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마이페이지
 
Q&A
[공지] 노블엔진 홈페이지가 …
[꿈꾸는 전기양과 철혈의 과…
《노블엔진 2017년 4월 2차 …
[리제로 10 + 리제로피디아] …
[Re :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
 
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 3급 매니저, 치유담당 초파랑
  • 2급 매니저, 여동생담당 우연하
  • 1급 매니저, 츤데레담당 델피나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라나 클리델은 죽지 않았다
글쓴이: 니룬
작성일: 12-07-31 23:58 조회: 3,076 추천: 0 비추천: 0


라나 클리델은 죽지 않았다.

정확히는 죽을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올바르다. 마을이 불타오를 때 그녀만이 마을 바깥에 있었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으며 그가 최후의 힘을 짜내 한 말이 ‘살아남아라’는 것이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그녀는 매일 밤 자신의 죽음이 어떤 형태일지 상상했다. 불길에 휩싸이면? 칼에 베이면? 독을 먹으면? 물에 빠져 힘이 다하면? 목을 졸리면? 피를 많이 흘리면? 굶고 굶어 기력이 다하면? 늙으면?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이면?

언제나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모든 상황에 처하는 걸 두려워했고 두려움은 수련이란 행동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모두 비웃었다. 여자가 검을 배우면 얼마나 잘 다루겠냐, 힘도 약하고 체구도 작은데 호신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 앞으로 예쁘장하게 클 것 같으니 나한테 시집오면 어떻냐…….

그러나 그 모든 말에 대꾸하지 않고 라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검을 휘두르고, 몸을 날래게 움직이고, 근육을 만들고.

그런 짓을 하는 게 그녀 혼자였다면 시골 마을의 꿈만 많은 흔한 얼치기 처녀로 끝났겠지만, 다행히 라나에게는 좋은 스승과 재능, 그리고 의지가 있었다.



라나의 부모는 없었기에 촌장이 그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초로의 나이지만 얼굴은 청년처럼 말끔했고, 가끔 허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걸 빼면 몸도 멀쩡했다. 그는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고 쾌활했으며 어떤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하며 한편으로는 두려워했고, 때문에 라나에게 향한 많은 음담패설과 추접스런 접근은 사정이 모르는 자가 본다면 꽤나 의아할 일이었다. 마을 우두머리의 딸이나 마찬가지인 아이한테 저러고도 괜찮은 걸까?

괜찮았다. 분명 촌장은 그녀와 함께 살았고 그녀에게 검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그 뿐, 그녀가 할 일을 해놓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과 만나 무엇을 하는지 먼지 한 톨 만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십대 초중반의 보통 여자아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변화했으리라. 대개는 심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아이가 되거나, 반발이 지나쳐 만사에 적대적으로 대하는 왈패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라나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촌장의 일을 돕고 공부를 한 뒤에 검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태양이 저물었다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 그녀의 행동은 어느 때고 변함없었고, 그래서 못된 장난을 치고 싶은 자들이 툭하면 라나에게 다가오던 것도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 있던 일이다.

“뭐야, 오늘도 그 수련인가 뭔가 하는 거야? 팔도 그렇게 가느다란데 그러데 칼 놓치기라도 하면 발등에 콱! 하고 찍혀버리는 거 아니야? 그런 위험한 장난감은 놔두고 나랑 놀러가는 건 어때? 응?”

요란한 꼴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천박하게 웃었다. 마을 반대편에 사는 아벨룩이다. 나이는 벌써 스물을 넘겼지만 밭일도 사냥도 하지 않고 도회지에서 양아치 짓이나 하는 남자다. 늘 도시에 있으니 마주칠 일은 별로 없지만 돌아오면 이런 식으로 라나에게 시비를 건다. 라나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벨룩은 바로 발끈했다.

