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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스크램블 메탈 -(걸즈 밋 머신)-
글쓴이: 유나토
작성일: 12-07-31 23:50 조회: 3,533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검은 연기가 방에 스며든다.
“엄마… 엄마… 콜록! 콜록!”
소녀의 힘없는 외침은 전해지지 않는다. 6~7살 즈음의 어린아이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하얀 잠옷은 검은 연기에 이곳저곳이 그을려있다.
“어, 엄마아…”
동화책을 읽어주고 함께 잠에든 모친은 보이지 않는다. 무서움에 떨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눈물만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다리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 자리에 넘어질 뻔했지만, 침대 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일어선다.
문틈에서 들어온 검은 연기는 벽을 타고 천장을 그을린다. 소녀는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눈물범벅인 얼굴을 훔치며, 문으로 다가갔다.
“!”
금속 손잡이는 잡을 수 없을 만큼 열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다. 아마 문 너머는 불지옥이 펼쳐있겠지. 방에서 나갈 수 없다.
아이는 뒷걸음질을 치다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어버렸다. 그때 연기를 제법 들이마셔 버렸다.
목이 뜨겁다.
“콜록! 콜록! 어… 엄마… 엄마아….”
아이의 말은 힘없이 끊겼다. 말을 이어갈 기력조차 없이 눈물로 뿌연 시선이 허공을 맴돈다.
문이 불타기 시작한다. 문의 모서리부터 침입한 불길은 벽을 타고 날뛰는 마수가 되어 모든 것을 재로 만든다.
어린 시절 벽에 붙여놓은 스티커와 낙서가 불타 사라진다.
좋아하던 그림동화도 독한연기를 내며 사그라진다.
봉제인형에 떨어진 불똥은 귀여운 인형의 털과 솜을 태우며 그로테스크하게 변한다.
액자의 유리가 깨지며 어머니와 단둘이 찍은 가족사진 역시 불길에 오그라들며 사라진다.
침대가 불탄다. 책상이 불탄다. 소녀가 태어나 소중히 꾸며온 모든 것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있다.
붉은 화마는 언제든 소녀를 집어삼킬 수 있는 입을 뻐금거린다. 독한 매연과 열기에 소녀는 정신을 잃었다.
2층 저택이 불타는 큰 화재임에도 밖은 조용하다.
주거지역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집은 100미터 가량만 떨어져 있지만, 눈보라가 심한 심야다.
만약 누군가 소방서에 신고해도, 러시아 혹한의 눈보라를 해치고 도착하는 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저택 대부분이 불탄 지금 소녀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주변 사물을 불태운 불길은 마지막 입을 벌리며 소녀를 향한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열기에 탄다. 하얀 피부는 검댕투성이다. 토끼 그림이 그려진 잠옷에 불똥이 달라붙었다. 소녀의 등을 태운다.
소녀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불길 속에서 홀로 죽음을 맞는다.
그럴 운명이었다.
하지만 한줄기 구원이 나타났다.
유리창을 깨트리고 무언가 방안에 침입했다.
은색의 2m의 거구다. 팔, 다리, 배와 가슴, 머리 모든 것이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니다.
갑자기 돌입해 온 은색 거구는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간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불길한 소리를 낸다.
금속재질의 보디. 녹색의 고글, 등 부분엔 삼각형의 백팩을 메고 있다. 걸음걸이가 움직임이 한 동작씩 끊어진다. 마치 ‘로봇’ 같다.
은색 거구는 낭비 없는 움직임으로 불타고 있는 소녀의 웃옷을 잡고 찢어 던졌다. 부드러운 천이 공중에서 불타 사라진다.
소녀의 등은 이미 큰 화상을 입었다.
반나체가 된 아이를 양팔로 조심히 들어 올리고 도약자세를 취한다.
상체를 숙여 다리를 굽힌다. 시선은 부서진 창문 너머. 밤하늘에 고정한다.
그런 와중에도 불길은 더욱 거세진다. 집안 어딘가에서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집이 점차 기울어진다. 화염은 이미 발밑을 태우고 있다. 일반사람이면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순간 녹색의 고글이 번쩍였다.
힘을 모은 다리가 바닥을 차며 단번에 도약했다. 아이를 소중히 안고 은색의 선이 되어 불지옥을 탈출했다.
직후 소녀와 거구가 있던 자리에 천장이 무너졌다. 그 자리의 모든 것은 불 속으로 사라졌다.
한 줄기 선이 된 거구가 착륙한 것은, 불타는 건물에서 30m가량 떨어진 지점이었다.
며칠간의 폭설로 허리까지 쌓인 눈이 충격을 완화했다. 각 관절부에서 하얀 증기가 피어오른다. 증기에 눈이 녹아내린다. 내리는 폭설도 몸체에 닿자마자 물방울로 변한다.
등 뒤의 건물에서 몇 차례 폭발이 일어난다. 폭발 자체는 크지 않지만, 자잘한 파편이 날아와 은색 몸체를 두드린다. 몇 번의 폭발 뒤, 집은 괴물 같은 비명을 내며 으스러졌다.
눈이 먼지처럼 피어오른다. 그 소리에 인근 사람들도 잠에서 깼는지 좀 떨어진 가정집 창문에 불이 들어온다.
“으음….”
신음을 내며 기절한 소녀가 살짝 눈을 떴다.
‘누구…?’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뻥끗 거리는 정도다. 대답은 없었다.
(один(아진)…)
격통과 함께 다시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이마 부분에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구의 기계는 멀리서 남녀가 뛰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안고 있는 소녀를 푹신한 눈밭에 올려놓는다.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쉽게 내려놓은 은색 거구는 몇 차례 도약으로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소녀 ‘유리’는 정신을 잃었다.

1. 유학생

시골의 무인역 앞에 검은 승합차가 세워져 있다.
시동은 꺼져있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소나기가 내려 축축해진 흙 위에 남겨진 발자국은 역으로 이어져 있다.
평소엔 인적이 드물고 가끔 동내 어른들의 모임장소가 되는 곳일 뿐이다. 역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했다. 문서 상에만 무인역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 실질적으론 폐역이다.
플랫폼 한 개와 선로 한 개의 단선승강장이다. 길게 이어진 녹슨 철길이 과거에 기차가 다녔단 것을 알려주고 있다.
야밤의 어둠을 틈타 두 명의 남자가 폐역의 곳곳을 들썩이고 있다.
“정보에 의하면 4개 포인트 중 이곳일 가능성이 가장 컸는데.”
암시고글을 쓴 동양인인 대지가 중얼거렸다.
그가 장착하고 있는 것은 고글만이 아니다. 양팔과 어깨, 다리를 꽉 죄인 보호구를 착용했다. 보호구에 연결된 금속뼈대는 남자의 신체라인을 따라 등과 가슴패널에 이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팔과 다리가 두툼한 고릴라처럼 보일 것이다.
