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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설문조사 - <포춘 하모니> 인기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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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행아인가 행운아인가, 하필연
  • 모두의 대승운 파티, 대승운?!

 


대리인을 때리면 안 돼요
글쓴이: 파출부
작성일: 12-07-31 23:58 조회: 3,291 추천: 0 비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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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는 일은 묘한 매력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담을 넘었다. 마당을 둘러싼 작은 돌담을 넘고, 벽돌담도 넘고, 시멘트담도 넘었다. 문화재 훼손이었다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경복궁 돌담도 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미션은 교도소 장벽이다. 자유를 두고 펼쳐지는 목숨을 건 담 넘기. 응?

아무튼 이런 나에게 고등학교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사장이 땅 값을 빼돌렸는지 가파른 산비탈에 자리 잡은 고등학교는 삼면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머지 한쪽 면에는 여자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환경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 또는 격리시키기 위해서 어느 학교보다 높다란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특히, 여고와 맞닿은 경계에는 시멘트 높이만 3미터에 달하고 그 위에 철책까지 박혀있는 담장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개교 이래 그 담을 넘은 최초의 학생은 아니었지만 가장 많이 넘은 학생이었다.

라면이라도 당기는 날이면 종이 치자마자 잽싸게 후미진 테니스장으로 가서 여고 담벼락을 탔다. 교사의 눈을 피해 담을 타는 건 무엇보다 스릴 있는 일이었다. 꼭대기에 오르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 대신에 뒷산의 수풀이, 쓰레기 냄새가 묘하게 풍겨오는 테니스장 대신에 여자고등학교가 나타났다. 바로 뛰어내리지 않고 철책에 걸터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이렇게 앉아서 양쪽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쁠 것 없는 학교생활이었다. 비행 청소년이었던 형을 따라 담배를 배우긴 했지만 그 외엔 다 평범했다. 많지 않지만 착하고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성적도 그럭저럭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평범한 일상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날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1

그날도 여느 날처럼 담을 넘기 위해 라면을 먹으러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담벼락 근처로 유유히 걸어갔다. 담장에는 못 보던 물체가 걸려 있었다. 정신 사납게 바둥바둥 거리는 그것은 우리학교 여학생이었다. 용케 담장 끄트머리까지 손을 올렸지만 팔 힘이 부족해 넘어가지 못하는 듯했다.

이럴 땐, ‘정의의 용사로 등장해서 그녀를 구출! 감동받은 그녀와 뜨거운 첫 키스를!’이라는 시나리오는 B급 감독의 영화 줄거리로도 쓰이지 않을 소재여서 팔짱을 끼고 그녀가 빨리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좋아하는 여자 아이돌도 없고,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는 더더욱 관심이 없으며, 친구 놈들과 어울리며 PC방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던 나였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와 우습게 엉키느니 모르는 척하는 편이 편했다. 사실, 도와줄 것도 없었다. 여자애는 꽤 키가 큰 편이었으니 손만 놓으면 별 무리 없이 안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녀를 뒤를 돌아보더니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외쳤다. 어이가 없었지만 모른 척하기도 뭐해서 일단 가까이 다가갔다.

“뭐해?”

‘못 올라가겠으면 쓸데없이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내가 라면 먹으러 지나갈 수 있게 손 놓고 내려와.’라는 말의 준말이었다.

“담을 넘으려다가 망했어.”

그녀는, 그렇게 명석한 아이는 아니었다. 간단한 약어도 이해 못 했으니 말이다.

“빨리 구해줘, 더 이상 못 버티겠어.”

울먹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길고 탄력 있는 다리를 바둥거렸다. 길 가다가 부딪치면 부러질 것 같은 젓가락 다리가 아니라 댄스 가수들에게나 볼 수 있는 다리였다. 그녀의 안전은 조금도 의심되지 않았다.

“그냥 내려오면 되잖아?”

“히잉 너무 높단 말야. 빨리 도와줘. 벌써 삼십 분 째 이러고 있어서 지금 진짜 죽을 것 같아. 밑에서 잡아줘.”

콧소리가 섞인 가냘픈 목소리였다. 성우해도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삼십 분 동안 매달렸다니? 그럴 힘이면 뛰어넘고도 남았겠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근력의 힘과 물리법칙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도 없으니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받칠 준비를 하였다. 짧게 줄인 치마 사이로 팬티가 보였다. 레이스가 달린 검분홍색 삼각 팬티였다.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이제 손 놔도 돼.”

“그러지 말고 잡아서 내려줘. 키 크잖아.”

“그게 아니라 ….”

