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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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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내가 너의 대리인이니까
글쓴이: 파출부
작성일: 12-07-31 23:57 조회: 3,241 추천: 0 비추천: 0

<프롤로그>

마침내, 내 입술을 따스하게 적시던 그녀의 입술이 떨어졌다. 피에 젖은 그녀의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 붉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국어 시간에 배운 시구가 생각났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그땐, 어째서 키스가 날카로운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외우기만 했는데 이젠 알겠다.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아무튼 그렇다. 첫 키스를 하고 계약을 맺을 때부터 내 운명은 어긋난 것이다. 넘어서는 안 되는 담을 넘은 것이다. 그렇지? 동의를 구하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고인 눈물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칼이 비틀어지며 복부를 헤집었다. 나는 신음 대신에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녀의 새하얀 드레스 위로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장. 정체불명의 정의실현단>

인생을 그래프로 그리라고 한다면 자를 대고 수평선을 죽 그으면 될 만큼 나의 생활은 평탄했다. 메마르고 맛도 없는 삶이라고 불만을 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건 그 사람의 사정이고, 나는 내 삶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었다. 시련이라든가 모험이라든가 하는 비일상적인 일들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즐기면 되니까. 예를 들면, 소설이라든가 영화라든가 뭐 이런 문화 상품들 말이다. 내 경우에는 온라인 게임을 즐겼다. 방과 후면 친구들이랑 피시방으로 향했다. 그 밖에 취미 생활이라고 한다면 암벽타기가 있었다. 1학년 때 동아리 어느 한 곳에는 반드시 가입해야해서 어쩔 수 없이 암벽타기부에 가입을 하였는데 의외로 적성에 맞았다. 암벽 하나를 타고 넘을 때, 내 안에 있는 벽을 뛰어넘는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담 넘기의 확장판이랄까.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2학년에 올라서자 내 인생 그래프에 변화가 생겼다. 우선, 암벽타기부가 없어졌다. 교장이 대학 진학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폐지시킨 것이다. 강제로 가입시킬 때는 언제고 갑자기 말 한마디로 폐지시키다니 역시 우리나라 사립고등학교다웠다. 어쨌거나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리들은 다 없어졌기에 많은 동아리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새 회원들을 모으고 있었다.

HR시간에 동아리 홍보가 시작되었다.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수십 개의 동아리 홍보 테이블이 차려졌다. 나는 사이버네오 피시방 원정대 멤버이자 암벽타기부 부원이었던 민수와 함께 운동장을 서성였다.

“헤이, 저거 어때? 화학부.”

민수가 가리킨 곳에는 흰 가운을 입은 선배가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분자 구조 모형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선배의 표정은 화학 교과서보다 더 지루했다.

“저걸 하느니 봉사 동아리에 가입하겠어. 최악이야.”

“섣불리 판단하지 마. 겉은 저래 보여도 방과 후에 TNT 폭탄을 만들거나 LSD를 제조할지도 몰라.”

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민수가 말했다. 평소에도 실없는 친구이지만 이럴 때면 정말 한심해 보였다.

“그래, 그래. 봉사 동아리도 알고 보면 토요일마다 로리 로리한 여자 아이를 목욕시켜준다든가 그럴 지도 모르지.”

“정, 정말?”

……. 말을 말자. 어쨌든 우리는 이번 주 안으로 동아리를 가입해야 했다. 평소에는 입학사정관제 준비를 하다가 지구를 멸망시키겠다는 거대한 야심으로 온갖 음모를 짜서 그 결과로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을 시키는 그런 현실의 동아리 말이다.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그나마 게임이라도 즐길 수 있는 동아리를 찾았다. 실제로 게임 빌드오더 연구회 같은 동아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동아리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니, 입부 신청서는 작성할 수 있겠지만 저런 동아리가 허가가 나올 리가 없었다. 불행히도, 진학 담당 선생님은 바보가 아니었다.

우리는 동아리 홍보 테이블 사이를 어지럽게 돌아다니며 시간만 죽였다. 오늘 안에 적당한 곳에 가입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때였다. 여자애가 우리를 불렀다. ‘정의실현단’이라는 고딕체 글씨가 광고판에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엔 어떤 설명이나 그림도 없었다. 그럼에도 민수는 재빨리 테이블 앞에 앉았다.

