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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덜 든 고등학생*가시 돋친 중학생
글쓴이: 리루에스
작성일: 11-07-15 23:59 조회: 3,998 추천: 0 비추천: 0
이 세상엔 평생 동안 살아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이해해 봐야지. 이해해 봐야지. 아무리 몇 번이고 생각해도 절대로 알 수 없는, 내가 절대로 못 받아들일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저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렇게 사는 걸까.
아무리 서로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은 생길 수밖에 없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은,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도, 사람이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살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절대로 못 이해할 거라 장담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날라리 고등학생이랑 고집이 센 꼬맹이 여중생은 서로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이건 누가 봐도 또렷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날라리 고등학생 님이 철이 덜 들었을 땐, 더 이상 군말할 것도 없다.
원래 여자란 철이 덜 든 남자를 상대하는 걸 가장 꺼리는 법이다. 특히 그 여자가 고집이 좀 많이 세다면, 그런 남자랑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중학생 여자란 대체로 좋고 싫은 게 좀 많이 뚜렷한 편이다. 날라리 고등학생 역시 좋고 싫은 게 뚜렷하다면, 저 둘이 이야기해봤자 십중팔구 싸움밖에 안 난다.
날라리 고등학생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고등학생 남자 입장에서 키도 조그마한데다가 고집만 센 중학생은 참 골칫거리다. 여자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초등학생처럼 마냥 귀여운 것도 아니니 보고 있으면 짜증만 난다. 특히 그런 여자애가 자기한테 눈을 부릅뜨고 대들기까지 하면 진짜로 화가 난다. 이걸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치면 범죄고 안 치면 화병 나는,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개와 고양이 사이란 말이 딱 맞아떨어진다. 금성인과 화성인 사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이 둘은 아무리 봐도 친해질 만한 구석을 찾기가 힘들다. 아니, 친해지는 건 둘째 치고, 이해나 할 수 있나 모르겠다. 아마 이 둘이 서로 얼굴을 맞댈 일은 살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일 테지. 어쩌다가 그 일이 진짜로 일어난다 해도, 결국엔 개와 고양이 사이니 서로 너 잘났다며 입싸움만 진탕 해댈 것이다. 만약 이 둘을 사이좋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한테는 세계평화상을 줘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하나 재밌는 걸 생각해 보자.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지만, 만약 이 두 사람이 서로 뒤바뀐다면, 이 둘은 과연 어떤 사이가 되는 것일까?
언뜻 보면 이 둘은 물과 기름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사이지만, 의외로 서로 처지가 바뀌면 꽤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물론 맨 처음에야 무진장 당황할 터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안 당황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겠는가. 게다가 그 뒤바뀐 사람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면 더더욱 그렇다. 아마 처음엔 죽을 때까지 하늘을 원망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잔뜩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 둘이 시간이 지나도 계속 원수처럼 지내기만 할까?
아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둘은 의외로 천천히 마음을 트게 될 것이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 그렇지만, 둘은 천천히 서로가 비슷한 점, 그리고 서로의 약한 점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의외로 상대방이 이해할 수는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아챌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걸 드디어 알아챘을 때, 둘은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이도 성별도 뭐든지 뛰어넘은, 서로를 인정하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터다. 물론 이제 막 마음을 트기 시작했을 뿐이니,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 좀 어색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 둘이 그냥 친해져서 끝나면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어진다. 둘이 드디어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뒤부터, 이야기는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둘은 서로를 이해한 다음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그랬다가 또 시간이 지나서 바뀌고, 그랬다가 서로를 이해하면 다시 돌아오고를 되풀이한다. 가면 갈수록 원래대로 돌아갈 정도로 '서로를 이해하는' 게 깊어져야 하고, 둘 사이도 점점 더 달라진다. 이 둘은 서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품고 있던 마음앓이까지 풀어주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손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모든 사람들을 활짝 웃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면서 둘 사이도 점점 더 깊어지고, 서로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던 둘은 끄트머리에 가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맨 처음 만났을 때 서로 눈을 부라리고 싸우던 걸로는 생각지도 못하던 결말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둘은 이제 서로 철천지원수가 아니라,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 하는 게 더 옳을 터다.
……어유.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버렸네.
물론 이 책 한 권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다 박아넣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누구나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도록, 저 둘이 서로를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를 다룰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저 둘한테는 큰 사건일 것이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건방지고 짜증나는 인간을, 자기가 스스로 '사람'이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니까.

자. 그럼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앞으로 저 둘한테 어떤 일이 닥칠지를, 먼발치에서 발꿈치를 들고 가만히 지켜보도록 하자.

철이 덜 든 고등학생*가시 돋친 중학생

1. 운명의 날 - 고등학생과 중학생, 처음으로 '만나다'

그 날은 드물게도 노을이 참 예뻤다.
금빛 햇살이 바삐 움직이는 시내 번화가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이제 계절도 봄에서 여름으로 옮아가는 5월 마지막이다. 때마침 사람들이 많이 다닐 토요일 저녁 다섯 시쯤이기도 해서, 역 앞 번화가는 어디론가 발을 옮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토요일 저녁때다 보니 사람들도 참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었는데, 회사가 막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회사원들이나 이제 막 학교가 끝난 고등학생, 그리고 옛날에 학교가 끝나서 낮 동안 실컷 놀다가 아쉽게 집으로 돌아가는 중학생들 및 이제 몸은 대강 풀었으니까 더 놀아야겠다고 마음먹은 팔팔한 중학생들이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서로 팔짱을 꼭 낀 연인들도 있었고, 연인과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팔짱을 꼭 끼고 있는 여고생들도 있었다.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껄렁대며 상점가를 왔다갔다거리는 남학생도 보였고, 저녁 약속이라도 있는지 발걸음도 가볍게 역 근처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학생도 있었다. 나이가 든 사람도 있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키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모두 있었다. 이 근처에 사는 사람도 있었고, 저기 멀리에서 기차를 타고 온지라 아직도 눈꺼풀이 감겨 있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사람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몇몇 무리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빼면 서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물론 친구나 애인, 가족, 친척 및 친구의 친구처럼 사실상 남남인 사람이 우연히 같은 데에 있거나 자기를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일단 둘째치도록 하자.
아무튼간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있는 사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죽 서로를 모르고 살 사람들이다.

이렇게 서로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 이 이야기를 이끌 주인공 두 분이 서로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앞으로 자기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거란 사실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하물며 이런 말도 안 되는 천재지변을, 이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쨌든, 앞으로 이야기는 시작될 예정이다.
본인들이 아무리 싫다고 고개를 흔들어봤자, 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을 리는 없었다.

