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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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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에테르 아머
글쓴이: 천영天影
작성일: 12-07-31 23:52 조회: 3,509 추천: 0 비추천: 0
위이잉, 위이잉
40cm 정도 크기의 로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생긴 이족보행의 로봇은 마치 작은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방바닥을 걸어 다녔다.
“옳지, 그래. 잘 했어.”
턱수염이 지저분한 30대 초반의 남자가 반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탄했다. 턱수염만큼이나 지저분한 검은색 머리카락에 흔히 볼 수 있는 청바지와 티셔츠, 지적인 이미지의 하얀 가운만 아니라면 평범한 가장으로 보일 외모였다.
“다음으로 달리기를 할 수 있겠니?”
남자의 시선이 자리에 앉아 가만히 로봇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10세 전후의 조금 어두운 파란색 머리카락의 귀여운 소녀였다.
“응.”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숏컷의 머리카락이 잠시 휘날렸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 작은 로봇에 향해 있었다.
“할게.”
탓, 타다다다다!
대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로봇이 달리기 시작했다. 육상 선수 못지않은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첫 번째는 뛰어넘고.”
남자의 지시와 동시에 로봇은 방 한가운데 세워둔 종이가방을 펄쩍 뛰어 넘었다.
“두 번째는 굴러서 넘어가.”
푹신한 베게 위를 앞구르기로 쉽게 타넘었다. 소녀의 시선은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로봇을 계속 쫓고 있었다.
“왼쪽으로 움직인 뒤, 뛰어넘으면서 거총. 타깃은 벽에 세워둔 동화책.”
“우웅, 그건 싫어. 내가 좋아하는 책이란 말이야.”
로봇은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허리 뒤쪽에 장착된 소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소녀의 투정과 함께 움직임을 멈췄다.
“하하, 그러니? 미안하구나. 그럼, 사격 대신 다른 걸로 할까?”
남자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방안을 살폈다. 그러다가 탁자 위에 걸쳐진 나무젓가락이 보였다.
“저기까지 뛰어오르는 건 조금 어려우려나.”
“으으응, 할 수 있어.”
남자의 생각을 눈치 챘는지 소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생각과 동시에 로봇도 몸을 움직였다.
우선 소총을 다시 허리 뒤로 장착했다. 소녀의 시선이 탁자 여기저기를 훑어보는 것과 대응하여 로봇의 고개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디 밟고 올라갈 데는 없어. 순수한 도약으로 뛰어 올라야 하는데, 가능하겠어?”
남자는 힌트를 주고 싶어 간질간질한 입을 참으며 말했다. 놀라운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소녀이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에 다양한 테크닉을 다루진 못한다. 직접 많은 스킬을 가르쳐주고 싶은 욕심과 가만히 지켜보며 알아서 깨우쳐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단 기대감이 같이 공존하고 있었다.
“우웅.”
소녀가 아미를 찌푸리는 사이 로봇은 탁자 밑으로 걸어가 폴짝 폴짝 제자리를 뛰었다. 하지만 도약은 고작해야 탁자 절반 높이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우우웅.”
한층 더 깊이 고민하는 사이 로봇은 뒤로 물러나 앞으로 달려가며 점프를 해 보았다. 좀 더 높이 뛸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탁자 위로 올라서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착지가 불안정해 그대로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휴우.”
아슬아슬하게 낙법으로 앞으로 구르며 일어나는 로봇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녀. 그리고 로봇도 마치 함께 고민하는 것처럼 소녀와 똑같이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턱에 손을 짚으면서 탁자 밑을 왔다갔다 거렸다.
“아빠가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남자의 도움을 거절하며 자리에 벌떡 일어난 소녀. 그녀는 로봇 대신 몸으로 직접 허공에 폴짝 뛰면서 문제 해결을 궁리했다. 자신의 내부를 가득 메운 힘, 에테르 포스 혹은 영력이라 불리는 힘을 이리저리 운용해보면서 십 몇 분 동안 시뮬레이션했다.
“응, 이거야.”
그리고 해답을 찾았는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다시 로봇을 바라보자 로봇은 제자리 점프를 위해 한껏 자세를 낮췄다.
“도움닫기는 없이는 힘들지 않겠어?”
“없으면 만들면 돼.”
소녀의 대답에 남자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스스로 해답을 찾아낸 것이다.
“가능하겠어?”
“응.”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그리고 로봇이 제자리를 뛰어 올랐다. 역시나 이번에도 탁자 절반의 높이밖에 이르지 못했으나,
“뛰어올라!”
파앗!
소녀의 외침과 함께 로봇은 허공을 박차고 다시 뛰어 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지상을 향해 폭발시키듯 영력을 뿜어내 그 반작용으로 뛰어 오른 것이다.
사악!
탁자보다 더 높이 뛰어오른 로봇은 정점에서 발도를 하여 내려치듯 탁자 위의 젓가락을 잘랐다.
“대단해.”
남자는 박수를 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정도면 웬만한 파일럿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나 어땠어?”
소녀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운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녀 뒤에 서 있는 로봇도 의기양양한 포즈였다.
“훌륭해. 아주 잘 했어. 이대론 이 아빠도 금방 뛰어 넘겠는걸.”
“피이, 거짓말.”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치지만 그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입가의 미소가 가실 줄 몰랐다.
“정말이야. 우리 아란이가 마음만 먹으면 매일 연구만 하는 아빠 따위는 금방 이길걸?”
“흐흥, 좋아. 그럼 아빠의 도전을 받아주겠어. 조만간 승부를 겨루는 건 어때?”
작은 몸집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는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를 껴안았다.
“응응, 그래. 내일 저녁엔 일찍 퇴근할게. 오랜만에 같이 놀아 보자구나.”



성우는 건너편에서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의 딸, 류아란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 어디서든 몇 번을 보아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우웅, 오늘 출근하면 아빤 언제 와?”
기대감과 서운함이 뒤섞여 있는 어조. 성우는 최근 연구가 바빠 딸과 놀아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어떻게든 오늘 시간을 마련해 잠깐 놀아주긴 했지만, 밤늦은 시각임에도 그는 다시 출근을 해야 했다.
“아까 말했잖니. 내일 저녁에는 올 거야. 그때 아란이는 아빠의 도전을 받아줘야 하지 않겠니?”
아란의 방과 그녀가 가지고 노는 로봇이 떠올랐다. 아빠인 그의 영향이었을까? 여자아이임에도 인형과 소꿉놀이 대신 로봇과 밀리터리를 좋아하는 소녀. 그녀를 위해 넓은 방 안에 시가지 등 여러 전투지역을 미니어처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실제 군에서 운용중인 에테르 아머, EA를 1/40 사이즈로 만들어 선물로 줬다. 크기는 작지만 작동원리는 실제 EA와 똑같았다.
