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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나이트 & 위저드 Knight & Wizard
글쓴이: cloud
작성일: 11-07-15 23:59 조회: 4,717 추천: 0 비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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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렬로 나란히 선 수십 개의 석조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회색빛의 복도.
그 양쪽 끝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두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서로 마주 보는 방향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양쪽 다 아직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소년들이
었지만 기묘하게도 서로의 복장들이 판이하였는데, 왼쪽에서
걸어오는 세 명은 튼튼한 가죽 복장 위에 가슴과 팔, 다리가
판금으로 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반대로 오른쪽에서 걸어오는
셋은 천으로 된 세련된 옷을 입었고 가죽구두를 신었으며 손에는
필기구가 들려 있었다.
맞은편이 보이기 시작한 시점부터 웃고 떠들던 행동을 멈추고
서로 조용히 상대를 노려보며 걷는 소년들.
얼마 지나지 않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양측은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하던 조금 전까지의 모습들을 지운 지
오래였고, 그저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서로 신경전을 펼칠 뿐이
었다.
석조 기둥 사이로 비치는 따스한 햇볕과 대조되는 싸늘한 분위
기 속.
갑옷을 입은 소년들이 먼저 스쳐 지나가며 입을 열었다.
“아, 저 말라비틀어진 오징어 같은 놈들 또 여기서 보네.”
“방구석에 처박혀서 낙서나 계속할 것이지 왜 기어 나오는지
모르겠어.”
하하하하.
서로 유쾌하게 웃으며 말하는 소년들.
그러자 뒤이어.
“후우……. 뇌까지 근육으로 된 놈들이랑 마주치다니, 그 무식
함이 전염될 것만 같군.”
“누가 아니래. 자기 이름도 못 쓸 것 같은 녀석들이라니까.”
후후후후.
이에 질세라 비웃는 점잖고 세련된 복장의 소년들.
“…….”
“…….”
서로가 동시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다진 고기로 만들어 줄까 마법쟁이?”
“……통구이로 만들어 줄까 견습기사 나부랭이?”
자신들이 상대에게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모욕을 당했
다는 사실에만 분노하는 견습기사들과 마법학생들.
이윽고, 양측은 어느새 단순히 말로만 싸우는 것에서 벗어
나 슬금슬금 물러서며 거리를 재고 있었다.
“이것들이……!”
“움직이기만 해 보시지…….”
서로 지금 물러나면 상대에게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지느니 굽느니 했던 말들이 위협이 아닐 수도 있게 되어
버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견습기사들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들, 수업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지금 상황이 어떤지 파악 못 하고 말 걸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근심 없는 목소리. 모두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덥수룩한 앞머리지만 눈을 전부 가리지 않는
대신 붕 떠있는 모양새인 갈색 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그냥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말 걸었을 뿐인데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바람에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소년.
그런데, 갈색 머리의 소년을 본 두 무리의 반응이 확연히 차이
가 났다.
“루, 루베르!”
“루베르! 마침 잘 왔어!”
소년을 보자마자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긴장감 어린 표정을 벗어
던지고는 금세 환한 얼굴이 되는 견습기사들.
“윽, 루베르 메르카토다…….”
“견습기사대장…….”
반대로, 대치하고 있던 마법학생들은 그야말로 쉬어빠진 스튜
라도 들이킨 듯 한없이 구겨진 표정이었다.
뒤에서 나타난 루베르라는 소년은 기본적으로 자신들과 맞서고
있는 견습기사들의 복장과 다를 바 없는 갑옷차림이었지만, 단
한 가지. 왼쪽 어깨를 덮고 있는 망토의 존재가 상대에게 대항
하는 마음을 사라지게 하였다.
백이십 견습기사들의 정점을 상징하는, 흰 가시덩굴이 수 놓인
푸른색 망토. 견습기사대장 루베르 메르카토.
그 실력은 이미 견습을 아득히 벗어나 정식기사들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소문이다.
그렇게 마법학생들이 멈칫거리며 루베르의 눈치를 살피자 마치
자신들이 이긴 양 으스대며 루베르를 부추기기 시작하는 견습기
사들.
“아니, 그게 말이야~ 우리가 지나가는데 마법쟁이들이 통로에서
길을 막고 얼쩡거리잖아?”
“아……. 그, 그랬어?”
“루베르, 실력 발휘 좀 해 봐!”
“무, 무슨 실력?”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루베르는 영 내켜 하지 않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켜 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상대인 마법학생
들과 비슷할 정도로 당황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루베르의 표정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계속 부추
기는 견습기사들이었고, 그 의기양양한 모습에 기가 죽은 마법학생
들은 슬슬 꼬리를 빼기 시작했다.
“으윽……!”
“수, 수업시간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 하겠군.”
“어허, 가긴 어딜 가려고?”
“헤헤. 왜? 아까처럼 대들지 않고?”
“으으으…….”
그렇게, 예기치 않은 원군의 힘으로 팽팽했던 신경전의 승패가 겨우
가려지려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마법학생들의 뒤쪽에서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들이신가요?”
결코 서두르지 않는 은은한 목소리. 기품 있는 자태. 허리까지 내려
오는 은발의 웨이브. 얼어붙을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보석같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
“아, 라미나씨!”
“아직 안 가고 계셨군요!”
현재, 기사 마법사 가릴 것 없이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등장했다.
“우엑, 라미나 에브게니스!”
“저 여자가 최연소 위저드…….”
발레나 왕국의 한 줌도 안 되는 근대 마법 역사 속에서, 수많은 마법
사를 배출하며 우뚝 선 신흥 귀족가문 에브게니스 가.
그중에서도 신성이라 불리며 격을 달리한 천재 마법사가 있었으니,
라미나 에브게니스. 바로 그녀였다.
“라미나씨, 글쎄 저 무식한 놈들이 자꾸 시비를 걸어요!”
“혼쭐을 내 주세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황홀한 표정으로 라미나에게 부탁하는 마법
학생들. 라미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돌려 견습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지, 진짜로 하려고?”
감정이 읽히지 않는 싸늘한 눈빛. 루베르는 라미나의 기백에 밀려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검집에 손을 가져갔고, 곧바로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저주했다.
아아, 이래서야 싸우겠다는 꼴이잖아. 마음속으로 후회의 몸부림을 치는
루베르. 그러나 이미 자세를 취한 마당이라 다시 손을 놓기는 어려운 상
황이 되어버었다.
“헤헤! 멍청한 놈들, 너희는 루베르의 검이 뽑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걸!”
“지금이라도 기사님들 앞에서 나대고 다닌 걸 사과하시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루베르의 속도 모른 채 그를 앞장세우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기 시작하는 견습기사들.
“아~아. 이래서 무식한 기사 나부랭이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그렇지
않나요, 라미나씨?”
“마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으로 깨닫게 해 주죠!”
그리고 이에 맞서 질 수 없다는 듯 대꾸하는 마법학생들.
루베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견습기사들과 마법학생들은 뒤로
빠져서 서 있었고 이미 상황은 자신과 라미나 에브게니스 둘만의 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서로 바라보기를 몇 초.
먼저 움직인 것은 라미나였다.
“응?”
“라, 라미나씨?”
그런데 라미나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냥 루베르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 행동에 마법학생들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다툼은 그만 두세요.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입니다.”
라미나는 그 말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걸어갔다.
“아……. 아, 네!”
“저, 저희와 같이 가시죠!”
“운 좋구나, 견습기사 놈들!”
라미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견습기사들에게 한마디씩 던지며
황급히 라미나의 뒤를 쫒아 사라지는 마법학생들.
그 모습을 보며 안도하는 루베르였으나, 다른 견습기사들은 그렇지도
않았는지 개운하지 않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투덜거렸다.
“저, 저것들이……!”
“루베르에게 겁먹어서 도망가는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하여튼 마법
쟁이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안 그래?”
“그, 그렇지 뭐…….”
이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루베르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말을 돌렸다.
“자, 우리도 가자. 오늘은 훈련장에서 대련 수업이지?”
“오오. 그래. 오늘에야말로 모두에게 나의 필살기를 선보일 때가 왔군!”
“필살기는 무슨, 그전에 체력부터 더 키워야 하지 않겠냐? 저번에는
10분도 못 휘두르고 제풀에 지쳐 쓰러졌잖아.”
“아, 아픈 점을 찌르는구먼. 친구.”
그러자 견습기사들은 그 말에 겨우 자신들이 걸어가던 목적지를
떠올렸는지 다시 웃으면서 가던 길을 향했다.

