윽!”
한참을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던 울음소리가 분노의 괴성으로 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 괴성조차 들리지 않게 됐다.
조금 전까지 세 사람이 같이 있던 장소에는 이미 희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희빈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확실히 분노가 깃들었다.
희빈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고, 가슴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한 번 문질렀다. 그리고 희빈의 코푸는 소리가 한 번 난 뒤에 그 손수건은 방구석에 냅다 던져졌다.
으드득.
희빈이 이를 한 번 갈더니 문을 향해 거칠게 눈을 돌렸다.
“또 내 감정을 마음대로 갖고 놀았겠다, 그 하녀.”
희빈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과 칼집을 주워서 끼우더니, 다시 저고리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지상을, 아니 내 아이들을, 내 보물들을 박살낸 그 쓰레기, 용서 못해. 용서…….”
희빈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니, 소리 질렀다.
“안 해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콜록.
평소에 잘 지르지도 않던 소리를 질러서인지 희빈은 수차례 기침을 했다. 하지만 눈에서 분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희빈은 방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힘껏 열어젖히고 방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뛰었다.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희빈은 키가 족히 2m는 되는 거구의 사내와 부딪쳤다. 사내는 그 충격 탓에 뒤로 쓰러질 뻔했으나, 한 발 뒷걸음질 쳐서 겨우 중심을 잡았다. 반면에 희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딪친 자리에 서있었다. 뭔가 반대로 된 느낌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사내는 놀란 듯했지만 반항적인 희빈의 얼굴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희빈은 그 모습을 보고는 짜증난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비키게.”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보다 50cm나 작은, 149cm의 소녀를 보고 말했다.
“화제의 신인, 다음에는 꼬맹이들의 왕녀인가.”
“비키라고 말했네.”
사내는 손을 움직여서 희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희빈은 저고리 안에서 단검을 빼내 사내의 팔을 향해 휘둘렀다.
칼날이 사내의 팔에 닿았다. 당연히 사내의 팔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힘껏 휘두른 칼에 베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금씩 흘러나왔다. 칼이 사내의 피부에만 상처를 냈기 때문이다.
“꼬마야, 이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인 거냐? 평소에 한나 양이랑 좀 붙어있다고 너무 기고만장해져있는 거 아냐?”
희빈은 하녀의 이름이 나오자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그 뒤, 희빈은 칼을 거둬들이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심호흡 소리가 나더니 말이 이어졌다.
“기고만장, 이 내가 그 하녀 따위를 믿고 기고만장해 있다 이건가?”
“그럼, 아니라는 거냐? 앙?”
희빈은 고개를 들고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 역시 희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빈이 그 사내의 얼굴에 대고 말했다.
“네 놈, 하루 종일 골목을 배회하며 싸움만 한다는 2위로군.”
그러자 사내가 만면에 미소를 띄운다.
2위, 육체파들이 모여 있는 지하마을에서 순위를 정한다고 한다면 물어볼 것도 없이 강한 순위다. 그리고 그 강한 순위는 싸움으로 결정되는 게 당연하다.
“이제 와서 알아채도 늦었어.”
하지만 희빈도 그에 맞춰 같이 웃었다.
“늦지 않았다. 알아보기도 전에 끝났다면 내가 2위가 됐다는 것도 몰랐을 테니까.”
희빈의 도발에 사내는 웃음을 짙게 했다. 그 후, 사내는 희빈과의 거리를 벌리고 입을 열었다.
“꼬마야, 싸우기 전에 서비스로 내 육체에 대해 알려주마. 난 내 근육을 분해시킬 수 있다. 분해되며 생긴 에너지는 모두 파괴력으로 전환되지. 또한 내 근육은 갑옷 역할도 한다. 그러니까 근육이 있는 곳에 공격해봤자 웬만한 건 간지러운 수준이라는 거다. 그렇기에 난 내 공격이 들어갔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내 갑옷, 근육을 분해시키지 않아. 그리고 분해된 근육은 10분 정도 있으면 다시 생겨난다.”