키가 작아서 잡을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잡을 곳이 없었다.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 레이스 팬티를 입은 엉덩이? 에라, 모르겠다. 눈을 딱 감고, 아무데나 잡아서 그녀를 내렸다. 다행히 미필적고의에 의한 성추행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게 안겨 숨을 고르더니 방울방울 맺힌 눈물을 훔쳤다. 어라? 정말 무서웠나?

“정말 고마워.”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당장 아이돌 가수로 데뷔해도 될 만큼 예쁜 얼굴이었다. 맑은 눈도 예뻤지만, 오뚝 솟은 코가 특히 예뻤다. 키도 백육십 후반은 되어 보였고, 딱딱한 교복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육감적인 몸매를 감출 수 없었다. 진짜 이 나이에 저런 가슴을 가지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아니, 패드라도 집어넣은 게 틀림없었다.

파란 명찰을 보건데 나와 같은 2학년이었지만 처음 보는 아이였다. 여자애한테 관심을 주지 않더라도 이렇게 예쁜 여자애는 얼짱이니 뭐니하면서 소문을 듣길 마련일 텐데. 어쨌든 나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다.

“뭐,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 그럼 난 이만.”

그녀를 떼어내고 담장 위로 가뿐히 올라갔 ……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내 바지를 잡았다. 바지가 벗겨지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도로 내려왔다. 물론 내색하지 않고 쿨하게 행동했다. 아마도.

“그냥 가는 거야?” 여전히 바지를 놓치 않은 채 말했다.

“왜?”

“생명의 은인이니까 이름이라도 알려줘야지.”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 생명의 은인이라니. B급 영화라도 찍자는 걸까?

“내가 무슨 네 생명을 구해. 그리고 이름은 명찰 보면 되잖아.”

“항지역?”

“……한시혁.”

명찰이 좀 필기체로 박혀있긴 했지만 이건 분명 미필적고의였다. 미필적고의에 의한 명예훼손! 이로써 나의 미필적고의에 의한 성추행은 상쇄되었다.

“반가워. 난 신지아라고 해. 엊그제 전학 왔어.”

학기가 끝나가는 7월 달에 전학을 왔다니 ……. 7월의 전학생이 내민 손을 자신 있게 내민 손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어색하게나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기, 나 좀 볼 일 있어서 이제 담 넘어갈 거거든? 나 이제 가도 되지? 안녕.”

급히 돌아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몸이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다.

“잠깐. 어디 가는 거야?”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윽, 낯선 여자에게 내 순결을 빼앗겼다. 이래서 악수도 피했던 건데. 그녀의 손은 의외로 차가웠다. 손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대답했다.

“라, 라면 먹으러. 근처 슈퍼마켓에 갈 거야. 왜?”

“아 진짜? 야호, 잘 됐다. 나도 컵라면 먹고 싶어서 담 넘어가려고 했어. 가자!”

그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먼저 담에 올라가 그녀를 끌어올려 주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여고 건물 창밖으로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자아이 하나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합장하고 여고로 담을 넘어갔다.

2

“자.” 손을 내밀어 지아를 끌어올렸다. 올라온 그녀는 무섭다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잘 받아줄 테니 걱정마라며 먼저 내려가서 그녀를 받을 준비를 하였다. 그녀는 폴짝 뛰어 내려 내 품에 안겼다. 빵빵한 가슴이 나를 압박했다. 수입산은 자연산이라 그런지 확실히 다르구나.

같이 컵라면을 먹으면서 그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입수했다. 그녀는 쿼터였다. 혼혈아 중에서 가장 예쁘다는 백인 쿼터 말이다. 할머니가 프랑스인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피부가 유난히 하얗다든가 가슴이 크다든가 하는 사실 빼고는 프랑스어 한 마디 할 줄 몰랐다.

그녀는 국내 최고의 엘리트들을 양성한다는 모 특목고에서 전학 왔다. 왜 하필 별 볼 일 없는 우리 학교로 왔냐고 물으니,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았다고 했다. 강원도가 아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었고, 야간자율학습도 없었고, 장학금도 받기로 했고, 방과 후 특별활동도 적극 지원 해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뭐, 교장 입장에선 내년에 아이비리그 합격생을 배출하는 게 목표일 테니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그녀만 특별대우를 해준다는 게 조금 샘이 났다.

“그래서 어떤 CA활동을 할 건데?”

그녀를 천천히 품에서 내려놓으며 물었다.

“암벽 타기부!

“등산부 말하는 거면 작년에 없어졌는데, 워낙 인기가 없어서.”

“아니, 암벽 타기부라니까. 등산부하고 완전 달라.”