“안녕. 난 하령이라고 해.” 여자애가 가슴에 달린 노란 명찰을 가리키며 말했다. 핀으로 꽂은 명찰은 불안정하게 달려 있었는데 여자애의 가슴이 교복이 괴로워할 만큼 빵빵했기 때문이었다. 모유 대신에 딸기 우유를 마시면서 자란 걸까? 도저히 한국 여고생이라고는 믿기 힘든 볼륨이었다. 그에 반해 민수는 정상적인 한국 남고생의 반응을 보였다.

“난 이민수야. 입부 신청서 어딨어? 그런데 너 몇 반이야?”

하령은 전학생인 게 확실했다. 작년에 같이 학교를 다녔다면 처음 볼 리가 없었다. 아무리 내성적인 아이라도 이렇게 예쁘면 소문이 퍼지기 마련이었다. 하얀 피부에 오뚝한 콧날, 희미하게 파진 보조개, 무엇보다 눈이 매혹적이었다.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미 민수가 앉기 전에도 많은 아이들이 앉았던 흔적이 있었다. 심지어 내 등 뒤로도 남자 세 놈이 줄을 섰다.

“1반.” 하령이 명랑하게 답했다.

“오, 진짜? 장난 아니다. 나 네 옆 반이야. 1 옆에 1. 나 11반!” 민수의 답을 들은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구도 우리 반을 저렇게 부끄럽게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민수는 당장에라도 가입할 생각으로 보였다. 정의실현단이라는 이 수상한 동아리를 말이다. 하지만 민수의 꿈은 무산되어 버렸다. 하령이 민수의 손바닥을 살펴보더니 입부가 곤란하다며 거절한 것이다.

“왜, 왜? 손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손금이 나랑 잘 안 맞아서. 미안.” 손금 때문에 안 된다니? 요즘 시대에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게다가 이건 연애나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동아리 활동일 뿐인데 궁합까지 필요가 있을까? 미안하다는 말도 그다지 성의가 없었다. 민수가 물러나자 내 뒤에서 기다리던 남자 셋이 의자를 차지했다.

“야, 재물운이 이거냐? 이게 좀 짧은가? 아니, 두뇌선이 문제였나?” 민수는 손바닥을 활짝 펴보며 내게 물었다. 그냥 네가 싫은 거라고 말해주려다가 참았다. 녀석의 정신을 파괴하면 그 파편이 내게 떨어진다는 걸 지난 일 년 간 충분히 경험했다. 한 번 부서지면 잘 회복되지도 않았다. 다행히도 둔해 빠진 감각이 정신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그런 일은 드물었다.

뒤이어 면접을 본 세 명의 남자도 퇴짜를 맞았다. 어쩌면 하령의 이상형은 손이 고운 남자일지도 몰랐다. 나는 내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민수처럼 나도 굳은살이 조금 박혀 있었다. 암벽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가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호기심은 가지만 정체불명의 동아리에 남은 2년을 바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불렀다.

“나?”

“응. 너, 이름이 뭐야?”

“한시혁.”

“손 좀 보여줄래?”

“나는 입부할 생각이 없어.”

그리고 괜히 퇴짜 맞을 생각도 없다.

“그래도 한 번 보고 싶어. 손 이리 줄래?”

하령이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민수도 나를 부추겼다. 나는 여자친구에 의해 억지로 점집에 들어가는 남자처럼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하령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금을 더듬었다. 간지러웠다. 그러나 웃음을 터트리기에는 하령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점쟁이처럼 말이다.

“사슬 모양의 생명선은 혼돈을 의미해. 어떤 원인에 의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생활을 겪게 되는 거지. 이를 테면, 바람 피다가 들켜 버리는 거야. 부인도 애인도 떠나 버리고 사랑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동성애자가 되는 거지. 아니면, 도플갱어가 나타나서 너의 모든 걸 뺏어가고 넌 하수도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될 수도 있고. 게다가 생명선의 가운데가 끊어져 있어. 보이지? 여기. 이건 생활이 확 뒤바뀐다는 건데, 급성 매독에 걸리거나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거나 그럴 수가 있지. 그리고 이게 바로 감정선인데 가지선이 너무 많아. 연인과의 갈등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는 거지. 심지어 너는 두뇌선과 붙어 있어. 헤어 나오기 힘든 비애가 닥칠 거야. 비극의 주인공처럼. 그밖에도 넌 전부 최악이야. 두뇌선, 운명선, 태양선, 건강선, 결혼선, 재물선, 뭐 하나 최악이 아닌 게 하나도 없어.”

