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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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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마법소녀의 이름을 부를 때
글쓴이: 대마
작성일: 12-07-31 23:54 조회: 2,985 추천: 0 비추천: 0
00.
짧은 아포칼립스


인류는 멸망한다.

그건 농담 같은 게 아니었다. 자잘한 수식을 모조리 쳐내고, 웃기지도 않은 유머를 죄다 잘라낸 한 줄의 진실이었다.

대한민국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내부. 성냥갑처럼 빼곡하게 세워진 아파트 내부에 들어차 있던 인간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며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그저 옆의 사람을 따라 무작정 달리고 있는 사람들.

날씨는 매우 맑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아파트 화단에 심어져 있는 벚나무들도 꽃을 활짝 피워, 바람이 불때마다 연분홍빛 꽃잎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흩날렸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맑아지는 풍경이었다. 지금 이 아파트 단지로 몰려오고 있는 괴물들만 아니라면.

소년은 겁에 질린 채 동생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행위에 별 의미는 없었다. 놈들의 지능은 조야하지만 피지컬적인 면에서는 지구상의 어떤 동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발도 빠르다. 인간보다야 훨씬.

비명 소리가 들렸다. 비명 사이사이로 총성도 들렸다. 군대인가? 아니면 경찰? 하지만 그 발악에 의미가 없다는 건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그 무력한 총성은 오히려 공포를 부채질하는 장치일 뿐이다. 놈들에게 총 같은 건 통하지 않으니까.

놈들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만약 인류에게 시간이 충분했다면 그건 좋은 고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생명이란 단어의 정의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괴물들은 나타나자마자 인류를 향해 총공격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괴물들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무력하게 도망쳐야만 했다.

“으아아아악!”

방향을 명확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본능적으로 비명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람의 모습과 닮은, 하지만 절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금속질 괴물이 긴 팔을 내밀어 한 남자의 몸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 부분을 천천히 남자의 목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입이 비상식적으로 크게 벌어지며 끈적한 침이 남자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그 바로 아래 선홍빛 혀와 날카롭게 솟아 있는 회색질의 이빨들이 보이고,

푸욱!

괴물은 남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인간의 목이 그렇게 쉽사리 짜부라지는 모습은 너무나 초현실적이었다. 사방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비, 비켜! 난 살아야 해! 살아야 한다고!"

도망치던 군중들은 패닉에 빠져 허둥대고,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든 앞질러 도망치려 했다. 괴물들은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하지만 저 괴물들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다른 사람들이 낙오할수록, 괴물의 식사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낙오하지 않은 사람이 살아날 가능성은 티끌만큼이나마 높아지는 것이다.

"오, 오빠!"

그런 사람의 격류 속에서, 소년의 여동생이 손을 놓쳤다. 어떻게 반응할 사이도 없이 사람들 사이로 동생의 모습이 묻혔다. 그 순간 소년의 머리에 부모님의 인자한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가 없더라도, 네가 꼭 동생을 지켜줘야 한다. 의젓한 남자애니까. 우리 아들, 할 수 있지?]

물론이에요. 소년은 그 때 상기된 얼굴로 자랑스레 대답했었다. 가족 앞에서 나눴던 작은 맹세가 소년에게 실낱같은 용기를 주었다. 소년은 인파의 흐름을 역으로 헤치고 나아갔다. 동생을 찾기 위해.

"오빠, 오빠! 으아아아앙!"

사람들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남자를 잡아먹고 있던 괴물이 그르륵 거리며 웃음소리 비슷한 것을 냈다. 아무리 도망가 봤자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소년은 무서워서 덜덜 떨리는 발을 간신히 움직여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걸어갔다.

울고 있는 동생을 품속에 끌어안았다.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오빠의 품속에 안긴 동생은 그걸로 안심한 것인지,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기절해버렸다. 소년의 힘으로 동생을 데리고 저 괴물들을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괴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입가에 피칠갑을 한 금속질의 괴물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거대한 원을 형성해 갔다. 순식간에 모여든 괴물들의 숫자는 기실 백. 놈들은 소년을 놀리는 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선 채 그르륵거렸다. 마치 웃음소리 같은 울음소리였다.

이걸로 끝이구나.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고 괴물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그 입가에 흘러내리는 사람들의 피를 보기만 해도 상상이 만들어낸 저릿한 통증이 목덜미를 찔렀다.

칠흑의 세상 속, 괴물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머뭇거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짝 수줍어하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괘, 괜찮으세요?"

소년은 살짝 눈을 떴다. 자신보다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이는 자그마한 여자애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서 있었다. 소년의 눈앞에 있는 괴물들을 그 작은 몸으로 가린 채로.

분홍색 후드 티에 무릎까지 오는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은 소녀였다. 새하얗게 죽 뻗은 다리는 상처 하나 없이 곱고, 소매 끝으로 드러난 하얀 양 손목에는 가느다란 팔찌를 차고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후드의 그림자 아래 찰랑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만이 보일 뿐.

"용감한 분이시네요……여자애를 구하기 위해 되돌아오다니."

동생을 타인 취급하는 듯한 그 말에 소년을 발끈하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접근을 피하려는 것인지 소녀는 당황하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 와중에 후드가 살짝 뒤로 젖혀져 맑은 갈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소년은 그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오기로 외쳤다.

"……이 애는, 내 동생이야! 내, 내 동생은 반드시 지킨다!“
“아…….”

현실성 없는 맹세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스스로가 묻게 된다. 무슨 수로? 여기에 있는 건 기껏해야 중학생 꼬마일 뿐이다. 하지만 소녀는 자그마한 탄성을 터트리고선 젖혀진 후드를 다시 두 손으로 꼭 잡아당겼다. 그 얼굴을 후드의 그림자 속에 다시 숨긴 채로, 소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잖아요. 저기서 죽어간 사람들도 가족이 있겠죠?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겠죠? 하지만 다들 도망갔어요."