***

“아. 진짜. 짜증나네.”
그리고 그 주인공 중 한 명이, 저기 멀리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도 눈에 아주 잘 띄는 오렌지색 머리가 인상적인, 키가 훤칠하게 큰 남학생이 친구 두 명을 양옆에 두고는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대충 어림잡아보면 고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까. 누가 봐도 보통 고등학생보다는 훨씬 더 ‘노는’ 느낌이었지만, 아무튼 나이는 대략 그런 느낌이었다. 얼굴도 상당히 성질이 있을 것처럼 생겼고, 몸집도 다부진 편이었다. 아마 누가 싸움을 걸면 상대가 연장 좀 쓰는 분이 아닌 이상은 쉽게 질 것 같지 않을 것 같았다. 교복바지 속에 쑤셔넣은 양손이나 비죽비죽 튀어나온 머리카락, 그리고 반항기 청소년 특유의 날카로운 눈매 역시 이 남학생이 어떤 인물인지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남학생이 무슨 동네라도 주름잡는 줄 알겠지만, 사실 무서운 인상은 여기서 끝이다.
그럼 나머지는 어떤가 하니, 가만히 뜯어보면 우습다 못해 참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일단 얼굴부터 보면,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지만 귀에 한 저 금빛 귀고리가 아주 눈에 띈다. 물론 진짜 금은 아니지만, 진짜 금 못지않게 번쩍대는 큼직한 귀고리다. 동그랗게 생긴 그 금빛 귀고리는, 안 그래도 환한 저녁노을에 반사까지 되어서 아주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귀고리뿐만이 아니다. 남학생 귓불엔 귀고리 말고도 조그만 장식 같은 게 콕 박혀 있었다. 이건 은빛이었는데, 이 역시 햇빛에 반사되어 아주 눈이 부셨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그 빛에 못 이겨 고개를 돌리고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저 귀고리는 새겨진 문양만 정신사나울 뿐이지, 가만히 뜯어보면 별 신기한 것도 아니었다. 저런 건 아마 근처 시장에서 조금 비싼 값을 주면 쉽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은 나 이런 사람이야, 란 생각으로 저런 멋있어 보이는 장식물을 귀에 달고 다니는 모양이지만, 지나가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저건 무거워 보이는 요란한 물건밖에 안 되었다.
물론 시선을 끄는 건 귀뿐만이 아니다. 가만히 보면 코에도 귀에 붙은 거랑 똑같은 은빛 장식물이 있다. 분명 박은 사람은 자기랑 잘 어울릴지보다는 멋있어 보이는 걸 더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이 역시 지나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냥 눈만 부실 뿐이었다. 멋있다기보다는 겉멋만 든 걸로 보일 뿐이다.
얼굴에서 눈길을 떼고 아래로 가보면, 이것도 얼굴 못지않게 겉멋만 잔뜩 든 모습이다.
남학생은 ‘춘추복’을 입고 있었는데, 춘추복에 빠뜨리면 안 되는 조끼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넥타이도 엄청 헐렁하게 맨 데다가 시간까지 지난 고로, 조금만 더 있으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게 아닐까 괜히 걱정될 정도였다.
조끼가 없으니 와이셔츠는 잘 입었는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닌데, 가만히 보면 와이셔츠 단추가 두세 개 정도 가볍게 풀어져 있었다. 게다가 안에 아무 것도 안 입었으니 속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데, 부끄러움 잘 타는 여중생 정도라면 얼른 고개를 돌리려 할 정도로 많이 적나라했다. 사실 팔목 단추를 푼 다음 대충 걷어올린 것도 별로 보기 좋진 않았지만, 저기 위에 있는 것들하고 대보면 새 발의 피나 마찬가지였다.
이 밖에도 눈에 띄는 걸 하나하나 말하려면 입이 아프다. 발목에 딱 달라붙을 정도로 줄인 교복 바지에, 대충 둘러메고 있는 은빛 가죽가방에(이 역시 눈만 아플 뿐이었다), 뭘 바른 건지 줄무늬가 은빛으로 빛나는 운동화에, 저 건들대는 발걸음에…….
본인이야 어쨌든, 주변 사람 입장에선 그냥 좀 노는 애일 뿐이었다. 물론 본인은 자기 나름대로 멋있게 하고 다닌다고 여겼지만 말이다.

“그 개자식. 지금도 또 설치고 있겠지?”
남학생은 한숨을 푹 쉬며, 아무 것도 없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보면 남학생이 ‘그 개자식’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저 잠잠히 있기만 할 뿐, 아무 것도 가르쳐 줄 것 같지 않았다.
“왜. 들어가기 무섭냐?”
남학생과 같이 다니던 애들 두 명 중, 껄렁껄렁하게 보이는 친구가 그렇게 말하며 남학생을 놀렸다. 이 친구 역시 남학생만큼이나 번쩍이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학생보다는 훨씬 더 성격이 좋아 보였다. 다만 둘이 괜히 친구인 건 아니라서, 학교에서 받는 대접이나 멋부리기 좋아하는 성격은 거기서 거기였다.
“이 새끼가.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남학생은 정말 짜증난다는 말투로 그 껄렁껄렁한 친구한테 화를 내고는, 이윽고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냐.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그딴 놈이 내 아버지란 건 나도 진짜 짜증나지만, 지금 당장 거기서 나오기엔 상황이 또 개판이라고. 그나마 그 자식이 집에 가끔 오니까 다행이지, 만날 왔으면 진작 나왔다. 술이라도 안 먹으면 모르겠는데, 그 자식이 어디 술 안 먹는 거 봤냐?”
남학생과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남학생 친구들은 될 수 있으면 이 얘기를 안 하려고 한다. 이 얘기를 꺼내면 남학생이 짜증을 낸다는 걸 불보듯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남학생 자신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보통 때라면 저기 껄렁껄렁한 친구가 입을 잘못 놀렸다가 남학생한테 맞곤 했겠지만, 오늘은 자기가 먼저 꺼낸 얘기라서 때릴 상대도 없다. 그저 내가 미쳤지, 라는 말만 중얼거리며 아무 데나 발을 옮길 뿐이다.
"아무튼 너도 참 복이 없다. 인생 굴곡도 그렇지만, 생긴 것도 참 뭣같이 태어나서……."
"강찬식.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남학생이 무서운 눈빛으로 자기를 돌아보자, 껄렁껄렁한 친구, 즉 찬식은 재빨리 이야깃거리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이것만 봐도, 이 친구는 남학생한테 만날 당하고 산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에. 에이. 왜 그래. 그냥 하는 말이지. 넌 농담도 모르냐? 자식이 배운 게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이 새끼가 진짜. 죽을래? 너 오늘 굴다리 밑에서 형 좀 볼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다 제가 입이 싸서 그렇죠. 아. 아하하……."