그렇게 혼자 집에서 로봇과 함께 몇 개월을 놀았을까.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양의 영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한 그것을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다. 지금은 여타의 파일럿 못지않은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장난감을 다루는 솜씨이고, 실제 EA를 다룬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우웅, 그 다음엔?”
“그건…….”
기대에 찬 아란의 시선을 받은 성우는 대답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하여 딸을 슬프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집 안에서 쓸쓸히 홀로 놀게 할 수도 없었다. 국경지대에다 인구도 적은 리세크 마을에 아란 또래의 아이는 거의 없었고, 몇 있는 아이들도 그녀의 힘을 알고는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않았다.
지금의 아란에겐 성우가 선물해준 로봇 외에는 친구가 전혀 없었다.
“미안, 이제 마무리 단계라서 아빠가 많이 바쁠 것 같아.”
“우웅, 그래?”
실망을 했지만 아란은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했다.
“어쩔 수 없지. 아빠, 일 열심히 해야 해.”
하지만 아직 어려서일까? 아빠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모습에 성우는 아란이 기특하면서도 무척이나 미안했다.
“며칠 있으면 아빠 후배가 올 거야. 아빠 일 도와주러 오는 건데, 걔는 시간이 많을 테니까 우리 아란이하고 많이 놀아줄 거야.”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놀면 안 되잖아.”
“후후, 아란이가 아기일 때 만나봤던 사람인걸.”
“우웅, 난 기억에 없어.”
“하하하.”
찾아올 후배는 성우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랬기에 최종 테스트 파일럿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아란에게는 이미 은퇴하여 퇴물에 가까운 그보다 선생 노릇을 더 잘 해줄 것이다. 물론 그 후배는 보모 노릇이나 하라고 불렀냐며 불평을 하겠지만 말이다.
“그 후배라는 아저씨, 좀 해?”
“응, 좀 하지.”
“아빠보다?”
“9년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빠보다 더 나을 거야.”
그가 현역일 때도 천재니 신동이니 하며 기대를 받았던 녀석이었다.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으니 그 실력을 늘었으면 늘었지 줄진 않았을 것이다.
“아빠보다 세면 많이 하는 아저씨네?”
“하하, 아란이 생각만큼 아빠가 대단하진 않아요. 그리고 아저씨보단 오빠라고…….”
후배의 나이를 생각하던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렴.”
나이가 10세 이상 차이나면 이미 아저씨라고 불릴만하다. 겨우 20대 중반일 후배에겐 미안하지만, 어차피 군인이라면 누구에게든 아저씨라 불릴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 혹시라도 오빠라고 부르다가 소중한 딸이 넘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 아저씨, 얼마나 해?”
“글쎄. 못해도 대륙에서 100명 안은 들지.”
“아빠는?”
“나도 들었지. 지금은 조금 무리려나?”
“나는?”
“하하핫, 조금만 연습하면 우리 아란이도 100위권 안은 충분하단다.”
빈말이 아니었다. 굳이 영력을 다루는 재능만이 아니다. EA를 다루기 위해선 사고단련, 전투에 활용할 정도라면 사고제어라는 특수한 테크닉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성우가 계발 중인 4세대 EA를 다루기 위해선 그보다 더 윗 단계인 사고분할이 필요하고, 그게 가능한 사람은 대륙에서 고작 100명 내외일 것이다.
“아란이는 벌써 사고분할이 가능하니까, 걱정할 거 없단다.”
천재라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란이 가지고 놀고 있는 로봇 장난감은 성우가 지금 계발 중인 EA를 모델로 만들었다. 4세대의 작동 방식을 따르고 있어 평범한 사람에겐 그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걸 아란은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성우는 딸을 굳이 군인으로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무한한 재능과 천재성에는 언제나 감탄하고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자, 이제 아빠는 일어나야겠다. 혼자서도 치울 수 있지?”
시계를 보자 출근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오랜만에 딸과 만나느라 시간 가는지 몰랐던 것이다.
“응.”
아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우물쭈물했다. 시간이 지나가지만 성우는 재촉하지 않고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엄마…….”
“응?”
너무 작은 목소리였기에 성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 아니야. 아빠가 만드는 로봇 보고 싶다고.”
“후후, 그래? 아빠도 우리 아란이에게 보여주고 싶네.”
성우는 아란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그리곤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이건 비밀이야. 아빠가 만드는 로봇의 이름은 ‘크롬바커’란다.”
아직 임시 형식번호만 있을 뿐 공식적으론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에오르카 왕국 최신의 4세대 실험기 XRGA-40. 성우는 무슨 이유에선지 오직 그밖에 모르는 진정한 이름이자 시동키를 딸에게 알려줬다.
“완성되면 꼭 아란이에게 보여 줄게.”
그는 아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럼 다녀올게. 내일 봐.”



혼자 남겨진 아란은 자신의 방에서 아빠가 준 로봇을 만지작거렸다. 로봇과 함께 있으면 왠지 아빠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
그럼에도 아란의 외로움은 가실 줄 몰랐다. 어려서부터 엄마 없이 아빠와만 자랐기 때문일까? 성우와 함께 있을 땐 괜찮았지만, 그가 없으면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무척 보고 싶었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목숨을 잃었다는, 사진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 그 외로움을 잊는 방법은 오직 아빠와 함께 있는 것뿐이었다.
“아빠, 내일 꼭 와야 해.”



“미안, 조금 늦었군.”
리세크 마을 외곽에 위치한 리세크 기지. 에오르카 왕국과는 앙숙인 레피엠 제국과 맞닿은 국경 기지이다. 하지만 마을이나 기지 모두 국경에서도 외곽이었고, 전략적 전술적 가치도 없는 지역이다. 지금껏 레피엠 제국과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단 한 차례도 침공을 받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리세크 기지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병력 수도 보잘 것 없었고, 현재 전 세계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EA도 3세대이긴 하나 구형인 지상형 BGA-32 벡스 2기가 전부였다.
“아닙니다.”
“시간에 딱 맞춰 오셨습니다.”
성우의 사과에 파일럿 슈트를 입은 소위 계급의 두 사람이 경례를 하며 그를 맞이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사님께서 점검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성우는 두 소위와 함께 격납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사라는 말은 부담스럽다니까. 그럴만한 실력은 아니야.”
“아닙니다. 박사님은 박사님이라고 불리실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칩니다.”