작업용 근력보조기구. 강화외골격이다.
말하자면 입는 지렛대로 명칭은 <레버서포트>라 불린다.
그는 역 한구석에 자리 잡은 창고를 향했다. 붉게 녹슨 문은 굵은 사슬로 단단히 잠겨 있다. 허나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문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넣는다.
“흡!”
등에서 모터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금속의 마찰음이 귀에 거슬린다. 경첩의 못이 하나씩 뽑히더니 철문은 휴지장 뜯어졌다.
팔을 몸쪽으로 끌어당긴 게 전부였다. 인간의 힘이 아닌 기계의 힘이다. 암시고글을 내리고 어두컴컴한 창고를 본다. 하얀 먼지만 둥둥 떠다닌다.
"역시 아무것도 없네.“
숨을 한번 고르고 선로 아래쪽에 있을 파트너를 불렀다.
“루이즈, 그쪽은 어때?"
금발과 파란 눈의 곱슬머리 서양인이다.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정장 셔츠에 장갑을 끼고 있다. 작은 단말기와 후레시를 가지고 플랫폼 아래를 둘러보고 있다.
“마찬가지야,”
행여나 놓친 것이 있을까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는 부분은 일일이 손으로 만져본다.
루이즈는 장갑을 벗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3월이라 아직은 추웠다.
작업은 한밤중에 시작했으나, 멀리 산 하늘이 남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해온다.
“아, 제길 이번에도 꽝인가.”
‘꽝’이란 단어에 힘이 쫙 빠지며 노동의 피로가 몰려온다. 새벽 특유의 고양된 공기가 주변을 맴돈다.
“철수하자.”
몇 시간 동안의 작업에도 별다른 이득이 없던 탓일까. 말투에 저도 모르게 가시가 있다.
루이즈가 플랫폼으로 올라와 풀어놓은 장비를 알루미늄가방에 넣는다.
대지는 뜯어낸 문짝을 쓰러지지 않게 세워두고, 무거운 장비들을 차로 옮겼다.
짐을 모두 챙기고 승합차 뒷좌석에 밀어 넣는다. 좌석을 모두 떼어냈기 때문에 공간은 넉넉했다.
짐은 모두 밀어 넣고 마지막으로 외골격을 벗는다.
가슴 부분 아래에 달린 손잡이를 당겼다. 압축공기가 새는 소리와 함께 팔, 다리의 보호구가 느슨해진다.
팔, 어깨, 다리 순서로 보호부의 잠금을 풀어헤쳤다. 마지막으로 가슴보호부를 올려 벗는다.
두툼한 근육의 영장류 같았던 강화복은, 앙상한 뼈대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대지가 운전석, 루이즈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머리에 걸친 암시고글을 벗고 시동을 넣었다. 히터를 틀었지만, 엔진이 예열되기 까진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정보부 녀석들은 조금 더 일할 수 없는 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아, 보고서 써야 하는데, 졸려 죽겠다.”
루이즈는 눈을 지그시 감고, 눈 마사지를 했다.
“그럼 커피라도 마시던가.”
대지는 좌석의 콘솔박스를 열어, 보온병과 종이컵을 꺼내 따랐다. 단 커피 향과 따뜻한 김이 오른다.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다.
“땡큐. Mr.돼지.”
대지의 시선과 움직임이 몇 초간 정지했다.
“?”
“돼지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대지’라니까. 따라해 봐 ‘대’.”
“어? 어… 대.”
루이즈는 얼떨결에 따라 한다.
“‘지’.”
“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흡족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두 단어를 붙이면?”
“돼지.”
대지는 머리를 푹 떨궜다. 그리고 약간의 원망이 담긴 눈초리로 루이즈를 본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
히터에 점차 열이 오른다.


유리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검붉은 빛이 감도는 머리카락, 회색 눈동자. 새하얀 피부의 소유자다. 그렇지 않아도 티 없는 얼굴은 지금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색을 하고 있다.
등굣길부터 들려온 건 익숙한 러시아어가 아닌 한국어다.
1주일 전 입학식이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은 건 외국인인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 시선, 시선, 시선.
입학 전날까진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뭐라고 대답할까, 한국어로 말실수라도 하면 다들 웃으며 친구가 되겠지.’ 라며 내심 기대 섞인 긴장을 했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을 피한다.
시선이 느껴져 눈이 마주치면 상대는 시선을 회피하거나, 몇 무리는 자신을 쓱 훑어 본 뒤 자기들끼리 키득거린다.
이방인1을 보는 눈이다.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공기 같은 존재로 보내길 1주일.
먼저 다가가 대화에 껴볼까 생각도 했지만, 과감히 실행할 만큼 유리는 뻔뻔하지도, 대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 뻔뻔하고 대담한 모습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 남학생들은 종이 치자마자 급식실로 나갔다. 반에는 두 개의 여학생 무리가 있었다.
우선 창가 쪽엔 3명이 책상에 걸터앉아 있다. 치마를 짧게 줄이고 화려한 색상의 점퍼를 입었다.
인상을 찡그리거나. 방정맞은 웃음을 흘린다. 손가락은 쉼 없이 핸드폰 자판을 누르고, 말끝마다 ‘존나’ 라거나 ‘미친’ 같은 단어가 붙어 있다.
또 다른 무리는 4명 모두 안경을 쓰고 있다. 책상을 붙여 둥글게 앉은 4명은 점심시간임에도, 문제지의 정답을 맞히고 있다.
스터디그룹. 유리는 문득 인터넷에서 본 한국의 학교생활에 관한 글이 떠올랐다.
한국 학생들은 공부를 너무 좋아해서, 온종일 공부만 한다는 것이었다.
(진짜였구나….)
잘못된 지식이었나, 누군가 지적해줄 사람이 없다.
잡생각은 제쳐놓고, 지금은 두 번째 무리에게 다가가는 것이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유리는 처음 할 말을 적어 둔 쪽지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밤늦게까지 고민한 끝에 정한 첫마디였다. 살짝 눈을 감고 얕은 심호흡을 했다.
‘좋아.’
쪽지를 마이 주머니에 접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끄는 소리도, 발소리도 없이 조심스럽게 스터디그룹을 향했다.
전신의 신경이 어색한 걸음을 뇌에 호소했다. 물속을 걷는 기분이다.
“15번 문제는 정답은 3번.”
정답을 맞히고 있던 학생들 뒤에 살짝 서고 몇십 번이고 되풀이한 말을 꺼낸다.
“음, 저기, 이번 달에 새로 나올 신형 레버서포트(RS)에 대한 뉴스 봤나요?”
다행히 말은 더듬지 않았다.
“15번 문제는 좀 어렵던데.”
“그럼 공부 더해.”