이렇게 둘이 학교에서도 만날 그러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놀고 있을 때, 찬식 옆에서 묵묵히 같이 다니던 친구는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키는 남학생과 찬식 못지않게 컸지만,척 봐도 이런 불량학생들과 어울릴 법한 인물은 아니었다. 머리도 검은 색 그대로인데다가 교복도 단정하고, 안경을 쓴 얼굴도 이 친구가 모범생이란 걸 잘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남학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기와는 하늘과 땅 차이인 이 바보들과 같이 토요일 저녁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남학생은 누가 자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단 사실을 단박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를 보고는, 고개도 제대로 안 돌아본 채 이런 말을 뱉어냈다.
"백유현. 우리랑 다니는 게 그렇게 피곤하냐?"
"왜 니가 사람 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괜찮다. 그냥 니 가고 싶은 데로 다녀."
"지금 너, 나랑 장난하는 거지? 니 눈빛이 지금 뭐라 말하는지 아냐? 제발 니들 좀 여기서 헤어져서 집에나 가라. 딱 그런 눈빛이야. 알아?"
남학생이 반쯤 시비조로 이렇게 쏘아붙이는데도, 유현이라 하는 친구는 전혀 무서운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남학생한테는 관심 하나 없는 것처럼, 앞을 보며 이렇게 받아쳤다.
"어차피 니들 지금 집에 안 갈 거잖아. 오늘 볼 거 없어서 짜증난다며. 그리고 너도, 니네 아버지가 무서워서……."
"야. 이게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냐? 너 죽을래? 지금 나랑 싸우자 이거지?!"
가뜩이나 집에 있을 '개자식' 때문에 짜증이 있는 대로 나 있던 남학생은, 유현이 내뱉은 이 말에 정말로 화가 났다. 아까 찬식과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반쯤은 농담조였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사라지고 없었다. 남학생은 정말 사람 몇 명 잡아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요즘 들어 같이 다니기 시작한 주제에 건방진 소리를 해대는 유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표정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지나가는 사람 몇 명도 남학생을 불안한 표정으로 잠깐 보고 지나갈 정도였다.
"야. 니들 여기서 그러면 안 되지. 황제형 너도 이런 데서 싸우면 안 된다. 백유현 너도, 이 자식이 진짜로 열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는 주제에……"
"내가 한 말 중 이상한 게 있긴 있었어? 나는 그저 '아버지가 무서워서'란 말밖에 안 했는데. 자기가 찔리는 게 없으면 맨 처음부터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 아냐."
"……이게 진짜. 자기랑 놀아주는 걸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찬식이 모처럼 중재를 하고 있는데도 분위기 파악을 전혀 안 하려고 하는 유현 때문에, 남학생, 즉 제형은 정말로 화가 있는 데까지 치솟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량 학생이라 해도, 제형은 참을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결국 제형은 유현을 죽일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이윽고 자기가 스스로 눈빛을 거둬들였다. 화는 나지만, 일단은 참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개자식. 오늘은 내가 봐준다. 다음엔 얄짤없어."
제형이 이렇게 말하는데도, 유현은 아 그래. 라는 듯 고개만 까딱댔다. 제형은 이걸 보고 화가 더 났지만, 일단은 어떻게 참기로 작정한 듯했다. 이 둘 중간에 있는 찬식만 불쌍하게,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창고라도 되는 것처럼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형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백유현이라는 짐덩이를 내칠까 고민하곤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저 놈을 진짜로 내치려고 마음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형은 유현의 마음속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형은 그다지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유현을 내치기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요즘 우리 반 여자애들 꽤 외모에 신경쓰지 않냐? 나도 한 번 작업이나 걸어볼까 하는데, 제형이 니 생각은 어떠냐?"
어쨌든 이렇게 상황이 좀 나아지자, 찬식이 분위기라도 바꿔볼 겸 제형한테 이렇게 물었다.
"글쎄다. 솔직히 우리 반에 나한테 관심있는 애들이 있긴 하냐? 소문은 개판이지, 성적도 개판이지, 잘하는 것도 없지……."
"그치만 이대로 있긴 또 아깝잖냐. 니랑 같이 노는 여자애들 중에도 괜찮은 애들은 있던데? 한 번 작업해 보지 그러냐?"
"……됐다. 화장이나 두껍게 하는 애들은 이제 질렸어. 성격도 거기서 거기고."
"너, 이제 여친이랑 헤어진 지 꽤 됐지? 이젠 슬슬 새로 누구 하나 사귀어야 하지 않겠냐? 혼자서 외로운 밤 보내는 것도 질렸잖아. 아마 키스했던 것도 1년 전……."
"아 진짜. 오늘따라 이 자식 되게 짜증나게 하네. 니나 잘하세요. 남 걱정하지 말고."
제형은 그렇게 쫑알대는 찬식을 다물게 한 다음, 계속 갈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때, 제형한테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항상 그렇듯 별 것도 아닌 말이었지만, 제형은 그 말을 무심코 입에 담았다.
"꼬맹이."
"어?"
당황하는 찬식은 본체도 안 하고, 제형은 이렇게 말했다.
"꼬맹이만 아니면 돼. 시끄러운 것도 안 되고. 중학생 이하도 싫어."
"……너. 지금 니 취향 말하는 거냐?"
"그거만 아니면 돼. 아 진짜. 이젠 보는 것만으로는 지겨운데……. 어떻게 안 될까.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없다."

