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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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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신(神) - 제 1장.
글쓴이: 스마일
작성일: 11-07-15 23:59 조회: 4,732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그럼 내일 보자~!”
“응!”
활기찬 작별인사를 건넨 어린소년이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손목을 들어 내려다보니 짧은 시계바늘이 2를 가리키고 있었다. 뭣하면 더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겠지만, 최근 들어서는 잘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 다발하는 교통사고가 그 이유였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화제를 불러일으킨 의문투성이의 교통사고들. 게다가 피해자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
‘연속교통사고’라는 명칭하의 어린이 사망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걱정이 앞선 부모들이 ‘학교가 끝나면 빨리 집으로 오거라’ 라는 식으로 아이들에게 미리 일러두었던 것이다.
학교 역시 조치를 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후 수업을 중단시키고, 12시가 되기 이전에 집으로 귀가시키는 방침이 적용되었다.
학교는 일찍 끝나는데다가, 집에도 일찍 가야한다.
결과적으로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줄어들게 된 소년은 한숨만을 푹푹 내쉴 뿐이었던 것이다.
달려가던 소년의 시선이 오른쪽을 향했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다니는 차도. 쌩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속을 파고 들어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소년은 평소라면 할 리가 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순진무구한 그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의문은,
‘자동차에 부딪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몸이 뻥하고 날아가게 되는 걸까? 아니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나려나? 음, 부딪쳐서 날아가면 하늘을 날 수도 있지 않을까? 뻥~하고, 슝~하고 날아가면 구름 위에 올라갈 수도 있겠지? 자동차들은 저렇게 빨리 달리는 걸! 자동차하고 부딪치면 분명 천사님이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어떤 말이 소년의 뇌리를 스쳐갔다.
『만약에 네가 천사님이 된다면, 네 엄마랑 아빠가 많이 슬퍼하실 거야.』
누군가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들었던 것 같았다.
소년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엄마 아빠가 슬퍼지는 건 싫다. 그러니까 빨리 달리는 저것들한테는 가까이가지 말자. 자칫하면 천사님이 될 수도 있으니까.
소년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을 재빨리 정리했고, 다시 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
어디선가 ‘휘리릭’ 하고 피리소리가 바람처럼 흘러왔다. 무척 경쾌한 음으로,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소리가 소년의 귀에 봄바람처럼 살랑였다.
소년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보았다. 방금 전에 바라봤던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는 길. 분명 방금 전과 다를 것이 없는 광경이다.
하지만 그 속을 좀 더 파고들자, 전에는 없었던 그 무언가가 소년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곳에는 피리를 부는 장신의 남자가 있었다. 돌출된 콘크리트에 앉아, 남자는 역동적이고도 우아한 피리소리를 흘려대고 있었다.
황금빛이 나는 그 피리를 하얀 장갑으로 쥔 채, 입가에 대어 휘리릭, 휘리릭.
소년은 귓가에 흐르는 그 소리가 그저 평범한 관악기의 소리만으로는 들리지가 않았다.
무언가, 남모를 매혹적인 마력이 담겨있는 음(音).
마치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어느 새인가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부르는 피리소리에 현혹(眩惑)되어 점점, 점점, 도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소년의 귓가에 그 피리소리 외의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하게 울려대는 경적소리조차 소년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았다.




1장.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티비에서 교통사고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엉망진창으로 부셔져버린 현장이 비춰지고 있었다.
“최근 들어서 빈번하네요, 교통사고.”
네모난 바보상자를 바라보다가 슬쩍, 맞은편에 앉아 여전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검희 씨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그러네.”
시선을 노트북 화면에 고정한 채 검희 씨가 대답했다.
“그것도 어린애들이 주 대상이래요. 정말 잔인하지 않나요?”
“그러네.”
이번에도 단답형인가.
“검희 씨, 제대로 듣고 계신 거죠?”
“물론이지.”
“그럼 제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지 말씀해보세요.”
“뽀O로가 사실은 북O에서 만들어졌다는 얘기 아니었나? 확실히 그건 놀랄만한 얘기였지.”
도대체 어딜 어떻게 들으면 교통사고에서 뽀O로랑 북O 문제로 화제가 전환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 지금 검희 씨의 상태가 소귀에 경 읽기라고는 해도 이런 슬롯 체인지가 가능하다고 보진 않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 너무 몰두하고 계신 모양이다.
“바쁘신 건가요?”
“아니었니? 뽀O로.”
“아닙니다.”
“그럼 셧 다운제가 도입되었다는 얘기였던가?”
“그건 잔혹하기 보단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잖아요.”
내가 그 대상이었다면 인정 못했겠지만. 청와대 앞까지 또래 녀석들을 인솔해가서는 대항의를 벌였을 게 분명하다.
“어쨌든 아니에요.”
“그럼 뭐였는데?”
“그 얘긴 이제 됐어요. 지금 전환된 화제는 검희 씨가 바쁜 가 아닌가하는 문제예요.”
뭐, 사실상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지만, 눈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계신 이분은 꽤나 변덕이 심해서 말이다. 주기적으로 말을 걸어주지 않으면 나중에 꼭 한마디를 하거든. ‘왜 말을 안 걸었어.’ 라든가, ‘우리 사이가 이렇게 소원했었나?’ 라든가, ‘일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말을 걸어주길 원하는 걸 왜 눈치를 못 채는 거야? 이 둔팅아’ 라든가. 나 참, 고양이도 아니고.
“어제까지만 해도 여유만만이셨잖아요? 시간은 많으니까 쉬엄쉬엄하자고도 말씀하시고.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이라…. 있었지, 무슨 일.”
“무슨 일인데요?”