자신의 목숨보다 타인을 우선시할 수 있는 사람이 어찌 그리 흔할까. 그 타인이 설령 가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와중, 아무런 힘도 없는 이 소년은 무슨 용기로 괴물들 앞에 돌아선 것일까.

사자가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용기라 부르는가? 아니다. 용기란 것은 언제나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가지는 최후의 희망. 괴물들을 무서워하면서도, 동생을 지키러 온 이 소년이야말로 용사라 부르기에 적당할 것이다. 그녀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고 있던 바로 그 용사.

"그 용기를 믿고 당신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탁?"
"네."

소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부탁이란 말인가? 괴물들은 점점 더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안에 있는 먹이들을 약 올리려는 듯 천천히.

소녀가 후드에서 손을 떼고, 팔을 넓게 양쪽으로 펼쳤다. 양 손목에 차고 있는 가느다란 네 개의 팔찌가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괴물의 입가를 칠하고 있던 피보다도 붉은, 반짝이는 루비색 팔찌였다.

소녀가 몸을 돌렸다. 괴물들을 가로막으려는 것처럼 양팔을 활짝 펼친 채, 소년의 앞에 서서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푹 눌러쓴 후드 아래서 다시 그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니, 갈색이 아니었다. 그 눈동자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사랑을 가득 담아서."

팔찌가 빛났다. 팔찌 아래서부터 기묘한 붉은색 문양이 나타나더니 소녀의 양 손을 감쌌다.

"이……름을 부르라고? 지금 상황에서?"
"시간이 없어요. 그렇게 해 주세요."
"그, 그럼 나랑 동생은 살 수 있는 거야?"

팔찌에서부터 시작된 문양은 소녀의 뺨까지 올라와 있었다. 옷 때문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아마도 전신을 감싸고 있으리라. 붉은 문양에 휩싸인 소녀는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소년의 물음에 대답했다.

"네, 물론."
"그럼 알려줘! 네 이름, 이름이 뭐야?"
“저는 홍염 깃든 루비의 운명을 타고난 불꽃의 수호자.”
“뭐?”
“제 이름은 리나 시루 유이나. 당신의 용기를 받아 태어날 마법소녀입니다.”

소녀의 몸을 중심으로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다가오고 있던 괴물들을 단번에 밀쳐내었다. 괴물들도, 소년도 방금 일어난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괴, 괴물들이 밀려났어!?”
“제발,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사랑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소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소년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저 애에게 중요한 거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저 애도 죽어버릴 것이다. 위기감이 전신에 차올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사랑을 담은 목소리라는 게 어떤 건데?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소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선 막무가내로 내뱉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앞에 붙이면 되겠지!

“사랑스러운 리나 시루 유이나아아!”
“리얼라이즈!”

그 순간, 불꽃이 피어올랐다.

소녀를 휘감고 있는 바람 때문에 후드가 벗겨졌다. 아까 언뜻 보았을 때 그 머리는 분명 까만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소녀의 머리카락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짧은 단발머리에 불과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길게 자라나 허리까지 닿았다. 마치 루비처럼 반짝이는 길고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소녀가 걸치고 있는 복장들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로 붉은 문양이 떠올랐다. 그 붉은 문양은 단숨에 확장되어 소녀의 전신을 감싸는가 싶더니, 붉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드레스가 되었다.

소녀가 몸을 빙글 돌렸다. 치맛자락이 따라 빙그르르 돌며, 끝부분이 갑작스레 타오르더니 붉은 드레스 끝단엔 불꽃 무늬의 문양이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로도 불꽃이 피어올라 붉은 라인이 들어간 새하얀 볼륨 베레모가 되었다.

전신에 몰아치는 불꽃의 바람을 휘감은 채, 손에는 가느다란 붉은색 레이피어를 들고 있다. 새하얀 볼륨 베레모, 붉은색 드레스……. 무엇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소년 앞에서, 소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만한 웃음을 매단 채 외쳤다.

“홍염 깃든 루비의 마법소녀, 리나 시루 유이나! 당신의 용기를 받아 지금 여기에, 등장!”
“어…….”

리나 시루 유이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소년을 보며 살포시 웃어준 뒤 몸을 돌렸다.

그게 마지막이다. 소년에게 있어 그 이후의 기억은 확실하지 않았다. 너무나 밀도 높은 감정의 흐름, 괴물에 대한 공포, 동생에 대한 걱정, 그리고 마침내 살게 되었다는 안도감, 이해할 수 없는 소녀의 모습, 그 모든 것이 섞인 격류가 머리를 씻어버린 것 마냥 기억이 희미했다.

게다가 그 뒤로 바로 기절해 버렸기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깨어난 이후, 자신과 동생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을 뿐.

그 후로 그 괴물들은 귀신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대한민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괴물들이 동시에 사라졌다. 인류 전체가 한꺼번에 같은 꿈이라도 꿨던 것처럼 더 이상 어디에서도 괴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괴물들의 정체와 왜 나타났는지, 그리고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 떠들곤 했다. 하지만 이미 진실을 증명할 수단은 묘연해진 상태. 갈수록 괴물 이야기는 태풍이나 지진 같은 옛날 재앙 이야기가 되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그에 대해 언급하길 꺼렸다.


서기 2008년 4월.
인류는 멸망할 위기에 처했었다.
하지만 멸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인류를 구원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소년의 기억 속에 새겨진 붉은 마법소녀의 뒷모습을 제외하고선.





01.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포칼립스 사태로부터 4년 후.
서기 2012년 3월.

-삐삐삑! 삐삐삑!

선반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요란하게 알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아놓은 담요 위에 누워있던 소년이 신음성을 흘리며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한 후, 간신히 핸드폰을 잡고선 알람을 껐다.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소년의 부모님은 해외로 여행을 가 계신 상태다. 깜빡 다시 잠들었다간 출석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뜬 채, 밍기적 밍기적 이불에서 나와 세면대로 향했다.