제형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산들대는 바람이,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것처럼 세 명을 가볍게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 집에 가기 싫어.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그리고 또다른 주인공 한 명이 제형 일행 정반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지금 이 둘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직은 서로가 있는지조차도 얼른 알아볼 수 없었다.
이번엔 여자애 한 명이 친구 두 명이랑 같이 역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앳된 티가 많이 남은 얼굴로 볼 땐 중학생인 것 같지만, 150도 될까말까하는 키만 보면 도저히 중학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이 근처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으니, 중학생인 건 틀림없을 터다. 여자애 주변에 있던 친구 두 명은 하나같이 여학생보다 훨씬 더 키가 컸는데, 둘 다 160 안팎은 되어 보였다.
여자애는 눈코입이 무척 또렷한 편이었는데, 딱 봐도 기가 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비록 키도 작고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지만, 함부로 했다간 진짜로 큰코다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말싸움 같은 걸 하면 절대 안 지려 할 것 같았다.
머리는 가지런히 뒤로 묶었는데, 그게 또 말총 모양이라서 여자애를 더 드세게 보이고 있었다. 아마 이 아이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작지만 가시가 매운 고슴도치를 떠올렸으리라. 겉으로 봐도 가시를 잔뜩 드러내고 있지만, 실제로 잘못 건드려도 엄청 아픈 고슴도치 말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 여자애는 기만 세고 귀여운 데는 하나도 없을 것 같지만, 물론 그렇지만은 않다. 고슴도치는 가시가 좀 많고 따가워서 그렇지, 가시가 없는 배는 참으로 말랑말랑하다. 여자애 역시 친한 사람들이나 자기 식구 앞에서는 나름대로 귀여운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다만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안 보여주니까 잘 안 보일 뿐이다.
여자애는 키도 작은데다가, 피부도 말랑말랑하고 얼굴도 묘하게 앙증맞은 게 참 귀여웠다. 귀여운 옷이라도 입혀 놓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쯤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볼 것 같았다. 사실 이 여자애는 보기엔 이래도 귀여운 옷이나 맛있는 음식(특히 단 거)을 상당히 좋아했다. 누가 이걸 가지고 어린애 취향이니 뭐니 말을 꺼내면, 눈을 부라리고 그 사람을 쳐다보면서 그런데 어쩌라고? 라며 대놓고 짜증을 내곤 했다.
제형과 달리, 옷매무새나 머리모양, 걸음걸이는 그야말로 모범생처럼 단정했다. 교복도 깔끔하게 잘 입었고, 줄인 데나 허름하게 입은 데 하나 없다. 머리도 깔끔하게 잘 빗었고, 손톱물이나 귀걸이 같은 것도 안 하고 있었다. 사실 봉숭아 물 정도는 매년마다 들이곤 하지만, 그걸 빼면 올해 중학교 2학년 여자애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을 안 부린 모습이었다. 하지만 여자애는 충분히 귀여워 보였다. 저 나이 땐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한 게 가장 예뻐 보이는 법이다.
대강 볼 때, 여자애는 자기가 또래보다 몸집이 작다는 게 그렇게 부끄럽진 않은 모양이었다. 친구들과 대볼 때 키가 확연히 다른 자기를 지나가는 사람 몇 명이 살짝 힐끔대는 걸 느껴도, 그냥 눈을 감고 지나갈 뿐이다. 항상 자기를 맨 처음 보는 사람들이 중학교 2학년이란 사실을 전혀 몰라주는지라, 굳이 말하자면 그것만 좀 화가 난다. 사실 요즘 들어 얼굴과 키 대신 몸만 나이대로 자라 허리도 들어가고 나올 데도 어느 정도 나왔지만, 이걸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름대로 여자애는 이게 자랑스러운데, 이걸 봐주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살짝 억울하다.

"어유. 우리 친구 집에 가기 싫어요? 오늘 언니네 집에서 자고 갈까?"
아무튼 여자애가 이렇게 불만을 늘어놓자, 바로 옆에서 같이 다니던 친구 둘 중 한 명이 장난기있는 목소리로 여자애를 위로했다. 이 여자애는 그냥 평범하게 생겼는데, 한창 멋부릴 나이인 중학생답게 여기저기 신경쓴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 친구는 여자애가 우는 소리를 나면 킬킬 웃으면서 그걸 다 받아주는 성격이리라. 언뜻 보기만 해도 한눈에 그러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싶은데 안 돼. 저번에 그랬다가 아빠한테 두들겨맞을 뻔했단 말이야."
여자애는 그렇게 말하면서, 누구한테 혼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자애 친구들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런 여자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친구들은 여자애 집안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도 뭘 어떻게 해 주고는 싶었지만, 중학생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에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무튼 너네 오빠도 참 나쁘다. 뭐가 잘났다고 만날 너네 아빠한테 반항하냐? 거기에 낀 너도 불쌍해. 만날 방에서 우리한테 가만가만 전화하고……."
"그러니까 혜은이 너도 딴청부리지 말고 전화 좀 제때 받으란 말이야. 만날 내가 전화할 때만 화장실 들어가 있고. 남은 진지한데."
"에이. 그건 안 되지. 우리 미래가 울면서 언니한테 전화하는 게 얼마나 듣기 좋은데. 솔직히 그건 이미래 니 잘못도 있다. 왜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만 전화하냐? 무슨 텔레파시도 아니고."
"……혜은이 너. 진짜 나빴다. 앞으로 맛있는 거 안 갖고 올 거야."
"어. 미래야. 잘못했어. 용서해 줘~!!"이렇게 여자애랑 혜은이가 만날 그러는 것처럼 다정히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 한 명이 이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친구는 머리도 짧고 겉모습도 단정했으며, 얼굴 생김새도 상당히 얌전했다. 아마 여자애, 즉 미래랑 혜은이와는 달리 말주변이 별로 없는 성격일 터다. 하지만 이 친구는 다정한 눈빛으로 장난치는 미래랑 혜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주변은 좀 없을지 몰라도, 성격 자체는 상당히 곱다는 게 그대로 드러났다.
"어. 시영아. 괜찮아?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어?"
그리고 이걸 얼른 눈치챈 미래 및 혜은이가, 둘이서 떠드는 걸 멈추고 시영이라 불린 여자애한테로 고개를 돌렸다. 시영이는 잠깐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고개를 저으면서 살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 괜찮아. 둘이 재밌어하는 게 보기 좋아서 그냥 봤어.""우리 한시영이는 마음도 참 고와요. 어디 사는 누구는 미운털만 박힌 고슴도친데."
"……김혜은 너 죽을래? 내가 왜 미운털 박힌 고슴도치야?!"
"맞잖아 뭐. 그런데 하늘도 참 딱하지. 왜 우리 시영이는 남자를 그렇게 무서워할까. 우리랑은 이렇제 잘 지내는데.""나는 괜찮아. 혜은이랑 미래처럼 좋은 친구도 있고……."
"어유어유. 우리 시영이 또 착한 말한다. 이러니까 언니가 우리 시영이를 격하게 아끼지. 이리 와 봐 같이 가자."
"아. 부끄러운데…….""그러지 말고. 같이 가면 얼마나 좋아. 자!"
혜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미래 및 시영이의 팔짱을 꼈다. 미래는 얘가 또 닭살돋게 군다, 는 표정을 하면서도, 결국엔 헤은이랑 같이 팔짱을 끼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집안에만 가면 웃고 싶어도 웃을 수가 없는 미래한테, 이렇게 친구들과 같이 있는 시간은 둘도 없이 소중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미래는 자꾸만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그렇게 미래가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근데 미래야. 너는 누구 사귈 생각 없어?"
갑자기 혜은이가 이런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미래는 옆에서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가, 갑자기 웬 소리야. 기, 김혜은 너……."
"왜 그래. 언니는 그냥 물어본 거뿐인데. 우리 미래가 가만히 보면 참 귀엽잖아. 시영이처럼 남자애들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누구 한 명 잡아다 사귀어도 될 거 같은데?"
"……너는 우리 반 남자애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미래는 짜증난다는 얼굴로, 그 '우리 반 남자애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사귈 남자가 없어도 그딴 애들하고는 안 사귄다. 만날 남의 키가 작다고 놀리지 않나, 틱틱댄다고 놀리지 않나……. 그런 놈들은 트럭으로 줘도 사절이네요. 아 진짜. 지금 생각해도 짜증나."
"그게 다 미래 니가 고슴도치처럼 따갑게 굴어서 그런 거 아니야. 니가 한 번 싱긋 웃어줘도 걔들이 난리칠 걸? 언니 한 번 믿어 보라니까."
"그러니까 싫대도. 혜은이 넌 왜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그러냐? 난 몰라. 그런 놈들한테는 관심도 없어."
미래는 그런 말을 혜은이한테 쏘아대고는, 아까처럼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그 때, 미래한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 생각은 참으로 별 게 아니었지만, 미래는 그 생각을 무심코 입에 담았다.
"날라리 자식."
"응?!"
혜은이는 물론 시영이까지 깜짝 놀라는 가운데, 미래는 하던 말을 계속 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들어가 있는 건 하나도 없는 놈. 그런 놈은 절대로 안 돼. 우리 반 남자애들 보면 알잖아?"
"아, 알았어. 근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그냥 말하고 싶었어. 가자. 좀만 더 놀다 가야지."