드디어 검희 씨가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소파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보는 사람조차 우울해질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다음 달 중순에 나오는 5권의 마감이 말이야…, 실은 앞당겨져 버렸거든. 엄청 여유로웠는데 어제 밤에 담당이 전화해서 그렇게 말하더라. 덕분에 지금 쓰고 있는 원고를 다음 주까지 완성시켜야 될 판이야.”
과연 그랬었나. 그래서 오늘은 만났을 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던 건가. 이미 두드린다기보다는 파괴한다는 게 이미지 상 맞는 것 같지만.
“그 망할 자식, 뭐가 죄송합니다~야. 그렇게 죄송하면 어떻게든 시간을 늘릴 생각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검희 씨가 신경질이 난다는 듯이 긴 검은 생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나 같아도 열 받을 것 같긴 하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라던 숙제가 사실은 오늘까지 마감이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 때의 그 기분은 쉽게 익숙해질 수가 없는 법이거든.
“너도 조심하는 게 좋아. 이쪽 업계에서 살아가게 되면 각오하고 덤벼들지 않음 안 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까.”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온 말이로군요.”
“모든 건 경험으로 이뤄지는 법이지. 그리고 단계를 밟아나가는 거야. 갓난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해서 걷기까지의 과정처럼.”
단계는 뭔 상관이래.
검희 씨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식 선풍기를 바라보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아니, 왠지 생각을 한 다기보단 갈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갈림길을 벗어난 검희 씨가 앞에 놓여있던 검은 노트북을 옆으로 치웠다.
“그것보다 아까 얘기하던 거, 무슨 얘기였어?”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고 계시더니 결국은 현실도피를 선택하셨나보다. 바로 노트북화면에 얼굴을 파묻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말이야.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는 한 마디 콕 집어서 말해주는 게, 검희 씨한테도 나한테도 득이 될 일일지 모른다.
“저기…, 그거 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응? 그거라니? 이거?”
검희 씨가 방금 옆으로 치운 검은 노트북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그거요.”
“아 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잡아먹진 않겠지. 애초에 저쪽에서 잘못한 일이니까.”
그렇게 자기합리화해서 남는 게 대체 뭐라고. 누가 잘못했건 결국은 원고를 마감해야하는 게 자신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계시지 못한 모양이다. 이래서야 더 이상 말해봤자 헛수고일 것만 같다. 그냥 쉬는 겸해서 잡담에 어울려드리면 되려나?
“아까 하던 얘기가…분명히 교통사고가 빈번하다는 얘기였죠.”
“흐음…, 교통사고라…. 요즘 빈번해지긴 했지. 이상할 정도로.”
“그렇죠? 그것도 대부분 어린애들이 대상인 사고래요.”
“어린애들만 인가…. 잔혹하네. 인생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애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가다니 말이야. …아니,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지도 몰라. 험한 세상을 알기 전에 떠나버렸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봐요.”
이 사람은 방금 자신이 내뱉은 그 말 한마디가 전국각지의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두 번 울리는 위험한 발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다시 왼쪽 편에 놓인 티비로 시선을 향해보니, 이미 교통사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화제의 뉴스를 보도하는 앵커가 화면에 비춰지고 있었다. 대충 들려오는 소리로선 또 채소 값이 올랐다나 뭐라나.
“……교통사고라….”
최근 들어서 교통사고에 대해 보도되는 뉴스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툭 하면 차에 치여 숨지고, 중상을 입고, 또 입원을 하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이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하다. 어린애들이 대상이 되는 사고가 개중 가장 많은 빈도수를 차지한다는 점 역시 그 의문점을 뒷받침해준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가 아이들을 과자의 집이란 이름의 죽음의 길로 유혹하는 것만 같다고나 할까.
뭐, 뭘 어떻게 말해도 매번 치는 사람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의도적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삼도천 너머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이리오렴’ 이라며 부르는 것과 같은 느낌…은 아니구나, 이미지가 안 맞네.
“흐음…, 하멜른인가….”
“네?”
무심결에 답하자 검희 씨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어라? 최근 들어 발생한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어린애들의 증언, 아직 안 들어봤어?”
“증언이요?”
어라, 그런 게 있었나? 애초에 교통사고에 증언 같은 게 필요하기는 하나? 그냥 우연적인 사고인데 말이야. 관심 있는 화제가 아니어서 거기까지 자세히는 몰랐는데…, 묘하게 신경 쓰이네.
“뭐라고 했다는데요?”
“그게 말이지. 사고를 당하고 살아남은 아이들 모두가 사고 직전에, 피리소리를 들었다는 거야.”
피리소리라…. 그렇군. 하멜른. 즉 피리 부는 사나이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 분은.
“들리는 소리로는 사고 직전에 피리소리가 들려서,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차에 치였다고 하더라.”
“에이, 그게 뭐에요. 그냥 지어낸 얘기겠죠.”
“교통사고까지 당한 마당에 과연 그런 거짓말을 칠 여유가 있을까? 그것도 어린애가. 게다가 한두 명이 그런 게 아니라 살아남은 아이들 모두가 그렇게 증언했어. 진실을 왜곡하면 못 쓰지.”
진실왜곡이라 부를 만한 것도 못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 수수께끼의 증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근 발생하는 교통사고가 더 더욱이 누군가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깊어지고 있다나봐. 왜 있잖아. 그…, 연속 교통사고였던가? 큰 소란이 되기도 했었잖아?”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교통사고를 인위적인 시점에서 본 것은 아무래도 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다. 뭐, 당연하려나? 어딜 어떻게 봐도 여태까지는 없었던 이상 현상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연속이라…. 어쩐지 그런 게 붙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다.
“정말, 뭔가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하멜른입니까?”
검희 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상황이 비슷하잖아?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소리로 아이들을 현혹해서 데려간다.’ 라는 점이 딱 이네. 그리고 믿는다고 한다면 우연이 겹친 평범한 사고라는 것보단, 숨겨진 비밀,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의해서 일어나는 의문의 연속 교통사고라는 쪽이 훨씬 덜 절망적이잖아?”