우와, 이건 점치는 게 아니라, 저주를 퍼붓는 거다. 민수한테는 별 말 하지도 않던데 나한테 무슨 악감정 있나 싶다. 하령에게 잡혀있는 왼손을 뺐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

“잠깐. 그런데 말이야.” 하령이 내 손을 다시 붙잡았다. 살짝 고개 숙인 하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 손을 꼭 쥐면서 고개를 들어올렸다. 서클렌즈라도 낀 건지 파란 눈동자에, 기쁨이 가득 찼다.

“담을 넘었어! 담을 넘은 흔적이 확실히 있어.”

어? 점심시간에 컵라면 먹으려고 담 넘어간 걸 어떻게 안 거지? 손바닥에 흙이라도 묻어 있나? 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내 손바닥에서 돌담을 넘을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점쟁이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 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부적이라도 한 장 써 주십쇼.’하고 신사임당 누님을 딱! 꺼낼 리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입하지도 않을 정의실현단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나는 하령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응? 어디가?” 하령이 여전히 내 손을 붙잡은 채 물었다. 슬슬 손 좀 놓아주면 좋겠는데….

“민수랑 동아리 찾아 봐야지.”

“뭐? 입부 신청서 써야지. 가입한다고 했잖아.”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하마터면 내가 진짜 가입하려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나 한시혁. 지난 4년 간 수많은 게임을 하면서 상대방의 기만전술을 겪었고 격파해왔다.

“손 좀 달래서 손 줬을 뿐이잖아. 왜 계속 잡는 거야?”

“아 그랬나? 헤헤. 딴 데 가지 말고 동아리 가입해줄래? 잘 해줄게-. 응응!” 하령이 실실 눈웃음을 치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탁했다.

지금까지 다른 애들 내쫓더니 내 손은 왜 안 놓아주는지 모르겠다. 슬슬 인상이 찌푸려졌다. 다른 애들은 하령의 애교에 넘어갈지 모르겠지만 난 흔들리지 않았다. 게임만 좋아하고 여자아이에게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다만, 하령의 스타일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나는 좀 더 작고, 여리고, 마르고, 가슴도 작은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절대! 페도필리아는 아니다. 그냥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정도이다. 아무튼 나는 현행법을 존중한다.

“미안. 난 이 동아리가 뭐 하는 곳인지도 잘 모르겠고, 나랑 잘 안 맞는 것 같아.”

“아니야. 너랑 완전 잘 맞아.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거야. 나쁜 놈들 혼내 주고 신나게 노는 거지.”

뭐지? 황당하다. 게다가 이미 저 ‘우리’에 나도 껴 있는 말투다. 하령은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교내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애를 혼내주고.” 애들이 나를 반장으로 뽑아주면 고려해볼 수 있겠다. 그럴 리가 없지만.

“소매치기 범을 현장에서 잡아서 때려주고.” 오 대 오로 도난품을 분배해준다면 고려해볼 수도 있다.

“팔려가는 여자를 구출하고, 인신매매단을 일망타진하고.” 강력계 형사님들의 일자리 보존을 위해 양보하겠다.

“총기를 들고 탈영해서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소리 지르는 바보를 혼내주고.” 사랑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 법이다.

“대통령과 장관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테러범들을 제거하고.”의사 선생님, 어디 계세요?

“농담 그만 해. 아무튼 나랑은 안 맞아 보여. 내 생각엔 창설 허가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잠깐! 가장 중요한 게 남았어. 그렇게 착한 일을 많이 많이 해서 대학교에 가는 거야. 학교에서 원하는 입시를 위한 동아리 활동 그 자체지. 이거야말로 학창 시절의 재미있는 추억과 명문대 입학과 공동체를 위한 아름다운 봉사를 다 잡는 거지. 한 마디로, 쓰리섬이랄까.”