“벙어리냐? 왜 대답이 없어. 어쭈? 눈매가 왜 그래? 꼴아봐? 야, 네가 그딴 걸 한다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여자 주제에. 그딴 거 들지 말고 남자한테 구멍이나 대줄 것이지 뭐하는 거야? 내 말 무시하냐? 엉?”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라나에게 손대지 않았다. 라나가 진검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나 역시 자신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여기서 칼을 휘두르면 마을에서 쫓겨날 거야. 어차피 네 편은 없어. 그걸 휘두르면 나야 좋지. 널 덮쳐서 먹어도 변명할 핑계가 생기니까. 아벨룩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손에 잡혀질 듯 느껴졌지만 라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딴에는 머리를 굴린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걸 지적당하면 더 화낼게 분명하다.

결국 아벨룩은 뭐라고 욕설을 우물거리며 돌아갔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까. 어기적거리며 걷는 등을 보면서 라나는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 바로 거두었다. 어차피 도시로 떠나면 자주 볼 상대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아벨룩만 그렇게 행동한 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자들 역시 라나에게 야릇한 시선을 보내거나 실수를 가장해 몸을 만지려고 했다.

마을에 다른 여자, 젊거나 어린 아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라나는 달랐으니까. 손대도 뒤탈이 없을 거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라나의 부모가 이 마을 출신이었다면 사람들은 그녀에게 훨씬 호의적이었겠지만 라나는 촌장이 어디선가 주워온 아이일 뿐이고, 촌장이 양녀로 거두어들인 게 아니라 그저 촌장과 함께 사는 어린 여자일 뿐이니까. 라나는 그들에게 처음부터 외부인이었던 것이다. 만약 라나가 붙임성이 좋았다면 그녀를 보는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고, 귀염성도 없는 아이다보니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을 터다.

그들은 어느샌가 라나를 대하면서 그녀의 말을 듣지 않거나 그녀가 지나가면 뒤에서 소리내어 웃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몇몇을 뺀 마을 사람들에게 라나는 ‘자기보다 약한 상대’일 뿐이었으니까. 그녀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녀가 누구와 어떤 관계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라나는 그들이 촌장에게 뭐라고 언질을 받아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 그 여자아이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마음대로 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라나는 생각을 떨쳐냈다. 어쨌든 자기가 본 게 아니니 상상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라나는 촌장에게 물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별 건 아니고, 단순한 사실을 말했지. 저 아이는 이곳의 아이가 아니다. 오래지 않아 여기서 떠날 것이다. 그것뿐이야.”

“그걸 왜 당신이 판단하는 거야?”

라나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어투는 차분했지만 그녀는 꽤 화난 상태였다. 큰 사건도 자극도 없이, 가능하면 조용하게, 오래 살아남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 마을은 그런 생활에 알맞은 장소였다. 그런데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런 말을 내뱉다니. 라나는 촌장을 노려보았다. 여태까지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 자신도 꽤 놀랐지만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여기 있어봐야 마을에든 너 본인에게든 득 될 게 하나도 없거든.”

“왜?”

대답하지 않고 촌장은 파이프를 한 번 빨아들인 뒤에 기분 좋게 연기를 뿜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대답이 아니었다.

“널 주워올 때 말이야, 네 옆에는 어떤 남자가 뻗어 있었지. 옆구리가 검게 물들어 있는 걸 보니까 다시 세상 빛 보기는 힘들어 보이더라. 워낙 외진 곳이라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보름은 있어야 지나갈 것 같았고, 그대로 뒀으면 넌 들개 밥이라도 되었겠지. 마침 난 다른 곳에서 피 냄새나는 일을 막 끝냈던 참이고, 그런 꼴을 더는 보기 싫어서 그냥 속 시원하게 죽어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럴 때 네 울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들린 거야. 거짓말 같다는 얼굴로 보지 마. 진짜니까. 기억 안날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어릴 땐 많이 울었어.

아무튼 네 얼굴을 보니까 갑자기 고향집이 떠올라서, 널 안고 여기까지 와서, 시간이 꽤나 흘렀다는 거지.”