“브라우닝 씨는 그렇게 생각 안할 걸요.”
자기가 쓴 소설이 연속교통사고 같은 것에 비교대상으로 삼아지는 걸 좋아할 저자는 없다고 보는데.
“아, 거참 시끄럽네. 기껏….”
거기까지 말했을 그 때, 검희 씨의 주머니로부터 딩가딩가 하고 희한한 벨 소리음이 들려왔다. 벨이 울리자마자 검희 씨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시더니, 바로 수신자명을 확인하셨다.
“아.”
얼굴을 잔뜩 찡그리는 걸로 봐선 담당자님으로부터의 독촉전화인 모양이다. 그러게 본업에나 충실하시지. 썩은 우유를 잔뜩 마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검희 씨가 귀찮다는 듯이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담당편집자님과 실랑일 벌이는 검희 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벽에 걸려있는 시계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직 6시 밖에 안 된 건가…. 이거 곤란 하네…. 검희 씨, 저 상태라면 앞으로 두세 시간은 담당자님 험담만 늘어놓으실 텐데 말이야….
물론 중요한 건 검희 씨가 험담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청자상대가 되어주느냐, 아니냐이다.
결국은 하게 되겠지만.
“으휴…, 오늘은 글렀네.”
라고 말하며, 이젠 검은 대기화면만이 가득 찬 넷 북을 조용히 옆으로 치워두었다.



* * *



시간은 벌써 10시 20분.
나는 지금 집으로 향하는 마을의 골목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검희 씨의 끝이 없을 것 같던 주정이 끝난 뒤, 짐을 꾸려(그래봤자 넷 북 하나 밖에 없지만) 단골카페를 뒤로 하곤 이렇게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나 참, 도대체 몇 시간을 잡아먹은 거야. 여차하면 출판사랑 전쟁이라도 벌일 판이네. 검희 씨도 빨리 납득하셔야 할 텐데 말이야…. 언제쯤 순응하는 게 운명이라는 걸 깨달으실지….
“으휴…, 이것 참….”
뭐, 그 건은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어차피 내가 고민해서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신경 써서 머릿속을 포화상태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는 당연하다고 해야 되나, 사람은커녕 사람그림자조차 보이지가 않았다.
컴컴한 골목길을 밝히는 가로등만이 가로수마냥 쭉 늘어서있을 뿐, 차가운 이미지를 심어주는 형광불빛들이 콘크리트 바닥을 싸늘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단조로운 길을 걸으며, 상쾌해지고자 ‘스읍’하고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전신에 시원한 공기가 맴돌았다.
그 때였다.
“저기…. 이러시면 곤란한데요.”
“…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퍼득 놀라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러자 저 앞에 가로등 밑으로 몇 몇의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오밤중에 뭐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야, 같이 가자니까?”
“얘 말하는 거들었냐? 곤란하다는 데?”
“곤란하기는 무슨. 응? 어때?”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호기심을 못 이기고 다가가 보니, 아직 중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들의 중심에 왠 여자애 한 명이 서 있었다. 곤란하다는 듯이 계속해서 손을 내젓고 있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자애는 핏기가 없을 것이라 착각할 정도로 새하얗고 말끔한 피부와 잘 단정되어있어 윤기가 흐르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보관’되어 왔다는 이미지를 뇌리에 각인시키는 것만 같았다.
간단히 말해서, 적어도 이런 지방마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곁눈질만으로도 단번에 미소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쁘장했으니까 말이다.
나이 대는 주위를 둘러싼 남학생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고등학교 2학년인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아래이려나.
여자애는 왠 인형을 하나 안고 있었는데, 전체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꽤나 독특하게 생긴 인형이었다. 실크 햇과 정장, 구두. 심지어는 피부까지. 검은 머리카락과 노란 눈동자를 제외한 모든 것을 새하얀 색으로 통일한 신사인형이었다.
그리고 외모에 비해서 차림새는… 뭐, 별반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늘색 원피스…. 그것 한 벌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가자니까?”
…아니지, 일단 그건 둘째 치고. 음…, 혹시 헌팅이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서, 설마 성희롱!?
“응? 이 인형은 뭐야?”
“아, 안돼요. 이건 안 돼요.”
“아 이런 이상한 거보다 우리가 더 재밌게 해준 데니까~?”
여자애가 금세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젓는다. 한 놈은 여자애가 안고 있는 인형을 빼앗았고, 나머지 두 놈은 계속해서 찝쩍댔다. 아직 성희롱인지 뭔지 잘 파악은 되지 않지만, 어쨌든 이대로 두면 위험할 것만 같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지금 당장에라도 저 여자애를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야! 너희들!”
부름과 동시에 여자애를 둘러싼 세 중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하는 짓을 볼 때부터 알았지만, 상판대기를 보니 진짜 불량아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귀걸이에, 목걸이에, 심지어는 부분염색을 한 녀석도 있었다. 불량 3인조의 고개 너머로 눈을 돌려보니 방금 전까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던 여자애가 보였다. 뭔가 불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아까는 살짝 살짝 웃고 있었지만, 결국은 여자애이다. 역시 불안했겠지.
불안에 떠는 여자애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저 불량한 놈들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3인조에게 돌렸다. 녀석들이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잠깐 나 좀 보자.”

“뭐야, 벌써 끝난 거야?”
“재미없게 시리…. 야, 그만가자.”
“편의점이라도 갈까?”
몸을 돌려 제 갈 길들 가시는 중학생들의 뒤태를 보며, 나는 지금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이, 이건…예상외였다. 분명히 겁을 먹거나 해서 슬금슬금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고등학생이란 신분이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게다가 싸움은 둘째 치고 갑자기 와서 쳐대니, 당해낼 수가 있나. 나도 참 추한 놈이다. 도와준답시고 달려들었다가 이런 꼴이라니.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당장 들어가고 싶다.
