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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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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타뷸라 라사 - 결말 집필의 싸움꾼들
글쓴이: 뭬뤠
작성일: 12-07-30 14:19 조회: 2,694 추천: 0 비추천: 0

Prologue.

샨도 클라오운. 아버지는 내 이름을 그렇게 지어주셨다. 어렸을 적의 나는 과자를 연상시키는 그 이름이 정말로 싫었다. 물론 지금도 싫긴 하지만. 언젠가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고 울면서 돌아와 이름을 바꾸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과자 같은거나 연상시키는 이름은 필요 없다고. 아버지는 그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셨다.
'아들아, 네가 태어나던 날 온 나라가 네 이름을 속삭였단다…… 아서ㅅ-'
내 기억이 맞다면 아버지는 불행히도 하시던 말씀을 다 끝내지 못하시고 어머니의 발길질에 나가 떨어지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신 채 그대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자애로운면서도 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세상 사람들이 네 이름에서 과자를 떠올리는게 싫니? 그럼 너가 바꿔가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 이름에서 과자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자 이름에서 너를 떠올릴 수 있도록. 아주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서 모든 사람들이 과자를 먹을 때마다 너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야. 샨도, 넌 그럴 자질이 충분히 있고, 분명히 그렇게 될거란다, 아들아.'
콧잔등에 가로로 길게 난 칼자국에 조차 따스함이 스며든 그때의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한 나라의 여왕님과 같았다. 하긴, 어머닌 진짜로 여왕이셨지. 어머니의 말에 울음을 그치고 그 날 저녁으로 우린 아버지가 만드신 오믈렛을 먹었다. 그로부터 몇일 뒤, 어머니와 아버지는 도둑여왕과 그녀의 남편이라는 죄목으로 잡혀들어가 처형당하셨다.

"…… 이상이다, 샨도 클라오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반쯤 감긴 눈을 활짝 뜨자 쇠창살 너머에 서있는 간수가 보였다. 아, 젠장. 끝난건가. 이 자식 이야기가 너무나 재미 없는 나머지 그만 졸아버렸다. 샨도 클라오운. 어딘지 달콤한 과자같은 느낌이 드는 내 이름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내 이름이 싫다. 내 인생은 내 이름의 반만큼도 달콤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금은 달달했던 적은 있었던 것 같다. 가령-
"일단 요즘 나도는 풍문은 이정도다. 뭐 더 알고 싶은 것은 없는가."
가령, 이런 간수 놈들한테 싸바싸바해서 겨우겨우 바깥 소식 듣는 게 유일한 낙이 되버리기 직전이라던가. 아오 빡쳐. 그 때 왜 걸려가지고 이 모양이 된거지. 어쨋든 재밋는 바깥 소식은 없나보다. 요즘엔 밖도 굉장히 따분한가보네. 아니면 이 간수 놈의 말투가 따분해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던가. 새하얀 두건을 푹 눌러써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는 간수는 쇠창살 밖에서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샨도 클라오운. 3일 전 새벽. 서쪽에 유성이 떨어졌다."
그래 그래, 유성. 다른 말로 별똥별. 근데 그게 뭐. 나더러 어쩌라고. 왜? 소원이라도 빌까? 나는 의아해져서 입을 열었다.
"유성요? 나랑 상관도 없구만. 그게 왜요?"
간수의 두건 밑에서 느릿느릿 대답이 새어나왔다.
"그 질문은 옳지 않다, 샨도 클라오운. 너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나와 관계가 있냐고요."
얘 지금 진지빨고 이야기하는거 맞지? 말투로 보면 농담은 아닌데……. 그러고보니 이 자식, 왜 두건을 눌러쓰고 있지? 여기 간수들은 두건같은거 안쓰는데? 이 새끼 뭐야?
"그 질문 역시 옳지 않아, 샨도 클라오운. 서쪽으로 떠나라. '압슐루스'를 찾아라. 끝내라. 그리고 바꿔라. 너의 운명을. 그리고 나의 운명을."
뭐래니. 미치신건가. 심지어 이 새끼는 두건을 제외한 복장마저도 간수복이 아닌 새하얀 로브- 어? 그러고보니 내가 왜 여태까지 이 놈을 간수라고 믿은거지? 그보다 간수놈들은 뭐하는거야? 이런 놈이 감옥 안을 돌아다니게 그냥 두고. 하여간 이 놈들이 빠져가지고. 큰소리로 간수를 부르며 미친 놈이 서있는 쇠창살 쪽으로 다가가 감옥 복도 쪽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었다. 내 감방과 그 앞의 미친 놈이 서있는 곳만 제외하고 모두. 이 장소 이외의 공간은 그저 새하얀 공백뿐이었다. 마치 이 감방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이.
"새삼스레 놀라는 척 할 필요는 없다, 너가 자초한 일이니까."
내가 자초했다니. 그게 무슨?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바로 눈 앞에 있는 하얀 두건을 노려본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맞대고 있음에도 두건 밑에 가려진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너, 뭐야?"
그 질문에 녀석은 웃었다. 청년의 호쾌한 웃음소리. 소녀의 수줍은 웃음소리. 아기의 천진한 웃음소리. 노인의 떨리는 듯한 웃음소리……. 수많은 웃음소리를 섞어놓은 듯한 다채롭고 기묘한 웃음소리였다. 나는 순간 섬뜩해졌다.
"그래. 이번엔 현명한 질문이군."
녀석은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한손으로 두건을 내렸다. 이건 또 무슨? 순식간에 등골에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두건 아래에 감춰둔 그 얼굴. 그 얼굴에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 코, 귀, 입 모두. 그저 새하얀 백지였다. 이 감방 밖의 세계를 그대로 담아놓은 것 처럼.
"너… 너,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것은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섬찟한 미소뿐. 그렇게 아사르 알루바트의 미소에 얼어붙은 나는 딱딱한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방금 전의 미소만큼이나 차가운 지하 감옥의 바닥에서 눈을 떴다.