두 명 중 하나, 190cm가 넘는 금발의 거구의 군인인 해럴드가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성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한 명도 대화에 끼진 못하고 있으나, 해럴드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성우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사실 그도 계급인 대위보다 박사라고 불리는 게 친근감 있고 좋았다. 군인으로서의 그는 이미 9년 전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럼, 테스트에 나서기 전에 상태를 점검해볼까?”
격납고 안. 거기에는 다소 투박하고 각이 진, 초록색과 갈색의 위장색이 칠해진 16m의 거신 두 기가 서 있었다. 그리고 한쪽 옆에는 새하얀 색의 아름다운 기체가 하나. 아란이 들고 있는 로봇 장난감과 똑같이 생긴 거신이 가슴의 콕피트를 열어놓은 채 당당히 서 있었다.
“볼 때마다 정말 아름다운 기체입니다.”
“하하, 딱히 미를 보고 설계한 건 아닌데.”
해럴드의 감탄에 성우는 볼을 긁적였다.
“그런데 왠지 좀 이질적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거야. 베르너 인더스트리와 코롤료프 설계국의 설계 사상을 모두 합친 거니까.”
에오르카의 베르너 인더스트리는 투박하고 직선적인 설계, 레피엠의 코롤료프 설계국은 우아하고 곡선적인 설계로 유명했다.
“젊었을 때 코롤료프 설계국 사람과 교류가 있었거든. 그때 그녀와 나눴던 토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체이네.”
성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분위기에 해럴드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보질 못했다.
“어쨌든 정말 박사님은 대단하십니다. 이 기체를 혼자서 만든 거나 다름없지 않으십니까?”
“하하, 너무 치켜세워 주지 말게.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야.”
그의 말과는 달리 해럴드의 말대로 이 기체는 성우가 혼자 만든 거나 다름없었다.
최근 몇 년간 에오르카 왕국과 레피엠 제국의 사이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때문에 왕실은 새로운 기체 개발보다는 기존에 사용하던 기체의 생산에 더 많은 예산을 지원했다. 국가의 지원을 받는 에오르카 제1의 EA 생산 회사, 베르너 인더스트리로선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새로운 세대의 EA 계발은 대부분 동결된 상태.
성우는 왕실과 베르너 인더스트리, 군부에 설득을 거듭한 끝에 겨우 예산을 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예산에 인력도 부족했다. 게다가 새로운 기체를 계발한다는 소문에 여기저기서 견제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리세크 기지로 와서 지인의 도움을 얻어가며, 개인 재산을 사용해가며 겨우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음, 괜찮군. 그럼 테스트를 해볼까?”
성우가 신형 기체에 올라타자 두 파일럿도 각각 자신의 기체에 올라탔다.
“세바 기지엔 연락했나?”
세바 기지는 인근의 레피엠 제국의 군사 기지였다. 리세크 기지와 마찬가지로 보잘 것 없는 기지였지만, 그래도 EA의 숫자만큼은 리세크 기지보다 더 많았다.
「예. 일반적인 기동 훈련이라고 통보했습니다.」
요즘과 같은 최악의 정세에 사소한 꼬투리 하나하나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적국의 기지에 미리 연락했던 것이다.
“뭐, 거짓말은 아니니.”
성우는 해럴드의 말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4세대의 신형기체, XRGA-40 ‘크롬바커’의 기동 테스트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른 3세대의 기체에는 각종 계기부터 시작해 여러 조종 장비가 있었다. 하지만 크롬바커의 콕피트 안에는 중앙의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삐삑
「System All Green」
그때 허공에 창이 하나 나타나더니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아직 AI가 완성되지 않아서 조금 불편하군.”
3세대 기체에는 음성인식, 음성지원을 비롯한 AI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4세대부터는 더욱 발전된 EGO-AI 시스템이 탑재될 예정이지만, 이를 위해선 세계에 몇 명 없다는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성우가 도움을 구한 마법사는 그의 요청에는 승낙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먼저 하드웨어부터 완성하고 부르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기다리십시오, 아버지.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리세크 마을 인근의 에스트 숲. 나무가 울창한 이 숲에는 기체의 기동 훈련 및 테스트에 최적의 장소였다. 나무의 높이가 대부분 10∼20m는 되기에 적의 정찰에도 몸을 숨기기 용이했다. 에오르카 왕국의 영토 안이었지만, 간간이 레피엠의 세바 기지에서 훈련 신청을 할 정도였다.
“구동에는 문제없고.”
성우는 체크리스트를 들어 테스트 항목 하나하나 체크했다. 그가 딴 짓을 하든 말든 크롬바커는 성우의 의지대로 잘 움직이고 있었다. 각종 계기 및 조종에 온 신경을 쏟아야 했던 3세대 기체와는 달랐다. 이게 바로 사고분할이 가능한 파일럿을 위한 4세대 기체의 중요기능 중 하나였다.
“그럼, 간단히 모의전을 해볼까?”
아직 날이 밝기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계획 밖이지만 생각보다 크롬바커의 상태가 매우 좋다. 소프트웨어 외에는 완성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삐삑, 삑
성우가 ‘생각’을 하자 허공에 여러 스크린이 나타났다. 이 일대와 같이 온 두 부하의 위치를 나타낸 레이더였다. AI가 미완성이라 레이더는 아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부하의 기체와 링크하여 받아볼 수밖에 없었다.
“시계전투를 해야겠는걸. 페인트 탄을 얼마나 가져왔더라.”
그가 무장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바, 박사님!」
당황한 어조의 해럴드의 목소리가 통신을 타고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통신에서 해럴드의 감정이 느껴져서일까? 성우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저, 적입니다.」
“적이라니?”
허공에 생성된 레이더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크롬바커는 두 기체의 레이더 정보를 다운받고 종합하여 다시 나타냈다.
“이런.”
절로 욕설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레이더에는 빨간 점 4개가 성우와 부하들을 넓게 포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 빨간 점 위에는 모두 KGA-35라는 표시가 쓰여 있다.
“둔켈. 세바 기지의 EA군.”
두 부하가 탑승하고 있는 벡스는 3세대 초기형, 지금 접근하고 있는 둔켈은 3세대 중기형 기체이다. 성능 차이는 명백했다.
“나와 레이더 링크를 계속 하면서 후퇴. 아직 RTB는 하지 말도록. 내가 처리하겠다. 적과의 통신은?”
「응답하지 않습니다. 명백한 적의입니다.」
“아군 기지와 통신은?”
「안됩니다. 재밍입니다.」
“젠장, 마음먹고 나섰다는 건가?”
안 그래도 양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밤중에 선전포고가 날라 왔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문제는 과연 이걸 알고 온 거냐, 이건데.”