원형의 운동장과 그곳을 둘러싼 듯 만들어진 부채꼴의 계단. 그
계단위에 층층이 앉아 있는 수십 명의 견습기사들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것은 운동장에서 서로 검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
비록 서로 사용하는 무기는 나무로 만든 연습용 검이지만, 나타
내는 기백은 실제 사투와도 같았다.
“…….”
“허억……. 허억…….”
그러나 그런 막상막하의 기백과는 달리 실제 승부는 이미 한쪽으로
기운 지 오래였다.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갈색 머리의 소년에 비해 어깨를 들썩이며
거친 숨소리를 내쉬는 다른 한쪽.
이윽고, 더는 길게 끌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지쳐 있던
소년이 먼저 검을 고쳐 쥐고 상대에게 낮게 달려들었다.
“……하앗!”
그러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 가볍게 검을 내질러 손목을
찌르는 갈색 머리 소년의 대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최후의 일격을 담은 검은 그 상대에게 닿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크윽……. 졌습니다.”
“후우.”
가격당한 손목을 부여잡고 꿇어 앉아 있는 상대의 목에 연습용 검을
들이대는 승자.
그의 왼쪽 어깨에는 흰 가시덩굴이 수 놓인 푸른 망토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만!”
곧이어 교관이 승패가 결정된 것을 확인하고 시합의 종료를 알렸다.
“음! 훌륭해. 멋진 대련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교관은 자신의 자랑인 콧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연신 루베르를 칭찬했다.
그러나 그런 칭찬을 듣고도 기뻐하기는커녕 어색해하는 루베르. 무언가
상당히 껄끄러운 표정이다.
그러나 루베르의 그런 모습을 보며 겸손하다고 느꼈는지 더욱 흡족
해하는 교관이었다.
“모두 봤지! 너희도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리 루베르를 따라잡는 실력
을 갖추도록!”
“옛!”
계속되는 칭찬에 점점 더 껄끄럽다는 표정을 짓는 루베르. 하지만 교관
은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고 학생들을 향해 뜨거운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기합이 들어간 표정을 지으며 견습기사들의 뒤편으로 보이는 우뚝 솟은
보라색의 원뿔형 탑을 향해 검지를 펴서 구멍을 뚫을 기세로 가리키는 교관.
“대답 소리 한번 우렁차구나! 좋다! 그 기세로, 다음 승급시험 때는
기필코 저 마법사의 탑 녀석들의 위저드 승급자 수보다 우리의 정식기사(배츌러)
승급자가 더 많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교관은 울분에 찬 듯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마법사들의 험담을 이어갔다.
“마법 좋아하네! 그런 여자나 말라깽이들이 사용하는 좀스런 기술들 따윈
이 검 하나로 날려버리는 것이 우리의 힘이지, 안 그러냐? 얘들아!”
“옛! 그렇습니다!”
“루베르 메르카토를 봐라! 대대로 기사가문인 메르카토가의 장남으로서
이렇게도 훌륭하게…….”
그렇게 마법사들을 매도하며 루베르를 기사의 본보기라고 칭찬하는 교관과
그의 말에 맞장구치는 견습기사들.
루베르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울음 반, 웃음 반의 애매한 표정을 짓고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교관님과 친구들…….
죄송합니다.