“하아암……. 아, 학교 가기 싫다.”

하루의 행운을 보장하는 주문과도 같은 말을 중얼거린 후, 찬 물을 틀고 얼굴을 세면대 안으로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 전체에 쏟아지며 정신을 번쩍 깨웠다. 눈곱을 씻어내고, 비누칠을 대충 해서 얼굴의 기름기를 닦아낸 후 수도꼭지를 잠갔다.

“야, 동생! 아침이다! 일어나!”
“우웅……나 일어났어…….”
“잠꼬대 하지 말고 일어나서 세수해.”
“나 일어났다니까아…….”

세면을 끝낸 후 곧장 동생의 방에 쳐들어가 아직까지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동생을 현실세계로 탈출시키고, 바로 부엌에 가서 아침을 준비한다. 아침이라고 해 봤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무더기로 사 놓은 시리얼 중 마음에 드는 것 하나와 우유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을 뿐인 심플한 식사였다.

준비가 끝나면 방으로 가서 교복을 입는다. 어차피 교복은 세트화 되어 옷걸이에 걸려 있으니 입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번개같이 교복을 입고 나서 다시 동생의 방으로 향한다.

“야! 일어나라고!”
“나 이미 일어났다니까!”
“쇼하고 있네! 야, 빨리 안 일어나?”

동생의 팔을 잡아끌고 이불에서 강제로 끌어낸 후 세면대로 데려가 세수를 시켰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좀 일찍 깨워달라니까…….”
“네가 할 소리냐!”

동생이 씻을 동안, 부엌에 가서 그릇을 꺼내 거기에 시리얼을 대충 붓는다. 많이 넣으면 살찐다고 뭐라 하고, 적게 넣으면 배고프다고 뭐라 한다. 심혈을 기울여 완벽하게 양을 맞춘 시리얼을 넣고, 우유를 부었다. 숟가락 두 개를 꺼내 그릇 옆에 놓았다.

“미안해, 오빠! 내일부턴 진짜 내가 꼭 차릴게!”
“너 양치기 소년이 죽은 이유가 뭔지 아냐?”
“헤헤, 오빠도 참. 양치기 소년은 안 죽었어. 양이 죽은 거지.”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같이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겼다. 보통 교과서는 전부 사물함에 넣어두고 다니지만 오늘만은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우유만 부어 먹었으니 별 일 있겠느냐는 자기암시를 하며 그릇을 물로만 박박 씻은 후에 대충 식탁 위에 뒤엎어 쌓아 둔 채로 현관을 나섰다. 문 옆에 묶어둔 자전거를 푸는 동안 동생이 문단속을 했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징그럽게 왜이래?”
“나 뒤에 태워 줄 거지?”
“뭔 개소리야? 너 학교 가는 길 모르냐? 언덕 있거든, 언덕!”
“쳇, 치사하게 굴기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자전거에 올라탔다. 고개를 흔들며 동생에게 신호를 보내자, 동생은 좋아라 달려와 잽싸게 뒤에 올라탔다.

“정말 우리 오빠밖에 없어!”
“미터기 올린다. 지갑 준비했냐?”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중고 자전거 가게에서 2만원을 주고 산 고물 자전거가 죽죽 나아갔다.

새 학기 첫날, 하지만 평소와 그리 다를 바 없는 한류현, 한류아 남매의 등굣길이었다.



며칠 입은 건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잔뜩 구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여자가 출석부로 교탁을 내리쳤다.

“1년 더 남았다 생각하지 말고, 미리미리 공부를 시작해 두는 게 좋아요. 물론 공부가 뭐가 필요하냐고 생각할 학생들도 있겠죠. 하지만 하루 종일 고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고민하지 않을 시간엔 공부를 하세요. 여러분이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고등학교 과정을 알아서 해가 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요? 야자가 최고죠, 최고. 공부를 하다가, 공부에 지치면 멍하니 앉아 잠시 조용하게 사색에 잠길 수 있잖아요? 자, 그럼 우리 반은 전원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는 걸로 할 테니까, 빠지고 싶은 학생은 내일까지 부모님의 사인이 포함된 사유서를 글자 크기 9포인트, 줄간격 160%에 여백은 사방 5mm로 놓고 A4 용지 4장 분량을 써서 제출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 발표하세요. 청소는 내일부터.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은 교실 문을 잠그고 열쇠를 교무실에 내고 가세요. 이상, 이제 집에 가도 좋아요.”

그리고선 활짝 웃는 얼굴로 엄청난 소리를 했다. 분명 오늘은 개학식 날이 아니었던가? 반 학생들이 원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건 말건, 기주고등학교 2학년 10반 담임을 맡고 있는 현윤하는 종례를 끝내고 휑하니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확실히, 일학년일 때랑은 좀 다른데. 이과라 그런가?”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친구, 김규일이 의뭉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류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과랑 뭔 상관이야?
“상관있지, 임마. 안 그래도 우리 학교, 이과에 무시무시한 선생들이 많다고 소문이 자자하다고. 우리 담임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래, 그래. 잘 알았다.”

류현은 무언가 이야기를 계속하려 하는 규일을 내버려두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서 교실 뒤편의 사물함으로 향했다. 눈으로 훑으며 자신의 사물함 번호를 찾은 후, 그 앞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너 또 교과서 짱박냐?”
“너도 해. 편하다고.”
“아, 됐수다. 거기 두면 다른 반 놈들이 계속 가져간다고.”

개학식 첫날이긴 했지만, 보통 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거의 대부분이 동네의 기주중학교에서 같이 올라온 애들이었으므로 서로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야자에 대한 불안과 불만은 잠시 미뤄둔 채,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며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갔다.

류현이 최대한의 공간지각능력을 발휘하여 좁아터진 사물함 안에 가방에서 꺼낸 모든 교과서와 노트를 다 쑤셔 넣었을 무렵, 교실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류현을 기다리고 있던 규일과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여자애뿐이었다.