전쟁이 일어나도 리세크 마을과 기지는 단 한 번도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 물론 언제나 예전 같을 수는 없지만, 지금 타이밍이라면 의심해볼만한 일이다.
자신이 4세대 기체를 계발하고 있단 건 본국에서도 극비인 일이다. 레피엠 제국, 세바 기지에도 알려지지 않도록 기밀에 신경을 쓰고 또 써왔다.
그런데 지금껏 침공이 없던 리세크 기지 소속의 EA를 향해 공격하려고 한다? 그것도 세바 기지 EA 모두를 꺼내서?
“단순한 공격인가, 크롬바커의 포획인가.”
어느 쪽이든 심각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모두 처리하면 되니까.”
그래도 왕년에서 날렸던 성우다. 3,4세대의 성능 차는 둘째 치더라도 그는 충분히 자신 있었다.
지금 적은 넓게 퍼져서 조금씩 조여오고 있었다. 포위하여 화력을 집중할 생각이겠지만,
“각개격파하기엔 용이하지.”
파앗!
크롬바커가 높이 뛰어 올랐다. 나무를 뛰어 넘는 높은 도약.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파앙, 파앙!
크롬바커는 허공을 박차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영력을 폭발시키듯 뿜어내며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허공의 계단을 밟고 뛰어가는 것 같았다.
위이잉, 투두두두두두!
거리를 좁히는 건 찰나였다. 하늘에서 흰색의 기체가 다가오자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혀오던 적의 EA, 둔켈 한기가 당황해 소총을 쏘기 시작했다.
“소용없는 짓.”
하지만 총알은 기체에 닿자마자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자동으로 상시 전개되는 에테르 배리어 시스템(EBS)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콰아앙!
날아온 크롬바커가 둔켈의 위에 올라타자 관성에 의해 둔켈이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둔켈의 머리를 짓밟으며 크롬바커의 손바닥이 둔켈의 가슴을 가리켰다.
파앙!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빛줄기가 둔켈의 가슴을 꿰뚫었다. 둔켈 역시 EBS가 있기에 나름 방어해보려고 했으나, 크롬바커 그리고 성우의 힘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삐삑, 삑!
레이더에서 경고음이 들렸다. 아군이 당한 걸 눈치 챈 3기의 둔켈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스르릉
성우는 당황하지 않고 정신이 일체화된 크롬바커를 향해 이미지를 전송했다. 크롬바커는 그의 이미지를 받아 허리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웅
성우의 영력이 크롬바커 내부기관을 통해 증폭되어 검에 집중되었다. 그는 두 대가 함께 다가오고 있는 곳을 향해 검을 겨눴다.
“받아라.”
슈우우욱!
크롬바커가 검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반월형의 빛줄기가 그대로 나무를 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퍼어엉!
멀리서 들리는 폭음을 무시하며 성우는 반대쪽으로 크롬바커를 조종했다. 이번엔 조금 전처럼 눈에 띄게 하늘을 달려가지 않았다. 무성한 나무들을 모두 지그재그로 피하면서 달려갔다.
투두두두두!
둔켈은 크롬바커를 노리며 소총을 쏘았지만, 나무 사이사이로 회피기동을 하는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하아, 무장은 검 한 자루인가.”
격렬한 기동 중임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성우는 침착히 전투 상황을 분석했다. 간단한 테스트라고 생각해서 검 한 자루만 챙겨온 게 아쉬웠다. 총도 있긴 하지만, 탄환은 모두 페인트탄에 불과했다.
우우우웅!
영력이 집중된 크롬바커의 검이 부르르 진동에 떨었다.
“ETES, ESS 모두 양호하군.”
영력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시스템, 그리고 에테르 스킬, 맨몸으로 영력을 사용하여 구사하는 기술을 EA에 탑승한 채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 이 2가지는 EA의 핵심 기술 중 하나였다. 특히 4세대는 3세대보다 에테르 스킬 사용의 자유로움이 특징이었다.
“그럼, 가볼까.”
파아아악!
어느 정도 접근하자 성우는 모아뒀던 영력을 폭발시켰다. 그러자 폭발적인 가속과 함께 둔켈의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서걱!
먼저 소총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그대로 둔켈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으나,
끼리리리릭!
크롬바커의 검은 둔켈의 가슴을 뚫지 못하고 비껴나갔다. 어느새 적 파일럿이 대검을 꺼내들어 막은 것이다. 그의 검에도 크롬바커와 마찬가지로 영력이 집중되었는지 빛이 일렁거렸다.
“센스는 제법. 하지만.”
카앙, 캉!
몇 번 칼끼리 부딪히다가 크롬바커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그리고 타점이 빗나간 둔켈이 휘청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기회!”
크롬바커의 손이 대검을 쥔 둔켈의 손목과 어깨 관절부위를 붙잡았다. 이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엎어치기를 했다.
까앙, 깡!
갑작스런 충격에 기절을 한 것일까? 쓰러진 둔켈은 일어나질 못했다.
“기존 3세대보다 관절 강도나 유연성이 훨씬 나아. 이거 생각지도 못한 실전이 좋은 테스트가 되었는걸.”
움직임이 없다고 성우는 전혀 봐주지 않았다. 그는 둔켈의 어깨 관절을 역으로 꺾으면서 억지로 일으켰다.
타타타타탕!
그와 동시에 울리는 총성과 충격. 한 대 남은 둔켈이 달려와 지원 사격을 한 것이겠지만, 그의 총격은 방패가 된 동료가 다 맞아버렸다.
“으음.”
크롬바커의 손바닥이 방패 너머로 드러났다. 손바닥이 가리키는 곳은 사격을 멈추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 마지막 남은 적이었다.
파앙!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간 빛줄기. 하지만 적의 실력이 생각보다 좋은지, 아니면 예상했는지 너무나 쉽게 빛줄기를 피했다.
“괜찮은 실력인걸.”
슈슉!
그때 크롬바커의 모습이 사라졌다. 둔켈은 경계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크롬바커가 다시 나타난 곳은 둔켈의 바로 등 뒤였다. 크롬바커의 손날이 둔켈의 등을 꿰뚫을 듯이 찔러 들어갔다.
카앙!
그래도 둔켈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기체를 회전시키더니 들고 있던 소총으로 손날을 튕겨낸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동료의 기체 옆에 떨어져 있는 크롬바커의 장검을 보지 못했다.
푸욱!
누가 던지지도 않았는데 의지를 가진 듯 알아서 날아온 장검이 둔켈의 배에 박혔다.
빠깡! 파지지직!
이어서 크롬바커의 주먹이 둔켈의 얼굴이 부쉈다. 메인 카메라가 파괴되자 둔켈의 파일럿은 앞을 보지 못했다. 패배는 확정적.