“그건 궁금한 게 아니야.”

“끝까지 들어. 난 너한테 내가 아는 건 다 가르쳤지. 칼 다루는 것부터 세상 이야기에 이런저런 두서없는 지식까지. 넌 군말 없이 그걸 죄다 익혔지. 하지만 그게 문제란 말이야.”

그러면서 촌장은 씩 웃었다.

“알겠어? 너무 잘해서 문제란 말이지. 이제와서야 이야기하는 거지만, 네가 그걸 모두 익히지 못했다면, 조금만 머리가 둔하고 몸이 굼떴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대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어. 하지만 넌 뭐든 잘 흡수해왔어. 여기선 그런 것들이 필요도 없는데. 여기 계속 있다보면 넌 다른 사람들과 계속 부딪히겠지. 내가 별 말을 하지 않더라도 네가 ‘다른’ 존재라는 건 모두 점점 더 절실하게 느끼겠지.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다만 미인이기도 하고.”

“그럴 거면 왜…….”

“왜 그런 것들을 가르쳤냐고? 학생이 뛰어나면 자기가 가진 걸 전부 쏟아 부어서, 그 학생이 어디까지 성장하나 보고 싶거든. 뭐, 굳이 말하면 내 취미란 거지.”

그렇다면 왜 날 지켜주지 않았나. 라나는 그걸 묻고 싶었지만 그 질문은 왜인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그에게 묻지 못했고, 끝내 그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라나는 17살이 되었다.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의 끈적거림도 더해졌지만 별 일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그녀가 잽싸게 자리를 피하거나 우연을 가장해 상대를 응징하는 일이 잦았기에, 누구나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라나가 마귀라느니 저주가 붙어서 저렇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그쪽이 편하다.

라나가 보기에 마을 사람들은 정말 이상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눈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집 소는 이웃보다 조금 더 크다. 이쪽은 밭이 비옥해서 너네보다 수확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우리집 아들은 키도 크고 힘도 좋아서 일을 잘한다. 고작 그런 사소한 것들로 은근히 기싸움을 하며 내가 너보다 낫니 못하니 비교하고 있었다. 라나는 그들의 관계 안에 들어있지 않기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걸까 생각했다. 숨막힌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다른 곳은 어떨지하는 의문을 떠올린 것도, 그럴 계기가 생기면 좋겠다고 바라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날도 라나는 마을 근처의 들판을 걷고 있었다. 멀리서 짐승소리가 드문드문 흘러오는 걸 빼면 고요했고 달은 없어 몹시 어두웠다. 동행은 없었다. 애초에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아는 사람은 촌장 뿐이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마녀니 수상하니 수군거릴 게 뻔하지만 그런 건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았다. 라나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라나는 언제나 죽음이 자신의 가까이에 머무른다고 느끼고 있었다. 기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이유는 없다. 마을이 물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국경지대도 아니며 기후는 언제나 온화하다. 사람들은 음험하지만 나서길 꺼려하고 맹수도 나타나지 않는다. 사고사만 아니라면 죽을 일은 없고 라나 역시 그런 일은 몇 번이나 조심하지만, 그녀로서도 왜 그런 불안이 생기는지는 의아했다. 아무리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해도 며칠마다 한 번씩은 목덜미가 싸늘해졌고, 그러면 라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밤은 길고, 깨어 있어봐야 달리 할 것도 없으니 라나는 집을 나섰다. 그리고 밤새도록 들판을 떠돌다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의 새벽녘에나 돌아오곤 했다. 그때만은 어떤 걱정도 사라지고 다른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마을 바깥세상을 몰랐다는 건 아니다. 촌장은 젊은 시절 많은 곳을 떠돌았고, 거기서 있었던 일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나 라나에게 해주었다. 그는 바깥 세상이 매력적이라고, 여기보다 훨씬 즐거울 거라는 말만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은, 이야기의 행간 속에서 세상은 무척이나 위험한 곳이었다. 영민한 라나는 그것을 알아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촌장은 그런 상황에는 이렇게 하면 된다, 고 가르쳤고 라나도 빠르게 익혔지만 그것만 가지고 바깥에서 살아남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라나는 여전히 마을에 남아 있었고 촌장은 탄식했다. 평생을 조용히 살고 싶다. 그 나이에 흔히 보일만한 열정도 호기심도 없이 라나는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라나는 천천히 걸으며 마을 바깥에 작은 집을 하나 짓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건 싫지만 혼자 외딴 곳에 사는 것보단 마을 근처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할 테니까. 날이 밝으면 촌장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린 그녀는 하늘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을 쪽이었다. 라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고, 칼이 거기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화재가 일어난 걸까? 이런 때 돕지 않으면 사람들의 태도는 더 나빠지겠지. 그건 좋지 않아. 어서 가서 도와야지. 라나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이 습격당해서 저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피어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하고 달렸다.