쓰리섬이 도대체 왜 나와? 나는 ‘봉사’라는 착한 여자아이가 지적인 ‘입학’과 잘생긴 ‘추억’ 사이에 둘러싸여…… 으읏, 현행법 준수, 현행법 준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망상을 쫓았다.

“어떻게 대학을 가는데?”

“입학사정관제로 가는 거야. 아성시 용감한 시민 이야기 들어봤어? 그 동네에서 학교 다니던 내신 6등급인 남자애가 소매치기를 때려잡아서 그걸로 용감한시민상을 받아가지고 J대에 붙었대. 이거 말고도 사례가 많아.”

귀가 솔깃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허황된 계획이다. 수시 원서를 쓰기 전까지 소매치기 범을 만난다는 희박한 확률에 그 소매치기 범을 잡는다는 희박한 확률을 곱해야 하고 거기에 또 그 일로 인해 용감한시민상을 받는다는 희박한 확률을 곱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하더라도 꼭 대학에 붙는다는 보장도 없다. J대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명문대인 건 틀림없지만 용감한시민상을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합격시킨다는 규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있자 하령이 잽싸게 서류 뭉텅이와 펜을 들이댔다. 어서 서명하란다.

“이게 뭔데?”

“뭐긴-, 입부 신청서지요. 자자, 여기에 서명만 하면 돼.”

입부 신청서는 길게 이어진 종이를 차곡차곡 접어놓은 거였는데 전부 백지였다. 하령이 들이민 맨 마지막 쪽에만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는 정의실현단에 입단합니다. (인). 부장은 정의실현단의 입단을 허락합니다. (인).』펜도 특이했다. 만년필처럼 생겼는데 가늘고 반투명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았다. 내가 얼떨결에 팬을 건네받자 하령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이가 없다. 팬을 돌려줬지만 하령은 집요하게 서명을 요구했다. 고양이처럼 두 손을 모으기도 하고 잘 생긴 시혁님이라고 아부도 떨었다. 하령의 가슴이 두 컵만 작았어도 넘어갈 뻔했다.

“저기요, 선배.” 실랑이를 벌이는 중인데 뒤에서 여자아이 한 명이 나타났다. 흰 색 명찰. 1학년이었다. 짧은 머리에 야구 모자를 쓰고 있어서 소년 같은 느낌이 났지만 키가 작아서 여자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언니 바쁘거든? 조금 있다 다시 올래?” 하령이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민수처럼 눈치가 없지 않는 한, 가입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민수가 보이지 않았다.

“민수 좀 찾아 볼 게.” 하령이 1학년에게 시선이 팔린 틈을 타서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하령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애들이 바글대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2장. 사랑의 계약서>

내가 하령에게 붙잡혀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에 민수는 유도부에 가입하였다. 중학교 때까지 꾸준히 유도를 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시작해서 체육특기생으로 입시까지 노려볼 거라 하였다.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면 좋겠지만 나는 유도에 관심이 없고 민수의 진학을 방해할 생각도 없었다. 이제 우리도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각자의 길을 슬슬 찾아보기 시작할 나이였다. 나는 진로를 정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리를 고르는 것도 어려웠다.

종례가 끝나고 민수와 피시방에 가기 위해 운동화를 갈아 신는데 따끔한 것이 밟혔다. 운동화를 벗어 털어보니 자그마한 카드가 떨어졌다.

“이거 설마? 설마 러브레터냐?” 민수가 호들갑 떨며 말하는 바람에 주변 애들이 쳐다보았다. 그 때문에 바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학교를 벗어나 펼쳐보았다. 그때까지 민수는 바람을 불어넣었고, 나도 요 분홍빛 카드가 러브레터까진 아니더라도 여자애가 보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11시. 옛날 놀이터』

날짜가 없으니 오늘 밤 11시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만나자고 하다니 여자애가 맞는 걸까? 게다가 옛날 놀이터는 버려진 건물을 의미했다. 오래 전에 놀이터였지만 재개발되면서 빌딩을 세우다가 무슨 일인지 공사가 중단된 곳이었다. 자연히 음침하고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거기서 밤마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는 소문도 있었고, 수전도 북부에서 밀려난 조직폭력배 세력이 근거지로 삼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11시면 야심한 시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가기 꺼려지는 곳이었다.