??Chapter 1.

서율은 거기까지 쓰고 멈췄다. 머리가 멍했다. 노트북 자판의 달그락 거리던 소리가 없어지니 방안에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엔 커서가 깜박이고 있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8시를 조금 넘어있었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화면에 출력된 글자들을 읽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어딘가 마음에 안든다. 문체는 또 왜 이따위야. 그리고 아사르 알루바트? 이건 또 뭐지. 무슨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봉인된 고대신 같은건가. 그보다 내가 이런 캐릭터를 설정한 적이 있나?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서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비우고 써보자 라는 생각으로 손가는 대로 프롤로그를 써봤더니 설정에도 없는 이상한 놈이 튀어나와버렸다. 무의식의 산물인가. 서율은 프로이트 선생과 융 선생을 원망해본다. 역시 막 갈겨 쓰면 안되는 거였다. 제대로 설정을 더 짠 다음에 써야지. 이번에도 폐기다, 폐기. 그렇게 생각하고 혀를 차며 서율이 백스페이스를 누르려는 찰나-
"누구게?"
어설픈 코맹맹이 소리와 함께 어둠이 엄습했다. 순간 흠칫 놀란 서율이었지만 상대가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얜 또 왜 이런다니. 여름이라고 더위를 처먹었나 남의 집에 기어들어와서 이게 무슨? 그보다 어떻게 들어온거야? 뜬금없이 나타나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는 상대가 조금 어이없어서 일부러 틱틱댄다.
"예전에 셰익스피어 선생이 말했지. 사랑에 빠진 사람, 작가, 미친 놈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너 작가가 미친 놈으로 변하는거 보고싶냐? 좋은 말 할 때 손 치워라, 윤초설."
그러자 칫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걷혔다.
"기왕이면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 변했으면 하는데, 작가 지망생 씨."
뒤에 있는 상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래도 너하곤 안빠져."
그렇게 내뱉고 서율이 의자를 빙글 돌려 뒤를 돌아보니, 거기엔 슬림한 체형의 미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서-
퍽!
왼팔뚝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앍! 뭐! 왜! 아프잖아!"
이년이가 진짜로 더위라도 먹었나. 서율이 도끼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초설이는 딴청을 부리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아, 미안. 파리가 앉아있어서."
애쉬브라운으로 긴 머리를 물들인 그녀는 보일듯 말듯하게 얼굴을 살짝 붉히며 몇초의 공백을 두고 말을 이었다.
"있잖아, 김서율 씨. 똘레랑스라고 알아? 사람이 평소에 안하던 쪽팔린 짓을 하면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거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똘레랑스 정신으로 너그럽게 받아주면 안됐었어? 꼭 날 무안하게 만들어야 했었냐고."
"초설아......"
서율은 가볍게 한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베풀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 밖에 없다."
퍽!
"아악! 이게 진짜 뒈질라고!"
"아, 미안. 벨제붑이 앉아있어서. 아까 그 파리가 복수해달라고 아빠라도 불렀나보네."
이번에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듯한 말투로 그녀는 기독교 7대 죄악 중 탐식을 관장하는 대악마 벨제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핑계로 댔다.
"그것 참 고맙다, 야. 하마터면 내가 파리대왕에게 지옥까지 끌려갈뻔 했구나. 쩐다, 너. 엑소시스트 짓도 하고."
그렇게 받아치며 서율은 속으로 이것도 꼴에 여자라고 때릴 수도 없고. 라고 궁시렁 댔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기로 한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누구게'는 왜 했냐. 시공간이 오그라드는걸 보고싶나봐? 폐쇄 공간이라도 만들게? 그리고 우리집엔 어떻게 들어온거야?"
"섬세하지가 못하다니까. 내가 똘레랑스 어쩌구 하는건 코로 들으셨나. 그리고 문은 안잠겨있던데."