─사실 저, 마법을 좋아해요.

#1

발레나 왕국.
이 나라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자면, 위로는 지금까지도 정체불명인 마물
의 숲을 끼고 있기 때문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의 위협을 받고 있고,
아래로는 최강국인 에렌스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받고 있는 그야말로
대륙 최고의 불운한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국경의 7할 이상이 마물의 숲과 닿아 있어서 언제나 몬스터에게 시달리는
것이 일상인 발레나 왕국. 이런 지리적인 약점을 지닌 나라이기 때문일까,
발레나 왕국은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기사의 쓰임새가 전쟁과 장원 관리가
아닌 마물의 습격 방어에 주로 치중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마물과의 전투를 수행해야 했던 기사계급은
당연히 그 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렇게 기사의 유지에 골머리를 앓던 발레나 왕국은 어느 날 커다란 국책을
실시하게 된다.
‘도제식으로 기사를 양성하지 말고, 교육기관을 만들어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기사를 팍팍 찍어내자.’
기사계급 자체가 곧 귀족이었던 다른 모든 나라가 비웃는 가운데서 그 교육은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5년 뒤, 발레나 왕국은 처음으로 양성된 기사들을
마물의 숲 국경지대로 배치하였다.
결과는 예상 이상이었다.
기사들의 실력이 들쭉날쭉해서 인원의 적절한 배치에 애를 먹었던 예전과는
달리, 개개인의 실력은 예전보다 조금 떨어지지만 그만큼 평준화가 되었고
또 수적으로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우위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발레나 왕국은 5년에 한 번씩 규정시험을 통과한 기사 졸업생을
배출해 내어 몬스터를 잡아내고 그 뒤에 나오는 사냥 전리품과 마물의 숲
개척으로 기사의 양성비용을 충당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사이클이 정착되
었고, 노하우가 축적된 실전 위주의 훈련법은 대륙에 울려 퍼져 기사 훈련
생들의 기숙사였던 타원형의 푸른 탑은 ‘기사의 탑’이라 불리며 유명세를
떨쳤다.
그리고, 그로부터 50년 뒤. 대륙 전체를 전율케 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마법주각의 등장.

여기서 잠시 기사의 이야기를 벗어나 마법사의 이야기를 해 보자.
마력을 에너지 삼아 갖가지 현상을 일으키는 이전까지의 마법사들은,
그 마력을 변환하여 마법을 쓰기까지의 소위 말하는 ‘수식’을 머릿속으로
연산하여 처리해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마법사가 되는 조건은 첫 번째로 선천적으로 마력을 느낄 수
있는 ‘마력감응자’여야 했고, 두 번째로 마법의 종류별로 있는 복잡한
수식들을 전부 암기할 수 있는 ‘우수한 기억능력’을 가져야 했으며 세
번째로 그 수식들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처리할 수 있는 ‘연산능력’을
가졌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대륙에서 마법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쓸모가 있나 라고 물으면 글쎄다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일까. 여기서 마법주각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복잡한 수식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말고, 적어
놓은 뒤 그것을 이용하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마법
주각 이론.
그 연구의 결과는 특수 처리된 손바닥만 한 석판이나 돌조각에 수식의
주술 각인을 새긴 뒤 그것을 매개체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앞서 말했던 마법사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 중 뒤의 두 가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대륙 사람 중 절반이라는 ‘마나감응자’와 예전과 달리 지연시간 없는
마법발동, 그리고 다양한 곳에서 쓸 수 있는 범용성.
유례없는 마법사의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잘 읽은 발레나 왕국은 이미 기사를 양산해
봤던 그 노하우를 살려 재빨리 마법사의 교육기관도 만들었고, 그 졸업
생들은 '기사의 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마물 사냥, 영지 관리 등
모든 분야에서 빠른 실적을 올렸다.
결국, 발레나 왕국의 마법은 20년 만에 에렌스 제국에서도 배우러 올
정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며, 이때를 계기로 마법학생들의 기숙사
였던 원뿔형의 보라색 탑은 '마법사의 탑'으로 불리게 되어 발레나 왕국
마법 학교의 상징이 되었다.