“그만큼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 좋은 곳이지.” 민수가 말했다.

“됐네요. 근데 누굴까? 이름이 안 쓰여 있어.”

“인아 아닐까? 걔가 겁도 없고 이런 고전적인 고백 방식도 좋아하고.”

“에이, 걔가 왜 나와. 나랑 친하지도 않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근히 인아가 나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인아가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아는 영어 학원 다니면서 알게 된 한 살 어린 여자애인데 나보다 마르고 귀여운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가슴도 작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페도필리아가 아니다. 인아가 다섯 살만 더 어렸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은 해 보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다.

10시까지 피시방에서 놀고, 민수와 헤어졌다. 민수에게는 곧 바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였지만 길거리를 쓸 데 없이 돌아다니며 11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혼자 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당연히 그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11시 5분에 버려진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일찍 가면 러브레터 받고 설레서 달려가는 쉬운 남자처럼 보일까 봐 일부러 지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봤다. 내부의 밝기는 천차만별이었다. 유리 없는 콘크리트 창을 통해 네온사인 불빛이 들어오는 곳은 충분히 밝았지만 구석진 곳에 가면 형체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구석구석을 뒤져 봐도 그녀는 없었다. 누군가의 장난에 파닥파닥 낚인 것 같다. 에이쒸. 괜히 설렜네. 널브러진 각목 하나를 찼다.

“까악! 저리 가.”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소리를 쫓아 반사적으로 계단을 오르려다가 돌아서서 각목을 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위층에 치한이 있다. 한 명이 아닐 수도 있다. 둘이나 셋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조폭들의 근거지로 쓰인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내가 각목을 들고 설친다고 이길 수 있을까? 그냥 112에 신고하고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언제부터 정의의 용사 흉내를 내었지?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술 취한 미치광이가, 까악! 저리 가, 가란 말이야!”

여자의 비명소리에 이어 남자의 욕지거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경찰이 오기 전에 여자가 다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여자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아이였다. 나에게 러브레터를 보낸 그녀일 것이다. 술 취한 남자 한 명 정도면 내 힘으로 어찌해볼 수 있겠다는 현실적인 판단도 개입했다. 2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명소리는 점점 더 처절해졌다. 나는 한 층 더 올라갔다.

어둠 속에 여자애가 쓰러져 있고 남자가 거칠게 여자 옷을 벗기고 있었다.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며 침을 삼켰다. 네온사인 불빛이 이동하면서 여자가 쓰러진 곳을 비추었다. 치한은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십 미터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얼굴이 불콰했다. 여자는, 령이었다. 브래지어가 반쯤 드러난 하령은 치한을 밀쳐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치한은 하령의 입을 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한 채, 하령의 옷을 벗기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치한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하령이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마구 헝크러져 있었다. 브래지어 한 쪽은 벗겨진 상태였는데 노출된 가슴을 머리카락이 가까스로 가리고 있었다. TV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줄은 몰랐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몸을 일으키려는 치한을 향해 각목을 들어올렸다. 머리를 내리치려는데 하령이 “안 돼!”라고 소리쳤다. 가까스로 감정을 억제해 머리 대신에 다리를 내리쳤다. 그는 다시 쓰러졌고, 나는 하령의 민소매 블라우스를 주워 주었다. 찢어졌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 다음엔 어찌해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 어떻게 하더라? 하령과 눈이 마주쳤다.

“시혁아, 흑.”

하령이 울음을 터트리며 나에게 안겼다. 하령이 겪었던 수모가 내게도 밀려오는 듯, 가슴이 울컥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흑흑,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바보야.”

싸 보이지 않으려고,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늦게 왔다고,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미안.” 힘없이 사과했다.

“그래도 와 줘서 다행이야.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난, 흑.”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이제 그 자식은…….”

치한은 신음소리를 내며 휴대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119에 신고하긴 난감할 테고, 지인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듯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혼자 힘으로 걸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일단 신고부터 하자.” 나도 휴대전화를 꺼냈다.

“히익, 안 돼. 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하령이 기겁하며 말렸다.