초설이는 더위를 처먹어서 그런 짓을 한건지 뭔지 어쨋든 진짜로 대답하기 싫은듯 했다. 그래, 굳이 더 캐묻지 말자. 괜히 나만 아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율은 기지개를 한번 쭉 폈다. 꽤 오래 앉아만 있었더니 어깨가 뻐근했다. 그보다 현관문은…… 분명히 잠근 것 같았는데? 뭐 별일 없었으니까 됐지 뭐. 조금 찜찜한 면이 있긴 했지만 현관문에 관련된건 그렇게 그냥 좋게 좋게 생각하고 넘겼다. 문득 맞은게 억울해져서 서율은 초설이에게 괜한 시비 걸어본다.
"그럼 온다고 전화라도 하고 오던가. 사람이 에티켓이 없어."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생각해보니 글 쓴답시고 핸드폰을 꺼놨었다.
"맞다. 폰 꺼놨었지. 미안. 그럼 이제 너도 내 폰처럼 좀 꺼져."
……반응은 없었다. 초설이는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자기 할 일을 시작했다. 회심의 언어유희였는데. 전부터 언젠가 써먹을 생각하면서 혼자 키득거리던 개그가 개무시 당하자 서율의 기분은 더 언짢아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초설이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져온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내들더니 그대로 서율의 침대에 걸터 앉는다.
"아주 자기네 집 안방이구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다 큰 처녀가 기어들어와선. 내가 혹시라도 발정나서 너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곤 서율은 이 당돌한 아가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에 초설이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서율을 바라보며 서율의 디스를 시작했다.
"괜찮아. 김서율 씨는 절대 내 몸에 손 못대. 넌 선천적 얼간이니까. 그러니까 조금 전의 '누구게' 도...... "
초설이는 비아냥대다가 말을 끊었다.
"아, 아니다. 그건 됐어. 그보다 그렇게 계속 한숨만 쉬면 복 달아난다, 서율아."
그녀는 말을 돌려 엄마같은 표정을 하고 서율을 나무라듯 말했다. 이게 메인 탱커로 전직을 하셨나. 성질 긁는 말만 골라서 하네. 서율은 발끈해서 따지기 시작했다.
"복이 달아나긴 개뿔! 다 너 때문이잖아, 윤초설! 왜 멀쩡한 하숙집 놔두고 남의 자취방에 기어들어와서 날 빡치게 하는건데? 니가 기어오는 혼돈이냐? 너 그림 그릴거면 학교 작업실도 있잖아!"
초설이는 기어오는 혼돈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모르는게 당연했다. 연애소설이나 쓸거같은 이름의 작가가 창조한 정신나간 신이나 그 신을 2차 창작한 결과물인 변신 빠루 은발 소녀. 그 둘 모두 마이너였으니까. 특히 후자는. 어쨋든 그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서율의 자취방에 찾아온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초설이는 아무말 없이 쌩쌩 돌아가는 에어컨을 오른손 검지로 우아하게 가리켰다. 이년이? 서율은 뭐라고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그녀의 하숙집과 과 작업실에는 에어컨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서율은 또다시 한숨을 쉰다. 왜 이런거하고 엮여가지고.
김서율과 지금 여기 서율의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에어컨 탐식자 윤초설은 초등학교 때 부터의 친구 사이다.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서 심지어는 대학까지 같이 다니고 있다. 물론 전공은 다르지만. 서율은 꿈인 소설가와는 상관도 없는 경영학과에 왔다. 수능 성적에 대학 맞추기도 급급했고 솔직히 말해서 문과는 경제학, 경영학 말고 다른 학과를 나와봤자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문과나 문창과를 지망하던 서율이는 결국 자신과 적당히 타협을 했다. 하지만 초설이는 그러지 않았다. 예체능이었던 초설이는 재능도 있고 노력도 꽤 해서 자기가 원하던대로 회화과에 갔다. 더군다나 서율과 초설이 다니는 대학의 미대는 이 대학 하면 바로 미대를 떠올릴 정도로 미대가 유명한 곳이다.
"너 방금 전에 그거 지우려했지?"
초설이는 스케치북을 휙휙 넘기면서 갑자기 그 말을 툭 던졌다. 맞다. 까먹고 있었네. 서율이 의자를 책상 쪽으로 돌려 노트북 화면을 보니, 아까 지우려고 했던 글줄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응. 이건 폐기야."