“애독하던 잡지 최신호에서 봤는데, 기존의 의료용 RS 보다 장착이 편한데다가, 단가가 훨씬 싸단 거 있죠.”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니 듣는다 하더라도 유리가 뭐라 떠드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래도 전 이런 쪽에 취미가 강한데, 여러분의 취미는-,”
“잠깐, 아까부터 뭐야.”
여학생 한 명이 짜증스런 말투와 함께 샤프를 내려놨다. 나머지 3명의 시선이 동시에 유리에게 쏠린다. 아마 착각이겠지만 안경에서 인광이 보인 듯했다.
“미안한데.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해줄래?”
“어, 저기….”
“아까부터 좀 방해되거든?”
“급하면 말해봐. 들어줄게.”
동시에 쏘아붙인다.
“아, 아니… 방해해 미안해요.”
날카롭게 집중되는 4명의 시선. 유리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뒷걸음질쳤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러다 뒤에 있는 의자에 다리가 걸렸다.
“꺅.”
무릎이 꺾이고, 몸의 중심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간다. 요란한 소리로 의자가 넘어지고, 뒤통수가 바닥과 충돌했다. 폐에서 공기가 무겁게 빠져나간다. 숨이 막힌다. 하얀 허벅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닥의 차가움이 등을 타고 올라온다.
1초가 1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지났다. 창가에 모여 있던 3명은 교실이 떠나가라 폭소했다. 한 명이 유리가 넘어지는 걸 재연하니 웃음소리가 더 커진다. 시끄럽고 창피해 죽고 싶어진다.
유리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피가 올라 귀에서 이마까지 시뻘게 졌다.
“아…으.”
일어서야지. 마음은 먹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반에 있는 학생 중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비웃을 뿐이다.
4명의 여학생은 동시에 책을 덮고, 필기구를 정리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기계처럼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짜증 난 표정이다.
그녀들은 유리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옆을 지나갔다. 그 순간 앞문이 열리고 누군가 요란하게 들어왔다.
“좋은 아침!”
3명의 웃음소리가 딱 멈춘다. 모든 시선이 앞문에 쏠렸다.
그곳에는 여학생이 있었다. 지금 학교에 온 건지, 가방을 메고 있다.
활동적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검은 눈동자는 빛나고,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검은 머리카락은 세필 붓처럼 고운 머릿결이었다.
분명 초면이지만, 어디서 본 것 같다. 유리는 기억을 더듬어 입학식 날 받은 반편성표를 기억해 냈다.
[경일고등학교 1학년 2반 ‘김 은하’]
몸이 아프단 이유로 입학식 날을 포함해 단 하루도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학생이었다.
“응? 분위기가 왜 이래.”
은하의 등장으로 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호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험악한 것도 아니다.
단지 낯선 이의 등장에 다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던 것이리라.
창가 쪽에 있던 개조교복 3명은 별다른 말없이 자리를 떴다. 이 묘한 분위기에서 빨리 나가고 싶은 거겠지.
“너는 왜 엎어져 있어.”
“아니, 이건.”
유리는 의자에 얽힌 다리를 빼고,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등의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야야, 같은 반인데 안 도와 주냐?”
“우리가 왜?”
“그럼 네가 도와주지그래?”
스터디 그룹의 몇 명이 독설을 내뱉는다.
“그런 말 안 해도 그러려고 했어.”
은하는 복도에서 신발을 벗고, 유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유리가 잡아도 될지 잠시 망설인 동안 은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유리는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한 줄 알았다.
“그 머리 색깔. 담임 쌤이 말하던 러시아 유학생이구나?”
“네? 아, 네.”
“그렇구나, 그보다 빨리 일어나. 옷 더러워진다.”
“아, 네! 죄송합니다.”
유리는 은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등의 아픔은 어느새 사라져있다. 유리는 교복 치마를 털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뭘 별것도 아닌데.”
교실 앞에선 여전히 4명의 시선이 느껴진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혹시 오해할까 미리 말하는데, 걔가 넘어진 건 자기가 의자에 걸려 넘어진 거야.”
스터디그룹 중 리더로 보이는 학생이 말했다.
“응? 난 안 물어봤는데.”
은하는 태연하게 답했다.
“만약을 위해서야.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오는 사람한테 이상한 소리 듣기 싫거든.”
혐오감 담긴 시선으로 쳐다본 뒤 3명과 교실을 나갔다.
“까칠한 애네.”
반에는 유리와 은하 두 명만 남았다.
“자기소개가 아직 이었지? 내 이름은 은하인데, 네 이름은?”
“유리. 보르프스키 유리입니다… 가 아니라 에요.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은하는 이상한 말투라며 웃었다. 하지만 기분 나쁘진 않았다.

도서실 앞 자율학습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즘 수도권 학교는 표면상이라도 자율야자가 됐기에 쓰는 건 몇 명 되지 않았다.
유리와 은하는 매점에서 산 빵과 우유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가끔은 이런 점심도 괜찮겠지."
은하는 슈크림 빵과 500mL흰 우유를 샀다.
“은하 양은 그냥 점심 먹어도 괜찮은데, 저 때문에….”
유리는 동급생에게 송구스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유리는 우유크림샌드와 딸기우유를 샀다. 한국식이 아직은 입에 맞지 않기 때문에 급식은 신청하지 않았다. 특히 매운 것은 질색이다.
“같은 반이잖아. 그렇게 불편해하지 말래두, 그리고 난 빵 좋아해.”
그렇게 말하며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달콤한 크림이 입안에 가득 퍼진다.
“죄송해요.”
“잠깐, 존댓말금지. 동급생인데 존댓말이라니 이상하잖아.”
“아, 죄송…. 아니 이게 아니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몇 번 뻐금거린다.
유리는 한국인인 모친의 영향으로 한국어는 읽는 것도, 듣는 것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말하기만큼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상한 높임말 말고는 잘 써지지 않는다.
눈의 초점이 방황하며 말 놀림을 연습하는 유리를 보니 은하는 쓴웃음이 나왔다.
“근데 아까는 무슨 일이었어?”
은하는 화재를 돌렸다.
“반에서.”
“프렌드. 그러니까 친구 만들기에요. 이 잡지에 적혀있는 대로 했더니 그냥 무시당했지만요.”
유리는 어디서 꺼냈는지 여성잡지를 펼쳐 은하에게 보였다.
“어디? 어디? <입학식 당일 아는 사람도 없고, 먼저 말걸 용기도 없는 당신을 위한 친구100명 만들기 방법>?”
쓸데없이 구체적인 것이 수상한 제목이다. 그리고 100이라니 난이도 너무 높잖아. 라고 은하는 생각했다.
그 방법으로는
1.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해보자]
“(제목에 용기 없는 당신)이라 적힌 것 같았는데.”
“그래도 용기는 냈어요.”
2. [자신의 취미를 상대에게 밝혀보세요.]
“이건?”
“RS의 최신 정보에 대해 말했어요. 너무 오랜 소식이라면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공감대고 뭐고 일반인, 그것도 평범한 ‘여고생’에게 말해본들 알아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RS? 그게 뭔데.”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은하도 마찬가지였다.