“에휴….”
은근 서글퍼지네. 역시 운동 좀 할 거 그랬나.
“저, 저기!?”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으려니, 뒤통수 쪽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내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듯이 말했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어요?”
“어? 아, 괜찮아. 이 정도야, 뭐.”
사실은 엄청 아프지만.
“저, 정말인가요?”
여자애가 다시금 물었다.
“정말이야.”
억지웃음을 띄우며 그렇게 대답하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아까와 같은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진짜 미소다.
“다행이에요.”
이하동문이다. 나 역시 위험에 빠진 이 애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정도 상처쯤이야, 금방 낫겠지 뭐. 처음에는 중학생 녀석들한테 졌다는 사실에 다소 창피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웃어주니, 나로선 고마울 따름이다. 내가 한 일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기쁘다.
“자, 이거.”
품에서 신사인형을 건네며 내가 말했다. 혹시 인형에 무슨 흠이라도 생겼을까하고 걱정이 되어 살펴보았지만, 다행히도 그리 상한 곳은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거친 손을 오간 것치고는 너무 깨끗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아!”
건네준 인형을 와락 껴안으며 여자애가 짧게 외쳤다. 그리고는 인형과 시선이 마주보게끔 그것을 위로 번쩍 들더니,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하양이 씨.”
하곤 다시 꼭 껴안는다. 과연, 이름이 흰둥이인 모양이다. 이상하기보단 왠지 모르게 납득이가는 이름이다. 옷도 하양색, 피부도 하양색. 비록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만큼은 통일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것만으로도 영락없는 흰둥이였으니까 말이다.
“소중한 거니?”
“네, 엄청 소중한 인형이에요.”
저렇게 기쁜 표정으로 말하는 걸보니 정말 소중한 인형인가 보다. 괴상하게 생겼긴 하지만. 히죽히죽 거리는 게 꼭 날 보며 비웃는 것 같다.
“정말 감사드려요. 저…, 답례로 뭐라도….”
“아니야, 아니야. 내가 좋아서 한 일인데 뭐. 신경 쓰지 마.”
“네? 하, 하지만….”
“괜찮대도 그러네?”
여자애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왠지 풀이 죽은 새끼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보답을 받다니, 당치도 않다. 물론 이 여자애를 구하려고 중학생 녀석들에게 싸움을 걸긴 했지만, 결국에는 내가졌잖은가. 녀석들이 여자애한테서 신경을 끄고 돌아선 것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으로 빚어진 결과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도 감지덕지한 마당에 보답은 무슨.
“마음만 받아두도록 할게.”
“아…그…. 네…알겠습니다.”
여자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건 그렇고…이제 어쩐다? 아까 그 중학생 녀석들은 어찌어찌 쫓아(?)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늦은 밤에 여자애를, 그것도 이렇게 예쁜 애를 혼자 보내는 건 너무 위험천만하다. 또 아까 같은 상황에 빠질지도 모르고…. 게다가 중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이나 어른한테 걸릴 가능성도 있다.
지금은 내가 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은데…. 뭐, 싸움 쪽에서는 도움이 안 되긴 하지만, 도망치게 해주는 것까진 가능하겠지.
“너희 집은 이 근처야?”
“네? 집이요?”
여자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 데려다 줄게. 너무 늦은 시간인데다가 아까처럼 위험한 녀석들하고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아, 아니에요! 괘, 괜찮아요.”
“어? 아니…, 그래도…….”
“저, 정말! 괜찮아요.”
“…그, 그래?”
엄청 완고하네. 그렇게 싫은 건가? 하기야, 구해준답시고 나타나선 멋지게 깨졌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 이해한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여자애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본인이 싫다고 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도 억지로 데려다줄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역시 그냥은 못 두겠어.
“그럼 말야, 이거라도 받아둬.”
주머니에서 오천 원짜리 지폐를 찾아내 눈앞의 여자애에게 내밀었다.
“네? 저기 이건?”
“데려다주는 건 무리여도, 택시비는 대줄게. 역시 너무 위험하다니까?”
“아, 아니에요. 괜찮…….”
거절하는 여자애에게 반강제적으로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다.
“아, 정말 괜찮다니까?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이거 받고 빨리 택시타고 집으로 가. 알았지? 그럼 난 간다!”
“자, 잠깐……!”
갑작스런 작별인사를 하며,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이제 됐다. 이대로 쭉 집까지 달리도록 하자. 저 애는 계속 사양하는 것 같았지만, 세상에 어떤 남자가 저렇게 곤란한 상황에 처한 여자애를 그냥 둘 수가 있겠냐고. 비록 그 돈이 이번 달 마지막으로 남은 비상금일지라도, 어떻게 한명의 여자애와 비교할 수 있을까. 애초에 비교조차 할 수 없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걸로 작별이다.
얼마나 뛰었을까. 여자애가 있던 장소로부터 웬만큼 달려온 것 같아, 슬슬 속도를 늦춰 뜀박질을 멈췄다. 뒤돌아보니, 그곳엔 어둠만이 먹구름마냥 가득 깔려 있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나는 문득 오른손바닥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여자애의 손에 지폐를 쥐어줄 때 맞닿은 손.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피부의 감촉이 남달랐다. 솔직히 말해 순간 두근거렸다. 연애도 한 번 못해본 순정남에게 여자애랑 접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거든. 게다가 걘 무지 예쁘기도 했고 말이야. 지금이라면 아주 조금은 그 불량 3인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어라.”
…뭐야, 나 지금 웃고 있는 건가? 나 참, 분명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겠구나. 헤벌레~하면서 말야. 사랑이란 감정에 메말라있던 내 속을 여자애와의 접촉이라는 갑작스런 소나기가 내려 적셔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들뜬 모양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이라도 더 그 여자애랑 대화를 나눠서, 사이를 가깝게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돈 주기 전에 말이나 더 나눌 걸 그랬다. 어휴….