지워야지. 서율은 화면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백스페이스를 길게 쭉 누른다.
"벌써 프롤로그만 몇번째야? 작가 지망생 씨. 근성 없게."
자신의 창작물을 시원하게 파괴하면서 싹트던 서율의 변태적 쾌감은 난데없이 날라온 그 말에 애로사항이 꽃피고 말았다. 서율은 글을 지우다 말고 백스페이스에서 손을 뗐다. 근성 없게. 프롤로그. 프롤로그. 근성 없게. 에휴, 그러게나 말이다. 근성 없네. 이게 도대체 몇번째 프롤로그일까? 여섯번째인가. 맞을 것이다, 아마. 서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또다시 한숨을 쉰다.
"아직 세계관이 덜 완성되서 그래. 이런 저런 자잘한 설정들을 다 짜야 뭘 하던가하지. 원래 세계관 완성하는게 제일 어렵거든. 세계관만 완성되면 글이야 금방 써."
언제나 써먹었던 레퍼토리를 또다시 내뱉었다. 항상 하던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왠지 구차하고 궁색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이에 초설이는 흐음, 하고 운을 뗀다.
"너가 그런거라면 그런거겠지. 설정이란게 소설을 써서 완성하려면 꼭 필요한거라고들 말하니까. 근데 거의 육개월 가까이 너의 '압슐루스' 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는 나도 좀 생각해주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서율이 쪽을 힐끗힐끗 보더니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스케치북에 연필로 무언가를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는 나도 좀 생각해주라. 그 말이 마음 한구석을 콕콕 찌르는 것 같다. 서율은 그녀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초설이는 언제나 서율이 쓴 글의 첫 독자였다. 그의 소설이 잘써졌건 못 써졌건 항상 가장 먼저 읽어줬다. 물론 그 소설들을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독서 능력에 문제가 있는건 아니었다. 문제는 서율의 소설에 있었다. 서율로써는 이런 말 을하기 부끄럽겠지만 그의 소설은 완성된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단편 하나조차도. 그래도 완성작이 없는 것에 대한 이유는 나름 많았다. 중간에 이건 역시 아니다 싶어서 엎어버렸다던가. 다른 바쁜 일이 많이 생겨서 흐지부지되었다던가. 작년엔 고3이어서 공부해야한다는 핑곗거리도 있었고. 어쨋든 그렇게 연재하다가 유야무야 된게 한 트럭이다. 그리고나서 서율이 '압슐루스'로 시작하는 단편 연작의 세계관을 구상한 것은 입시가 끝난 후 였다. 이젠 수능도 끝나고 했으니 어디 한번 작가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자. 전공이 대수인가, 나는 계속 작가의 길을 걸어갈거야. 라는 생각으로.
압슐루스(Abschluss). 독일어로 성립, 종결을 뜻하는 단어다. 저 위대한 반지 이야기의 세계관처럼 깔끔하고 완벽한 세계관. 그러한 서율만의 독자적인 세계관에서 펼쳐질 첫 모험담은 '이것으로 내 세계관은 성립되었다.' 라는 상징성이 있어야 했기에 성립을 의미하는 압슐루스만한 제목이 없었다. 어감이 좋기도 했고. 그렇게 자신의 단편 연작의 시작을 압슐루스로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소설을 위해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설정이 완성된 세계를 우선 만들어야 될 것처럼 보였다. 안그러면 쓰는 도중에 설정 붕괴로 골머리를 앓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서율은 설정부터 짜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장르는 판타지였다. 크게는 국가와 문화 등 에서부터 작게는 언어와 문자 등 까지. 그렇게 틈날 때 마다 설정을 정해나갔고 세계관은 얼추 완성되어갔다. 서율이 어느정도 됐겠지 싶었을 때, 프롤로그를 썼더니 어딘지 모자라 보였다. 그래서 지웠다. 설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내 세계관은 얼추여서는 안된다. 그런 생각이 들어 서율은 좀 더 자세한 설정을 짰다. 그 와중에 설정들을 뒤엎거나 수정하기도 했고. 그리고 나서 다시 프롤로그를 써봤다. 이번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시 이상해보였다. 지우고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에 대한 설정을 자세하게 수정했다. 나중에 필요해 보이는 설정들을 더 추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프롤로그 대여섯개를 말아먹고 설정질만 하는 것을 반복하니 어느새 육개월이 지나, 대학의 첫학기는 종료하고 여름방학이 시작되어있었다.