……그랬다.
이것이 ‘기사의 탑’과 ‘마법사의 탑’. 그 분쟁의 시작이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시대의 흐름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기사의 탑과 마법사의 탑을 같은 곳에 세운 것이 잘못이었을까.
발레나 왕국의 기사들은 10년 전부터 갑자기 우대를 받기 시작하며 자신
들의 자리를 서서히 빼앗아 가는 마법사들이 거슬렸고, 지금까지 눌려 지내
왔던 마법사들은 기득권층이었던 기사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
이렇듯 위쪽에서부터 사이가 나쁘니 아래의 학생들은 오죽할까.
견습기사인 학생들은 마법학생들을 ‘방구석에서 낙서나 하는 말라깽이들’
취급했고, 마법학생들은 견습기사 학생들을 ‘뭐든지 몸으로 때우는 무식
한 놈들’이라 말하며 서로 경쟁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경쟁하는 덕분에 서로 더 발전하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지만, 그것은
젖혀두고.
어쨌든, 이런 반목의 시대에 여기 검과 마법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소년이 있었으니…….



훈련이 끝난 뒤 통금 시간 전까지 자유시간을 가지는 견습기사들은
친한 학생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을 하거나 근처 마을까지 향하
는 등 저마다 휴식을 취했다.
발레나 왕국의 기사학교는 5년에 한번씩 15세에서 30세를 대상으로
시험자격을 주기 때문에 같은 견습기사 동기 사이라도 그 나이대는 다
양했다.
자연스럽게 같이 어울려 다니는 친구도 비슷한 또래의 동기들일 수밖
에 없었고, 그것은 루베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세 명의 견습기사들과 같이 식당을 향해 걸어가는 루베르. 자세히 그
면면을 보면 낮에 마법학생들과 시비가 붙었었던 소년들이다.
“오늘도 대단했어, 루베르!”
“아, 고마워.”
주근깨가 있는 금발의 소년이 감동했다는 듯이 과장된 몸짓으로 루베
르를 띄워준다. 여전히 머쓱해하는 루베르.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
다면 우쭐해 할 법도 한데, 루베르는 그런 태도를 견습기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었다.
덕분에 뛰어난 실력과 겸손한 마음가짐을 모두 갖춘 진정한 기사의
견본이라며 견습기사들의 유례없는 지지를 받고 있는 소년.

모든 견습기사들의 우상. 견습기사대장 루베르 메르카토.
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도대체 같은 훈련을 받는 처지인데 왜 이렇게도 실력 차이가 나는 거야?”
“맞아, 혹시 숨겨진 비법이라도 있는 거 아냐?”
“하, 하하하…….”
있습니다. 비법.

……마법이라는 비법이.

기사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마법을 좋아함을 넘어 사랑해
마지않았던 루베르.
그는 집안의 기대에 떠밀려 할 수 없이 기사학교를 들어왔지만, 그럼
에도 포기 못 하고 계속 마법을 공부하고 사용했다.
아무리 마법사용이 간략화되어 수식을 외울 필요는 없다 하나 기본적
으로 평범한 공부로는 엄두도 못 내는 그 수식을 계산해서 주각을 새기
는 일은 사용자 자신이 해야만 한다.
하물며, 보통은 정지된 자세로 지팡이 끝에 매달아 놓은 석판이나 돌
조각에 집중하여 마법을 쓰는 것이 당연한 마법사들에 비해 1분 1초를
다투는 전투를 수행하면서 매개체와 마나를 연결해주는 지팡이도 없이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수준.
비록 기사로서의 올바른 길은 벗어났으나 역시 정상이 아닌 실력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루베르의 친구들은 그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사의 표본임을 한 줌 의심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자신의 친구를 자랑스
러워하며 대화를 계속했다.
“정말이지, 너의 그 빠른 찌르기는 흉내 낼 수가 없다니까!”
……미안. 가속마법(헤이스트) 쓴 거야.
“빈틈을 보일 때 내려치는 그 강한 일격은 어떻고! 평범한 몸집에 어떻
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거지?”
……근력강화마법(스트랭스) 입니다.
“역시 루베르는 우리 견습기사들의 목표라니까!”
그만 해 이것들아! 내가 잘못했어!
루베르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친구들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죽옷 품 안에서 느껴지는 두 개의
마법 석판.
비록 그들이 원하는 것과는 다르나 그것에 못지않게 노력했다고 자부
하는 루베르지만, 역시나 교관이나 동료가 감탄하거나 존경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을 배신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아. 루베르의 그 실력을 아침의 마법쟁이들에게 보여줬어야 했는데.”
“……보여 줬으면 난 끝장이지.”
“뭐라고?”
“아, 아니야 아무것도! 보여 줬어야지. 응. 아 아쉽다! 정말 아쉬워!”
루베르는 친구의 한탄하는 그 말을 들으며 아침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러나 루베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감탄하는 견습기사들은 뒤
이어 충격적인 대화를 했다.
“오오, 역시 견습기사대장은 다르구먼!”
“헤헤, 아쉬워할 거 없어 루베르. 조금 있으면 확실하게 보여줄 기회
가 오니까 말이야.”
“그래. 그래. 아쉽지만 조금 있으면 확실하게…….”
적당히 듣고 흘리고 있던 루베르의 정신을 뒤흔드는 한마디.
“……응?”
상황 파악을 못 하는 루베르에게 추가정보의 융단폭격이 이어졌다.
“아아, 맞다! 처음으로 시행된다는 마법쟁이랑 우리 견습기사의 2인
1조 수업이라던 그거? 소문이 아니라 진짜로 한대?”
“……뭐라고?”
“그래! 심히 불쾌하지만, 시대에 발맞춰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때부터
실행한다고 하더라.”
“내가 듣기로는 실제로 몬스터를 사냥하는 실전 형식이라던데.”
“헤헤, 방구석에 처박혀 책이나 읽던 마법쟁이가 첫 실전에서 오줌
지릴 때 루베르가 멋지게 해치우면……!”
“캬! 최고구먼! 최고!”
저 멀리 서쪽 산맥 뒤로 사라져 가는 태양과 함께 루베르의 제정
신도 사라져갔다.