“‘레버서포트’에요. 사람들이 입는 강화외골격이요.”
은하는 팔을 위, 아래, 좌, 우로 움직이며 설명했다.
“아,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거 말이지? 팔, 다리에 뭘 두르고 힘이 강해지는 그거.”
일반적인 사람에겐 ‘그거’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다.
RS. 그러니까 <레버서포트>가 탄생한 것은 1940년도 초반의 일이다. 당시 세계대전 중반. 탱크 같은 외부동력에 연결하여 전장에서의 물자 운반이나 수리용 도구로 사용되었다.
80년대 이후엔 배터리의 발달로, 군사용보다 의료분야나 능동적 작업도구로서 활용도가 더 높음을 깨닫고, 여러 분야에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5년. 지금은 일정수준의 선진기업이라면 대부분 이 사업에 몸담고 있다. 다만 고질적인 가격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탓에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이번에 새로 나올 RS는 구조를 심플하게 만들어서 비용문제가 파격적으로 해결 됐어요. 앞으론 휠체어보다 RS를 이용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걸요!”
유리는 말문이 트였다.
이런 공과분야를 줄줄 꿰고, 관련 잡지를 정기 구독하는 여고생이 몇이나 있을까. 그녀가 1주일간 반에서 고립된 건 소심한 외국인인 것도 있다. 그러나 이런 마이너 한 성향도 관련돼 있을지 모른다.
“그거 굉장한 거야?”
“굉장해요.”
유리는 묘한 박력을 뿜어냈다.
“하지만 친구 만들기엔 실패했지.”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네.”
박력은 단번에 사그라졌다. 그 모습이 왠지 기가 죽은 고양이 같았다.
은하는 그런 유리를 물끄러미 보았다. 남은 빵을 한입에 넣고 우유로 단번에 넘겼다. 그리고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객을 잡은 세일즈맨처럼, 혹은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 같았다.
“그 잡지에 적힌 대로 성공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
유리의 귀가 솔깃 솔깃.
“뭔데요?!”
은하는 표정을 살짝 바꿔 소악마적인 미소를 흘렸다.
“동아리에 들어가는 거야.”
은하는 양팔을 쫙 펼쳤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린다. 유리는 머리 위에 ‘?’를 띄었다.
못 들었나
“동아리에 들어가면 되는 거지.”
은하는 다시 말했다.
“동아리… 병아리가 아니라요?”
“무슨 놈의 병아리? 동아리라니까. 영어로 C.L.U.B.”
그 나라의 말을 사용하는 것과 단어를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동일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노는 거 말이야. 학교생활의 피크!”
유리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말한다. 숨결이 피부에 느껴진다. 은하는 갑자기 일어서서 의자 위로 올라갔다.
“동아리란 건 말이다. 학생이 학교의 권력을 뒤에 엎고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란 말이지! 학교에서 나오는 막대한 지원(공금)!, 축제 때를 노리는 돈벌이(장사)! 그리고 학교 내에 나름 사적인 공간! 그리고 (중략) …암튼 이 모든 혜택을 알고서도 무시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야.”
어딘가의 유능한 연설가 같은 포스를 뽐낸다.
은하는 불끈 쥔 주먹에 힘을 빼고, 의자 위에서 내려왔다. 유리는 벙 찐 표정으로 시선을 보낸다.
“암튼 그런 그룹에 들어가면 사람들과 친해지는 건 쉽겠지. 뭔가 할 말이라도?”
은하는 새침하게 덧붙였다. '뭔가 할 말이라도?'는 그녀의 말버릇 같았다.
“어… 그러니까, 잘 아시네요.”
입학식 때부터 학교에 안 나온 사람이 맞나 싶다.
“사실 예전부터 동아리 활동 같은 걸 해보고 싶었거든.”
은하는 배시시 웃으며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유리는 그 모습이 어딘가 귀엽게 보였다.
“그냥 그것뿐이야.”
유리는 은하의 가벼운 말투 뒤에 살짝 흐리는 부분을 알아챘다. 조금 신경 쓰였지만, 굳이 따지진 않았다.
“아무튼 어때, 같이 해볼래?”
유리는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화를 이어가며 서서히 흥이 오르는 유리와 은하였다. 다만 신입생인 그녀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지금은 동아리 활동기간이 아니다.


“짜증나!”
배팅머신이 던진 야구공은 경쾌한 소리를 내고 홈런마크에 명중한다.
은하와 유리는 하굣길에 오락실에 들렸다. 안전철창 뒤에는 유리를 비롯한 구경꾼이 모여 있다.
(저 여학생 굉장한데, 아까부터 전부 홈런만 치고 있잖아.)
(어디의 야구부인가?)
구경꾼들은 각자 한마디씩 던지고 있다. 덧붙여 유리는 서투른 동작으로 헛스윙만 휘두르다 끝났다.
“우랴압!”
은하는 기합을 내지르며 날아온 공을 쳐냈다. 이번에도 홈런.
야구공이 족족 홈런마크를 맞춘다. 그럴 때마다 은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린다.
수업이 끝나고 은하와 유리는 동아리명단을 받으러 교무실에 갔다. 당차게 들어선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선생님 왈 ‘아직 설립된 동아리는 없다.’란 대답만 들었다. 개교한 지 1년밖에 안 된 학교니 그럴 만도 하다.
기대 망상과 현실의 벽.
짜증과 실망만 안고 나온 두 여학생이 들린 곳이 학교 근처의 오락실. 은하는 배팅게임에 화풀이 중이다.
4천원 째. 슬슬 팔과 허리가 저린다. 남은 공은 하나.
은하는 깊은 심호흡을 하고 방망이를 다시 꽉 쥐었다.
배팅머신에서 공이 던져졌다.
방망이를 높이 쳐들고 시선은 날아오는 공을 주시한다.
마지막 혼신을 담은 풀스윙. ‘깡’ 하는 맑은소리와 함께 공이 멀리 날았다.
나이스 홈런.
좁은 실내가 아니더라도 멀리 날아갔을 것이다.
남은 공은 ‘0’ 게임이 끝났다. 은하는 조금 더 하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팔도 아프고, 유리도 기다리고 있다.
발아래의 가방을 둘러매고 배팅 룸을 나갔다. 필통과 공책 1권만 들어있는 가방은 매우 가벼웠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갈까.”
“속은 풀렸나 보네요.”
“응. 후련해졌어.”
은하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다. 그만큼 상쾌한 표정이다.
두 여학생은 모여 있던 구경꾼들을 해치고 오락실을 나왔다. 해가 넘어가며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어 간다.
대학이 근처에 있는 대학가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진다. 둘은 역을 향해 걸었다.
“오랜만에 하니까 팔이 좀 아프네.”