사내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자, 희빈은 그 흐름을 끊고 입을 열었다.
“그걸 왜 말하는 겐가?”
“수준 차이를 줄여서 싸움다운 싸움을 하고 싶어서다.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내 공격을 맞은 다음에, 근육이 분해된 곳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다 이거지.”
“전혀 아닐세.”
희빈은 사내의 말을 부정하며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희빈의 오른손 검지는 사내를 지목하고 있었다.
“나도 네 놈에게 한 수 물러주지. 난 여기 서서 공격을 피하지 않겠네. 네 공격이 끝나기 전까진 반격도 하지 않고, 네 놈이 날 죽이든 반신불수를 만들든 상관하지 않겠네. 그러니 전력으로 덤비게.”
사내가 목을 돌리며 뚜둑 소리를 냈다. 이제 사내의 얼굴에서 미소는 찾아볼 수 없다. 그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짜증과 귀찮음뿐이었다.
“오냐, 소원대로 해주마.”
사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더니 희빈에게 달려들었다.
희빈은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그 와중에도 태연히 입을 열었다.
“참고로 하녀가 내 옆에 서 있던 건 이 몸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사내의 주먹이 힘껏 휘둘러진다. 사내의 그 눈은 사람을 죽일 각오를 한 눈이었다.



4

피스가 고개를 돌리자, 식당 문이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71번! 된장찌개 나왔습니다!”
“256번! 김치볶음밥 시키신 분? 빨리 받아가세요! 256번!”
“잠깐만요, 271번은 라면이잖아요! 아니, 그보다 이거 된장찌개도 아니고 김치찌개라고요?”
문이 완전히 열리고 피스와 한나가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봐도 5~6백 명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식당이었다. 식당에서도 주방 안을 볼 수 있었는데, 주방 역시 식당 크기에 걸맞게 컸다.
“오~.”
피스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려버렸다. 비록 사람은 스무 명 정도 밖에 없을지라도 지상의 자동화된 시스템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인간적인 구조였기 때문이다. 주방 사람들과 손님이 대화를 할 수 있다니, 지상에서는 생각도 못 할 상황이다.
“굉장하죠?”
한나가 고개를 샬짝 기울이며 피스에게 말했다.
“예, 이런 광경은 처음입니다.”
한나는 피스의 그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지, 그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카운터에 있던 사람에게 한나가 말을 걸었다. 원형탈모증에 걸렸는지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남지 않은 아저씨였다.
“도도 아저씨, 제육덮밥 둘 부탁할게요.”
“기분 좋아 보이네, 한나 양? 273번, 274번 제육덮밥 둘.”
한나는 이 말에 고개를 살짝 숙이는 걸로 대답했다.
“피스 군, 기억해요. 273번이랑 274번이래요.”
한나가 피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자, 카운터에 있던 도도 아저씨도 피스를 바라봤다.
“273번, 274번이라고 하는 건 주문한 번호입니까?”
“예. 그 숫자가 불릴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으면 돼요.”
둘이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도도가 끼어든다.
“네가 피스구나! 한나 양, 그 소문, 사실이야? 이 위를 바로 이 호리호리한 소년이 박살냈다는 게?”
피스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한나는 곤란한 듯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글쎄요~.”
“에이~, 한나 양은 현장도 봤는데 그걸 모르려고? 나한테만 말해줘 봐.”
도도라는 사람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한나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전혀 작아지지 않았기에 피스에게도 또렷이 들려왔다.
“도도 아저씨도 참, 또 이러시네요. 정부 측 공식 입장이 안 나와서 함부로 말 못 해요.”
한나는 너무 가까워진 도도의 얼굴을 한손으로 밀어내고는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러자 도도는 몸을 뒤로 빼며 입 꼬리를 늘어뜨렸다.
“재미없는 건 여전하네~. 그지, 피스 군?”