그런 말을 하며, 미래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또다시 산들대는 바람이,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것처럼 세 명을 가볍게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

“……뭐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짐작도 못 한 채 온갖 짜증을 다 내면서 번화가를 걷던 제형은, 저 멀리서 이리로 다가오는 미래와 친구들을 보고 살짝 놀랐다.
“왜. 뭐 예쁜 여자라도 있냐?”
제형이 놀라는 걸 보고 찬식은 장난스럽게 그런 말을 툭 던졌다. 이 장난스런 말 하나가, 앞으로 자기 친구 앞날을 크게 바꿀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좀 희한한 걸 봐서.”
제형은 이렇게 입을 열고는, 항상 그러던 것처럼 별 생각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중학생들 많이 컸다고 하지 않았냐? 아직도 저런 땅꼬마가 있어?”

한편, 미래네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역 앞을 지나가려다, 멀리서 봐도 눈이 부신 제형 일행을 보게 되었다.
“우아. 아직도 저런 날라리가 있단 말이야?”
미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을 자연스레 입 밖에 내고 있었다. 미래는 겉멋만 잔뜩 든 남자, 특히 날라리를 무척 안 좋아한다. 하물며 그런 인간이 자기 눈앞에 나타났을 땐, 감정을 숨기고 싶어도 숨기질 못하는 것이다.
“야. 미래야. 너 목소리 너무 커. 좀 줄여야지.”
“안 들리겠지 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게 뭐냐? 자긴 저게 멋있는 줄 아나 보지? 저거 그 날라리 학교 교복 아냐? 으아. 쪽팔려……”
미래네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제형 일행도 마침 미래 옆을 스치려 하고 있었다.
“땅꼬마가 뭐냐. 요즘 애들 키 작다 하면 스트레스 진짜 많이 받는다. 다 들릴라.”
“들리라지. 키작은 게 자랑이냐? 저런 애들이 성질은 또 더러워요. 자긴 잘난 것도 없으면서 목소리만 오질나게 크고.”
제형은 사실, 이 말을 미래가 진지하게 들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끼리 모여서 이렇게 철없는 이야기를 자주 했고, 설마 쟤가 이걸 귀담아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제형 입장에서는 학교에서 하는 선생님들 험담이나 지금 하는 이야기나, 다 비슷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조심해서 할 필요를 전혀 못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미래는 ‘자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말을 듣는 걸, 아주 많이 싫어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겉멋이나 든 머리 빈 남자’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미래는, 자기 맘에 안 들면 처음 본 사람한테도 막말을 서슴지 않는 애였다.
이쯤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제형 일행을 스치고 지나가려던 미래는, 정신이 확 들었는지 고개를 쳐들고 그 말을 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비록 몸은 또래보다 작았지만, 누군가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미래는 차마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험악했다.
“뭐야?”
제형도 이걸 알아채고는,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꼬맹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 눈엔 무척 어이없다는 느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제형은 만날 학교에서 주변 친구들하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가는 말에 이 애가 이 정도로 세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네. 아까 나한테 꼬맹이라고 말했잖아요. 자기가 한 말도 까먹고, 바보 아니에요?”
"뭐라고?!"
제형이 어이없어하기도 전에, 미래는 마치 따발총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엄청 빠르게 쏟아냈다.
"게다가 뭐, 성질이 더럽다고? 니가 내 성질 봤어요?! 당신하고 나하고 얘기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요? 왜 아무 것도 모르는데 헛소리예요. 니가 그렇게 잘났어요?"
"지금 참 잘 알았다. 이 기집애야!"
제형이 그렇게 소리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저 둘한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 저 두 사람한테 가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대체 이 인물은 뭘 먹었기에 이딴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게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냥 한 말을 가지고 여기까지 늘어지는 걸 보니까, 너 진짜 성질머리 더럽구나? 중학생 주제에 참 잘하는 짓이다. 너 남자친구 없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니도 없잖아요. 지는 없어도 되고 나는 없으면 안 된다 이거예요?"
"이 인간이 진짜. 너 자꾸 니, 니 그럴래? 내가 너보다 나이 많은 건 알지? 오빠라고 부르지는 못할망정, 뭐가 어쩌구저째?"
"야. 제형아. 진정……"
"오빠는 개뿔. 오빠같은 구석이 있어야 그렇게 부르죠. 님같은 인간 쓰레기한테 그런 말을 해서야 되겠어요? 너한테는 니도 아깝다."
"아 진짜. 이 년이!"