크게 기지개를 피고, 어깨를 빙빙 돌린다.
“정말 굉장했어요. 처음 2번 빼곤 다 홈런이었잖아요.”
“응, 아니 작은 게임장이니 그렇지. 별거 아니야.”
말로는 점잔빼는 은하지만, 표정은 칭찬에 헤벌쭉하다.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하면 설득력 없어요.'라고 유리는 마음속으로만 태클을 걸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까.”
은하가 말했다.
“동아리가 없다면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크읏~ 2학년 선배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은하는 뺨 한쪽을 부풀리며 불평했다.
“그래도 아직 CA가 남아 있잖아요.”
“뭘 모르는구나. 남들 다하는 CA로 만족해선 안 되지, CA로는.”
"그런가요?"
“그렇고말고.”
은하는 강하게 강조했다.
“그럼 만들면 되지 않나요?”
“응?”
유리는 그냥 별생각 없이 말했다.
“‘없으면 만들어라.’ 저희 할아버지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거든요.”
"그렇구나…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였어."
유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뱉은 말에 은하는 무언가 필이 꽃인 것 같다. 은하는 제자리에 멈춰서 유리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약간 거칠지만 따뜻함이 전해졌다.
“혹시 천재 아냐? 그래 없으면 만들면 되는 거였어! 우리의 동아리!”
외침에 가까운 말투가 주변에 퍼졌다. 몇 명 행인이 가던 발을 멈추고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3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리가 시선을 의식하기엔 충분했다. 집중되는 시선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 길가에 서지 말고 가요.”
유리가 은하의 어깨를 밀어 이동을 재촉한다.
“그런데 어떤 동아리를 만들 건가요?”
“음, 그래 그게 문제지.”
유리는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생각해 둔 게 없었나?
“그냥 이미 있는 동아리 중 가장 재밌어, 보이는 곳에 들어가려 그랬거든.”
“무책임해요.”
“그럼 ‘대머리 가발 동아리’ 같은 거 어때?”
머리에 생각난 것을 필터 없이 입으로 내뱉는다.
“뭐하는 곳인지 감이 안 잡히네요.”
“대머리 가발을 쓰고 노는 곳?”
그런 클럽에 들어갈 바에, 차라리 러시아로 돌아가는 걸 택하리라.
“유리는 좋은 아이디어 없어?”
“글쎄요.”
유리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동아리에 들어가기로 한 것은 은하에게 설득당한 것이기에 유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음, 그럼 역시 대머리 가발로….”
“그건 절대 안 돼요!”
유리는 정색하며 팔을 X자로 교차했다.
이런 식의 대화가 몇 번이고 오가는 사이 역에 도착했다. 유리는 상행선, 은하는 하행선.
“결국 못 정했네요.”
“그러게나, 그럼 내일까지 어느 동아리를 만들지 생각해 오는 걸로 하자.”
“네? 아니. 저기!”
“그럼 내일 봐~.”
은하는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손을 흔들며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다녀왔습니다.”
유리가 집에 도착한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문 뒤였다. 집안에는 고소한 튀김냄새와 술 냄새 풍겨온다.
“왔구나. 늦었네.”
러시아어였다. 거실에는 핫팬츠에 스포츠브라차림의 회색 머리카락 여인이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을 뜯으며,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와, 유샤~”
올가는 주정뱅이의 얼굴로 사촌 동생 유리의 애칭을 달짝지근하게 부른다.
“으~ 술 냄새. 올가 언니. 오늘 야근이라 하지 않았어?”
가방을 내려놓는다. 유리가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니던 고국은 러시아다. 러시아어 대화할 때는 자연스러운 말투가 가능했다.
“우리 유샤~는 이 언니가 빨리 와서 싫은 거야? 이 언니 조금 섭섭한데.”
“아니, 싫다고는 안 했는데….”
“그럼 이 언니를 좋아한다는 거네. 꺅~♡ 유샤에게 프러포즈 받았당!”
서양인 특유의 왕가슴을 유리에게 들이밀며 힘껏 껴안는다. 유리의 절벽흉부와 끔찍한 차이가 난다.
“언니, 숨 막혀….”
가슴에 얼굴이 파묻혀 허우적거린다. 올가는 그런 모습을 귀여운지 더욱 꽉 껴안는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방에서 회색 머리칼의 남성이 나왔다. 키는 2m가량, 입고 있는 티셔츠는 굵직한 근육에 한껏 늘어져 있다.
“보리스 오빠~ 나 유샤에게 프러포즈 받았당.”
올가는 베시시 웃으며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보리스는 술 냄새에 눈이 찌푸려진다.
“술 냄새 풍기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 그리고 교복에 기름 묻히지 마.”
“에이, 아직 초저녁인데 무슨, 오빠도 같이 마시자.”
보리스는 술주정 부리는 동생을 유리에게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유리를 바라본다.
“저녁은?”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야.”
“그래, 그럼 잠깐 기다려.”
보리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와 가스레인지 소리, 도마 위에 재료를 써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이들이 거주하는 곳은 지하철까지 10분 거리, 역세권에 있는 4층 빌라다.
일반적인 가정집과 다를 바 없지만 거실 한구석에 무언가 있다. 몸체의 절반이 분해된 <레버서포트>다.
그러나 멀쩡한 건 아니다.
외장이 해체되어 내부를 훤히 보이고 전선이 이곳저곳에 튀어나와 있다. 컴퓨터부품들은 뜯겨 있고 베터리박스도 없다.
올가와 보리스는 RS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유리가 메카닉에 관심이 많은 것은 이 남매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다.
“오늘 학교는 어땠어?”
올가는 캔 맥주를 새로 뜯었다. 거품이 올라온다.
“아직까진 말이나 배우는 거, 선생님들, 학교, 지하철 모두 낯설어. 그래도….”
유리는 방에서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며 답했다.
“오늘 처음으로 오락실에 갔다 왔어.”
“혼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반 친구랑.”
친구라는 말에 약간 쑥스러운 감정이 깃들어 있다.
“벌써 친구를 사귄 거야? 러시아에선 한 명 사귀는 데 한 달이나 걸리더니 굉장해.”
올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래서 무슨 게임 했는데?”
“배팅게임.”
유리는 방망이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근데 난 한 방도 못 맞췄어. 하지만 은하는 2번 빼고 전부 홈런을 맞춘 거 있지”
유리의 표정은 하루를 회상하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 은하란 아이 굉장한데.”
“나도 연습하면 그 정도로 칠 수 있을까?”
“그땐 이 언니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
“언니, 야구 할 줄 알아?”
“대학 시절에 여자야구 동아리에 있었거든.”
올가는 팔의 매끈한 잔 근육을 자랑했다. 체지방 없는 적당한 근육은 미용에도 좋다.
“그리고 공을 치는 것 말고도, 유샤의 귀여움을 더 상승시킬 왕 귀여운 포즈도 알려 줄게.”