“하하…….”
피스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볼을 긁적이자, 도도는 피스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떻게 된 거야?”
“전 폭력은 안 씁니다.”
피스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한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힌트를 드리자면 피스 군한테는 그다지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자 도도는 김샜다는 듯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헛소문이구만? 헛소문. 난 또 뭐라고……”
둘은 도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비어있는 자리로 향했다. 식탁과 의자, 수저통까지 모두 남색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나가 여기 앉자고 하자 피스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제가 지상을 박살냈다니, 무슨 말입니까?”
“그저 소문일 뿐이에요. 피스 군이 여기 오게 된 이유가 ‘지상에서의 난동행위’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뭔가 감춰진 사실이라도 있는 겁니까?”
“정부가 하는 일이니까요.”
이 말은 정부가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피스는 한나도 정부 관계자라는 걸 되뇌며 잠시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한나도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못 해도 본전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피스는 물어봤다.
“정부는 왜 저희 시위대를 공격한 겁니까?”
“불법시위였으니까요.”
피스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한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라고 정부는 발표했답니다. 그래도 카렌이 불법시위를 할 리가 없다는 건 알아요.”
한나의 입에서 마치 카렌, 그러니까 피스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이 나오자 피스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를 아시나요?”
“예, 한 때 카렌 밑에서 조수로 일했거든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충격은 조금 전에 한번 겪어서 이제 괜찮은 건지, 아니면 괜찮은 척 하는 건지, 피스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피스의 머리에서는 간단한 숫자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카렌의 나이는 서른셋, 한나의 나이는 조금 전에 듣기로는 스물 하나, 그리고 기록상으로 피스가 아버지께 입양됐던 게 바로 14년 전이다. 14년 전을 피스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다. 단지 피스가 3살 때 입양됐다고 아버지께 들었을 뿐이다.
결국 피스는 한 가지 추측을 했고, 그 추측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혹시 한나 씨는 예전에 시위대 소속이셨습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카렌이 아직 정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조수로 있던 거예요.”
“아버지가 정부에서요?”
피스가 미심쩍다는 듯이 물어봤지만 한나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예, 정부 관계자가 아니라면 지하마을을 알 리가 없잖아요.”
다시 한 번 피스의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요동친다. 한나의 나이는 스물 하나, 아버지가 시위를 시작한 건 14년 전, 따라서 여유롭게 계산해도 한나가 아버지 밑에서 조수로 일한 건 일곱 살 때라는 결론이 나온다.
피스는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이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빠가 오랫동안 시위를 할 수 있던 건, 정부에서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어서 함부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한나 씨는 일곱 살 때 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건가요?”
“정확히는 다섯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예요.”
“…….”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피스는 입을 닫았다. 그 때, 주방 쪽에서 큰 외침이 울려퍼졌다.
“273번! 제육덮밥, 274번! 제육덮밥, 나왔습니다!”


5

피스와 한나가 주방으로 다가가자 또 한 차례, 주변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도 대화는 한나와 다른 사람들 위주로 이루어졌고, 피스는 적당히 질문에 대답이나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피스에게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피스는 한나라는 정부 측 사람이 이 지하에서 어떤 존재인지 서서히 감을 잡았다. 육체파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어딜 가든 사람들이 말을 건다. 이 마을을 유지, 관리하는 사람이면서도 마치 모두의 친구 같은, 인망이 두터운 군주의 모습이었다.
한나와 피스는 제육덮밥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었다. 피스는 밥을 받아들자마자 거의 흡입하다시피 먹었고, 한나도 나름 그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피스가 밥을 다 먹었을 때 한나는 밥을 절반 밖에 먹지 못했다.
하지만 식사는 거기서 끝이었다.
“다 드신 겁니까?”
“예. 평소 같았으면 희빈 양이 제 것도 반절은 먹어치울 텐데 말이죠. 아, 그나저나 여기는 제육볶음이 제일 맛있어서 마음대로 피스 군 것까지 시켰는데, 어땠나요?”