마을에 가까이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나는 마을에 발을 디뎠다. 나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시커먼 그림자들이 달아나려는 마을 사람들을 베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믐밤에다 어두운 쪽에 있으니 그들이 발견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라나는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마을로 접근했다. 불빛에 비치는 그림자가 없는지, 위협적인 적이 없는지, 달아날 길은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정작 마을에는 불길만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익숙한 옷을 입은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으나 누군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목 위가 날아가 있거나 얼굴 한쪽이 뭉개졌으니 가족이라도 쉽게 알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라나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이럴 때 기습이라도 당하면 곤란하다. 아무리 그녀가 검을 익혔다고 해도 제대로 누군가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다. 라나 본인도 속으로는 당장 도망쳐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발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곧 라나는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왔냐.”

불타는 소리에 지워질 것처럼, 촌장은 라나에게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라나는 촌장의 몸이며 바닥이 검붉게 물들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전부 쓰러진 남자의 것이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촌장이 감싸 쥔 옆구리 사이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라나가 놀란 얼굴로 다가가니 촌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잘들어. 어서 짐 챙겨서 도망쳐. 남쪽으로. 알겠지? 남쪽이야. 도시에, 사람들 사이에 숨어. 넌 금방 익숙해질 거야.”

그걸로 끝이었다. 촌장은 힘이 다했는지 말을 멈추었다. 눈을 감지도 못한 채였다. 라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눈을 감겨주고 일어섰다. 그리고 촌장의 유언대로 했다. 짐을 챙겨서 남쪽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찾지도, 누군가를 살리려는 노력도 없이 망설이지 않고.

라나는 마을에 남아서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떤 흔적이라도 남았는지 단서를 찾을 수도 있었다. 촌장 옆에 쓰러져 있는 남자 역시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무슨 목적인지도, 부족하나마 단서는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라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봐야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너무나 적다. 좋아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의 복수에 몸을 던질 수는 없다. 스승이자 가족이 죽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삶을 줬고, 그는 내게 삶을 줬으니까.

다만 라나는 빠르게 걸으며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죽어있었는데 왜 촌장만 살아있었을까? 다른 자들은 허리가 끊어지고 머리가 박살나며 났는데 왜 그만은 그렇지 않았을까.

라나는 생각을 거두었다. 더 생각하다가는 누가 마을을 습격했는지 알게 된다. 어떤 사실을 알게 되면 감추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도망칠 테다. 그녀는 한 걸음마다 많은 것을 잊으려 애썼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도, 방금 전에 봤던 참상도, 모두 다. 추억은 살아남는데 그리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러나 라나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감정은 안도였다.

그랬다. 라나는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것만이 그녀에겐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라나는 밤 속으로 사라졌다. 규칙적인 발소리는 멀어지다 이내 들리지 않았다.