갑자기 올가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뒤에건 필요 없어.”
유리는 딱 잘라 거절했다.
“히잉.”
올가는 실망스런 한마디를 내쉬고 맥주 캔에 입을 댔다. 그때 유리는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근데 언니, 동아리를 만들 땐 어떤 동아리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응? 어떤 동아리라니, 그야 자신이 좋아하는 걸로 만들면 되는 거지.”
별 희한 걸 물어본다는 반응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방 한편에 매달려 있는 <RS>. 유리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짙은 밤안개가 낀 항구.
쓰레기들이 파도에 밀려왔다 쓸려가기를 반복한다. 역겨운 냄새가 올라온다.
트럭 4대에 옮겨지는 컨테이너 더미를 뒤로 하고, 검은 코트의 남자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걱정 마시죠. 문제의 ‘물건’은 책임지고 보내드리겠습니다.”
느긋한 말투였다. 그 느긋함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는 언성이 높였다.
[뭘 걱정하지 말란 거냐! 이 멍청한 자식! 서두르지 않으면 네놈 보수도, 내 목도 날아간다고!]
“예,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회수준비를 하고 있지요.”
[이미 <IL> 움직이는 낌새가 있다. 그건 어떡할 거지.]
“그쪽은 걱정할거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정보만으론 찾아 낼 수 없을 겁니다.”
이렇게라도 말해두지 않으면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미친개처럼 짖어대겠지.
[개수작 부리는 건 아니겠지? 페르소나.]
‘페르소나’라 불린 남자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수작’이라뇨, 그렇지 않습니다. 전 보기보다 유대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당신과의 관계는 앞으로도 우호적이길 바라고 있답니다. 그리고.”
페르소나는 컨테이너를 옮기는 작업에 귀를 기울였다.
“물자지원도 받은 이상 처리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여유롭군.]
노골적으로 비웃는 목소리다.
[쓰레기 같은 새끼가, 네놈의 잘나빠지고 멍청한 부하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건 알고 있고 말하는 거냐!]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놈들을 처분하지 않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말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분노 섞인 호통이 이어진다. 귀 따가운 목소리. 페르소나는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렸다.
“회장님. 인간이란 생명체는 정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죽이긴 쉬워도 그 가능성을-”
[유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건방지게 내게 설교를 하려 들어?! 죽여! 죽여버려! 그 새끼들을 죽이라고!]
발광이다.
페르소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핸드폰을 멀리했다.
“…라는데? 역시 설득이 안 되네. 거참 이거 미안하게 됐다.”
페르소나의 등 뒤에는 두 명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다. 팔 다리는 포박당해 있다. 틀어막힌 그들의 입에선 ‘읍읍’이란 소리만 새어나온다.
페르소나는 코트안주머니에서 권총한정을 꺼낸다.
두 남자는 타액을 질질 흘리며 울고불고 짜보지만, 단단히 묶인 끈은 풀리지도 않고, 눈앞의 총구도 흔들리지 않는다.
페르소나는 들릴 듯 말듯 ‘미안하구만.’이라 읊조렸다. 두발의 총성이 항구에 메아리친다. 총알은 이마를 정확하게 꿰뚫었고 두 남자는 즉사했다.
초연냄새가 코를 찌른다.
"하아, 죽이기 싫었는데."
힘없는 목소리다. 권총을 넣고 코트의 단추를 잠근다. 뒤에서 지켜보던 다른 자들이 다가와 시체를 정리한다.
“주문대로 처리했습니다. 원한다면 사진이라도 찍어 보낼까요?”
[필요 없어. 당장 일 시작해!]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공허한 신호음이 맴돈다.
“라져”

2 숨겨진 머신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유리는 여전히 반에서 동떨어져 있다. 전날 점심 이후론 마음도 무겁다.
그러나 전날 이후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건이요?”
유리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첫 번째는 개설인원이 5명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
뒷자리에 앉은 은하가 손가락을 하나 새웠다.
“둘째는 담당선생 구하기.”
두 번째 손가락을 세운다.
“아, 그건 확실히 어려울 것 같네요.”
두 학생은 동아리설립에 대한 대화로 열을 올리고 있다.
“근데 사실, 조건은 갖춰졌지만, 담당선생님을 못 구했을 땐, 굳이 없어도 괜찮으니까 별문제는 안 돼.”
유리의 반응은 ‘흐음~’ 정도였다.
“다만 그렇게 되면 축제 때 장사나, 부실 확보가 어렵거나, 학생회에서 걸려올 태클들이 골치 아프겠지만.”
역시 목표는 그것이다.
“그럼 인원만 채우면 되겠네요.”
앞으로 3명이면 충분히 모아볼 만 하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은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LDR / 강화외골격 창작 콘테스트]란 이름의 포스터가 띄어져 있다.
“여기서 입상하자.”
학교게시판에 붙어 있는 걸 때 왔는지, 압핀자국이 남아있다. 포스터의 강화외골격은 <RS>를 가리키는 것이다.
“창작 콘테스트?!”
지금까지 은하에게 이끌리기만 할 뿐 중립적인 반응을 보이던, 유리는 처음으로 흥미를 보였다.
입상해서 결과만 내버리면 그 성적에 따라 부원이 없어도 동아리 하나 정도 만들 수 있을 거야.”
쉬지도 않고 덧붙인다.
"재료만 조달해서 만들면 되겠지."
매력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유리는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근데 어제까진 RS에 대해 관심이 없지 않았어요?”
“음, 그런데 어제 TV에서 ‘리얼스틸’을 해주길래 봤더니 굉장한 거 있지.”
리얼스틸은 2011년에 개봉한 SF영화다. 폐기장에서 주운 로봇 아톰과 로봇파이터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휴머니즘성도 강한 스토리로 제법 호평이었다. 러시아에서도 개봉했기 때문에 유리역시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맞아도 계속 일어나는 아톰의 불굴의 근성에 진심 감동했지 뭐야. 엔딩이 올라갈 땐 ‘야, 나도 저런 로봇과 함께 하고 싶다!’ 란 마음이 솟구치더라고.”
RS와 로봇은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그 부분에 태클을 걸기 전에, 유리는 다른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럼 설마 자제조달처가….”
“방과 후 끝나고 고철처리장으로 가자.”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3정거장 떨어진 공장지대.
빽빽이 들어찬 공장에선 쇠를 절단하는 소리와,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음이 심하다,
그 외각에 거대한 고철폐기장이 있었다.
재개발사업으로 낙후된 시설을 새로 뜯어고칠 계획이었지만, 주민들의 폐기장반대와 맞물려 아직까지 어중간한 상태로 남아있는 흉물이다.
높이 3미터가량 되는 철문엔 굵고 큰 자물쇠가 걸려있다. 빨간 스프레이로 <출입금지>란 문구도 휘갈겨져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주변엔 감시카메라나 관리하는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거 범죄 아닌가요.”