“맛있었습니다.”
피스는 대답을 한 뒤에, 자신이 식사를 하면서 고민했던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 밑에서 2년 간 일했다고 하셨죠?”
“예.”
“그럼 아버지 두뇌가 어떤지도 아시겠네요?”
피스가 한나를 시험해보고 있었다. 만약 한나가 정말로 카레의 조수였고, 2년 동안 조수로 일했다면 그 정도는 아는 게 당연하다.
지금 피스의 눈은 마치 덫을 쳐놓고 사냥감이 잡히길 기다리는 사냥꾼 같았다.
“물론이죠. 카렌은 감정을 이해, 분석하는 쪽으로 두뇌가 진화했어요. 뇌의 미세한 생체전기를 타인의 몸에 흘려 타인의 감정을 조종하기도 하고요. 맞지요?”
“아닙니다.”
무 자르듯 단호한 대답이 돌아오자, 정적이 주위를 감쌌다.
한나는 계속 웃고 있었지만, 피스의 싸늘한 시선 때문에 뺨에 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한나는 그 정적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해요. 저도 카렌과 같은 부류라서 그 밑에서 조수로 일했던 거예요.”
“아버지는 상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결과를 이끄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확인해본 적 있어요?”
피스는 실제로 확인한 적은 없다. 애초에 두뇌파는 그 특징이 겉으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피스는 한나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피스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정은 한가지였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들을, 정부가 기록하지 않았을만한 사실들을 듣는 것이다.
피스는 생각했던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셨습니까? 개인적으로 그쪽이 아는 아버지의 모습들을 말씀해주세요.”
“음, 일단 카레를 엄청 좋아했어요.”
이건 피스도 아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한나가 말을 이어갔다.
“뭐, 보온병에 카레를 담아서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하루에 보온병 10통은 들고 다녔던 거 같네요.”
“잠깐……만요.”
피스는 잠시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피스 앞에서는 분명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저녁으로 카레를 많이 먹었을 뿐이다. 보온병에 카레를 담는 것까지는 뭐 보관하려고 그러는 거라고 쳐도, 10통은 지나치다. 자식이라고 해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
피스가 손을 내리고 한나를 바라본 뒤 이야기를 계속해달라고 말했다.
“음, 그럼 계속할게요. 카렌은 좀 위험한 녀석이었어요.”
계속해서 웃고 있던 한나의 낯빛이 처음으로 어두워졌다. 그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졌고 한나는 먹다 만 제육덮밥만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말도 멈췄다.
일단 보온병 10통에 카레를 담아서 다녔다는 것 자체도 어떻게 보면 위험하다고 할 수도 있다. 정신적으로 말이다. 평범한 사람은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피스는 어떤 말이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불안함이 땀에 묻어나오는지, 피스의 손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어떤 점이 말인가요?”
피스가 재촉하자, 한나는 말을 이었다.
“로리콘이었거든요.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쿵.
한마디에 피스가 넉다운됐다. 식탁에 머리를 박은 것이다. 소리가 크게 울려 주변의 이목을 끌었지만 피스와 한나는 그런 걸 신경쓸 수 없었다.
피스는 식탁에 이마를 붙인 채 아버지를 돌이켜봤다. 확실히 피스의 아버지는 작고 어린 여자애들은 남자들이 보호해야한다고 가르치기도 했고, 우리 시위는 지하마을의 소녀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말도 했지만 그다지 범죄의 느낌은……. 아니, 자세히 생각해보니 약간 얼굴이 상기된 것도 같았다.
피스는 너무나 큰 충격에 할 말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하지만 웃음을 잃은 한나는 피스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조수로 뽑히자마자 아기공룡 옷이라든가 병아리 옷이라든가 입히면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을 하고…….”
피스가 어떻게든 머리를 들려고 했지만 이 말을 듣자 아주 조금 들어 올렸던 머리조차 다시 식탁에 붙어버렸다.