류현의 작업이 끝나가는 걸 본 규일은 교탁 앞으로 나가 두 개의 자물쇠와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제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애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이, 누군진 모르겠는데 우리가 마지막에 정리하고 나갈게. 어서 집에 가라고.”
“히익!”
“으, 응?”

그 여자애는 규일이 말을 걸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허둥거렸다. 그러다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대번에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자물쇠를 든 채로 말을 건 규일도 놀라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눈을 끔벅거렸다.

류현은 한숨을 내쉬며 그 여자애에게 다가갔다. 덥고 아침에 머리감기 귀찮다고 반삭발로 머리도 짧게 깎고, 귀찮음을 숨기지 않는 표정에 다년간의 피시방 경험으로 다져진 구부정한 자세는 언제나 규일을 불량학생으로 오해받게 했다. 게다가 중학교 때 인근 고등학교 럭비부에서 점찍은 인재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체격도 좋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면 무서워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아마도 좀 먼 중학교에서 혼자 이 고등학교로 배정된 게 아닐까.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집단, 그것도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집단에 녹아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류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여자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괘, 괘,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같은 반인데 왜 존대하고 그래? 어색하니까 말 좀 놔.”
“넷!”

심하게 긴장하고 있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삑사리가 났다. 층진 단발머리에 살짝 펌을 넣고, 군데군데 약간씩 갈색으로 살짝 염색한 헤어스타일에 네모난 은색 반무테 안경을 걸치고 있는 여자애였다. 슬쩍 시선을 돌려 가슴 부분에 붙어 있는 아크릴 이름표를 확인했다.

유이나.

흔하지 않은 어감의 이름이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추억이 류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유이나? 이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

“야, 뭐해? 걔 꼬시냐? 빨리 일으켜 줘, 임마.”
“아?”
“아는 무슨! 야, 집에 가자 좀.”

규일은 투덜대며 교실을 돌아다니며 튀어나와 있는 의자를 하나하나 책상 안에 가지런히 밀어 넣었다. 류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이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아, 미안. 이름이 뭔가 내가 예전에 알던 느낌 같아서.”
“이름……?”
“유이나란 이름. 으, 언제 들어본 적 있긴 한데. 우리 혹시 옛날에 만난 적 있나?”

이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긴. 중학교 때 있었던 그 문제의 아포칼립스 사태에 겹친 악재 때문에 부모님이 불안해하며 서울로 이사한 것이 겨우 4년 전의 일이었다. 그 동안 류현이 사귄 친구들이라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으니, 아는 사람일 가능성은 극히 낮을 것이다.

“음. 집적거리는 거 아냐. 오해하지는 마.”

그렇게 말하며 류현은 손을 내밀었다. 이나는 귀까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로 조심스럽게 류현의 손을 맞잡았다. 손목에 차고 있는 두 개의 가느다란 팔찌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야, 나도 양아치 아니거든. 오해하지 말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뒷정리 할 테니까, 먼저 집에 가봐.”
“으, 응…….”

규일이 의자를 집어넣으며 그렇게 말하자 유이나는 건성으로 대답한 후 가방을 챙겨 황급히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계속 머릿속이 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이나가 앉아 있던 자리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류현을 보며, 규일은 앞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차 책상 아래로 밀어 넣고선 띠껍게 말했다.

“작업 걸 생각은 작작 하고 정리나 하시지, 색마새끼야.”
“뭐라? 하, 그런 거 아니거든. 그나저나 이 인간 어휘력 좀 보소. 무협 좀 그만 쳐 읽으라고.”
“흥. 그 나이 먹도록 마법소녀 타령하는 네놈에 비할까!”

한참을 아옹다옹하던 둘이 정신을 차리고 교실 문을 닫았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도 한참 지난 뒤였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류현은 몇 번이나 이나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얼마나 숫기가 많은지 말을 걸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과연 반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나가 피하는데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그리고 담임인 현윤하가 말했던 대로 야자가 칼같이 시작되었다. 몇몇 학생들이 어떻게든 야자를 빼 보려 말을 붙여 보았지만, 윤하는 생긋 웃으며 그때 말했던 대로 사유서를 가져오라고 말할 뿐이었다. 결국 10반의 누구 하나 야자를 빼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월요일 정규 수업이 끝나고 바로 모두가 함께하는 첫 야자 타임이 시작, 두 시간이나 되는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고 나면 한 시간 반 동안 저녁시간이라는 이름의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1학년 때는 중3이었던 동생과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서 야자를 하질 않았다. 하지만 2학년에 올라온 지금은 동생 역시 같은 고등학교에 떨어졌으므로 이젠 오히려 집에 갈 필요가 없었다. 밥을 먹으려면 요리를 해야 하고, 요리를 하면 뒷정리까지 해야 한다. 그런 귀찮은 짓을 감수하느니 그냥 둘 다 야자를 하면서 싼 가격에 저녁 급식이나 먹는 게 낫다는 것이 류현의 생각이었다.

“이거 진짜 맛없네.”

물론 그건 직접 먹어보기 전의 일이었다. 규일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숟가락 가득 된장국을 퍼 올렸다. 두부였던 물체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숟가락 위에 얹혔다. 한참동안 그 하얀 덩어리를 노려보던 규일은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식판 위에 내려놓았다.

“이 밥에 정말 3000원의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믿는가?”
“귤 오빠 말에 동의. 너무 맛없다. 마트에서 묶어서 파는 인스턴트 된장국이 더 맛있는 거 같아. 게다가 이 생선까스는 뭐야? 튀김옷밖에 안 보여.”