유리는 철문 위로 올라간 은하에게 가방을 던졌다. 가방을 받아든 은하는 가방을 폐기장으로 넘긴다.
“괜찮아,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유리는 나무박스에 올라 입구에 올라가려 발버둥 친다. 보다 못한 은하가 유리에게 손을 뻗었다
유리는의 손과 사슬을 움켜잡고 철장 위로 간신히 올라가 철문에 몸을 걸쳤다.
“와.”
굉장히 넓은 공간이다.
유리는 어딘가 애잔해 지는 철문 뒤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해가 저물어간다. 난잡하게 벌려진 고철위에 주홍빛 석양이 드리우고, 새털구름 사이사이로 빛과 그림자가 아름답게 섞여있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상의 경계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번 내딛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깊은 세계.
“뭐하고 있어, 가자”
재촉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은하는 자신의 키보다 더 높은 철문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한 마리의 고양이 같은 몸동작이다. 하지만 유리는 철장 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세월아 네월아다.
밑을 보기 무서웠던지, 몸을 뒤로 돌려 철문에 매달린 꼴이 됐다.
“받아 줄 테니까. 뛰어내려.”
2번 박수를 치고 팔을 벌려 받아낼 자세를 취했다.
“은하 양, 아래 있죠?”
재차 확인한 뒤 눈을 질끈 감고 뛰어 내린다.
“그래 있으니까… 아, 바보! 그렇게 뛰어내리면-.”
한 박자 늦게 외친 은하의 얼굴에 유리의 히프펀치가 작렬! 새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져 얽힌다.
“끄응.”
치마가 살짝 내려가 매끈한 다리 피부가 노출되었다.
“앗! 미안해요.”
“그럼 좀 비켜줄래… 엉덩이 무거워”
그제야 유리는 자신의 엉덩이가, 은하의 얼굴을 누르고 있단 것을 알고, 펄쩍 일어섰다. 창피함에 얼굴이 석양보다 더 붉어졌다. 흐트러진 치마를 추스른다.
“아, 코 아파.”
은하는 코를 몇 번 어루만지고, 피는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일어섰다.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질 뻔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사과하는 유리에게 은하는 괜찮다 손짓하며 블라우스에 뭍은 흙을 털어낸다. 피부에 생체기가 났을 뿐 상처는 없었다.
대개 또래 여학생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노발대발 하겠지만 그녀의 반응은 지나치게 쿨 하다.
다소 구태의연한 것 같지만 이런 점이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추진력이다.
두 여학생은 문구점에서 구매한 면장갑을 꺼내 착용한다.
“자, 그럼 어디 찾아볼까.”
“아, 네.”
은하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의욕이 넘쳐난다.

고철더미 한켠에 몸을 숨긴 남자는 쌍안경을 보고 있다.
주머니가 여럿달린 텍티컬베스트를 착용하고 있다. 뒤에는 1톤 트럭과 회색 RS를 착용한 남자 2명이 몸을 숙이고 있다.
쌍안경을 보다가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오메가1이 페르소나1에게.”
[여기는 페르소나1. 무슨 일이지?]
무선너머에선 요란한 소음이 깔려있다.
“민간인 2명이 작전지역에 침입. 사살할까요.”
쌍안경 너머에는 철장을 넘다가 엎어진 두 학생이 보인다. 시선을 고정한 체 홀더에서 총을 뽑아들었다.
[민간인?]
“인근 학교 학생으로 보임.”
간단명료한 보고다. 무전기 너머의 페르소나는 잠시 생각중인지 ‘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성별은?]
“여자가 두 명입니다.”
페르소나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무전기 너머에선 굉음이 들렸다. 토사가 무너지거나 철근이 우그러지는 부류의 소음이다.
무전에 요란한 잡음이 낀다.
무전기 너머는 곧 잠잠해지고 페르소나가 말을 잇는다.
[…아직 일을 시작하기에는 이르다. 지켜보다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도록.]
“라져.”
통신은 끊겼다. 꺼냈던 권총을 홀더에 되돌리고 뒤의 동료들을 향해 대기사인을 보낸다. 기척을 숨기고 여고생 2명의 감시를 시작한다.

“학교라, 그립구만.”
대지는 학교 앞 주행속도를 지키며 승합차를 몰았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의 귀가를 보니 향수가 몰려온다.
“학생시절이 재밌었나보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루이즈가 묻는다.
“아니, 전혀”
대지는 상한 우유라도 마신 것 처럼 인상을 구긴다.
“아침엔 조금이라도 지각하면 오리걸음이나 몽둥이찜질은 예사고, 전부 무식한 놈들만 모여 있어서 툭하면 쌈박질에, 선동당하기나 하고. 선생들은 학생이나 교육보다 체면을 더 중시하고, 수학여행 때는 일부 녀석들이 다른 학교 녀석들과 맞장 뜬 걸로 된통 혼난 일도 있었고. 하교시간은 밤 11시.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
“그게, 정말 학교 맞아?”
선진국 중에서도 극히 온화한 학창생활을 보낸 루이즈는 눈을 끔뻑이며, 못 믿겠단 표정을 지었다.
“몰라, 아무튼 내 모교는 그랬어. 군대 다음으로 끔찍했던 곳이야.”
“그런데 왜 그리워하는 거야.” 루이즈가 묻는다.
“그런 학교라도 졸업하니 가끔 생각나더라.”
은근히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다. 네비게이션이 진진 후 우회전이라 알린다.
“그런, 네 학교생활은 어땠냐?”
“너만큼 스펙터클하진 않았고, 오히려 애잔한 러브드라마?”
루이즈는 목의 브로치를 만지며 싱글싱글 웃었다.
“러브드라마는 뭐야, 닭살 돋게 시리.”
“닭살이라… 사랑을 모르는 불쌍한 영혼이구나. 결혼은 늦게 할수록 후회한다고.”
“시꺼!”
루이즈의 놀림에 ‘애인 없는 기간 = 나이’ 인 대지는 과하게 분노했다.
그런 분위기에 상관없이 네비는 침착한 음성으로 남은 거리를 알린다. 몇 분 뒤 공장 몇 개가 드문드문 보인다.


“이거 쓸 수 있을까?”
버려진 냉장고를 별생각 없이 열어본다. 미지근한 온기와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재빨리 닫아버렸다. 뒤편을 보니 컴프레서도 없다.
“아니 못쓰겠다.”
“은하 양은 정말 이렇게 부품을 구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유리는 문짝이 떨어진 전자레인지를 슬쩍 흔들었다. 예상대로 건질만한 부품은 없다.
“뭐, 되든 안 되는 우선 행동하고 보는 거지.”
그녀의 말투는 어딘가 어린아이의 억지처럼 들렸다.