앞으로 또 만날 기회 같은 건 없겠지? 아마도 그 애, 엄청 잘 사는 집 애 인거 같으니까 말이야. 보통 사람하고는 뭔가 차원이 다른 느낌이라고나 할까, 웬만해선 쉽게 조우하기가 힘든 상대일 것 같다.
“아아, 아까워라.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한 순간의 경솔한 선택으로 이뤄진 후회되는 결과에 한 숨을 내쉬며, 무신경적으로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뭐, 이미 지난 일 가지고 끙끙대봤자 좋을 것도 없겠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5층짜리 빌라를 향해, 씁쓸한 발걸음을 옮겼다.



* * *




“어서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날 반겨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내 여동생, 수진이었다.
노랑게 물들인 긴 머리카락.
화장기가 엿보이는 얼굴.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
귀걸이.
어느 모로 보나 그 불량배 녀석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나마 여자인데다가 웬만큼 귀엽게 생겼으니까 망정이지. 만약에 이 녀석이 남자였다면, 난 진작 부모님께 별거 신청서를 내밀었을 거다. 하여간…,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는….
“다녀왔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수진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야, 너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뜬금없이 왠 헛소리?
“숨기는 일? 없는데.”
“에이~, 거짓말 하지 마~.”
에이~는 무슨.
“거짓말 안 했어.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이거 봐,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없으니까 물어보는 거다, 이 바보 여동생아.
“아~뭐야 진짜.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말 하고 자시고 간에 숨기는 거 전혀 없어. 그 의심하는 버릇이나 좀 고쳐라.”
이 녀석은 언제나 이렇게 사람을 의심해놓곤 허탕만 친단 말이야. 나 참, 이번엔 또 어떤 오해거리를 들고 와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건지.
내가 계속해서 청렴결백함을 주장하자, 수진이는 ‘아~그러셔. 없단 말이지?’ 라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아무 말도 않고 홱 돌아서더니 현관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서 있던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쟤가 왜 저러지?”
묘하다. 정말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저 망설임이 없는 뒷모습….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 몸을 휘감아 온다. 뭐지?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설마…, 내가 컴퓨터에 몰래 숨겨놓은 금단의 영상이 발견된 건 아니겠지? 만약에 정말 그런 거라면…. 저 녀석은 지금 부모님에게 그걸 폭로할 작정일 게 틀림없다. 크윽…,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여동생 같으니라고…!
수진이는 벌써 현관 앞에 서서 문을 열고 있었다. 어쩌지? 일단 사과하고 용서해달라고 말해볼까?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서 떠벌리거나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천방지축 녀석이 비밀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말은 해봐야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말야.
나는 현관으로 들어서는 수진이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진이는 짧은 비명을 지르더니, 내 손을 뿌리치곤 다짜고짜 소리쳐댔다.
“가, 갑자기 뭐야!”
“미안.”
내가 정식으로 사과했다.
“어?”
갑작스러운 사과에 수진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팔짱을 끼며 태연히 말했다.
“그래, 드디어 말할 생각이 든 거야?”
“응,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턴 주의할 게. 두 번 다시 네가 그런 걸 보게 될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모님께만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려는 순간,
“뭐? 그런 거라니?”
…어라.
“그런 거라니, 뭐야?”
수진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날 째려보았다.
“오호라~, 또 뭐 숨기시는 게 있다 이거지? 어디 한 번 제대로 얘기해봐. 또 뭘 숨기고 있는 건데?”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니가 제 무덤을 팠구나.’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거렸다.
“아니, 저…그게 아니라…….”
“뭐냐고.”
수진이는 더욱 몰아붙여 왔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하던 그 때,
“어라? 오셨네요?”
내 귀에 불과 30분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하며, 여동생에게 향하고 있던 시선을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돌려 보았다.
집 현관에 있을 리가 없는 인물이 서 있었다. 방금 전에 골목길에서 마주쳤던,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여자애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뭐, 뭐? 기, 기다려? 아니, 그게 무슨…….”
“아, 빨리 들어오세요. 밥 다 됐으니까요.”
여자애는 거기까지 말하곤 부엌 쪽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여자애가 서있던 현관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야, 저건 뭐니?”
옆에서 수진이의 쫑알대는 소리가 내 머리통을 흔들어 깨웠다.
“…뭐가?”
“숨기는 거 없다매.”
“…뭐가 없어?”
“여친.”
“……….”
…이게 뭔 일이래.

“응? 리아야, 그 인형은 뭐야?”
“네? 아, 이건 하양이 씨예요.”
“하양이? 아…, 취미가 좀 독특하구나?”
“그, 그런 가요?”
“아니, 그런 걸 물어볼 게 아니잖니. 그래, 아가씨는 우리 아들하고 사귄지 얼마나 됐나?”
“음………아, 거의 세 달이 돼가네요.”
“이야, 벌써 그렇게나 됐어? 우리 아들 장하네. 아니, 왜 말 안했어. 이렇게 참한 아가씨면 아빤 언제든 오케이다.”
“하여간, 얘도 참.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한테 먼저 얘기를 했어야지. 리아라고 했지? 이름이 영어네? 혹시 외국에서 살다온 거니?”
“아………아, 아니에요. 계속 여기서 살았답니다. 그……어머니.”
“어머, 세상에. 나보고 어머니래요, 여보.”
“아 그래, 나도 들었어. 어디, 나한테도 한 번 아버님이라고 불러보지 않으련?”
“정말 신기하네. 이렇게 평범한 오빠가 이렇게 예쁜 애랑 사귀고 있을 줄이야.”
하하하하하하하ㅡ.
“……….”