“그리고 6살이 되는 생일에 갑자기 결혼해달라고 고백을…….”
피스는 도저히 머리를 들 수 없었다. 존경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누구든 그럴 것이다.
그 때 피스가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들었다.
“역시 한나 씨는 제 아버지를 모르는 듯합니다. 제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피스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한나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역시 자식 앞에서는 안 그랬나 보네요. 그런 특이한 점만 빼면 카렌은 제멋대로에, 조금 괴짜 같고, 폭력을 싫어하고, 무뚝뚝한 것 같아보여도 사실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녀석이라고 할까요?”
“…….”
제멋대로에, 좀 엉뚱하고, 폭력을 싫어하고, 무뚝뚝한 것 같지만 사실 상냥하다는 점은 피스의 아버지 그 자체였다.
피스는 한나의 말을 듣고 더욱 더 혼란에 빠졌다. 한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시험하려고 했는데, 도리어 자신이 시험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피스는 한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한나의 표정에 변화는 없다.
“피스 군, 이번에는 제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예? 아, 네.”
한나가 카렌에 대한 회상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던 건, 아마도 피스의 날카로운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스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한나에게 집중하고 있던 터라, 한나가 말을 걸었을 때 피스는 놀라고 말았다.
“피스 군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으음…….”
피스가 고민하고 있자 한나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왔다.
“아직 죽일 수 있나요?”
“예?”
피스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아, 잘못 말했네요. 아직 살아 계신가요?”
질문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 때문에 피스는 잠깐 머뭇거렸으나 결국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사실 전 3살 때 아버지께 입양돼서요.”
“그러면 카렌은 계속 미혼이었다는 건가요?”
“예, 어렸을 때부터 저랑 아버지랑 이렇게 2인 가족이었습니다.”
한나의 얼굴에서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방금 전에 몇 마디가 오고가는 동안 피스는 피바람이 몰아칠 것만 같은 싸늘함을 느꼈으나, 이 미소 한 방에 주변 분위기는 따스한 봄처럼 변했다.
피스는 이런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미 피스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런 질문은 필요 없다. 하지만 한나는 그걸 굳이 물어 봤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한나가 의도한대로 일지도 모르지만 피스는 일단 자연스럽게 흐름에 따라보자고 결정했다.
“그런데 저에 대한 건 이미 다 알고 계시지 않나요? 정부에서 자료를 받아서…….”
“아뇨, 그건 아니에요. 카렌이 정부에서 벗어나면서 온갖 자료들을 엉망으로 해두고 가서요. 손실된 자료도 있었고요. 그 중 하나가 피스 군의 신상 정보였어요.”
“제 정보요?”
“예. 아마 피스 군을 양자로 받아들인 거랑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피스 군이 언젠가 지하마을로 올 거라고 생각해서 보호하고 있던 거 같아요.”
피스는 한나를 바라봤다. 한나의 얼굴에는 아주 잠깐 보였던 살기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해서 느껴진 다정함도 없었다. 그저 진지함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저를 보호한다니, 아니 그보다 제가 지하마을로 올 걸 알았다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피스 역시 진지하게 그에 반응했다. 그러자 한나는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여 피스에게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제 추측으로는 피스 군의 육체적 특징에 단서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알려줄 수 있나요?”
피스도 한나와 비슷한 몸짓을 하며 대답했다.
“제 육체적 특징은 그저 구인류보다 조금 더 신체적으로 뛰어나다는 것뿐입니다. 다른 육체파들처럼 특징 같은 건 없어요. 몸 자체도 다른 육체파들이랑 비교 해봐도 평균 수준이고요.”
이 대답을 듣자 한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자기 특징을 모른다 이건가요?”
“모른다기보다는 아예 없는 것 같은데요.”
한나는 한숨을 한 번 짓더니 피스의 이마에 손가락을 대며 대화를 속행했다.