세계관은 아직도 완벽하지 않은 듯 했다. 분명히 몇 개월 전만해도 곧 완벽한 세계관을 완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좋아했던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정해야 할 설정들이 더 늘어가고 있어서 압슐루스의 시작도 그만큼 늦어지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본다. 아까 미처 다 지우지 못한 프롤로그와 깜박이는 커서, 그리고 흰색의 여백이 보였다. 젠장. 서율은 왠지 부아가 치밀어서 문장들을 통째로 지정하고 백스페이스 키를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글줄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잠깐 쉬어야지. 서율은 기지개를 피면서 침대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스케치 하냐? 뭐 그려?"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조금 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그리던 초설이가 그리던 부분을 마무리 짓고 나서였다.
"……스케치가 아니라 크로키야. 그리고 뭘그리고 있냐니. 너같으면 이 살풍경한 방 안에서 그릴만한게 뭐가 있을거 같아? 내가 나를 그리긴 좀 그렇고 그나마 그릴만한건 당연히 너-"
그녀의 말은 핸드폰의 벨소리때문에 끊겼다. 초설이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얼굴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네. 맞아요. 네. 네. 서율이요?"
초설이는 그렇게 말하며 이쪽을 힐끗 봤다.
"아, 네. 같이 있어요. 실례지만 누구신지? 뭐요? 그게 무슨- 아, 예. 네에."
초설이는 거기까지만 전화를 받더니 불만스럽게 핸드폰을 서율이 쪽으로 내민다.
"모르는 여자. 너 바꿔달래."
응? 뭐지? 서율은 왠지 모르게 이쪽을 째려보는 초설이에게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 김서율 씨?
전화기에선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간 장난기를 머금은 듯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네, 맞아요."
- 휴, 겨우 연결됬네. 핸드폰이 꺼져있던데 혹시나 해서 서율 씨 여자친구 분 핸드폰으로 전화해봤어요.
나한테 용무있는 사람이 초설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를 건거야? 내가 아는 목소리도 아닌데.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서율은 놀라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대답했다.
"여자 친구 아닙니다. 그리고 제 번호랑 제 친구 번호는 어떻게 안거에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
- 글쎄요. 그건 그렇게 좋은 질문은 아닌데요. 음, 하지만 일단 자기 소개는 해야겠네요. 뭐라고 소개하지? 일단 아사르 알루바트…… 라고 하면 아시려나?
뭐지, 이 여자. 아사르 알루바트? 그걸 어떻게 아는거야? 방금 전에 얼떨결에 써넣었다가 지워버린 캐릭터를? 서율은 조금 무서워졌다.
"이보세요. 장난 전화면 끊겠-"
- 그런데 왜 또 지우셨어요? 혹시 갑자기 내가 튀어나와서? 너무한거 아니에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가 따발총처럼 쏘아붙이는 말에 흠칫 놀라서 두리번거렸다. 스토커인가? 어떻게 전화 받기 직전까지 직전까지 하던걸 알고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스토킹 말고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도 나를 감시하고 있나? 세상에. 내가 스토킹을 당할 줄이야. 서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왜그러냐고 물어오는 초설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했다. 그리고 전화 너머의 스토커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런건 어떻게 아셨죠? 스토킹인가요? 더 장난치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좋은 말로 할 때-"
- 어떻게 알았냐구요? 그것도 그리 좋은 질문은 아닌데요. 그보다 너무하시네. 남도 아닌 나를 스토커 따위로 몰고. 경찰에 잡혀가면 나도 샨도 처럼 지하감옥에 갇히는건가요오? 헤헤.
서율의 위협을 중간에 잘라먹은 그녀는 짖궃게 대답했다. 샨도. 샨도 클라오운. 아직 프롤로그조차 제대로 쓰지 않은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소설의 주인공을 상대는 알고있다.그리고 좋은 질문이 아니라니. 이건 분명 방금 전 지웠던……? 분명 서율 자신 밖에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 내용들 안에 있던 '누군가' 라면 어쩌면...... 익숙한 형식으로 진행되어가는 대화에 불안감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며 서율은 예정 되어있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너, 뭐야?"
그 질문에 녀석은 웃었다. 청년의 호쾌한 웃음소리. 소녀의 수줍은 웃음소리. 아기의 천진한 웃음소리. 노인의 떨리는 듯한 웃음소리……. 수많은 웃음소리를 섞어놓은 듯한 다채롭고 기묘한 웃음소리였다.
- 그래. 이번엔 현명한 질문이군.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그녀…… 아니, 그놈의 목소리는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늙은이도 아닌 그 모든 것이 섞인 목소리가 되어있었다.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아사르 알루바트가 실재한다면 가장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어떠한 마력이 담겨 있는지 서율은 그 묘한 목소리로 인해 녀석이 진짜로 아사르 알루바트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해버렸다.
- 이 목소리가 너에겐 더 와닿을 것 같군.
알루바트의 말과 함께 갑자기 핸드폰이 두번 진동했다. 서율은 깜짝 놀라 헉. 하고 소리를 낼뻔 했지만 목까지 차오른 것을 가까쓰로 억눌렀다.
- 메세지를 보냈다. 그 메세지를 확인하고 적힌대로 행해라.
명령조의 말에 서율은 얼어붙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계속 되자 알루바트는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냥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번에는 바꿀 수 있기를. 끝낼 수 있기를.' 이라는 말만 남기고.
"김서율, 괜찮아? 안색이 안좋은데."