“……끝장이다.”
견습기사들의 기숙사이자 발레나 왕국의 상징 중 하나인 ‘기사의 탑’.
견습기사대장에게만 허락된 독방에서 루베르는 침대에 앉아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세상이 다 끝난 듯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는 마법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 속이라 어떻게든 잘 넘어
갔지만…….”
루베르가 지금 고민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견습기사
와 마법학생 간의 2인 1조 수업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주위 사람들에게 숨겨왔던 마법을 사용했었다는 사실이 들
통이 날 대 위기.
정식 위저드 칭호의 마법사가 아닌 일반 마법학생일 지라도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마법을 사용한다면 곧바로 눈치를 채고 말 것이다.
“으으으……끝장이야.”
물론, 정식기사로 인정받기 위한 승급시험 규칙에는 마법을 써서 통과
하지 말란 조항은 없다.
하지만, 그거야 당연히 상식적으로 기사가 마법을 쓸 리가 없다는 전
제하였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만약 견습기사대장인 내가 사실 마법의 힘으로 다져진 실력이란 게
들통 나면…….”
따돌림, 멸시, 괴롭힘, 기타 등등……. 루베르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마법사와 마법을 싫어하는 것은 견습기사인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교관이나 윗사람들도 마찬가지라 잘못하면 없는 규정도 새로
만들어서 퇴학 조치까지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무슨 수를……무슨 수를 써야 하는데!”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목을 졸라 오는 위기감. 루베르는 내일이라도
그 수업이 실행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몸부림을 쳤다.
“……으으, 그렇지!”
그렇게 괴로워하기를 잠깐.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는 루베르. 심상치 않게 눈을 빛내며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서.
……책과 종이를 꺼내들고 의자에 앉는다.
“후후. 일단 진정 할 겸 주각연구나 해 볼까.”
가문 대대로 몬스터의 위협을 막아내며 발레나 왕국의 변방을 지켰던
뼈대 있는 기사 집안의 장남인 루베르 메르카토.
그는 심각한 마법 마니아. 특히 그중에서 구제 할 길이 없다던 주각
연구 마니아였다.
주각연구란 말 그대로 마법 발동 구조의 주축이 되는 주술각인을 연구
하는 것인데, 이 주각의 수식의 차이에 따라 발동되는 마법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특히 마니아의 처지에서는 이미 보편화 되어 있는 주각을 잘 파헤쳐
수식을 약간 바꾸는 것만으로도 자신만의 특별한 마법으로 바뀌게 된다
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재미라나.
최근 바람계통의 전투계열 마법주각인 바람의 칼날(윈드커터)을 고
쳐서 지정한 장소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도록 연구하는 중인 루베르.
“저번에는 무슨 실수를 했는지 바람이 아니라 가스가 나왔으니 말이지…….
아니, 그건 그거대로 멋진 결과인 듯……후후후.”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작업을 계속한다.
푸른 망토를 휘날리며 견습기사를 상대로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던
늠름한 견습기사대장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라, 주각용 종이 다 써버렸네?”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한참을 몰두한 루베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얼마 전에 새로 사서 보충해 뒀을 터인 주각용 종이를 다 써버
리고 말았다.
주각연구를 매번 할 때마다 새기고 실패해서는 그 비싼 주각석판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주각석판과 같은 마법처리를 한 주각용
종이(일회용)에 시험적으로 주각을 작성하여 실행해 본 후, 결과가
좋으면 최종적으로 석판에 베껴 새기는 것이 주각연구자들의 정석이다.
“으으으……. 조금만, 조금만 더 해보면 될 것 같기도 한데……!”
이미 불이 붙은 마니아의 혼.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지만 그런 이유
따위로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견습기사대장은 사감을 피해 기숙사를 무단 외출했다.