류아는 편의점에서 파는, 밥 위에 뿌려먹는 후레이크를 뜯으며 말했다. 점심 급식은 각자 교실에서 먹으니 1학년인 류아와 만날 일이 없었다. 반면 저녁 급식은 야자를 하는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한정적인 급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급식을 교실마다 배달하자니 음식 나누는 것도 문제요, 급식실에서 음식을 담을 그릇도 모자랐다. 결국 타협안으로 책상과 의자를 대충 갖다놓은 강당을 전교생에게 통합으로 배식으로 하는 식당으로 쓰고 있었다. 그 덕에 남매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또 언제 샀냐?”
“에헴. 이럴 줄 알고 미리 세트로 사 놨지. 헤헤, 오빠들도 줄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류아마마!”

규일은 그 즉시 류아를 향해 두 손을 내밀며 납죽 고개를 숙였다. 류아는 거만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서는 부채 모양으로 후레이크를 펼쳐든 채 얼굴을 부치며 말했다.

“내가 예쁘다고 말해 보련?”
“류아님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십니다!”
“히히. 리리올렛보다도?”
“아, 그건 아니지. 리리올렛은 여신이거든. 인간과 여신을 비교하면 곤란하지.”

규일은 코웃음을 치며 자세를 단박에 바꾸곤 잘라 말했다. 류아는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흥. 안 줄 거야.”
“그깟 후레이크에 내 여신님을 팔 것 같으냐!”

팔짱을 낀 채 콧김을 내뿜는 규일을 보며 류현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아이돌이 뭐가 좋다고? 맨날 똑같은 가사에, 맨날 비슷한 멜로디.”
“너 리리올렛 노래 다 들어봤냐? 엉? 다 들어봤냐고? 특히 2집에 들어있는 히든 트랙 들어봤어? 지금 설마 안 들어보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논리와 규율을 중시하는 천하의 한류현이! 지금 설마! 들어보지도 않고! 리리올렛의 노래를 비난하는 건 아니겠지!”
“귤 오빠,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럼 꽉 막혀 있는 우리 오빠 밤새워서 악착같이 듣는단 말이야. 보는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류아는 소름끼친다는 듯 몸을 한 차례 떨고는, 들고 있던 후레이크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규일과 류현은 거절하지 않고 후레이크를 뜯어 밥 위에 뿌렸다. 밥에 짠맛이 좀 돌자, 밋밋한 반찬도 그때부턴 제법 먹을 만 했다.

자유 시간을 누리기 위해 세 명은 서둘러 식사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류아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날카로운 눈으로 류아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던 규일이 갑작스레 운을 뗐다.

“가위,”
““바위 보!””

잔반은 누가 가져다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운명의 가위바위보였다. 두 번 할 필요도 없이 단번에 승패가 가려졌다.

“야, 패배자. 빨리 갖다 버리고 와라.”
“헤헤, 오빠. 오늘도 고마워~.”

류현은 신음을 삼키며 자신이 낸 보자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본다 한들 자신의 보자기가 주먹으로 바뀔 일은 없었다. 류현은 한숨을 내쉬며 식판의 잔반을 모두 자기 식판에 몰았다.

실실거리는 규일과 동생을 뒤로 하고선 류현은 식판을 들고 지하의 강당을 나서 급식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 때 급식소 뒤편에서 무언가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꾸 알짱거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

학교폭력인가? 류현은 눈살을 찌푸리곤 식판을 잠시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부러 크게 혼잣말을 입에 담았다.

“아, 급식소는 너무 멀다니까! 버리러 가기 귀찮아 죽겠네!”

칫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자, 어떤 여학생이 상대방을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야자 끝나고 이리로 나와. 오늘 한 번 끝을 보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다는 느낌에 류현은 재빠르게 소리가 들려온 건물 뒤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녹색 천막이 드리워진 자그마한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주의 깊게 바닥을 바라보니 발자국 등이 찍혀 있는 것이 방금 전까지 사람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지만, 류현이 여기로 오는 짧은 시간 동안 다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게 가능한가?

마지막 위협하는 목소리를 듣고서, 여기로 달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어봐야 4초도 되지 않을 터였다. 류현의 50m 달리기 기록은 6.4 초. 순발력에선 그리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지금 달려온 거리는 20m도 되지 않을 테니 계산상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4초 안에 이 공터에서 모습을 숨긴다. 물론 본관이나 별관 뒤쪽으로 샛길도 나 있고, 못할 것은 없다. 하지만 류현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라진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계속 머리에 감돌았다.

“오늘 야자 끝나고?”

류현은 마지막에 들었던 말을 중얼거렸다. 야자를 끝내고 동생과 규일은 먼저 보낸 후에 한 번 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눈에 닿는 한 학교 폭력은 막고 싶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무관심이 가장 큰 해악인 법이다.

따돌림 당하고, 폭력에 휘둘리고, 그런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류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중학교 때 진절머리 나게 겪었던 일이기도 했으니까.

“야자 끝나고 와봐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식판을 놔둔 장소에 돌아오자 거기엔 팔짱을 낀 채로 생긋 웃고 있는 여자 선생님이 한 분 서 있었다. 저 후줄근한 청바지에 티셔츠, 그 위에 걸친 우중충한 가디건을 걸친, 눈 밑의 눈물점이 매력적인 여자였다. 류현의 머리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2학년 10반 담임 선생님, 현윤하였다.

“오호, 야자 끝나고? 좋아요. 이 담임도 야자 끝나고서는 시간이 있답니다. 그럼 야자 끝나고 교무실에서 함께 왜 식판에 잔반을 쌓아 버리고 갔는지, 그리고 범행 현장으로 의기양양하게 되돌아온 류현이의 대담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A4 용지 두 장 분량 정도로 토론해 보도록 하죠.”

야자 끝나고 가 볼 시간은 좀 늦어질 모양이었다.




“하아…….”