잠자코 지켜보던 초설이가 스케치북과 연필을 놓고 다가와 안색을 살핀다.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건 전화 때문에 몇분간 얼이 빠져있던 서율의 머리에 어떠한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지나 갔다. 설마?
서율은 의자에서 일어나 초설이를 밀치고 창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설마…… 아닐거야. 서율은 심호흡을 한번하고 에어컨 때문에 닫아놨던 창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 창문의 밖에는 옆 빌딩들이 보였고 도로와 저 앞에 있는 학교 정문 건물도 보였다. 밤이라 윤곽 밖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어쨋든 평소와 같다.
"휴……."
창문을 다시 닫으며 서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새하얀 세계가 아니다. 다행이다. 왠지 모르게 이 방 바깥의 세계가 방금 전의 프롤로그처럼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세계로 변했을 것 같았다. 서율은 터덜터덜 책상 앞으로 걸어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여자 누군데? 왜 그래."
초설이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서율은 적당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김미영 팀장이었다고 그럴까? 아니다. 개드립도 그런 개드립이 없다. 결국 서율은 감옥같은 느낌의 정신병원에 신고당해 끌려 들어갈 각오를 하고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심각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싸이코패스 광대 아저씨나 얼굴이 앙념 반 후라이드 반인 동전 아저씨하고 놀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초설이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서율의 프롤로그 속의 캐릭터가 전화를 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초설이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원래 옛날부터 이런 쪽에선 나름 쿨한 애니까 의외는 아닌가?
"그러니까 결국은 너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말이지?"
끄덕 끄덕.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초설이는 그런 서율을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눈을 다시 치켜 뜨며 조금 화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알겠으니까 내놔.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줌마한테는 안이를게."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릴하는거야? 서율은 벙찐 표정이 되서 초설이를 바라봤다.
"아무리 글이 안써져도 그렇지 약은 하지마라.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다 숨겼어? 빨리 내놔."
아 시바… 할말을 잃었슴다. 그래, 너가 이런 반응이 아닐 리가 없지. 그래도 정신병자로 모는 것 보단 이쪽이 현실성 있어서 좋네. 라고 생각하고 서율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런거 아니야. 진짜라니까? 말이 안되는건 알지만 진짜로 내가 소설에 써놓은 인물이었다고. 네 핸드폰에 그 놈이 보낸 문자도 있-"
서율은 잠시 잊고 있던 아사르 알루바트의 문자 메세지가 떠올랐다. 초설이의 핸드폰은 아직까지 자신의 오른손에 들려있었다. 재빨리 초설이의 핸드폰을 밀어서 잠금 해제하고 메세지를 확인한다. 메세지에는 오늘 오후 9시 정각까지 어떤 IRC (Internet Related Chatting) 사이트에 접속하여 Enlatados 라는 제목의 비공개방에 들어가라고 적혀있었다. 그 밑에는 tabularasa 라는 단어도 적혀있었다. 비밀번호인가. 라틴어로 새하얀 종이라는 뜻이었지, 아마. 서율은 초설이의 얼굴에 핸드폰을 들이밀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봐봐! 문자도 와있잖아. 진짜 맞다니까 그러네."
초설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메세지를 읽어보더니 대답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그럼 일단 그 채팅방에라도 들어가보던가. 그때까지 난 여기 청소 좀 할게. 좀 지저분한 것 같다."
지저분하긴 개뿔. 오늘 아침에 청소했는데. 청소한답시고 있지도 않은 마약을 찾아보려는 심산이겠지. 문자 메세지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초설이는 여전히 서율을 약쟁이 취급 하고 있었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서율은 노트북 쪽으로 의자를 돌려 인터넷 브라우저를 켰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포털사이트 나베르에서 채팅방 제목인 Enlatados 를 검색하는 일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 것은 그의 소소한 버릇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 결과는 어느 나라 말로 쓰여진 것인지도 모를 외국 사이트들만 잔뜩 나왔다. 서율은 혹시나 해서 검색했을 때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으로 보았던 Enlatado 라는 단어로 다시 검색해보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결과가 나왔다. 스페인어였다. 복수형이 Enlatados. 맞다, 이 단어. 어디보자 뜻은…… 통조림? 뜬금없이 왠 통조림이지? 방제는 통조림에 비밀번호는 새하얀 종이. 서율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자신이 창조한 텍스트 상의 인물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부터 불길함의 시작이긴 했지만.
서율은 모니터 오른쪽 구석에 위치한 시계를 봤다. 8시 37분이었다. 진짜로 들어가봐야하나? 서율은 조금 망설여졌지만 한편으론 알루바트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해서 IRC 사이트에 접속했다. 닉네임은 평소 소설 연재 사이트에서도 그랬듯이 그냥 자신의 이름으로 정했다. 옆을 힐끗 보니 초설이는 계속해서 샅샅히 방청소를 하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 쉬고 눈을 다시 화면으로 돌린다. 방 제목을 검색하고 비밀번호를 적어넣은 뒤 엔터 키를 눌렀다.