라나 클리델이 마을을 떠난 것도 2년이 지났다. 열아홉 살이 된 그녀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키와 가슴이 좀 더 커지고, 인상은 조금 부드러워졌으며 잘 웃는다. 무엇보다 라나의 옆에 누군가 있고, 라나는 그를 신뢰한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그 남자, 레스카는 옷을 입고 무기를 챙기면서 라나에게 말했다.

“그럼 나갔다 올게. 기트리 씨 만나고 올 테니 좀 늦을지도 몰라.”

“알겠어. 다녀와.”

레스카는 어깨를 으쓱하고 숙소를 나갔다. 라나는 손을 흔들어주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순례자의 우두머리인 기트리와는 호위 문제로 협의할 게 많아서 며칠 전부터 매일 만난다. 일정을 조절하는 게 영 여의치 않아 보였고, 레스카도 몇 번이나 함께 가자고 했지만 라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트리가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였다. 레스카는 곤란하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가 뜻대로 하게 두었고, 덕분에 이렇게 뒹굴 거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원래 성격인걸까.”

천장을 바라보며 라나는 중얼거렸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바라던 건 아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지난 2년을 천천히 회상했다.


마을을 떠나고 얼마간 라나는 밤에만 움직였다. 마을에서 가지고 나온 돈이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돈을 어떻게 벌지, 어떻게 생활할지 잘 알지 못하는 라나로서는 그 돈을 최대한 아끼는 것만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자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고, 대개는 모자 달린 망토에 의지해 쪽잠을 자고 다시 움직이는 걸 반복했다. 왜,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 않은 채 방황하던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라나는 적지 않은 사람과 스쳐 지났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라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접근했다. 하지만 라나는 그들을 물리쳤다.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대가를 지불한다. 뭔가가 돌아온다. 그녀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 이상은 두려웠다. 라나의 세계에서 목적 없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단지 라나 자신의 웃음 한 조각과 호의 가득한 몸짓을 원했는지 모르나 라나는 그마저도 그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결국은 사람과 접촉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라나는 대체로 인적이 없어도 안전할 법한 곳을 골라 다녔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사람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는 언제나 짐승이나 짐승 비슷한, 그러니까 불량배나 도둑 같은 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라나의 대응은 간단했다.

가능하면 피를 보지 않는다. 피를 본다면 확실하게 끝낸다. 그 뿐이었다. 라나 본인은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 동안 라나의 칼은 몇 번이나 피에 물들고 날이 무디어졌고, 다시 갈아낸 뒤에 같은 과정을 반복하다 결국은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 처음부터 좋은 칼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한 자루만 그랬던 건 아니다. 몇 자루나 되는 칼을 휘두르고 그것들은 모두 버려졌다. 사람과 마주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던 라나가 결국 포기하고, 순례단과 함께 다니기 시작한 건 그러한 것도 큰 이유였다.

순례단은 세계 각지의 성지를 향해 떠돌며 길 위에서 죽기를 바란다. 그들은 빈곤하나 선량하고 남루하나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안다. 그런 자들과 함께라면 ‘나’ 혼자서 위협에 대항할 필요가 없으니 더 좋다. 순례자는 초식동물의 무리와 비슷해 어떤 일이 닥치면 약한 일부가 남고 다른 자들이 나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여정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자들이 합류하니 무리가 완전히 흩어질 걱정도 없었다. 결정은 빨랐고, 라나는 작은 순례자의 무리에 끼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라나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없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가끔 꿈을 꾸었다.

꿈에서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같다. 자신이 있던 마을이 불타오르고, 촌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던 상태 그대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싫다고 소리치려고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들에게 붙잡히면서 꿈은 끝난다. 꿈에서 깬 라나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고, 자신이 떠나온 고향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잊기엔 너무나 강렬한 기억이다. 라나는 그 꿈을 꿀 때마다 울었다. 왜 울음이 나오는지도 알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을 깨우지 않기 위해 숨죽여 울었다.


그날도 라나는 꿈을 꿨고, 그 때문에 상태가 영 엉망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시달려야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비척비척 발을 옮긴다. 사람들은 별 말이 없었고 한 마리의 뱀처럼 좁은 산길을 나란히 지나고 있었다.