“아, 미안.” 다시 사과했다. 내가 이렇게 눈치 없다니. 민수를 욕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우리 그냥 다른 데 가자. 저 아저씨 슬슬 일어설 것 같아.”

“어, 그래.” 말은 했지만 하령은 가만히 있었다. 다쳐서 못 움직이는 건가? 상처는 보이지 않는데……. 아.

“어, 업힐래?” 한 번도 여자를 업어 본 적 없지만 이럴 상황에서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령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살짝 끄덕였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기 힘들 정도였다. 그녀를 업고 나를 노려보는 치한을 한 번 쳐다본 뒤, 계단을 내려왔다.

하령은 비교적 큰 키와 볼륨 있는 몸매에 비해 의외로 가벼웠다. 그래도 나는 땀을 흘렸는데 체력 문제가 아니었다. 하령의 가슴이 부드럽게 내 등을 눌렀다.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미니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새하얀 허벅지를 감싸 쥐고 있었는데, 탄력 있는 허벅지의 서늘한 감촉이 머릿속 회로를 하나씩 정지시켜 나갔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그녀의 숨결이었다. 귓바퀴를 타고 들어오는 숨소리 때문에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모든 감각이 낯설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오래 지나지 않아 내려달라고 하였다. 우리가 멈춘 곳은 시냇가의 산책로였다.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벤치를 비추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냇물의 리듬에 맞춰, 바람이 불며 풀과 나무를 흔들었다. 나는 그제야 하령을 제대로 보았다. 어느 정도 정돈된 머리카락이 가슴 언저리에서 흔들렸다. 찢어진 옷 사이로 하얀 살이 엿보였다. 거의 팬티가 보일 정도로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허벅지에는 내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찢어진 스타킹을 망설임 없이 벗어던졌다.

“안 추워?” 간신히 한 마디를 했다.

“조금 추워. 냇가 오니 바람이 차네.”

“따뜻하게 입지 그랬어. 아직 3월 초인데.” 그렇다. 꽃샘추위도 채 가시지 않아서 모두 긴 옷을 입고 다녔다.

“……,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앉아. 피곤하잖아.”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사를 던져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영화, 소설, 게임, 그 어떤 것도 도움이 안 되었다.

“응, 너도 앉아.”

우리는 살을 붙이고 앉았다. 하령은 추운지 나에게 밀착해왔다.

“옷 벗어줄게.” 오늘 내가 떠올린 생각 중 가장 괜찮은 생각 아닐까?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너도 춥잖아. 그냥…” 그녀가 말꼬리를 흐렸다.

“벗어줄게!”

“아니, 바보야. 그냥…, 안아 줘.”

“아, 응. 미안.” 역시 난 바보다. 최대한 따뜻하게 양팔을 벌려 령을 감싸 안았다. 내 목 아래에 머리를 파묻은 그녀가 속삭였다.

“오늘 정말 고마워. 네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난 ……, 너 아까 정말 멋있었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걸.”

“그래도 신고도 하지 않고 너무 잘해줬어. 예상대로 흘러가서… 아, 아니. 예상대로 진짜 용기 있고, 멋있어. 난 네 여자친구도 아닌데 목숨을 걸고 구해줬어. 심지어 오늘 낮에 내가 그렇게 귀찮게 굴었는데도 말이야. 낮에 일 진심으로 사과할게. 난 단지 너랑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 내 맘 이해해줄 수 있어?”

령이를 더욱 꼭 껴안았다. 그랬구나. 날 좋아하는구나. 그 카드도 고백하려고 보낸 거고. 수줍어하며 러브레터를 내 운동화 속에 집어넣고 버려진 건물에서 마음 졸이며 나를 기다리다가 치한에게 겁탈당할 뻔하다니.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품에 안겨있는 령이가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지켜주고 싶다.

생각해 보면 하령만큼 완벽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애도 없었다. 몸매는 국내 여고생 중 최강이고 얼굴도 아이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예쁘고, 동아리 만드는 걸 보니 성격도 활발하고 목표도 확실해 보였다. 조금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그건 나를 좋아하는 마음에 억지를 부린 거였다.

“있잖아. 시혁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들어줄래?”