- 서율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GE-2: 오 또 왔네. ㅎㅇ
사랑공예사: ㅎㅇ요
미치루: 오하~

어…… 뭐지? 입장한 채팅방 안에는 방장인 아사르 알루바트와 방금 들어온 서율 외에도 세명이 더 있었다. 어쨋든 일단 인사를 받았으니 대답을 해야겠지. 서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노트북 자판을 몇번 달그락거리며 눌렀다.

서율: 하이요. 근데 이거 뭐죠?
사랑공예사: ㅁㄹ요
미치루: 잘 모르겠다죠...
GE-2: 글쎄여;;

알루바트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결국 서율은 9시 정각까지 20분 남짓한 시간을 이 사람들과 채팅을 하며 보내게 됬다. 대충 이야기를 해보니 서율과 그들 사이에는 크게 세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먼저, 서율을 포함한 전원이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점.
둘째, 집필을 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수상한 캐릭터(아마도 아사르 알루바트일 것이다)에 대한 이야기를 쓰거나 설정하고 있었고, 곧 그 캐릭터가 전화를 걸어와 이 채팅방을 알려줬다는 점. 이 점을 미루어 보면 아사르 알루바트는 서율이 글로 쓴 존재가 현실에 나타난 것은 아닌 듯 했다. 오히려 반대로 현실에 원래부터 존재하던 알루바트가 어떠한 속임수로 작가들로 하여금 소설에 뜬금없이 자신을 등장시키게끔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이런 말 하기 조금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소설가 지망생임에도 불구하고 대표작이 없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설정만 짜고 소설은 안쓰는 설정 오타쿠. 줄여서 설덕후라고 불리우는 이들이거나 항상 소설의 프롤로그만 조금 깨작거리다가 말아서 프롤로거(prologuer)라고 불리우는 이들이었다. 알루바트가 이 채팅방에 그들을 초대한 이유에 대해 토론하다가 별다른 진전이 없자 그들은 화제를 돌려 소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루바트를 제외한 채팅방 안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현재 구상중이거나 프롤로그를 쓰고있는 소설의 설정 이야기 혹은 생각해놓은 클라이맥스 장면 등의 이야기를 하며 신나게 채팅했다. 어느새 초설이도 서율의 옆에서 채팅 내용을 구경하고 있었다. 결국에 마약 찾는건 포기했나보다. 그리고 마침내 9시가 되었다.

미치루: 결국 그래서 주인공은 동아리에 가입하게 됩니다만...
GE-2: ㅇㅇ
GE-2: 그러고나서는요?
AsarAlubat: 여러분 안녕하세요.
서율: 왔네.
미치루: 여어.
GE-2: 오셨네여
사랑공예사: ㅎㅇ
AsarAlubat: 여러분 굉장히 죄송하지만
AsarAlubat: 아직 한분이 안오셔서요.
AsarAlubat: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쟤가 아까 내 핸드폰에 전화했던 애야?"
초설이는 채팅창에 AsarAlubat 라는 닉네임이 쓴 글이 나타나자 그렇게 물었다. 서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채팅 말투가 가식적이다. 전화하고 완전 다르잖아. 존댓말 프X더같은 새끼. 굉장히 예의바른 말투였지만 알루바트의 등장은 채팅방의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한명을 기다리는 동안 채팅방에 있는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텍스트 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허구의 인물과의 대화는 분명 껄끄러울테니까. 그렇게 몇분이 지났다.

- Dunkelkrauz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

Dunkelkrauz: 늦었네요...죄송합니다...
사랑공예사: ㅎㅇㅇ
미치루: 오하
AsarAlubat: 그럼 다 모이셨으니
서율: 하이요.
AsarAlubat: 제가 여러분을 부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GE-2: 안녕하세요.
AsarAlubat: 모두 제 말에 집중해주세요.

그리고 나서 알루바트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채팅방은 또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서율과 초설이는 의아해졌다.
"뭐지? 왜 아무말도 없어?"
"내 생각엔 뭐 길게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장난 좀 쳐볼까."
초설이의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 그녀는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휙 끌어당겨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서율: 야
서율: 야 알루바트
서율: 자냐?
서율: ㅡㅡ
미치루: 서율 군. 그러면 다메다요;;;
서율: 너 내 폰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ㅡㅡ
서율: 내말 씹냐
Dunkelkrauz: ?

"이게 뭐하는 짓이야!"
서율이 소리를 지르며 다시 노트북을 뺐자 초설이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팔장을 꼈다.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GE-2: 어...뭐죠;;
서율: 죄송합니다;; 옆에서 친구가 장난친다고;;

그 때였다. 아사르 알루바트의 기괴한 장문이 올라온 것은.

AsarAlubat: 하하하하! 어리석은 우민들아! 이 몸이 너희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건 바로 자네들이 소설을 쓰지 않기 때문일세. 그대들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대로라면 분명 소설을 완성시키지 못할거에요. 네놈들은 설정질만 죽어라하는 설덕후에, 프롤로그만 조루처럼 찍 싸고 마는 프롤로거들이니까. 저능아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나선거야. 귀공들 중 일부는 이 채팅방 제목의 의미를 알고있을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 어로 통조림이란 뜻이죠. 귀관들은 그래도 꼴에 소설가 지망생이니 통조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것이다.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통조림은 작가를 감금시켜놓고 마감을 끝낼 때 까지 강제로 집필시키는 것을 의미해요. 근데 너희는 완성된 대표작 하나 변변하게 없어서 인지도가 바닥이잖아? 너흴 통조림이라도 시켜줄 담당 편집자 하나 없잖아? 너흰 안될거야, 아마. 아니아니 이게 아니라……. 어쨋든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대출혈 서비스! 본인이 너흴 구제하기 위해 직접 통조림시켜주겠다, 이말이다. 사양은 받지않겠다요. 그대들은 아직도 궁금증이라는 이름의 갈증 때문에 목이 마른 것인가? 궁금한게 있으면 질문해보라는거야.

"있잖아, 서율아."
"응, 초설아."
"얘 뭐래니?"
하아……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율은 작게 한숨을 쉰다.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아사르 알루바트.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말투가 달라졌다. 이거 분명 컨셉이겠지? 다중인격 컨셉이나 뭐 그런건가? 서율은 난감함을 느꼈다. 왠지 조금 전까지 이 괴인에게 겁먹고 있던 자신들이 매우 한심해 보였다. 어쨋든 이 놈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명확했다. 우리를 강제로 소설을 완성시키게 하겠다. 소위 통조림을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어떤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이지? 서율은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렸다.