「치직, 지지지직!」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려던 성우에게 잡음과 함께 통신이 들어왔다.
「어떻게 EA가 이토록 다양한 에테르 스킬을…….」
적으로부터의 통신. 당해서 분하다기보단 의아함이 담긴 어조였다. 기존의 3세대 EA는 고작해야 3개 내외의 에테르 스킬만 사용이 가능했다.
“3세대와 4세대의 차이이다.”
서걱!
배에서 검을 뽑아낸 크롬바커가 수직으로 둔켈의 몸체를 베었다. 잠시 후 폭음과 함께 둔켈이 산산조각이 났다.
“예상보다 성능이 더욱 좋군. 이게 양산되면 제국을 압도하겠는데.”
성우는 자신이 만든 작품에 감탄하며 부하들에게 통신을 넣었다.
「역시 대단한 실력이십니다. 과연 제104비행전대는 대단하군요.」
해럴드의 호들갑이 기분 나쁘진 않았는지 성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104대대에서 나온 지 벌써 9년이다. 어쨌든 RTB한다. 빨리 기지로 돌아가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봐야지.”
「넷!」
해럴드의 기체에서 보내준 레이더를 보건데 자신은 숲에 꽤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해럴드 등과 거리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우선 합류부터 하고…….”
파직, 파지지직!
그때였다. 잠시 콕피트의 조명이 불안정해지더니 시스템 경고 메시지 스크린이 정신없이 나타났다.
“이, 이건?”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는 성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기체를 점검했다.
「뭐, 뭐지? 기체가 말을 듣지 않아!」
“안티 에테르 필드다. 빨리 기체에서 탈출해!”
성우가 황급히 해럴드를 향해 통신을 넣었다. 3세대 초기형인 해럴드의 기체, 벡스에는 AEF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었다.
「박사님, 이건…….」
“잡담할 시간 없어. 어서 탈출해!”
「하지만, 으아아악!」
비명과 함께 통신이 끊겼다. 이윽고 다른 한 쪽에서의 신호도 끊겼다. 함께 온 부하 두 명이 순식간에 당한 것이다.
“제길, 안티 에테르 필드라니.”
EA는 모두 파일럿의 영력, 에테르 포스로 움직인다. 동력과 공격수단을 영력에 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대기의 에테르의 흐름을 멈추고 뭉치지 않게 흩뜨려버리면 EA는 고철이 되기 십상이었다.
“아직 소프트웨어가 완성되지 않아 AEF에 맞서긴 힘든데.”
성우는 서둘러 기체의 상태를 체크했다. 3세대 중기형 이후부터는 AEF를 대비하기 위한 장치가 장착되기 시작했다. 더 발전한 4세대에 이르러선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문제는 이 기체, 크롬바커는 아진 완성품이 아니란 것.
“무사한 건 ETES, LTT, 중력 보정 정도인가.”
다행히 크롬바커는 다른 두 기체처럼 운용불가의 상황이 되진 않았다. 파일럿의 영력을 동력원으로 전환하는 장치나, 생각만으로 기체를 조종하는 장치, 중력에 의한 충격 완화 정도는 무사했다.
하지만 이걸로 전투는 불가능했다. 당장 에테르 스킬을 사용하지 못해 무장은 장검 한 자루 뿐. 충격 보정이 되지 않아 마음대로 날뛸 수고 없다. 자동 방어막도 작동하지 않는다.
게다가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바로 영력 증폭 기관이 먹통이라는 사실이다.
EA는 인간의 영력을 증폭시켜 16m에 이르는 거신을 움직인다. 증폭기관이 없다면, 평범한 인간의 영력으로 이 거신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단순 이동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전투를 한다면 또 어떨까?
“제길, 여기까지인가?”
성우는 격렬한 전투 중에도 착용하지 않았던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충격보정이 없는 이상 그냥 의자에 앉아 있다가 충격에 튕겨나갈지도 몰랐다.
“자폭장치도 없고, 그렇다고 자해할 취미도 없고…….”
직접 조종하고 실전을 겪은 성우는 안다. 이 기체, 4세대의 기술력은 전쟁에 압도적인 힘을 자랑할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이 기술이 적에게 흘러가선 안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유일하게 남은 무장인 검으로 자해를 할 수도 없었다. 이걸 만들기 위해 몇 년이나 노력했던가? 이미 자식과도 같은 기체를 난도질 할 수는 없었다.
“보이스 락 설정. 키 패스워드 설정. 쉽게 가져갈 수는 없을 거다.”
파파파파팡!
크롬바커의 어깨에서 하늘 위로 조명탄이 쏘아 올라갔다. 이미 부하를 잃어 레이더를 사용할 수 없는 성우로선 직접 눈으로 보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조명탄을 쏘아 올리기 직전까진 그래도 성우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AEF의 영향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그건 여기에 AEF가 펼쳐져 있는 이상 적도 마찬가지로 EA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AEF에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N-EA시리즈가 필요했다. 영력 대신 기름을 동력으로 사용하고, 영력 컨트롤이 필요한 무기가 아닌 일반적인 화약 무기를 사용하고, LTT를 이용해 기체와 정신을 일체시켜 조종하는 게 아닌, 100% 손으로 조종하는 기체. 그런 기체는 당연히 기존의 EA보다 성능이 떨어지기 마련이었고, 파일럿의 실력도 모두 손으로 조종하기에 그다지 좋지 않았다.
9년 전 현역으로 활동할 때는 이와 비슷한 위기를 여럿 경험했다. 이번에도 티끌만한 가능성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쿵, 쿠쿵, 쿵!
하지만 조명탄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8기의 검은색 둔켈을 보고 전의가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색의 둔켈-N. 그렇다는 것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검은색의 기체 하나. 코롤료프 설계국 특유의 매끄러운 곡선형 기체.
“KGA-37 블랙비어.”
둔켈-N처럼 EA를 N-EA로 개조한 게 아닌, 처음 설계할 때부터 N-EA로 설계된 기체. 검은색을 전용 컬러로 사용하는 이 남자를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는 최강의 지상형 N-EA.
「거기 파일럿, 들리나?」
성우의 기체를 향해 탁한 음성이 통신을 타고 들려왔다. 성우는 외부 통신을 받아들이고 영상연결을 허가했다. 그러자 허공에 스크린이 생성되더니 험상궂게 생긴 30대 초반의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 추적자, 지신영.”