머리가 돌 것만 같다. 왜 저 애가 우리 집 식탁에서 내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는 거지? 그것도 내 여자 친구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말이다.
설마 이거 몰래카메라는 아니겠지? 예를 들면, 저 리아(?)라는 애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 연예인이고, 저기 안방에는 작전대기실이 있는 것이다. 집안 곳곳에는 감시카메라는 물론이고 마이크까지 설치되어있겠지.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빠밤! 여태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하고 이O규가 나오는 거다.
…너무 억지스러웠나. 하지만 정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납득이 가질 않는 상황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어라? 밥 안 드세요?”
“어? 어, 어. 먹어야지. 밥.”
으아…, 어색해. 어떡하지? 지금 당장 부모님한테 사실대로 털어놔야 되나? ‘사실 얘는 오늘 처음 만난 애고 내 여자 친구도 아니에요.’ 라고?
아니야, 잘 생각하고 행동하자. 이거 분명히 사실대로 얘기하면 엄청나게 큰일 난다. 단란한 가족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뀔게 분명하다.
우선 사실대로 털어놓은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수진이는 둘째 치고 부모님까지 난리를 피우실 게 틀림없으니까. 일단 리아와 단 둘이 얘기해서 이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의 끝을 맺는 것이 현재로선 최우선일 것 같다. 그러려면 우선 둘이서만 있어야 할 텐데…. 방으로 불러볼까.
“…저, 저기….”
““응?””
“…아무것도 아니야.”
리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날 주시했다. 하하하하, 가지가지 하네. 이 상태로 방에 가자는 얘기는 못하겠는 걸. 분명히 물고 늘어질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야.”
왠 뭉툭한 게 옆구리를 찌르고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수진이가 눈에서 레이저를 쏠 기세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넌 자기 여자 친구가 집까지 인사드리러 찾아왔는데 어떻게 아무 말이 없냐?”
그 답은 간단하다. 여기서 내가 한 마디라도 뻥긋하면 집안이 아수라장이 될 테니까.
“지금은 밥 먹는 중이잖아.”
고기반찬을 입에 넣으며 내가 짧게 말했다. 수진이 역시 ‘재미없게 시리….’ 라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입이 근질거려서 미칠 것만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리아에게 질문공세를 퍼붓고 싶은데…, 상황이 맞질 않다. 어떻게 해서든 둘이서만 있도록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봐야 할 텐데…….
“저기….”
“응? 왜 그러니, 리아야?”
“잠시만 자리에서 일어나도 될까요? 사실 오늘 여기에 온 건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거든요….”
순간 귀가 솔깃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리아가 계속해서 날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한테 할 말이라고?
“괜찮을까요?”
머뭇거리며 물어보는 리아에게 부모님과 여동생을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괜찮다며 방에 들어가 보라고 말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고, 나 역시 거의 가족들에게 떠밀려가다시피 하여 내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뭐지…? 갑자기 일이 잘 풀리네…. 뭐, 좀 수상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잘된 일이다. 이제 드디어 리아가 무슨 꿍꿍이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알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다.
혹시 리아가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것도 그 꿍꿍이에 관련된 게 아닐까?
“그럼 좋은 시간 보내~.”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게 수진이가 문 틈사이로 조용히 속삭였다. 시끄러워.
쾅. 하고 방문이 닫히고, 겨우 나와 리아가 단 둘이서만 있게 되었다. 리아는 먼저 들어와서 신기하다는 듯이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리아를 침대 위에 앉힌 뒤, 나도 책상 앞에 앉았다.
“……….”
“……….”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니까 정말 연인사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품에 안고 있는 저 웃긴 인형만 좀 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은근 맘에 안 든다.
서로 간에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말이야,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좀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
“왜 네가 우리 집에 와 있는 거야? 여자 친구는 또 뭐고? 우리 집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넌 대체…….”
“자, 잠깐만요.”
리아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물론 지금 이해가 안 가시는 게 많을 거란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잠시만 그건 덮어두고 제 말을 들어주시겠어요? 정말 중요한 얘기에요.”
“중요한…얘기?”
“…네.”
방금 전, 그녀는 내게 할 말이 있어 여기에 온 것이라며, 부모님께 나와 단 둘이 있게끔 해 달라고 말했다. 중요한 얘기라….
“…내가 방금 물어봤던 것들하고 관련이 있는 얘기야?”
“네.”
리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련성이 있는 내용이라면 굳이 지금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대로 리아가 하는 얘기를 듣는다면 내가 품었던 모든 의문들을 풀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건, 무척 중요한 얘기에요. 그러니까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리아가 곧은 의지가 담긴 눈을 빛내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얘기를 시작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입을 열려는 순간,
“야!”
갑자기 수진이가 방문을 확 열며 소리를 질러왔다.
“꺅!?”
“왁!?”
크게 울린 문 여는 소리와 수진이의 목소리에 나와 리아가 서로 놀라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수진이는 그런 우리들을 보더니 익살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방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깜짝 놀랐잖아. 뭐야?”
“뭐긴 뭐야. 엄마가 너랑 리아 먹으라고 과일 깎아 놨으니까 먹으라고.”
“그럼 적어도 노크는 하고 들어오던가. 왜 굳이 소릴 지르면서 들어오는 건데.”
“그거야 내 맘이지.”
이게 진짜.
“어라? 혹시 내가 좋은 분위기 망쳐놨어?”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좋은 분위기를 망쳐놨지.
“아, 아니에요. 망쳐놓긴요. 괜찮아요.”
책상 위에 과일 접시를 올려놓는 수진이에게 리아가 ‘감사 합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리아는 정말 친절하네~. 누구하곤 틀리게 말야.”
사돈 남 말하네.
“그럼 좋은 시간 보내.”
방문 앞에 선 수진이가 손잡이를 돌리며 말했다.
“시끄러워, 빨리 나가.”