령이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제 나오는 구나. 뭐라고 답해야 하지? 갑자기 그녀가 두 팔을 들어 내 목덜미를 감쌌다. 눈을 살며시 감으며 그녀의 입술을 내 입술에 맞추었다. 나도 눈을 감고 키스를 받아들였다. 산들바람이 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매만졌다. 흔한 여자 샴푸 냄새가 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야생화 냄새가 났다. 촉촉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이 젖어들었다. 령이는 깜찍하게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당기더니 혀를 집어넣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꽉 껴안았다. 내 가슴이 그녀의 커다란 가슴을 짓눌렀다. 뜨거운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나인지 그녀인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천천히 떨어지며 눈을 떴다. 나를 에워쌌던 그녀의 채취, 살갗의 감촉, 달아오른 숨소리가 하나 씩 지워졌다.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어. 나 지금까지 누굴 좋아한 적도 없고, 키스… 도 첫 키스여서 많이 서툴었는데 그래도 다 들어줘서 고마워.”

령이는 내 시선을 피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얼굴이 새빨갰다. 얼굴뿐만 아니라 하얀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어떻게 무슨 말이라도 해서 부끄러움을 덜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도 새빨간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시혁아, 나, 너를 좋아……, 동아리 같이 해줄래? 헤헤” 령이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키스 이후로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에 내 심장이 퐁당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응! 같이 하자. 가입할 게.”

“좋아. 고마워.”

령이는 작은 가죽 가방에서 종이 뭉텅이와 만년필을 꺼냈다. 예의 입부신청서였다. 저걸 챙기고 다니다니 좀 대단하다. 여하튼 만년필을 쥐고 그녀가 가리킨 곳에 서명을 하려는데 잉크가 나오지 않았다.

“이거 잉크 다 떨어진 것 같아.”

“아 그래? 줘 봐.” 령이는 만년필을 건네받으며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잡히니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이건 말이야….” 령이는 만년필을 가만히 들어 올리더니 순식간에 날카로운 펜촉으로 내 엄지손가락을 찔렀다. 황급히 손을 빼려고 했지만 그녀가 놓아주지 않았다.

“뭐, 뭐 하는 거야?”

“미안.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피를 건 계약이랄까? 자, 됐어. 이제 서명해 줘.”

놀랍게도 만년필은 펜촉을 통해 내 피를 빨아들였다. 반투명했던 만년필이 이제 검붉은 색이 되었다. 나는 잠시 주춤하였지만 이내 서명하였다. 단순한 동아리 가입이 아니라 연애의 서약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령은 뛸 듯이 기뻐했다. 고작 동아리 같이 해주는 걸로 이렇게 좋아하다니. 함박웃음이 몹시 예뻤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수천 년의 한이 풀리기 직전인데. 후아,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계약을 마무리해야지. 마지막 순간에 물거품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령이는 만년필을 빨아서 내 피를 뺐다. 뱉지도 않고 삼켰다.

“다른 데 쳐다 봐.”

그렇게 말하고는 뒤를 돌아서서 옷을 풀어헤쳤다. 만년필을 쥔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자기 가슴에 내리꽂았다.

“아흣”

“뭐, 뭐하는 짓이야?”

“보지 말랬잖아.”

“으응, 미안.”

이미 다 봤기에 아쉬울 게 없었다, 가 아니고 도대체 지금 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생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자는 서약 같은 건가. 탈퇴하겠다고 하면 손모가지를 내놓으라고 할 기세였다.

령은 만년필로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였다. 겉보기에는 혈서가 아니라 붉은 잉크로 쓴 것처럼 보였다.

“이제 다 된 거야?”

령이는 대답대신 웃었다. 시원스러운 웃음이 시냇물을 가로지르더니 점점 커졌다. 웃음소리에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기쁨, 슬픔, 성취감, 공포, 그밖에 내가 겪은 적 없는 감정들이 뒤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마녀의 광소랄까. 몹시 낯설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야?” 그녀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며 물었다. 하령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활짝 웃었다.

“이제 끝이 보이니까. 영겁의 시간 동안 나를 가두었던 윤회의 감옥에서 탈출 할 수 있으니까. 이제 죽을 수 있으니까.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히 지워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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