성우는 낭패한 표정을 숨기며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레피엠 제국 제14특수기동대대 대대장, 지신영 소령이다.」
지신영의 악명은 에오르카 왕국 내에서도 유명했다. 영력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그였지만, N-EA 조종에는 탁월한 실력을 자랑했다. 웬만큼 실력 있다는 EA 파일럿도 1대1에서 그를 이기기 힘들었다. 게다가 N-EA라면 어떤 기체라도 장착되어 있는 AEF. 영력이 봉쇄된 상항이라면 그저 그에게 농락당하며 죽어갈 뿐이었다.
「하얀 기체의 파일럿, 류성우 대위 맞나?」
“……알고 왔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적은 정확히 자신 그리고 자신의 기체를 노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당신만한 사람이라면 전황은 알겠지? 지금 당신에게 승산이란 단 1%도 없다.」
“…….”
뼈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4특수기동대대라면 기체가 멀쩡한 상태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뛰어난 EA와 파일럿을 찾아서 처단하기로 유명한 부대였다. 혼자서는 도리가 없었다.
「순순히 투항해라. 난 당신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다. 파일럿이 아닌 디자이너로서 말이다.」
계속 침묵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성우는 적을 향해서 통신채널을 완전 개방했다.
“그 말은 나보고 당신네 나라를 위해서 죽을 때까지 지식을 쏟아내라 이건가?”
「말이 통하는군.」
“거절한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순순히 잡히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한껏 반항을 할 테니 재주껏 잡아보시지?”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이다. 그럼에도 성우는 싸워야 했다. 락 시스템이 완전히 가동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잘난 EA와 파일럿 양반을 잡는 건 우리 전문이지. 그럼 반항해보도록.」
처처처처척!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8기의 둔켈-N이 크롬바커를 포위했다.
“이거, 싸우면서 유언이라도 녹음해야 할까?”



쿵쿵쿵!
“아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자던 아란은 벌떡 일어났다. 품안에는 성우가 선물해준 크롬바커 모델의 로봇이 안겨져 있는 상태였다.
“벌써?”
시계를 보니 성우가 나간 지 고작 5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날도 밝지 않은 꼭두새벽에 성우가 퇴근하는 건 드물었다. 늦으면 아예 날이 밝고 난 뒤에 퇴근했었으니까.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아란은 깊이 생각하는 건 그만뒀다. 오늘따라 유난히 외로웠다. 벌써부터 아빠를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을까?
“아빠!”
아란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달려 나갔다. 동시에 거실 문이 열렸다.
“어?”
문을 열고 아니, 부수고 들어온 사람은 성우가 아니었다. 아란도 자주 본 군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여럿 들어와 있었다.
“아저씨들은 누구…….”
퓻!
깜짝 놀란 아란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마취총을 쏜 것이다.
“아, 잠이…….”
아란이 쓰러지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인 한 명이 그녀를 어깨 위로 들쳐 올렸다.
“일반 시민은 내버려둬. 1조는 군 가족, 특히 연구개발에 관련된 사람 가족들을 생포해서 세바 기지로 연행한다. 2조는 리세크 기지의 모든 자료를 세바 기지로 가져간다. 지신영 소령님의 분부다. 서둘러.”
맨 앞의 남자가 외치자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이 모두 경례와 함께 뿔뿔이 흩어졌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란의 정신이 끊겼다.
그날, 리세크 기지와 마을은 레피엠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위이이잉!
콕피트가 열림과 동시에 빛이 보인다. 벌써 날이 밝았나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조명이었다.
“휴우, 꽤나 날뛰어 주셨군.”
콕피트가 완전히 열리자 몇 십분 전 통신을 나눴던 남자가 보였다.
“이렇게 순순히 열어줄 거면서 왜 그렇게 반항하셨나?”
지신영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안전벨트를 멘 의자 위에 축 늘어진 성우의 얼굴을 가볍게 발로 밟았다.
“으윽.”
기력이 다한 성우는 반항도 하지 못했다. 가볍게 부딪힐 때마다 엄습하는 충격을 버텨가며,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는 영력을 어떻게든 잘게 컨트롤해가며 싸웠다. 하지만 단 한기도 격파하지 못하고 이렇게 기력이 다해버렸다.
움직임이 멈추면 적은 보나마나 힘으로라도 콕피트를 열려고 할 터. 어차피 열릴 거면 괜한 상처라도 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그냥 순순히 콕피트를 열었다. 어차피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낸 상태였다.
“류성우 대위. 꽤나 대단한 실력이었어.”
얼굴에서 발을 치운 지신영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을 건넸다. AEF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성우는 꽤 분투했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다른 쪽 실력을 더 높이 사거든.”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나는 말이야, 하늘을 나는 것들이 정말 싫어.”
협박이나 회유를 할 줄 알았는데, 다른 말을 꺼내니 의외였을까? 성우는 축 늘어뜨린 고개를 힘겹게 들어 지신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언제나 신기술이 개발되면 언제나 날파리 같은 것들에게 먼저 적용되지. 그리고 적당히 쓰다 남은 찌꺼기 같은 기술들을 선심 쓰듯 먹으라고 우리들에게 던져준단 말이야.”
지신영은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그래. 코롤료프 설계국 녀석들, 4세대 EA는 공중형을 먼저 제작하겠다고? 보나마나 이번에도 하늘에 왱왱 날려 보내다 단물이 다 빠지면 지상형으로 전환하겠지? 나는 그게 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성우는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놀랐다. 그의 말대로라면 레피엠 제국은 벌써 4세대 EA 개발에 착수한 것이다. 아직 3세대를 붙잡고 있는 에오르카 왕국으로선 순식간에 전력열세가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난 참 기쁜 소식을 들었어. 비록 타국이지만 4세대 지상형 EA를 개발하고 있다지 뭔가. 날파리들이 쓰는 게 아니라 지상형. 꽤 오래 찾았어. 설마 대담하게 국경 바로 앞에서 만들고 있을 줄이야.”
성우가 리세크 기지에 자리 잡은 건 이런 이유도 있었다. 신무기를 개발한다면 보통 본국 깊숙이 안전한 곳에서 개발하지, 설마 바로 눈앞에서 개발할 거라 생각하진 못할 것 아닌가? 문제는 오늘 이렇게 탄로 났다는 것이지만.
“난 무척이나 기뻐. 아까 전투를 봤어. 이거 아직 미완성이라지? 그런데도 꽤나 좋은 성능을 발휘하잖아.”
지신영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성우와 눈을 마주쳤다.
“이봐, 류성우 대위. 내 하나 부탁하지. 나와 함께 가서 지상형 4세대 EA를 만들지 않겠나? 이왕이면 N-EA타입으로. 난 날파리들 다음으로 에테르 포스인지 영력인지 사이비 같은 힘을 쓰는 사람이 가장 싫거든. 아, 그렇게 눈을 부라리진 말게. 자넨 예외니까. 소중한 디자이너 아니겠나, 디자이너.”