“너한테 말한 거 아니거든?”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흥!’ 하더니,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하여간 누굴 닮아서 저렇게 성격이 못된 건지 모르겠다. 남매지간인데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로 딴 사람인 줄 알겠다.
“나 참….”
한 숨을 푹 내쉬며, 나는 리아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럼 하려던 얘기 계속해.”
“아, 아, 네.”
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드디어 얘기를…….
“…응?”
어라, 갑자기 리아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뭔가 빠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리아야, 너 인형은 어쨌어?”
위화감의 원인을 눈치 챈 내가 물었다. 독특하고도 괴상하게 생겨서 나름대로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던 신사인형이 리아의 품에서 사라진 것이다. 혹시 방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인형은 찾을 수 없었다.
“어쨌냐니까?”
다시금 묻자, 리아는 이상하게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저러지? 그냥 자기 인형이 어디 있는지를 묻는 것뿐인데 말이야.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리아는 그저,
“아…저…그….”
라는 말만 옹알이처럼 반복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왜 저렇게 당황해하는 거…….
“이야~, 방금 들어오셨던 분은 여동생 분이십니까? 정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곤란하네요. 저렇게 무턱대고 들락날락거리시면 얘기를 진행할 수가 없으니까요. 조금 손을 써 봐야겠습니다.”
등 뒤 쪽에서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놀라 뒤를 홱 돌아보자, 그곳엔 왠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다.
‘별나다’란 생각이 들 만큼. 아니, 오히려 ‘이상하다’란 생각이 들 만큼 외견이 괴상한 남자였다. 실크 햇에 정장, 구두, 장갑, 그리고 피부.
이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고양이처럼 노랗게 빛나는 눈동자와 파마를 하여 힘을 준 듯한 검은 머리카락을 제외하곤 전부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리아가 들고 있던 신사인형의 1:1사이즈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새하얀 복장에, 노란빛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히죽히죽, 웃고 있는 모양까지. 남자는 인형과 똑같았다.
혹시 이 남자가 지금 사라진 신사인형의 참모습이 아닐까하는,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이 들 정도로, 똑같았다.
“누, 누구야, 당신!! 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나는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조건반사적으로 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앞을 감쌌다. 남자는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이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만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냐니…, 이상한 걸 물으시는군요. 아까부터 같이 있었잖습니까.”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남자.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까부터 같이 있었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당장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을 빼들었다. 자판으로 112번을 누른 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일단 경찰서에 신고부터 하자. 그럼 남자도 더 이상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진 못할 거다.
하지만,
“…어?”
수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뚜우ㅡ.’하고 들려야 할 그 수신음이, 들리지 않았다. 이게…어떻게 된 일이지…?
“으흐흐흐. 소용없습니다.”
남자가 나를 향해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소용없다고?
“제가 약간 손을 써 놨거든요.”
손을 쓰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건 대체…….
“당신…누구야.”
“누구?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뭐?”
남자는 자신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가슴팍에 댐과 동시에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꿰뚫어볼 것만 같은 날카로운 노란빛 눈동자를 내게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하양이입니다.”
하양이.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여자애와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이름. 품에 안고 있던 신사인형의 이름. 흔하고도 공허한, 또는 깔끔하고도 청결한 색으로 온 몸을 도배한 인형의 이름.
“흰둥이….”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입에 담자,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흰둥이라뇨? 하양입니다, 하양이.”
흰둥이건 하양이건 거기서 거기인 이름이다.
이 흰둥이라는 남자의 말을 토대로 한다면,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이 그 인형 ‘흰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씨도 안 먹히는 변명거리다. 사람과 인형이 동인인물일 리가 없잖은가. 거짓말을 해도 좀 제대로 된 거짓말을 해야지.
“젠장.”
나는 혀를 차며 남자를 보았다. 남자를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틀림없이 큰일이 벌어지고 말거다. 지금 내 등 뒤에 있는 리아부터 수진이, 엄마, 아버지까지. 이 정신 나간 싸이코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그 전에 내가 어떻게든 해야….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는데….”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척 보기에도 내가 털이 곤두선 고양이 꼴을 하고 있었나보다.
“제가 그 귀여운 인형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시는 모양이군요.”
당연하다. 나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 얘기해도 정신 나간 얘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는 수 없군요. 정 그러시다면,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떠십니까? 인형에 대해선 인형의 주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리아에게…?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잘 생각해보니 남자의 말도 그렇겠거니 싶어 등 뒤에 서 있는 리아를 돌아봤고,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저 남자랑 아는 사이야?”
리아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다. 정말 리아가 이 남자와 아는 사이였다니…. 나는 놀란 마음을 잠시 추스르며, 다시금 물었다.
“저 남자가 말하는 게 사실이야?”
“…믿기 힘드시겠지만….”
긍정. 그렇다는 건, 리아는 지금 그 신사인형이 이 장신의 남자와 동일한 존재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째서? 어째서 리아는 저 남자의 말이 맞다고 말하는 거지? 리아는 정말 저 남자랑 아는 사이에다가 저 남자가 그 인형이라고 말할 셈인 건가? 정말로?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웃기고 있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 인형이 이 남자로, 이 남자가 그 인형으로 변신을 한다고? 장난 하냐? 여긴 판타지소설이나 s.f영화의 속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저기…, 괜찮으시다면 이제 얘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얘기?”
“네,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또다. 또 날 속이려고 한다.
“…이젠 됐어.”
“…네?”
이 여자애는, 리아는 저 남자와 작심하고 날 놀리려는 속셈이다. 딱 보기에도 왠지 속이기 쉬울 것 같으니까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여자 친구라고 말하면서 까지 날 골탕 먹이려는 거다.
간단한 일이다. 남자는 창문으로 들어오거나 하는 식으로 내 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온 것이고, 인형은 아마 이 방 어딘가에 감춰져 있을 거다.