야자 시간 내내 공부는 안 하고 졸았다. 게다가 중학교 때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채로 졸아서 그런지 한 번 고개를 끄덕끄덕 할 때마다 살짝 잠이 깼다가 다시 졸면서 그 괴물들이 나오는 꿈을 꾸길 반복했더니 몸 전체가 피곤했다.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교무실을 향해 걸었다. 그 꿈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맨 이터로 명명된 그 괴물들에게 쫓기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하면 뭐라도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신을 잃은 동생을 품속에 끌어안고, 입가에 인간의 피를 뚝뚝 흘리면서 자신을 향해 조여들던 수백 마리의 맨 이터들. 인간의 모습을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긴 팔에 총도 통하지 않는 금속질의 피부를 가지고선 인간을 잡아먹던 그놈들의 모습이 머리에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일하게 뚜렷한 이미지는 자신을 지키려는 듯 맨 이터들을 가로막고 선 붉은 머리의 마법소녀. 마법소녀 자체야 워낙 현실감이 없는 기억이라 자신이 환상을 본 건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뒷모습만은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사람들에게 마법소녀가 세계를 구해줬다고 말했다.

맨 이터는 재앙이었다. 인류를 멸망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지닌 재앙. 일반인들이야 거기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지금도 아포칼립스 사태에 대해서 조사는 꾸준히 이뤄지고 있었다. 성과가 없다 하더라도 조사를 중지하기엔 그 때 맨 이터가 인류에게 던져준 충격이 너무도 컸다.

그랬기 때문이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보답 받아야 하지 않는가?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 마법소녀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인간의 도시에 잔뜩 침투해서 전략병기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전술무기인 소총이나 박격포 정도는 통하지도 않는 그 무지막지한 괴물들을 모조리 쫓아내 준 자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그게 정도라고 믿었다. 그게 옳은 일이라 믿었다. 그래서 마법소녀가 세상을 구했다고, 맨 이터들을 모조리 쫓아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류현은 서울로 이사 오기 전까지 그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만 했다.

관심병자.

그게 자신에게 찍힌 낙인이었다.

지금에 와선 후회하고 있다.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된 꼬마가 뭐라도 된 듯 잔뜩 잘난 척을 하며 마법소녀가 세상을 구했다고 설교해 봐야 먹혀들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짓을 할 시간이 있으면 대신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자신의 기억을 명확하게 해 줄 증거들을. 그리고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사람들을 설득했어야만 했다. 그 땐 미숙했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썼다.

안 좋은 쪽으로 흐르려 하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 불분명한 기억에 관한 건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1년 정도 시간을 내서 여유 있게 찾아볼 생각이었다. 지금은 일단 교무실에 가서 반성문을 쓰고, 아까 언뜻 들었던 학교 폭력으로 추정되는 현장이나 찾아보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교무실 앞에 도착했다. 류현은 가볍게 교무실 문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왔나요?”

교무실에 들어서자 저녁때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윤하가 류현을 맞이했다.

“거기 의자에 앉으세요. 뭐 마실래요?”
“아, 가장 비싼 걸로.”
“물값이 금값이라던데.”

윤하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컵에 생수를 담아 류현에게 건네주었다. 류현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윤하는 피식 웃었다.

“진짜 비싼 물인데. 에미앙이던가. 선물로 받은 거라 잘 모르지만요.”
“에비앙이겠죠. 비싸긴 하네요.”

비싼 물이라고 하니 뭔가 맛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류현은 종이컵을 홀짝거리며 윤하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윤하는 생수통을 잡고 류현을 향해 살짝 내밀며 말했다.

“흠, 그럼. 우리 반 회장의 앞날을 축하하며.”
“네?”
“류현이 이제 10 반의 회장입니다. 오늘 교무실로 부른 건 그걸 공지하고 미리 준비하라고 그랬던 거죠.”

류현은 뭔 개소리냐는 평소의 말버릇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갑자기 야자도 끝난 이 시간에 한다는 말이 회장 임명이라니? 류현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은 채 윤하에게 물었다.

“아니, 아까 그 식판 때문에 부른 거 아니셨어요?”
“그거요? 버리고 가려고 했으면 다시 돌아올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냥 핑계죠. 이 의외의 결과를 듣기 전까지 두근두근하라는 지적인 장치라고나 할까.”

지적인 장치가 다 얼어 죽었냐는 듯한 표정의 류현을 바라보며 윤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너무 그렇게 보지 마요. 어차피 우리 학교 반 회장 제도는 알고 있을 텐데요? 모든 학생들에게 리더십을 함양할 기회를 줄 수 있도록 모두가 돌아가면서 하잖아요. 리더십이래. 푸후훗. 그 중 첫 번째가 되라는 것 뿐.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렇긴 하지만……보통은 출석번호 순 아닙니까?”

1학년 때는 출석번호 순으로 회장직을 돌렸다. 어차피 반 회장이라고 해봐야 하는 일이라곤 선생님들에게 프린터를 받아 반 애들에게 배포한 후 그걸 다시 모으는 역할밖에 없었으니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다.

윤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턱을 괴었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처음이 가장 중요한 법이죠. 우리 반엔 좀 먼 데서 온 아이도 있으니까, 그런 애들이 소외감 느끼게 하지 않으려면 좀 괜찮은 사람이 회장이 되는 게 낫다 싶잖아요?”
“괜찮은 사람? 혹시 저요?”

의심스럽게 되묻는 류현을 향해, 윤하는 한층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음, 예를 들자면……그래. 학교 폭력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정도의 용기를 가진 사람? 푸훗. 리더십 넘치네요.”
“어?”
“우리 반 애들이 지나갈 때마다 테스트하고 있었거든요.”
“그게……선생님 목소리셨어요?”

류현은 맥이 탁 풀렸다. 자신이 들었던 그 목소리가 윤하의 연기였다면 자신이 우려했던 사태는 없다는 결론이 된다. 다행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담임인 윤하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며 말했다.

“여고생에 비하면 나이야 좀 먹었지만, 아직 풋풋한 20대 초반이고. 제가 좀 몸은 처녀지만 마음만은 소녀니까요. 속는 게 당연하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우쭐거리듯 말하는 윤하를 보며 류현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네? 뭐가 소녀라고요?”
“잊으세요.”