“방금 전에 말했죠? 카렌은 감정을 이해, 분석하고 나아가서 조종까지 가능하다고요. 그리고 저 역시 카렌과 같습니다. 이렇게 저와 몸을 맞대고 있으면 피스 군의 생체전기의 흐름을 통해 피스 군의 감정을 제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어요. 거짓말 정도는 당연히 알 수 있습니다.”
“에……. 그 말은…….”
피스가 슬며시 몸을 뒤로 빼자마자 한나가 말로 저지했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 한 가지 질문을 할 거에요. 제대로 대답하세요.”
피스는 취조 받는 듯한 분위기 탓에 긴장해서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리고 슬며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한나의 손가락이 다시 피스의 머리에 닿았고 질문이 시작됐다.
“피스 군은 자신의 육체적 특징을 모르나요?”
“모릅니다.”
“정말로 피스 군의 육체는 구인류보다 신체적으로 조금 뛰어날 뿐인가요?”
“예.”
“마지막으로, 카렌은 정말로 미혼인가요?”
“예, 아니, 이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피스는 조금 의외인 질문에 그 의도를 물었다. 한나는 피스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몸을 뒤로 빼서 의자에 제대로 앉았다. 한나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소곳이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대답했다.
“궁금해서요. 그보다 육체적 특징이 없을 수도 있다니, 조금 곤란하네요. 정부 기록에도 없고, 카렌 군이 보호하려고 했던 아이라서 궁금했는데…….”
피스도 몸을 다시 의자에 제대로 앉혔다. 하지만 한나의 말이 뒤로 갈수록 혼잣말처럼 돼서 피스가 대답하기도 애매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말은 한나가 다시 이었다.
“그러면 싸움이라도 해볼래요?”
“에……. 전 폭력은 싫어해서요.”
“그래도 육체파들끼리 모여 있으면 서로 싸우면서 친해지니기도 해요. 그리고 어차피 여기 있는 미성년자들은 주기적으로 대련을 하도록 제가 시키고 있으니까요.”
“스포츠 같은 대련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스포츠랑은 거리가 멀 거에요. 서로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는 걸 목표로 싸우게 하거든요. 그래도 한 번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건 좋은 경험이에요. 자기도 모르던 힘이 솟아날 수도 있고요.”
“하하……. 그건 곤란하네요.”
피스는 그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쾅.
그 때, 식당 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리오너라!”
문에서 소리를 지른 건 바로 희빈이었다. 청록색 눈동자와 어울리는 고운 한복차림은 방에서 만났을 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희빈의 외침은 식당 전체에 내질러졌지만 그 눈길은 피스에게 고정돼있었다. 그러자 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녀, 이번에도 방해할 셈인 게냐?”
“저한테 덤벼든다면 당연히 말릴 거에요.”
그러자 희빈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한나의 말에서 속뜻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네 녀석한테 짜증났던 건 이미 풀렸네. 내가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건 바로 저 쓰레기 자식이라네!”
희빈의 손가락이 피스를 가리켰다. 피스는 희빈의 기세에 기가 죽었는지 차마 희빈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한나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 분은 왜 저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건가요?”
희빈은 이 소리를 얼빠진 소리라 판단했는지 이를 으득 갈고는 저고리 안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한나는 피스의 질문에 후훗 하는 웃음으로 대답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닐 걸요?”
희빈은 단검을 손에 쥐고 식탁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비어있는 식탁들을 발판삼아 피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살기를 띈 채로.
밥을 먹던 사람들은 조용히 식판을 들고 가장자리 쪽으로 발을 옮겼고, 한나 역시 피스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정쩡하게 희빈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희빈은 순식간에 피스에게 다가왔다. 희빈이 식탁을 박차고 뛰어오른 뒤 팔을 한껏 들어올리자, 피스는 자세를 낮추고 양 손으로 얼굴을 보호했다.
그리고 한나와 피스 두 사람이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폭력 금지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죽이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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