“……후후후. 이 정도 샀으면 한동안은 버티겠지?”
품속에 두둑하게 챙긴 종이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복면 속에서 입을
헤벌리며 웃는 루베르. 머리까지 뒤집어쓴 로브 차림으로 누가 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꼴을 하며 인적을 피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혈기왕성한 견습기사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방에서 제대로
외출조차 하지 않는데다가 밤샘 연구는 기본이었던 마법학생들에게는
통금 시간 따윈 없었고, 루베르는 그 틈새를 노려 마법사의 탑 근처에
존재하는 마법 물품 매점을 자주 이용하는 고객이 되었다.
처음 갔을 때는 복면에 로브차림을 수상히 여길까 봐 심장이 튀어나올
뻔한 루베르였으나, 로브는커녕 가면, 붕대, 심지어 전신 타이즈까지
입고 매점에 오는 일부 마법학생들의 경악할 만한 생활 퀄리티를 보고는
그 뒤로 당당하게 이용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마법사의 탑 주위를 빙 돌아 벗어나고
있던 그때.
앞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이런!”
행여나 들킬까 황급히 몸을 숨기는 루베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조용히 인기척이 난 방향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고 말았다.
“……엥?”
그곳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달빛이 환하게 비친 탓일까. 또렷하게 보이는 이목구비와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이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인물. 라미나 에브게니스.
그녀는 그런 인적이 없는 으슥한 곳에서, 뜀박질이라고 하기에는 경쾌
하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후우.”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은 움직임을 보일수록 낭패라는 듯 고개를 저으
며 점점 어색하게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라미나의 이해할 수 없는 노력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리듬감 있는 움직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견습기사인 그였기에 단번에 눈치를 채고 말았다.
루베르는 자신이 아는 그 동작과 그것을 실행하고 있는 인물의 불균
형에 너무나도 황당해서 자신도 모르게 툭 하고 혼잣말을 했다.
“……기사의 보법?”
“……읏!”
섬광과도 같은 반응. 루베르는 너무나도 기이한 상황에 넋을 잃었던
탓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접근한 라미나에게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멱살을 붙잡혀 근처의 나무에 밀어붙여 졌다.
“……쿨럭! ……윽!”
“네놈, 누구십니까.”
반말과 높임말이 기묘하게 섞여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라미나.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상대를 잡아먹을 듯 번뜩였다.
“자, 잠깐……!”
허우적대는 루베르의 로브 후드와 복면을 단번에 벗기는 그녀. 루베르는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는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뒤늦은 행동이었다.
“당신은……!”
“……아, 안녕…….”
견습기사 대표와 마법학생 대표. 달빛 아래서의 어색한 만남이었다.