“…….”
성우는 말없이 지신영을 노려봤다. 그러더니 큭큭 웃기 시작했다.
“왜 웃지?”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지신영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지신영 소령, 명성에 맞지 않게 마음이 좀 좁군.”
“크큭, 인정해. 나 속 좁은 사람이야.”
“내가 비행전대 출신이란 걸 알고도 그런 제안을 하는 건가?”
“아, 물론이네. 우리 제국에도 공포를 떨치고 있는 104전대 출신이라지? 모두 교관급으로 이뤄져 있다는 앨리트.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지금은 이렇게 나와서 지상형을 개발하고, 조종하고 있지 않은가?”
성우는 지신영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나도 돈만 있었다면 공중형을 만들었을 거다.”
“……뭐?”
“예산이 부족한데 어쩌겠나? 하늘을 날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걸. 그래서 없는 대로 지상형을 만들었지. 하지만 사실 난 땅개들이나 타는 인형에 관심 없어.”
“…….”
지신영은 조용히 성우를 노려보더니 권총을 그의 이마에 겨눴다.
“그 말은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 성우는 지신영과 마주 노려봤다.
“큭, 네 소원이라면.”
지신영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오늘 아란과 약속이 있는데…….’
타앙!



“설마 죽이신 겁니까?”
지신영이 콕피트를 내려오자 총성을 들은 부하 하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물었다.
“그딴 쓰레기 알게 뭐냐? 들어가서 분리수거나 해.”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지신영을 보고 그의 성질을 돋울 바보는 없었다. 부하는 경례와 함께 바로 크롬바커의 콕피트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신영은 시선을 돌려 간단한 장비와 함께 크롬바커를 분석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어떤가, 박사. 뭐 좀 알겠나?”
“아, 대대장님. 이거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박사라 불린 50대 중반의 머리가 벗겨진 백발의 노인이 잠시 머뭇거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망설이던 박사는 결국 한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락이 걸려 있습니다.”
“락?”
“예. 저 기체를 기동시키려면 시동 명령어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내면 되지 않나? 암호해석전문가 없나?”
“거기다가 성문 확인까지 합니다. 즉, 저 기체를 기동시키려면 기체에 등록된 목소리로 시동어를 말해야 합니다.”
“그래? 쓰레기 같은 것이 귀찮은 짓을 해두었군.”
다행히 이 일에 대해 크게 문책하진 않을 것 같았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박사는 좀 더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말씀하신 기체의 구조는……, 빠른 시일 내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뭐가 문제인가?”
“그게 말씀드리기 창피합니다만……, 너무 어렵습니다.”
“뭐?”
지신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 지식으로는 구조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봐, 박사. 박사는 얼마 전 코롤료프 설계국에 연수도 다녀오지 않았나? 4세대에 대해선 공부 좀 했을 텐데?”
“코롤료프 설계국에서도 개념적인 것만 설명했지 정작 중요한 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코롤료프 설계국에 도움을 요청하시던가…….”
“박사! 그것들의 힘을 빌리기 싫어서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나?”
결국 못 참았는지 지신영은 고함을 질렀다.
“공부하게. 공부해서 알아내도록.”
통보와 함께 지신영은 낭패한 표정의 박사를 내버려두고 크롬바커를 향해 걸어갔다. 마침 그가 처리한 성우가 내려오고 있었다.
드르르르륵!
그때 지신영이 파일럿 슈트 위에 걸친 외투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발신번호를 확인해보니 그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제14특수기동대대 대대장 지신영 소령입니다. 무슨 일이오?”
지신영은 통화 상대편의 대화를 듣더니 화가 나서 소리를 꽥 질렀다.
“이건 내가 잡은 것이오. 당신이 마음대로 달라 말라 할 수는 없을 텐데? 당신네 공군, 그리고 코롤료프 설계국이 뜯어가도록 할 생각은 절대 없소. 뭐? 이건 그냥 준다고? 흥, 배포도 크군. 그 쓰레기? 하하하, 이미 내가 죽였는데 어디다 쓰시려고? 흥, 뭐요? 알았소, 알았다고. 대신 이 기체는 우리 거니까 눈독 들이지 마시오.”
전화를 끊은 지신영은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씩씩 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폭군에게 걸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모두들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젠장, 너!”
결국 지신영은 시선을 피한 사람들 중 하나를 찍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성우를 내렸던 사람이었다.
“그 쓰레기를 데리고 따라와라. 루체자르 비행단에 다녀와야겠다. 시체라도 보고 싶다는데 데려가야지.”
그는 명령을 내리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부름꾼과 함께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그건 뭔가 모양새가 나지 않았다.
“14대대 전체 움직인다. 둔켈-N 기동 준비. 모두 움직인다면 그 여자에게 조금은 압박감을 줄 수 있겠지. 나머지는 저 기체를 세바 기지로 옮기고 분석을 계속한다. 세바 기지에 둔켈 4기를 놔두고 왔으니까 그걸로 알아서 잘 지키고.”
그 말을 끝으로 지신영은 자신의 기체, 블랙비어로 다가갔다. 팔자에도 없는 행군을 해야 할 판이었다.



“우웅.”
아란은 작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아직 몽롱한 정신을 다잡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른 한 명 누우면 꽉 찰만한 작은 방이었다. 침대 하나와 구석에 변기 하나가 전부였다.
“응?”
아란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빠졌다. 여긴 어디인가, 자신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러다가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이 떠올랐다.
“아, 아빠!”
비명을 지르듯 외치며 아란은 벌떡 일어났다.
“시끄러워!”
그러자 문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위협을 주려는 생각인지 군화로 철문을 쾅쾅 찼다. 하지만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아란이 아니었다.
아란 나이 9세. 아직 부모에게 기대며 어리광을 부릴 나이이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그녀는 자립심이 강했다. 나이답게 외로움도 많긴 하지만, 그걸로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 생각을 해.’
다시 침대에 앉으며 아란은 생각에 잠겼다. 나이와 성별답지 않게 그녀는 군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고, 성우 덕분에 아는 것도 많았다. 리세크 마을이 제국의 침략을 받고 점령당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생포되었다는 것 정도는 쉽게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기지를 샅샅이 뒤지라고 했어.’
성우 앞에선 어리광을 부리지만, 그녀는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성우가 어떤 일을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다.
저 나쁜 사람들은 아빠의 연구를 노리고 쳐들어왔으리라. 그리고 협박을 위해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납치했겠지. 세바 기지라고 했던가? 그쪽으로 이송하라는 말이 기억난다. 그럼 아빠는? 아빠의 로봇은?