불신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류현을 보며 윤하는 살짝 볼을 붉힌 채 이제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회장 일은 내일부터 하고요. 야자도 끝난 시간에 이 담임이랑 놀아주느라 수고했어요. 동생이 걱정하기 전에 얼른 집에 가세요.”

류현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 아래 내려놨던 가방을 걸쳤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윤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선생님.”
“그래요. 밤에 학생 혼자 다니면 위험하니까 빨리 집에 가고요.”

윤하의 배웅을 받으며 류현은 교무실 밖으로 나섰다. 원래는 반성문을 두 장이나 쓰고, 학교를 좀 돌아다니다 집에 갈 생각이었기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핸드폰을 꺼내 동생에게 지금 집에 간다는 문자를 타이핑하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 했다.

류현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쓸데없는 걱정이란 사실은 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어차피 학교를 돌아보는 데 쓰려고 했던 시간, 한번쯤 둘러보고 가더라도 손해는 아닐 터였다.

보내려던 문자를 취소하고, 핸드폰을 교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교과서도 노트도 하나도 없어 가볍기 그지없는 가방을 멘 채로 류현은 학교 부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별관의 문은 잠겨 있었다. 야자가 끝나자마자 수위 아저씨가 순찰을 돌고 내려와 잠가놓은 모양이었다. 대충 고개를 들어 창가를 둘러봐도 빛이 비치는 기색은 없었다. 별관 내부에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문이 잠기지 않은 본관 건물들을 한 번 돌아다니며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 건물 밖으로 나와 저녁 때 그 목소리를 들었던 급식소 옆 공터로 가 보았다. 아까 저녁때 자신이 왔던, 본관과 별관 사이의 길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무도 없었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관 뒤쪽과 별관 뒤쪽의 길까지 살펴보았으나, 길쭉한 건물 뒤편에서도 사람 그림자라곤 한 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모두 자신의 기우였던 것이다. 만족할만한 결론을 내린 류현은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전거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빨랐다고는 해도, 그 속으로 걱정 많은 동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면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내일부터 회장이라는 이름의 심부름꾼이 되어 일할 것도 좀 생각해 봐야 하고.

류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낡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학교에서 류현의 집까지는 자전거로 10분 정도.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중간에 있는 언덕 하나가 고비였다.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직접 끌고 언덕을 올라, 언덕의 정상에서 다시 안장 위로 올라탔다.

본관이나 별관 건물 길이 정도 되는 내리막길이 펼쳐져 있었다. 류현은 신나게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언덕길을 질주하자 바람이 붕붕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순간, 류현은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오래된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삐걱거리며 바퀴를 조였다. 하지만 이 낡고 제대로 정비하지 않은 브레이크가 제동을 걸기엔 자전거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잠시 끼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브레이크가 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다.

자전거를 억지로 멈추기 위해 발을 땅에 댔다. 운동화 밑창이 바닥에 끌리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고무 타는 냄새를 풍기며 류현은 간신히 자전거를 멈췄다.

그리고 바로 핸들을 돌려 다시 학교로 향했다. 류현은 기어를 저단으로 넣고, 미친 듯이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본관 건물이나 별관 건물이나, 다섯 개 이상의 반이 한 층에 들어서 있다. 건물의 길이로 따져도 100m 이상. 그리고 건물 사이로 난 길에는 류현이 서 있었다. 즉, 윤하가 그 위치에서 목소리를 흉내 내고, 류현 모르게 식판을 내버려둔 자리에 와 있기 위해서는 20초가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200m 이상을 주파해야만 했다. 여자라고 달리기가 느리단 법은 없다. 하지만 우사인 볼트의 100m 세계 기록이 얼마였더라?

결론은 하나다. 윤하가 류현에게 거짓말을 한 거다. 그 결론에 이르자마자 윤하가 마지막에 건넸던 인사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동생이 걱정하기 전에 얼른 집에 가라고?

보통은 부모님이겠지. 류현은 이를 악물고 자전거의 속력을 더욱 높였다. 류현과 류아의 부모님은 해외에 나가서 살고 계신 게 아니다. 지금 잠깐 여행을 갔을 뿐. 누구에게 말하고 다닌 적도 없었고 하물며 이제 겨우 일주일 동안 얼굴 본, 그것도 조회나 종례 시간에만 본 선생님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그 학교 폭력에는 현윤하, 그 선생조차 가담되어 있는 게 아닌가?

“웃기지 마……! 선생이 학교 폭력에 가담하다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이 있지!”

단내가 퍼지는 입으로 증오와 원망을 한껏 쏟아내며 류현은 학교를 향해 내달렸다. 이제 곧 교문이었다.

교문이 보이고, 그 위에 걸린 이번에 좋은 대학에 합격한 선배들을 자랑하고 있는 현수막이 보였다. 어차피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니 속도를 줄일 수도 없었다. 싸구려 같으니라고. 류현은 최고속도로 학교 운동장으로 돌입했다.

눈을 돌려 본관 건물을 바라보았다. 교무실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본관 건물도 잠겼다고 한다면, 가장 의심이 가는 장소는 최초의 공터였다.

본관 건물과 별관 건물 사이로 들어서는 길. 류현은 누더기가 된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그 어둑어둑한 길을 향해 달렸다.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달리면서 꺼낸 핸드폰의 화면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구를 출력하고 있었다.

[통화권 이탈]

서울 시내에서 핸드폰이 안 터진다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며 류현은 핸드폰을 거칠게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제기랄, 이렇게 된 이상 현장을 발견하면 온갖 소란을 부려 주위 사람들이 다 몰려오게 해 줄 테다. 그런 굳은 결심을 하면서 류현이 공터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거기에 있는 것은 학교 폭력의 현장 따위도 아니고,

담임선생님이 장난이었다며 웃고 있는 현장도 아니고,

저 뒤에 있는 주황색 가로등을 배경으로 서 있는 무언가.