상황은 가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다.
제형과 미래는 절대 안 지겠단 표정으로 서로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중이었다. 저 둘이 얼마나 팽팽하게 노려봤던지, 누구 하나 저 둘을 말리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래 두 명이 어쩌다 붙은 싸움에, 옆에 있는 말리기 전문 새우 두 명은 어쩔 줄 모르고 그저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현은 당사자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데도 이걸 강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불이 난 데는 저 너머가 아니라 바로 여기인 게 뻔한데도 말이다.
이와 반대로, 시영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착한 시영 입장에서, 미래가 이렇게 무서운 오빠하고 맞닥뜨렸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무서운 거였다. 말려야 하는데. 말려야 하는데. 마음만은 이렇게 간절하지만, 차마 그걸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다.
그리고, 둘이 노려본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 어디 가서 그렇게 굴지 마라."
제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미래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뭐, 뭐하려는 거예요?!"
"뭐긴 뭐야. 그냥 가는 거지. 너랑 싸울 시간도 아깝다. 꼬맹이랑 싸워서 뭐가 좋냐."
제형은 그렇게 말하곤, 찬식 및 유현한테 눈짓으로 그만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찬식이 '이래도 되냐?'란 눈빛을 제형한테 보냈지만, 제형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럼 잘 지내라. 그리고 넌 쓸데없는 말에 일일이 트집잡는 성격 좀 버려라. 애가 그래서 어디 남친이라도 만들겠냐? 그렇게 살면 머리만 아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형은 친구들과 같이 그 자리를 떠났다.
자기가 한 말이야말로 상대방 생각은 이만큼도 안 한 꼬맹이같은 말이란 생각은 이만큼도 안 한 채 말이다.

미래와 친구들은 거기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태풍이 한바탕 불고 지나간 자리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황량했다.
"미래야. 괜찮아?"
초대형 태풍에 넋이 나가 있던 혜은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미래를 부축하며 이렇게 물었다. 미래는 제형 일행이 갑자기 자리를 뜬 뒤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가만히 보면 다리도 살짝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무슨 짓을 할지 짐작도 안 가는 모습이었다.
"나. 나……"
"응. 괜찮아. 언니한테 다 말해. 그 인간이 한 말은 다 잊어버려. 지가 더 못났으면서 왜 미래한테 그러나 몰라."
"혜은이 말이 맞아.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이스크림 먹을래? 미래야……"
이젠 시영이까지 더해서 미래를 감쌌지만, 미래는 여전히 고개를 들 생각을 전혀 안 했다. 목소리로 봐서는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남자애들 앞에서 우는 걸 정말로 싫어하는 미래 성격으로 볼 때, 그건 분명히 아닐 터였다. 그리고 사실 미래는 이런 걸 슬퍼할 정도로 여린 애가 아니었다. 미래는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나……못 참겠어."
간신히 입을 연 미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응? 언니한테 다 말해. 괜찮아. 다 받아줄……"
"아니. 나. 진짜로 못 참겠어."
그렇게 말하며, 미래는 아직도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걸 무시하고 고개를 확 들었다.
미래는 정말이지, 이루 말할 데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새빨개졌고, 눈가엔 눈물이 살짝 맺혔고, 호흡은 아직도 거칠었다. 하지만, 미래는 아직도 눈빛이 날카로웠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끝장을 봐야 한다. 미래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갔다올래."
"응?!"
혜은 및 시영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건 보지도 않은 채, 미래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그만두면 나 진짜 후회할 거야. 저 놈이랑 한 판 붙어야겠어. 너희들은 먼저 집에 가도 돼. 난 진짜 못 참겠거든."
"그……미래야?"
"그럼. 갔다올게."
미래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까 제형 일행이 사라진 계단으로 번개같이 뛰어갔다.
마지막으로 미래한테 말을 건 혜은과 시영이는, 그냥 멍하니 미래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