생각이 차근차근히 정리되면 정리될수록 어린 아이의 머릿속도 차갑게 식어갔다. 그리고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야, 너는 어린 아이도 아닌데 그런 걸 가지고 노냐?”
그때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하나 들린다.
“뭐 어때서 그래? 이거 잘 만들지 않아? 꽤 정교하다고.”
아란은 직감적으로 그게 성우가 선물해준, 자신의 로봇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철로 이뤄진 그 문은 아래에는 밖에서 음식을 줄 작은 구멍, 위로는 감시를 위한 창살이 있었다. 아래에선 간수의 발밖에 보이지 않고, 창살은 9살 아이가 보기엔 너무 높았다.
하지만 아란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젯밤 로봇을 가지고 놀며 터득했던 방법을 그대로 자신의 몸으로 사용했다. 폴짝 뛰어 올랐다가 영력을 폭발 시켜 2단 점프를 하여 창살을 붙잡을 수 있었다.
쾅, 깡!
“엇?”
“뭐, 뭐야?”
창살에 매달리는 소음에 깜짝 놀랐는지 간수는 문을 향해 뒤돌아보며 경계했다. 하지만 꼬마여자아이가 손으로 창살을 잡아 매달려 있는 걸 보며 안심했다.
“이 꼬마가!”
“깜짝 놀랐잖아.”
그들은 작은 아이가 어떻게 창살에 매달릴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진 않은 채, 자신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사실에 화를 내며 위협했다.
“그거!”
아란은 아랑곳 않고 간수가 가지고 있던 로봇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거 내 거야!”
“응? 아아, 그래. 네 거였지.”
간수는 잘 만든 프라모델을 보는 것처럼 로봇의 팔다리 관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 것이고.”
“줘. 돌려줘. 그거 내 거야. 아빠가 준 거라고.”
아란은 울음 섞인 고함을 질렀다. 그 로봇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너는 나이가 몇 갠데 아이를 놀리고 그래?”
다른 간수가 로봇을 빼앗아 구박을 줬다. 그리곤 창살 너머의 아란에게 주려는 듯 내밀다가,
툭!
“어라, 떨어졌네?”
아란이 손에 쥐기 직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파직!
“아, 실수. 밟아버렸네.”
이어서 로봇을 군화로 밟아 부숴버렸다. 아무리 실제 크롬바커를 모델로 정밀하게 만든 것이라지만, 외장 부품의 대부분은 플라스틱으로 이뤄져 있었다. 조종하면서 영력으로 특별히 관리하지 않으면 충격에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 그거 아빠가 준 건데…….”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아란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계속 아빠아빠 거리는데, 이 꼬마 아빠가 누군지 알아?”
“이름을 들었는데……, 류성우라고 했던가?”
낄낄거리는 그들의 대화에 아란은 울음을 그쳤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빠의 소식이었다. 그녀는 귀를 기울여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군 관계자들은 모조리 끌고 오라고 했는데, 협박용으로 쓸 생각인가? 그 기지에 무슨 신기술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높으신 분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하지만 협박을 할 거면 이 꼬마는 못 쓸걸.”
“왜?”
“지신영 소령님이 죽였다고 하던데.”
---뚝!
그 순간 아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콰아아악, 투웅!
철문이 찌그러지다가 앞으로 튕겨나갔다. 간수 둘은 멋도 모르고 철문에 휘말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아빠가……죽었다고?”
아란은 멍한 눈빛으로 감옥을 나왔다. 두리번거렸다. 복도가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아까 자신을 약 올리던 간수와 똑같은 복장을 한 사람 두 명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멍한 눈빛 그대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아빠는 오늘 저녁에 돌아온다고 했는걸.”
파아아악!
갑작스런 돌풍에 휘말린 간수 두 명이 벽으로 날아가 쳐박혀 기절했다. 그들로선 아무런 영문도 몰랐으리라.
“아니, 아니야. 아빠는 여기 있어.”
그 순간 아란의 눈에서 생기가 돌아왔다. 이 근처에서 성우와 똑같은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빠, 아빠를 찾아야 해.”
그녀는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이라면 그녀가 붙잡힌 이곳, 세바 기지의 병력 중 상당수가 리세크 마을에 있다는 것이었다. 리세크 마을을 점령함으로써 치안을 지킬 병력이 필요했고, 리세크 기지에서 4세대 EA의 자료를 찾을 인원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세바 기지 내 병력은 얼마 없었고, 작은 소동에도 아란은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엔 로봇을 조종하면서 익인 아란의 에테르 스킬도 한몫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 정도는 조금 전처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으니까.
“아빠, 아빠.”
감옥 밖으로 나온 아란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다. 기지 내 군인들도 어린 여자 아이 혼자 달려가는 것을 보고 누군가 군 가족이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뒀다. 이렇게 이번에도 아란은 큰 건물 근처까지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연구소?”
팻말에 뭐라뭐라 적혀 있는 건 무시했다. 연구소라는 단어가 아란에겐 상당히 낯익었다. 성우는 매일같이 연구를 하고 있다, 연구가 잘 되어간다 등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여기에 아빠가 있어?”
이번에도 아란은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아빠? 이 너머에 아빠가 느껴져.”
정신없는 하루였고, 지신영의 명령에 따라 연구원들은 기껏 가지고 온 크롬바커를 분석할 수 없었다. 지식이 모자라니 각자 공부하느라 바쁜 것이다. 오늘 저녁에 다시 모여 토론을 하고, 분석을 해보자고 계획을 세워뒀지만, 그 계획은 이 작은 아이에 의해 무산되었다.
콰아앙!
아란이 손을 가져다대자 나름 엄중한 보안장치로 무장되었던 문은 사정없이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그녀의 몸속에 저장된 영력은 거의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맨몸으로도 웬만한 EA 1기 분량의 파괴를 충분히 저지를 수 있었다.
왜애애애앵!
문이 부서지자 연구소는 물론 기지 곳곳에 사이렌이 울렸다. 하지만 아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얀색의 거신과 만났다.
“이건……똑같아.”
성우가 자신에게 줬던 선물. 자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로봇과 똑같이 생겼다. 다만 크기가 훨씬 클 뿐이었다.
“아빠?”
하얀 거신에게 성우의 기운을 느끼며 그녀는 가까이 다가갔다. 계단을 오르고, 열려있는 가슴의 콕피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핏자국이 남아있는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윽!”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영상 하나가 강제로 주입되었다. 성우가 오늘 기체를 타고 나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아란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아, 아빠.”
아란의 눈가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재생의 마지막은 총성과 눈부시게 밝은 빛이었다.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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