여전히 둘 빼고는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으슥한 곳. 쓰러져 있는
나무에 앉아 있는 라미나와 그 근처에 있던 돌 위에 앉은 루베르였다.
조금은 침착해진 둘의 분위기 속. 이윽고 침착함이 어색함이 되어 갔고,
그 침묵의 시간을 참다못한 루베르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라미나 쪽에서 먼저 질문이 들어왔다.
“……어디서부터 보셨습니까?”
“……보법을 완벽하게 펼치고는 낙담하는 부분부터 봤습니다.”
“죽어주세요.”
“뭐야 이 상황!”
“죽어!”
“이젠 반말이네!”
아침까지만 해도 도도했던 분위기의 최연소 위저드 칭호를 가진 라미나
씨가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고개를 떨어뜨리며 흐느끼는 라미나.
“아아. 전 이제 끝장이에요. 지금까지 발레나 왕국의 마법을 이끌어갈
차세대 신성으로서, 또한 에브게니스 가의 얼굴로서 기품 있고 우아하게
행동했었는데……. 저 근본 없는 기사 나부랭이 때문에 이제 저는 몸이나
쓰는 천박한 암퇘지라고 모두에게 놀림거리가 될 거에요. 가문의 먹칠
이라고요! 젠장!”
“그건 좀 과장이 아닐까…….”
“시끄러워.”
“죄송합니다.”
한 떨기 꽃과 같이 얼굴을 감싸며 한탄을 하던 라미나였으나, 무섭게도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점점 말투가 험악해진다.
애초에 본래 성격은 우아한 아가씨가 아니라 뒤에 한 말투처럼 호쾌한
것이 아닐까.
점점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라미나. 그 침울함에 루베르는 왠지 아까
까지 자신이 고민하던 상황과 동질감을 느껴 그녀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거, 걱정하지 마. 내가 본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
“진짜라니까? 기사의 맹세라도 할 수 있어.”
“…….”
“나는 오히려 이상하기는커녕 존경했다고! 마법도 천재적이면서 그렇게
깔끔한 움직임도 할 수 있다니, 라미나씨는 정말 대단하구나! 하하하!”
“……그런가요.”
오 넘어왔다. 루베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조금 나아진 이 분위기
를 계속 이끌어나가 좋게 끝내고 돌아가려 했다.
여성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호감도를 올
리는 지름길이라고 누군가에게 들은 기억을 떠올리는 루베르.
“그, 그러고 보니 그 정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보법뿐만이 아니라 무
기를 사용에도 손이 익었을 텐데, 맞지?”
“뭐, 뭐 그렇죠.”
“역시! 무기는 뭘 써? 여성스럽게 레이피어? 아니면 평범하게 아밍
소드? 아 설마, 바스타드 소드?”
그러나.
라미나와의 이야기는 루베르의 훈훈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메이스(철퇴)요.”
“…….”
“…….”
“……뭐라고요?”
“메이스. 몰라요? 둔기류 무기.”
“아니, 알지. 알긴 아는데…….”
최연소 위저드 칭호의, 엘리트 마법사며, 모두의 우상인, 미소녀가,
……메이스.
상상했던 이미지 대폭발이었다.
아까부터 계속되는 충격의 연속에 정신을 못 차리는 루베르. 그런 루
베르에게 라미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계기는 열 살 때였어요.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산책하던 어느 날 밤.
불행히도 저는 영지에 숨어들었던 하급 슬라임과 마주치게 되었죠.”
으으. 듣고 싶지 않아. 이 이상 환상을 깨부수지 말아줘.
마음속으로 절규하는 루베르.
마법을 좋아하는 그는 위저드들에게도 역시 동경하는 감정이 있었고,
특히 최연소 위저드라는 라미나에게는 알게 모르게 환상을 품고 있었다.
“황급히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람은 없었고 온 힘
을 다해 도망쳤으나 결국 힘에 부쳐 넘어지고 말았어요.”
하지만, 라미나의 설명은 가차 없었다.
“그때, 절망에 빠진 제 눈앞에 보였던 것이 바로 굵직한 나무 막대기
였습니다. 다급했던 저는 그 막대기를 손에 쥐고 슬라임을 냅다 후려쳤죠.”
표현도 화끈하신 최연소 위저드님.
“그리고 그 순간, 저는 느껴버렸습니다.”
“뭐, 뭐를……?”
부들부들 떨리는 양 손바닥을 바라보며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고는 입
가에 미소를 짓는 라미나.
“산산이 흐트러지는 슬라임의 살점. 휘두른 뒤 손끝에서 머리끝까지
전해지는 짜릿한 충격. 후, 후후후……. 최고였어요.”
“…….”
위험하다.
위험한 여자다.
그냥 위험한 게 아니라 일평생 눈도 마주치면 안 될 정도로 매우 위험
한 여자다.
루베르는 확신했다.
“귀하의 훌륭한 무용담은 잘 들었습니다. 라미나 에브게니스양.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군요! 가 봐야 할 시간이네요!
지금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은 기사의 명예를 걸고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의 미덕이라는 빠른 결단력을 유감없이 선보이는 루베르. 견습기
사대장이란 직책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그러나 로브의 뒷덜미를 잡아 도망치는 것을 막은 라미나. 전율하는
루베르의 등 뒤에서 소름 끼치도록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서 문제. 저는 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다 말했을까요?”
“치, 친절해서?”
“정답은, 이유를 알고 당해야 그나마 덜 억울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아, 아하 그러시구나.”
루베르가 황급히 뒤돌아보자 어디에 숨겨 두었었는지 라미나의 손에는
아까까지 없었던 둔탁한 빛을 내뿜는 메이스가 쥐여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죽진 않을 테니까. 그냥 머릿속이 살짝 해피해지는
마법을 거는 것뿐이에요.”
“마법인데 왜 손에는 둔기가 들려 있는 건지 알고 싶은데요!”
“그것은 뒤통수라는 이름의 마법.”
“이런 게 최연소 위저드라니!”
광기에 젖은 눈을 빛내며 묘지를 배회하는 구울처럼 슬금슬금 다가오
는 라미나. 루베르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어, 라미나씨? 하, 하하. 장난하시는 거죠?”
“괜찮습니다. 고통은 잠깐.”
“안 괜찮거든!”
이윽고 높이 치켜든 둔기가 달빛이 내리쬐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
며 루베르를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썩어도 견습기사대장. 설마 했던 기습공격을 받게 되자 뼛속
까지 새겨진 전투의 감각이 살아나며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왼쪽으로
숙이듯 빠져나간 뒤 이어서 라미나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목표를 잃고 땅을 향해 내려쳐 진 메이스를 라미나의 오른손과 함께 제
압하는 루베르.
“주, 죽을 뻔했잖아!”
“…….”
그런데, 제압당한 라미나의 표정이 황당한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심상치 않았다.
그 반응을 본 루베르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왜, 왜 그래?”
“……가속마법(헤이스트)?”
“……아.”