팔이 묘하게 길쭉한, 금속질의 인형??????

??????맨 이터가 공터에 서 있었다.







왜?

왜 맨 이터가 여기에 있지?

저것들은 분명,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게 아니었나?

이성적인 사고는 거기까지였다. 뒤이어 류현의 머리를 침식한 것은 중학교 시절 맨 이터에게 쫓겼던 기억.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깊게 박혀 있는,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의 모습이었다.

그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거대한 이빨로 인간의 몸을 분쇄하며
생명을 이루는 물질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괴물.

저 묘한 금속질의 육체는 81mm 박격포탄도 상처 하나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보다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무기가 인류에게 없는 건 아니지만, 이미 전 세계의 모든 주거지역에 깊숙하게 침범해 있던 맨 이터들에게 그런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인류 자신의 목에 권총을 겨누고 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아으으…아?”

류현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용기가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기듯이 공터를 뒤돌아 나와, 운동장을 지나쳐 학교에서 나가려 했다. 그리고 본관과 별관 사이로 나오는 순간, 류현은 공포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맨 이터들이 운동장을 감싼 울타리를 따라, 학교를 완전히 둘러싼 채 류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다.

그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들은 마치 류현을 비웃는 것처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품속에 여동생을 안고, 겁에 질린 채 눈을 질끈 감았던 그 때의 기억. 이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이걸로 나의 운명은 끝이라 포기했던 그 순간. 압도적인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인생의 끝자락??????

류현은 간신히 눈을 치켜떴다.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가슴을 두드렸다. 막혔던 숨이 터지며, 류현은 기침을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커헉!”

구토할 것만 같다. 신맛이 식도를 가득 채웠다. 주저하지 않고 토해냈다. 저녁으로 먹었던 그 맛없는 급식이 위액에 섞여 모조리 튀어나왔다.

정신이 돌아온다.

Q. 나는 죽었나?
A. 아니, 살아 있다.

그 때도 죽을 거라 생각했다. 살 수 있는 길 따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가? 자신은 살았고, 그 후로도 5년을 가까이 더 살았다. 저 놈들은 결국 류현을 죽이지 못했다.

“여, 여기서……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순 없어!”

류현은 눈물을 흘리며 악에 받혀 소리를 질렀다. 모든 힘을 짜낸 그 외침은 학교를 둘러싼 이 기묘한 결계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 잔향이 사그라지기도 전,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류현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자가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용기일까요?”

현실감이 없는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류현의 뒤에서 소리 없이 걸어 나왔다. 기주고등학교의 여학생 교복 위로 분홍색 후드가 달린 재킷을 걸친 소녀였다.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가지는 최후의 희망을 용기라 한다면,”

류현의 앞에 선 소녀가 주머니에서 양 손을 뺐다. 그 새하얀 손목을 장식하고 있는 붉고 가느다란 팔찌가 부딪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펌을 넣은 층진 단발머리에, 은색의 사각 반무테 안경을 코끝에 살짝 걸치고 있는 소녀의 얼굴.

류현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유이나.

겁 많고, 지나칠 정도로 소심하던 반 친구.

자그마한 몸으로 맨 이터들을 막아선 채, 이나는 류현을 향해 수줍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용감하신 분이에요.”

이나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류현에게서 등을 돌린 후 몸의 자세를 낮췄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오른쪽 손에는 긴 목도를 쥐고 있다. 백을 넘는 맨 이터를 향해, 저 작은 소녀가 목도 하나만을 가지고 덤비려 하고 있다.

류현이 말릴 새도 없이, 이나가 운동장을 질주했다. 준족이라 하기 충분한 빠른 속도. 하지만 맨 이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교문 쪽에 서 있던 맨 이터 중 하나가 번개같이 달려 나왔다. 맨 이터 군단이 포위하고 있는 중앙에서, 이나와 맨 이터가 일기토라도 벌이듯 맹렬하게 충돌했다.

맨 이터가 그 긴 팔을 죽 내밀었다. 달려오던 속력을 모조리 실은 그 팔에 맞았다간 콘크리트 벽이라 하더라도 단숨에 박살날 강렬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이나는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맨 이터가 내지르는 팔을 피하며 목도를 올려쳤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총도 안 통하는 맨 이터들에게 목도 따위가 통할 리가 만무한 법. 맨 이터는 그르륵대며 뻗은 팔을 회수하며 발길질을 했다. 그 단순한 동작 하나만으로 목도가 박살나고, 이나의 몸은 그대로 발길질에 채여 한참을 날아가 운동장 바닥을 형편없이 굴렀다. 맨 이터가 다시 땅을 박찼다.

금속질의 괴물이 이나를 덮친다.

안 돼.

죽이지 마.

“죽이지……!”
“그만, 죽이지는 말라고 했잖아.”

싸늘한 목소리가 맨 이터를 가로막았다. 류현은 그 목소리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을 속여 넘겼던, 2학년 10반의 담임인 현윤하.

윤하는 아까 류현과 이야기를 나누던 복장 그대로 본관 앞에서 걸어왔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천지차이였다. 그 싸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양 손목에 차고 있는 파란색의 가느다란 팔찌와, 전신을 감싸고 있는 푸른빛의 기묘한 문양이었다.

이나를 향해 도약하려던 맨 이터가 윤하를 향해 뛰어들었다. 윤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팔을 양쪽으로 넓게 펼쳤다.

“나는 청영을 그리는 사파이어의 운명을 타고난 서리의 수호자.”

윤하의 몸을 감싼 문양이 한층 더 밝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분명히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로도 선명하게 모양이 보일 정도로.

“나의 이름은 시쥬리오 카쉰. 당신의 진실 속에서 태어난, 몸은 처녀지만 마음만은 소녀인 마법소녀!”

문양이 점점 커지며 윤하의 몸 전체를 감쌌다. 윤하는 무표정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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