이 정도로 날 속이려고 하다니. 흥, 그렇게 쉽게 속을까보냐.
그 얘기란 것도 분명히 별 시답잖은 헛소리에 비하는 이야기일 게 분명하다. 어디선가 보거나 읽었던 소설이나, 만화나, 드라마나, 영화에 따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게 분명하단 말이다.
그럼 지금 당장 난 어떻게 해야 될까? 리아와 남자, 저들이 할 얘기가 어떤 건지 알면서도 그대로 들어야 할까? 아니, 나는.
“그만 나가줘.”
“…네?”
“못 들었어? 그만 나가달라고.”
“…하, 하지만.”
“변신이라던가, 괴물이라던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걸 믿던 시절은 이미 지났어.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중학생이 하는 거짓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멍청한 녀석이 아니야. 그리고 이렇게 키 큰 녀석 하나 데리고 오면 내가 믿을 줄 알았어? 인형이 사람이랑 동일한 존재라고 말했던 시점부터 너희들의 패배야. 보통 누가 믿겠냐? 헛소리 마. 어린애 장난질은 집이나 학교에나 가서 하란 말이야. 알겠어? 알겠으면 더 이상 날 속이려고 들지 마.”
“……아, 아니에…….”
“이제 그만 나가.”
뭐라고 말하려는 리아에게 나는 인정사정없이, 깔끔하게 못 박았다.
리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안 나가고 뭐하냐고 내가 다시 한 번 말하려는 그 때,
“…!”
리아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얼굴로 새빨갛게 상기되어있었고, 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훌쩍이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결국 리아는 울음을 터트렸다.
리아가 울음을 터트리자,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감도 못 잡았으며,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만이 스쳐지나갔다.
‘세상에 어떤 여자애가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고 울음을 터트릴까?’
‘혹시 리아와 남자가 말했던 건 진실이 아니었을까?’
‘정말 세상엔 인형으로 변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이라면 리아도 꽤나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그 각오를 깨 부셔버린 거면, 어떡하지?’
“….”
부정으로 가득했던 방금 전의 내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마음속에 점점 알 수없는 감정이 생겨갔다. 뭐라 말할 수도 없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죄여오는 것처럼 아파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미안했다고. 믿겠다고. 그러니까 이제 울지 말라고, 말해볼까?
아니…,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단언해놓고서, 어떻게 이제 와서 믿는다고…….
“짝. 짝. 짝.”
리아의 우는 소리만이 가득하던 방안에, 갑자기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하양이란 그 남자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 남자…. 뭘 하는 거지…? 왜 박수를….
“이제 그만하죠, 리아 씨.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말보다는 눈이라고.”
“…뭐?”
남자는 리아가 빨갛게 된 볼에 눈물을 흘리며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주 태연했다.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다. 그의 얼굴엔 원인모를 웃음만이 가득했다.
“자, 그만 돌아가죠.”
남자는 할 말을 잃은 나를 본척만척하더니, 흐르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는 리아의 손을 잡아 방문을 향해갔고, 리아도 거절할 생각은 없는지 그대로 끌려갔다. 작아졌지만, 울음소리는 아직도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남자는 문의 손잡이를 돌리고 리아와 함께 방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리곤 닫혀가는 방문사이로 초승달 같은 미소를 보이더니, 내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말보다는, 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그쳤다.




…그 날, 방 안을 몇 번이나 샅샅이 찾아봤지만, 히죽히죽 웃고 있을 새하얀 신사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 * *



끼이익, 끼이익 하고, 뭔가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은근 시끄러운데….
나는 감았던 눈을 떠보았다.
그러자…,
“…!”
수많은 톱니바퀴로 뒤덮인 하늘이 보였다. 마치 구름조각들을 대신하는 것처럼 하늘을 가득 메운 그것들은 서로 맞물리며 시끄러운 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얗다. 가장 먼저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새하얀 세계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나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보았다. 하지만,
“…모르겠어.”
암만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왜 내가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역시 아무것도 없나’ 하고 낙담하려는 순간, 나는 방금 전까진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여자애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하늘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애가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표정은 왜인지 다급함 그 자체였다.
그녀는 정확히 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안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함께 손을 붙잡고 뛰고 있을 리가 없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자애가 내 손을 잡고 무작정 뛰기 시작한 것이다. 난 상황파악조차 제대로 못하고 그저 달리기만 했다.
이윽고, 저 너머에 새하얗게 도색된 문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고, 여자애와 나는 그 문을 향해 뜀박질을 계속했다.
그리고 새하얀 세계의 일부인 마냥 손잡이만이 달려있던 문에 다다르자, 그녀는 문을 열었고, 쥐고 있던 내 손을 그곳에 던져 넣었다.
“자, 잠깐 이게 무슨 짓이……!”
모든 것이 갑작스럽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뜨게 된 것도,
여자애와 만나게 된 것도,
여자애와 함께 달리게 된 것도,
문 안쪽으로 던져진 것도.
“…어째서.”
가슴을 뚫려버린 여자애의 모습을 보는 것도 말이다.
여자애의 가슴에서 붉은 물이 흘러나왔다. 마치 막혀있던 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떨어져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하지만 어째서인지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미소를 띠운 채, 점점 밑으로 떨어져가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삼켜져가는 내게 무언가를 말했다.
물론 그녀의 표정에서 그 말이 단순한 잡담과 같은 사소한 것이 아니란 사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였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슴을 꿰뚫은 장본인이 어디선가 한 번 본적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얀색으로 온 몸을 물들인 장신의 남자.
‘인형으로 변신을 한다.’라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였던 남자.
하양. 그가 은빛소녀의 가슴을 검은 지팡이로 꿰뚫고 있었다.
그는 점점 나락을 향해가는 내게 눈을 돌렸다.
그리곤,
“…그럼 또 봅시다.”
히죽히죽, 조소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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