망했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소리 지를 거에요!”
“시끄러워.”
단단히 실수하는 바람에 얼이 빠진 루베르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확인하는 라미나.
그녀가 루베르의 품속을 뒤지자, 숨겨놓았던 주각 석판 두어 개와
아까 샀던 주각용 종이가 드러났다.
주각 석판을 유심히 살펴보는 라미나.
“3급 숙련주각……. 어설프게 배운 실력이 아닌데요?”
“으윽.”
마법주각은 그 수식의 난이도에 따라 등급을 구별해 놓았는데, 제일
낮은 5급부터 제일 높은 1급. 그리고 그 급수 사이에 또 기본, 숙련,
특수로 3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발레나 왕국 마법 학교의 입학시험 난이도가 4급 기본이었으니, 독학
으로 배웠다는 레벨을 벗어난 루베르였다.
자신의 비밀이 들통 나 버리자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며 얼버무리기를 포기하는 루베르. 공황에 빠져 이성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그그 그래! 난 견습기사면서도 마법을 좋아한다! 어쩔래!”
“그렇군요.”
“…….”
“왜 그러세요?”
“……엥?”
그런데, 루베르의 예상과 다르게 담담하게 반응하는 라미나. 루베르
는 어안이 벙벙하여 되물었다.
“으, 으음……. ‘기사면서도 계집애같이 방구석에서 낙서나 하고 창
피하다’라거나 생각 안 해?”
“저도 마법사인데요? 그리고 마법의 연구는 재밌어요.”
“그, 그렇지!”
루베르 메르카토. 18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
을 만난 순간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취미생활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홀로
지내온 루베르는 이렇게 같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알게 되자 감격에
겨워 주체를 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그 상대는 마법에 통달했다는 최연소 위저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
그렇다. 루베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감정을 느꼈을 뿐이었다.
……굳이 잘못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흥분을 주체 못했다는 점일까.
“그렇지? 그래! 음. 역시 위저드님이라 뭔가를 아시는구나! 헤, 헤헤헤…….
마법은 멋지지 응. 특히 주각연구라던가 최고지! 아, 나는 기본형 주각의
변환식을 좋아하는데 라미나씨는 뭘 좋아해? 맞다! 두 가지 이상의 수식
결합도 버릴 수 없지. 아! 후후후, 설마 라미나씨는 개량형이 아니라
개발형? 이야, 멋진데? 위저드급이라면 가능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진짜로 그런 멋진 일을…….”
“…….”
“어……음…….”
“…….”
“……라……라미나씨?”
아. 저 눈빛. 아까 자신이 슬라임 이야기하며 쾌감에 몸부림 치던
라미나씨를 위험한 사람으로 보던 눈빛이다.
“아, 아하하……. 내가 너무 혼자 떠들었나?”
루베르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폭주했다는 것을 깨닫고 라미나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기분 나쁘니까 이쪽 보지 마세요. 이 음식물 쓰레기 같은 사람.”
“나보다 더 심한 평가잖아!”
위험한 여자에게 기분 나쁜 음식물 쓰레기 취급받은 남자 루베르
메르카토.
“쓰레기라니! 그렇게 따지면 여자 마법사면서 메이스 휘두르며
기뻐하는 사람 쪽이 더 심하게 안 좋거든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하다니. 당신, 그러고도
기사입니까?”
“자신이 한 말부터 생각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단숨에 가열되는 둘 사이의 말싸움. 그래. 이 여자는 자신과 극과
극의 상성임이 틀림없다. 루베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좋은 취미
친구를 만났었다는 조금 전까지의 감정을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그때, 라미나와 마주쳤을 때 그녀가 하고 있던 행동을 떠올린 루베르.
그 행동의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우습다는 표정을 띄우며
라미나에게 말했다.
“헹, 아까 연습 잘 기억하고 있다고! 난 잘 알지. 몸에 밴 움직임이
얼마나 버리기 어려운지를.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보법 때문에 요즘
한창 소문이 돌고 있는 2인 1조 수업 때 들킬까봐 일부러 어설프게
움직이는 연습을 하고 있던 거였지?”
“으, 으윽……!”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견습기사들도 그 움직임을 보면 한눈에 알걸?
아아 에브게니스 가의 신성, 라미나 에브게니스의 몰락이 눈에 선하네!”
“흐, 흥!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마법의 사용 여부는 마법
학생이라면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후후,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견습기사대장의 앞날이 기다려지는군요!”
“이, 이 여자가……!”
강렬한 카운터. 덕분에 잊고 있었던 위기감이 루베르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난다. 진짜 어떻게 하지. 마법을 쓰지 않고 싸우면 평범한
견습기사보다 겨우 나은 정도. 도저히 견습기사대장이라고는
보일 수가 없었다.
루베르의 그 위기감은 라미나에게도 옮겨진 것일까. 아까까지의
뜨거웠던 둘의 말싸움은 사그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 시작된 걱정과 괴로움이 담긴 침묵의 시간.
그때.
그들의 등 뒤에 전류가 달린다.
“……아.”
“……아.”
그래.
서로 알고 있지 않은가……!
“……2인 1조.”
“우리가 건의한다면…….”
그렇다. 서로 비밀을 알고 있는 둘이 힘을 합하면.
이 엄청난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극과 극이 분명할 터인데, 이렇게 또 통하게 되는 현실에 씁쓸
해하는 둘.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나.”
“매우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서로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내밀어 악수한다.
“수업이 시작된다면, 나는 라미나 에브게니스와 조를 짜겠다고
교관님에게 부탁하지.”
“저 역시, 수업이 결정되면 루베르 메르카토와 함께 하고 싶다고
교수님에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견습기사들의 장. 라미나씨는 마법학생들의 장. 이 이상의
조 구성은 있을 수가 없지.”
“그래요. 우리 둘의 조는 대외적으로 봐도 완벽한 명분을 가지고
있어요.”
“후후후……서로 힘내서 그 끔찍한 수업을 잘 벗어나자고.”
“후후후……당신만 잘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서로 굳게 잡은 두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그것이, 후대에 전설과도 같이 전해지는 견습기사대장 루베르 메르
카토와 최연소 위저드 라미나 에브게니스. 운명적인 파트너 계약의
진실이었다.


……참고로, 손아귀 힘 싸움에서 밀린 것은 루베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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