서율: 우리가 싫다면?
AsarAlubat: 사양은 받지않겠다고 했다요.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병신아.
서율: 이 새끼가?
GE-2: 사양을 받지 않겠다뇨. 우릴 납치라도 할거에요?
Dunkelkrauz: 전 나름 괜찮다고 보는데
미치루: 나...납치? (털썩)
사랑공예사: 난 아직 설정해야할게 남아있어서 안됨
Dunkelkrauz: 아 납치가 괜찮다는게 아니라 강제집필;;

이런 저런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질문이라기보다는 불만이 가득한 말들이 많아서인지 알루바트는 모두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시작했다.

AsarAlubat: 아, 더럽게 시끄럽네. 질문하라고했지 누가 언제 징징대라고 했냐?

채팅창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어지는 알루바트의 말은 빠르게 출력되어 채팅창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AsarAlubat: 님들은 그냥 닥치고 제가 하라는대로 하면 되는거에요.
AsarAlubat: 말했지만 그대들에게 선택권은 없다.
AsarAlubat: 근데 조금 특이한 통조림이라서요.
AsarAlubat: 재미있으라고 게임적 요소를 가미해봤거든.
AsarAlubat: 이 몸께서 여기서 네놈들에게 그 설명을 먼저 해야겠지만
AsarAlubat: 자네들도 알다시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도 있잖나?
AsarAlubat: 그러니까 설명은 '안'에서 하겠다는걸까나?
AsarAlubat: 부디 운명을 끝낼 수 있기를. 자 그럼 각설하고 바로 집필해봅시다, 작.가.님.들.

그 말과 함께 내가 아까 프롤로그를 지우고 최소화시켜두었던 워드 프로세서 창이 최대화되서 화면에 가득 찼다. 뭐지? 아무것도 건들지 않았는데? 서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초설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설이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서율은 다시 화면을 본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커서만 깜박였다. 서율은 왠지 모르게 그 새하얀 워드 프로세서의 화면이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눈이 아파져서 잠깐 얼굴을 찡그려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리고 백지는 보이지 않았다. 저 앞에 그저 어둠만이 보였다. 동시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후각 다음으로 서율이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잠시 마비됬었던 시각이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서율은 자신이 쇠창살로 막힌 감방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몸을 보니 거의 포대자루에 가까워 보이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이게 뭐여. 처음 보고 처음 입어본 옷이었지만 어딘지 익숙한 옷이었다. 감옥 안도 자신이 상상했던 그대로다. 아마 지금 깔고 앉아 있는 딱딱한 이것이 침대겠지. 서율은 혼란스러웠다. 어떠한 상황인지는 대충 이해는 했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인정할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이곳은 바로-
"처음 시작은 서율 씨의 세계네요."
왠지 몇십분 전에 들은 것 같은 목소린데. 그 목소리를 듣자 서율은 짜증이 솟구쳤다. 서율이 고개를 들자 쇠창살 밖에는 은발의 소녀가 교복같아 보이는 걸 입고 서있었다. 모두 다 이 자식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소설에선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냐?"
서율은 소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대꾸했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들 중 하나지만요. 껄끄러우신가요? 이런 귀여운 모습을 한 후배 컨셉인데? 박정해라. 서율 씨는 후배 위하는 선배는 아니네요오? 헤헤."
녀석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후배 위하는 선배'를 애매하게 끊어 말했다.
"X까."
그렇게 내뱉고 서율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자신이 놓여져 있는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말도 안되는 짓이긴 했지만 쇠창살 저편의 작자가 자신들에게 대충 뭘 시킬 것인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역할극이지?"
서율은 방금 전까지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괴인에게 앞 뒤 다 잘라먹고 불친절하게 물어봤다. 애초에 상대도 이 이상한 곳으로 서율을 불친절하게 끌어들인 것이니까. 이에 흰색 두건을 눌러쓰고 새하얀 로브를 입은 괴인, 아사르 알루바트는 대답했다. 아까 전 전화하면서 들려줬던 기묘한 목소리로.
"정답이다, 김서율. 머리 회전이 빠르군. 이곳은 너의 소설의 세계관인 압슐루스 레벨이지. 그보다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다. 다른 자들은 매우 놀라던데."
미안, 표정이 풍부하지 못해서. 이래보여도 나도 속은 패닉 상태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서율을 앞에 두고 알루바트는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네 소설의 주인공, 샨도 클라오운이 되서 움직여라. 그리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야기를."
그래, 대충 그런 것일 거라고 예상했어. 젠장,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감금 집필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서율은 혀를 찬다.
"혹시 지금이라도 내보내줄 생각은-"
"없다."
"만약 무릎 꿇고 싹싹 빌면-"
"아니."
"그래도 벌레처럼 바닥에 기면 혹시라도-"
"싫다."
서율은 단념하고 한숨을 쉰다. 오늘은 왠지 한숨 쉴 일이 많은 것 같았다.
"그래…… 다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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