이런 곳에서 멀쩡한 기계. 그것도 사용할 만한 부품을 찾는 건 99% 불가능 하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어느 괴짜들은 이런 쓰레기더미에서 재료로 외장을 만들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부만 고철이고 내장은 비싼 신형부품이나 오리지널부품으로 채워 넣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극악한 확률로 쓰레기더미에서 재료를 찾아내 자신만의 <RS>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매우 드물게 잡지에 소개되곤 한다.
이러한 사례를 알고 있는 유리기에 은하의 주장이 실현 불가능한 몽상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잖아?”
그렇게 말하는 은하의 얼굴엔 본 적 없는 의지 같은 것이 깃들여 있었다. 단순히 ‘즐겁게 지내고 싶다.’는 감정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좋은 말이네요.”
“당연하지.”
은하는 의기양양했다. 그러다 문득 화재를 바꿔 질문한다.
“근데 러시아에 있을 때는 어땠어? 역시 한국과는 좀 다르겠지.”
그녀가 어떤 차이를 묻는 건지 잠시 생각했다.
“네, 수업이나 시설은 다르죠.”
“친구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중학교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다들 좋은 친구들 이었어요.”
“그렇구나, 졸업하고 헤어질 때 쓸쓸했겠다. 유학이면 그쪽 학교에선 만날 수 없는 거잖아.”
“네에… 그렇죠.”
유리는 거짓말을 했다. 만약 사실을 말하면 은하와의 관계마저 틀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여학생이 만나건 고작 하루하고도 몇 시간 이다. 그렇기에 더욱 신경 쓰인다.
둘은 어느새 손을 멈추고 있었다.
은하와 대화를 하다보면 언제나 묵묵한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두 사람의 성격차이 때문일까?
유리는 화재를 전환했다.
“여기엔 건질게 없는 것 같은데, 이동할까요?”
“그럴까.”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순간 소름이 전신을 훑어 내린다. 신경이 곤두섰다.
“누, 누가 있는 것 같은데요?!”
“여긴 출입금지라고, 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유리와 은하는 목소리를 죽이고 소곤댔다. 자신들 들어온 건 예외로 치는 모양이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들키면 귀찮아 질 것 같아. 일단 가자.”
은하는 유리의 팔목을 잡고 자리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폐기소의 더욱 안쪽으로, 안쪽으로 향한다.
발소리도 천천히 그녀들을 따라온다.
마치 미로를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은하가 앞에 서고 유리가 뒤를 쫒아 달린다.
오르고, 다시 내려오고의 반복. 다리는 꼬이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유리는 운동부족임을 새삼 실감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더 이상 발소리나 인기척은 없다.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른다.
“따돌린 것 같네요….”
“고물을 노린 도둑일까.”
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들도 훌륭한 도둑이지만… 뭐, 아무렴 어떠리.
“이건 뭐죠?”
두 명의 눈앞엔 거대한 기계가 있다
“압축기잖아. 굉장히 큰데.”
몸체의 절반이 땅에 묻힌 압축기였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먼지와 검붉은 녹으로 뒤범벅 된 모습은, 현대기계인 주제에 고대 유적이라도 되는 위압감을 내뿜고 있다.
둘은 압축기 앞으로 다가갔다.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것 같다.
“이 정도나 되면 쓸 만한 부품이 있겠지?”
“분해가 가능하다면요.”
“분해는 무슨, 그냥 부숴버리지.”
“예?!”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은하는 고철더미로 다가갔다. 그리고 쇠파이프를 뽑아내려 애쓴다.
행동력이 좋은 건지 그냥 무식한 건지. 도저히 몸이 안 좋아 학교마저 쉬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유리는 은하를 놔두고 압축기를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지면과 압축기 사이에 틈이 있음을 발견했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 쏙 들어 갈만한 크기다. 그 안에는 무언가가 있다.
(사람?)
팔과 다리, 머리가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다. 해가 더 기울어진다. 틈새에 석양빛이 비춰지니 실루엣이 선명해진다.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진 <RS>.
아니.
그것은 <RS>가 아니다.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정말 터무니없는 물건이 그곳에 잠들어 있다.
기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넘겼을 부분들이, 유리의 눈은 자연스럽게 알아봤다.
그것들은 투명한 방수시트에 덮여있었다.
관절보호쿠션과 충격흡수젤. 다량의 전선과 케이블 그것들이 땅속공간에서 예의 ‘물건’에 이어져 있다.
전신에 소름과 전율이 동시에 흘렀다. 땅과 하늘이 어지럽게 회전할 정도의 쇼크.
그녀들은 1%이하의 확률로 말도 안 되는 것을 발견해 버렸다. 흥분이 간신히 억누르고 은하를 불렀다. 은하 역시 유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것도 RS야?”
“아니 이건 아마도….”
유리의 뭐라 설명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상식선에서 그것은 한국이란 나라엔 존재할리 없는 물건이다.
“일단 꺼내볼까?”
은하는 싱글벙글하며 지면과 압축기 사이의 틈으로 몸을 집어넣으려 했다.
신체에 크게 튀어나온 부분 없어서 걸리는 부분이 없는 유리나 은하. 두 사람의 몸이 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멈춰!”
인기척도 없이 뒤에서 위협적인 음성이 둘렸다. 두 학생은 동시에 어깨를 움찔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검은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남자가 서있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주머니가 잔뜩 달린 조끼를 입었으며, 오른손을 등 뒤에 숨기고 있다. 석양을 등지고 있어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은 빈말로도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위압적인 목소리다. 영화에서 불량배나 조폭들이 협박할 때 쓰는 부류의 말투.
“아, 저, 저희는 절대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어, 그러니까….”
유리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손사래친다. 변명을 하고 싶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며 언어가 러시아모드로 변환됐다.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누구세요?”
버벅대는 유리와 달리 은하는 당당했다.
“알 것 없다.”
“여기 관리자…? 는 아니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똑바로 치켜들고 남자를 쳐다본다.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흘렀다.
“….”
관리자였다면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 것이다. 적어도 ‘알 것 없다.’란 말을 하지 않을 터.
“여긴 출입금지다. 당장 나가라.”
“아저씨 고철도둑이죠? 경찰에 신고는 안 할 테니까, 서로 못 본 셈 치죠?”
남자는 혀를 차고 압축기에 시선을 옮겼다.
“본거냐?”
“봤다면요?”
험상궂은 남자는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위협적인 눈빛으로 쳐다본다. 유리는 손찌검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잔뜩 위축됐다.
“운이 없군. 원망하려면 겁 없는 자신을 원망해라.”
남자의 등 뒤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거기 두 명! 엎드려!”
“어?”
그때 다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린 외침과 함께 ‘펑’하며 무언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등에서 번갯불과 하얀 연기가 폭발하듯 솟아오른다. 전기 충격에 노출된 남자의 비명이 몇 초간 이어진다.
버티는듯하더니 이내 몸이 무너지며 자리에 쓰러져 내렸다.
유리와 은하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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