“야. 너 정말 괜찮겠냐?”
찬식은 아무 말도 없이 역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을 오르는 제형한테 이렇게 물었다. 이미 얼굴엔 땀으로 범벅이 된 채다.
“당연히 괜찮지. 그럼 거기서 계속 얼굴팔리고 있으란 말이야? 쪽팔려 죽겠는데.”
제형은 그렇게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유현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제형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제형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는 유현이라 할지라도, 불난 집에 부채질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 걔한테 별로 좋은 짓한 건 아니잖아. 지금이라도 가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제형은 이렇게 딱 잘라 말하면서, 찬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대체 무슨 소리냔 표정이었다. 애초에 모든 일은 자기가 입을 잘못 놀려서 벌어진 건데, 본인은 그걸 별 것도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 이래서야 일이 해결될 리 없다.
“아니. 너도 알잖냐. 원래 키작은 애들이 그런 말하면 많이 상처받아요. 물론 걔 성질도 좀 많이 셌지만……”
“그러니까 그게 어쨌냐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을 뿐인데 먼저 시비를 건 걔도 문제지 않냐? 조그만 주제에 목소리만 댑다 커서……."
"거기. 잠깐만요."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제형 일행이 층계참까지 다다랐을 때, 뒤에서 누가 제형한테 말을 걸었다. 어쩐지 귀에 익은 목소리라서 무의식중에 고개를 확 돌려보니,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아까 그 여자애, 미래가 제형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넌 또 할 말이 남았냐?"
"무지 많죠. 누가 혼자 도망가래요. 내가 언제 말 끝났다고 그랬어요?"
"너도 참 끈질기다. 이제 적당히 좀 해 주면 안 되겠냐? 오빠 바쁜 몸이거든?"
"바쁘긴 개뿔. 할일도 없어서 아무 데나 돌아다니는 주제에……"
이렇게 미래와 제형이 또 한 판 붙자, 역 앞 사건 뒤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금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찬식 역시 또 골치아픈 일이 벌어졌단 생각에, 그냥 머리만 짚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 유현은 어떤 생각에 골똘히 빠진 표정으로, 제형과 미래, 저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야. 너 진짜 끈질기다. 키가 작은 게 그렇게 서럽디? 남자애들이 놀려대서 그렇게 짜증나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요. 너는 키가 커서 좋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거든요? 키가 큰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나 봐. 머리는 텅 비었는데 키만 커서 그렇제 자랑스러워요?"
"너, 중학생치곤 말 참 잘 한다. 이렇게 나 이기려고 들면 기분 좋냐? 누가 이러라고 가르쳤어?"
"니가 뭔데 상관이에요. 그러는 댁은 누가 그러라고 가르쳤는데요? 부모님이 집에서 참 좋은 아들이라 칭찬하겠다. 그죠?"
"……뭐?"
이 대목에서 제형의 눈빛이 확 달라진 걸, 미래는 미처 그걸 깨닫지 못했다. 사실, 미래가 제형의 집안 사정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을 까닭이 없었다.
"내가 틀린 말한 건 아니잖아요. 분명 너희 부모님도 당신 이러는 거 보고 참 좋아하실 거야. 그 부모에 그 아들……"
여기까지 말하던 미래는, 자기가 말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했단 걸 알고 무심결에 입을 두 손으로 꽉 막았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빨개질 대로 빨개진 제형이 그걸 그대로 넘길 리가 없었다.
"이 인간이 진짜, 보자보자하니까……"
제형한테 부모 운운하는 말은, 금기를 넘어서 미친 짓이었다. 그건 찬식도 엄청 잘 알고, 같은 반 남자들도 잘 알며, 제형을 전혀 안 무서워하는 유현조차도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처음 보는 꼬맹이 여중생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감히 누구도 안 하려 하던 제형네 집안 사정을, 별 것도 아닌 것처럼 건드렸다.
그리고, 제형은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 인간을 봐줄 인격은 못 되었다. 그게 아무리 오늘 처음 본 꼬맹이 여중생이라 해도 말이다.
"야. 이 년아."
제형의 얼굴이, 몇 발치 떨어져 있는 미래한테도 보일 정도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누가 남의 집 얘길 함부로 하래. 니가 날 아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이게 장난하냐?!"
사실 가만히 보면 이 모든 일은 제형이 입을 함부로 놀렸기에 시작된 것이지만, 원래 철이 살짝 덜 든 제형이 이걸 신경쓸 리가 없었다. 지금 제형 머릿속에 있는 건, 감히 부모 운운한 꼬맹이 여중생한테 내는 화, 단지 그것뿐이었다. 이미 주변 사람들도 얘가 정신을 살짝 잃었단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미래 역시 그걸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당신도 우리 엄마아빠 말했잖아요. 처음부터 그런 말만 안 했으면 내가 그런 말을 왜 해?"
"그래서, 지금 니가 한 게 잘한 짓이란 거야? 너희 집안 사람들은 다 말을 그렇게 해?"
"그러니까 처음부터 꼬맹이란 말을 안 하면 되는 거잖아요. 나도 부모님 들먹이기 싫었단 말이에요. 그 쪽이 하도 말을 함부로 하니까……""그런다고 니가 내 부모님 들먹인 건 다 봐줄 수 있는 거냐? 너희 집안 참 말 곱게 한다. 설마 니 오빠가 너보다 더 심한 건 아니지?"
"……그,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자기가 잘못했으면서, 왜……."
제형은 한 발짝 한 발짝, 미래가 있는 계단 근처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미래는 무심코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친다. 1초 1초가, 마치 1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찬식은 이 둘은 진짜로 뜯어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현도 그렇게 생각했다. 미래를 생각해서 계단 바로 아래까지 온 혜은 및 시영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이 계단 층계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형이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다. 미래가 아까처럼 뒷걸음질을 친다. 자기도 모르게, 뒤꿈치가 바닥이 없는 텅 빈 곳을 무심코 짚는다.
미래가 그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었다. 미래는 그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계단 층계에서 붕 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가까이에서 봐도 얼른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제형은 곧장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걸 알아차린 순간, 제형한테서 모든 분노가 싹 가셨다.
지금 제형의 눈에 비치는 건 미래가 아니었다. 몇 년쯤 전에, ‘아버지’ 자식한테 주먹으로 두들겨맞은 뒤,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던 제형의 엄마였다. 엄마 역시, 지금 미래처럼 뒤로 휘청대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 때, 제형은 엄마를 잡아드리지 못했다.
이젠 잊었을 거라 생각했던 기억이, 오늘 이 일로 다시금 되살아난다.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제형이 저걸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두 번 다시 두 손 놓고 지켜보지 않겠다 맹세했다. 이번만은, 어떻게 해서든 구하고 싶었다. 저번에 저지른 그 실수를, 지금이라도 만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제형은 그 생각 하나만으로, 재빨리 미래가 있는 데로 뛰어갔다. 그 나이 또래보다도 운동신경이 더 좋은지라, 뛰어가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미래가 땅에서 완전히 발을 떼는 게, 제형이 거기 다다르는 것보다 더 빨랐다.
미래는 이제 완전히 공중에 떴다. 이젠 그대로 7단 계단을 굴러떨어질 뿐이다.
상황을 눈치챈 몇몇 사람들이, 그걸 보며 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그걸 본 제형은, 미래한테로 자기 오른손을 죽 내밀었다.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러떨어진다는 상황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빈 미래는, 자기 눈앞으로 뻗은 굵고 큰 손을 본다. 그리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손을 꽉 잡는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미래는 이미 땅으로 몸이 상당히 기운 상태였다. 아무리 몸집이 있는 제형이라 할지라도, 아래로 많이 기울어진 무게중심은 이길 수가 없다. 결국 자기도 몸이 기울어져서는, 앞으로 쑥 떨어진다.
그렇게 서로 오른손을 꼭 잡은 채, 제형과 미래는 계단 맨 아래로 빙그르르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둘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때,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다.
이 둘한테,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사람 구경하기 좋아하는 하늘이 내린, 작지만 커다란 기적 말이다.