“멈춰!”

고함 소리는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순례자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길의 앞과 뒤, 그리고 좌우 산 위에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적 떼였다. 이 근방의 치안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멀리서 흘러들어온 난민인지 손에 든 건 낫이나 곡괭이 같은 농기구였고 입은 옷은 몹시 꾀죄죄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번득이는 살기는 진짜였다. 그런 자들은 때때로 놀랍도록 흉폭해진다.

“여긴 우리 영역이라 통행세를 걷는다! 자기 발밑에 돈이나 돈 될 물건은 다 내려놔! 그러면 무사히 보내주지! 몸을 뒤졌는데 나오면 그 자리에서 죽인다!”

순례자들은 서로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누구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천천히 몸에 지닌 것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곤란한데…….”

라나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이 내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목숨이 돈보다 더 중요한지 몰라도 그녀는 돈이 없으면 두려워서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위치도 문제였다. 라나는 지금 행렬의 맨 뒤쪽에 있었고, 그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남자는 시뻘게진 눈을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베어버리고 그대로 도망칠까? 그러면 그 뒤의 일도 고민이었다. 여길 돌아서 간다는 방법도 있지만, 여자 혼자 돌아다니다간 난감한 꼴을 이것저것 많이 겪는다는 건 질리만큼 겪었다. 그런 건 사양이다.

그때였다.

“이봐요, 겁쟁이 아저씨들. 통행료를 받으려면 이쪽에도 그만한 걸 내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행렬의 가장 앞이었다. 라나는 그곳을 보았다. 후드를 벗은 젊은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눈을 반짝이면서, 입에는 비웃음을 매달고 있다. 그는 뒤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더니 정확히 라나를 바라보고 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바보들은 죽어야 비킬 것 같은데, 언니가 그쪽을 맡아주면 내가 이쪽을 밀어버릴 수 있어. 여기서 이렇게 있는 거 지겨워보이니까 얼른 해치우자. 어떻게 할래?”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에는 오만함과 신뢰가 뒤섞여 있었다. 라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뒤를 향해 돌아서며 칼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기묘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그녀 본인은 그것이 전투의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라나는 레스카 듀라일과 그렇게 만났다.


그 뒤에 있었던 일은 굳이 설명할 것이 없다. 둘은 손쉽게 산적들을 해치웠고, 서로를 보며 농담을(라나는 꽤나 서투른) 주고받았고, 그 때부터 가까워졌으니까. 그렇다, 마치 처음부터 그것이 필연인 것처럼.

라나에게 레스카는 처음으로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레스카의 행동 하나하나가 흥미로웠다. 그를 보면서 라나는 빠르게 변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익히고 농담을 하는 방법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그걸 표현하는 방법까지 말이다.

“그래, 사람은 변하지.”

듣는 사람이 없어도 중얼거리면서 라나는 씩 웃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레스카가 멍하니 서 있었다.

하긴 올 때가 되었지. 뭘 해주면 좋을까. 라나는 그 생각을 품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와. 오늘도 고생 많았어.”

“응.”

그런데 레스카의 얼굴이 조금 이상했다. 라나는 의아했다. 여태까지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던 것이다. 라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야 레스카는 입을 열었다.

“라나, 미안해.”

뭐가 미안한 거냐고 묻기도 전에, 라나의 목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왜?


라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물음은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라나의 의식은 그대로 멀어졌다.

그렇다. 사람은 분명 변한다. 문제는 어느 방향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나는 그걸 알지 못했고, 적지않은 시간을 들이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라나 클리델은 죽지 않았다. 아직 그녀의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제휴문의 이용약관 개인정보보호정책
주소 : 인천광역시 부평구 평천로 132 (청천동) TEL : 032-505-2973 FAX : 032-505-2982 email : novelengine@naver.com
 
Copyright 2011 NOVEL ENGIN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