당사자들은 이것도 모른 채, 그저 텅 빈 머리로 바닥에 떨어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구경꾼들마저 숨을 죽이는 가운데, 아까부터 먼발치에서 이 둘을 지켜보던 맹한 긴머리 여자애만이, 놀라는 기색 하나 안 보이고 저 둘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야. 일어나야지. 야…….”
아득하게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제형은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떴다. 짧은 시간 동안 워낙 여러 가지 일이 확 일어났던지라, 대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일단 기억나는 건 미래란 이상한 여자애. 그리고 걔랑 역 앞에서 싸웠던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고 계단을 올라왔더니 걔가 따라오기까지 했지. 그래서 거기서 또 한판 붙었다가, 걔가 자기 엄마까지 들먹이는 바람에 진짜로 화가 났었다.
그래서 다가가려 했는데, 미래가 발을 헛디뎌 계단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그걸 보고 든 어떤 생각 때문에, 제형은 미래한테 곧장 달려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 물론 그 애가 떨어지는 걸 그냥 서서 지켜볼 수는 없단 까닭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걸 보고 엄마가 떠오른 것도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론 어떻게 되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뒤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제형과 미래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6층 정도 있는 계단에서 뚝 떨어졌다. 아마 자기가 미래 머리를 감쌌던 것 같긴 한데, 너무 순식간이라서 또렷이 떠오르진 않는다. 어쨌든 이렇게 정신이 멀쩡하니, 아마 다 괜찮을 것이다. 몸이 어쩐지 좀 많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게 높은 데서 뚝 떨어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기까지 떠올렸으면 됐다. 얼른 일어나야지. 느낌을 보니 여긴 아직 땅바닥인 것 같은데, 이런 데서 다 큰 사내자식이 쓰러져 있으면 한스럽게 보인다.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팔다리가 좀 굳은 것 같지만, 그래도 이젠 정신을 차릴 때인 게 분명했다.
“으. 으……"
앓는 소리를 나지막이 내며, 제형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좀 뻣뻣하긴 했지만, 일단 움직이기는 한다. 다친 데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높은 데서 떨어졌으면 내 몸이 이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텐데. 뭔가 좀 많이 이상하단 생각이 든다.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그 미랜가 뭔가 하는 여자애는 어떻게 됐지.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정신 비슷한 게 확 든다.
살며시 몸을 일으켜 불안정하게나마 길바닥에 앉았다. 눈은 아직 제대로 못 뜬 상태다. 햇살이 너무 눈부시다. 이제 해도 질 때가 됐는데, 눈이 너무나도 부셔서 참을 수가 없다.
가늘게 눈을 떠 본다. 세상은 살짝 그늘지긴 했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 대부분이 자길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지금 이 상황은 절대 보통내기가 아니니까.
……그건 맞는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다.
저 계단이, 원래부터 저렇게 높았던가?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원래부터 저렇게 키가 많이 컸던가?

한편, 미래 역시 수런대는 소리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어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맨 처음엔 미래도 제형만큼이나 머리가 얼른 돌아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찬찬히 머릿속에 들어왔다.
자기가 어쩌다 보니 난간에서 발을 헛디뎠다. 여기서 죽나. 란 생각을 했을 때 제형이라고 하는 저 밥맛없는 인간이 나한테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자기는 계속 떨어졌다.
……그리고, 제형도 같이 떨어졌다.
어. 잠깐. 그럼 이거 살짝 위험한 거 아닌가?! 일단 아픈 데는 없는데, 당장 병원이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주위에서 사람들도 보고 있을 텐데? 아 이런. 쪽팔려. 나 어떡하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미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뒷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한 채, 미래는 마치 용수철이라도 된 것처럼 자리에서 펄쩍 일어났다.
“어?”
그렇게 자리에서 펄쩍 일어난 미래는, 뭔가 좀 많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세상이 갑자기 너무 작아졌다. 자기가 무슨 난쟁이들 나라로 옮겨온 것도 아닐 텐데, 사람들이며 건물들 크기가 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이것도 다 높은 데서 떨어졌기 때문일까?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기 몸 자체도 뭔가 좀 많이 이상하다.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몸 자체가 통째로 바뀐 것 같다. 겉도 좀 딱딱해진 것 같고, 느낌도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이건 좀 말하기 어렵지만, 그, 있어야 할 게 없고, 없어야 할 게 있는 듯한 느낌이…….
“제형아!”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다. 오늘 만난 그 나쁜 자식의 이름이었을 터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상하다.
대체 왜 그 놈을 부르는 소리가, 저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들리는 거지?
왜 아까 내가 냈던 목소리가, 한없이 낮고 무겁게 느껴지는 거지……?
“야. 이 자식아!”
미래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아까 들은 적이 있는 고등학생 남자 목소리가 미래한테 달려들었다.
“괜찮냐? 아까 떨어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 몸은 좀 어때?”
“누. 누구세요?!”
미래가 반쯤 겁에 질려 이렇게 되묻자, 달려든 고등학생은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래를 쭈그려앉아 쳐다보더니, 이런 질문을 했다.
“누구라니. 너 황제형 아니냐? 애가 높은 데서 넘어졌더니 미쳤나? 왜 그런 걸 되물어?”
“……누구라고?”
가면 갈수록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따라잡을 수가 없는 미래한테, 지금 이 상황을 한 번에 알려주는 마무리 공격이 퍼부어졌다.
“미. 미래야. 괜찮아? 괜찮은 거지. 응?!”
“누가. 미래라고?”
진짜 미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냥 거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야. 제형이 너 왜 그래? 체했어? 아. 그게 아니지. 넌 저기 계단에서 떨어졌는데…….”
“누가……미래라고?”

그리고 제형 쪽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제형 역시 이 이상한 상황에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 자기 옆에는 아까 그 여자애 친구로 보이는 애들이 몰려들어서 괜찮냐고 계속 묻고 있다. 평소라면 ‘이게 뭐야?!’라고 당장 고함을 질러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지금 제형한테는 그럴 기운도 없었다. 제형은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어지러워 돌아가실 지경일 뿐이었다. 저 시끄러운 계집애들한테 뭐라 말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제형한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건 믿을 수 있고 없고가 아니다. 이건 있을 수 없다. 온세상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도 이건 꿈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 꿈이어야 한다.
하지만 제형은,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자기 눈앞에 얼뜬 표정을 한 자기 자신이 주저앉아 있는 걸, 두 눈으로 아주 똑똑히 보고 있었다.
“저거. 뭐냐?”
무심코 던진 말에, 그 시끄러운 여자애들 중 한 명이 얼른 답했다.
“응? 저거?”
제발 아니어라. 제발 아니라고 말해라.
제형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그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가볍게 빗나갔다.
여자애들 중 가장 시끄럽던 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저게 누구긴. 너랑 싸웠잖아. 그. 고등학생 오빠.”

제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란 표정으로, 저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저기에 있는 ‘자기 자신’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 자기가 한 명 더 있다.
아니,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으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둘은 거의 동시에, 사람이 엄청 많이 다니는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젠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저 둘을 쳐다보았지만, 저 둘한테 지금 그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금 자기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이건 꿈이어야 한다. 아니. 제발 좀 깨게 해 줘. 이건 좀 아니잖아. 그지?

어쨌든, 우리가 이 상황으로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그건 무진장 비현실적인 거고, 또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참 우스운 일이지만, 그리고 참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이고. 이런.
저 둘, 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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