“으응, 미안하지만 그것도 없어.”

암벽 타기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라니. 농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학 오자마자 내가 만들었어.”

‘대학교도 아니고 그런 게 될 리가 없잖아’라고 말하려다가 교장이 특별 지원을 해준다고 하였다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우리 학교엔 암벽이 없는 걸?”

“왜 없어. 저기!”

그녀가 담장을 가리켰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지도 교사랑 부원은? 우리 학교는 3월 달에 CA 반을 나눠서 1년 동안 그대로 가는데.”

“새로 모으면 되지.”

점심 시간동안 같이 어울리며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지나치게 낙천적이었다. 이런 그녀에게 현실을 하나하나 적시해 좌절하게 만드는 일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응, 그래. 잘 해봐. 그럼 난 이만 교실로 들어갈게.”

“잠깐 잠깐! 수업 끝나고 다시 여기로 와줘~요.”

“왜?”

그녀는 대답 없이 미소만 띠었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그 녀의 미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난생 처음이었다.

3

“혁, 싸월 가자.”

종례가 끝나자 친한 친구인 민철이가 꼬셨다. 평소라면 오케이 했겠지만,

“오늘은 됐어. 성수랑 둘이 가.”

“뭐야, 지난번에 발리더니 의기소침해져서 빼기는. 됐어. 가자.”

“야, 나이프로 권총을 어떻게 이기냐? 말도 안 되는 세팅으로 하고서는 뭘 발라. 역대전적 따져볼래?”

“기억이 안 납니당-. 진짜 안 갈 거야?”

“어. 학교에 남을 일이 있어.”

“설마? 설마-? 서얼마-?”

처음으로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를 폈을 때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신지아랑 같이 있던 걸 본 걸까? 어떻게 하지? 뭐라고 하지? 아냐, 당당하게 나가자. 전학 온 여자아이한테 학교 소개를 좀 했을 뿐이잖아.

“그냥 별 거 아니고 …….”

“설마 네가 야자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제 우리 싸월 원정대에서 빠지는 거냐?”

“나 원래 공부하거든? 이번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수능 공부하기로 했어.”

“으음 …. 그래. 공부한다는 애 억지로 끌고 갈 순 없지. 오늘 성수도 일 있다고 하니, 지희나 불러서 놀아야겠다.”

민철이는 진행형에 놓인 쌍방향 연애를 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연애보다는 게임을 더 좋아하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오늘따라 왠지 부러워 보이는 민철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천천히 테니스장으로 갔다.

지아는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부드럽게 허리를 감았다. 두발제한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 나라에서 이렇게까지 긴 머리를 지닌 여학생은 흔치 않을 듯했다. 어쩌면 그녀가 유일할 지도 몰랐다.

“기다렸어?”

“아니.”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그리고는 별 말이 없었다. 나는 테니스장 구석으로 살짝 이동하여 담배를 꺼냈다. 점심시간에 지아랑 얽히느라 담배를 못 피웠다. 학교 안이고 지아가 옆에 있지만 한 대는 피워야 했다. 난 그렇게 다른 여자가 옆에 있다고 니코틴양을 소홀히 대하는 나쁜 남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 옆에서 담배를 안 피우는 척을 해서 다른 애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

당당히 한 모금 빨았는데 지아가 다가왔다.

“담배 피우지마.”

“…… 왜?”

작게 되물었다.

“너랑 키스할까 생각 중이야.”

“어? 어….”

내가 지금 빨아들인 건 니코틴이 아니라 코카인이었던 걸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였다. 아니, 실제로 이런 대사가 나오는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남자 주인공이 어떻게 대답했더라?

“오케이, 굿투노, 잇츠 굿투노.”

그녀의 표정이 영화 속 여주인공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아 …. 뭔가 조금 실수한 것 같다. 발음이 나쁘다든가 아니면 내가 로맨틱하고 섹시한 마크 웨버가 아니었다든가. 아무래도 후자 쪽이겠지?

난 후다닥 담뱃불을 끄고, 지아에게 왜 여기로 오라고 한 거냐고 바보 같이 물어봤다.

“부실 받았거든. 암벽 타기부. 구경시켜주고 싶었어.”

“으응. 그래. 어디야?”

관심이 없었지만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따라갔다.

부실은 5층 구석에 있었다. 전에 여기에 뭐가 있었더라? 기억이 날듯 말듯 했다. 미닫이문이 아니라 방음이 잘 되는 철문이었다. 문은 특이하게 손잡이가 거꾸로 달려 있었다.

“이거 왜 이래? 안과 밖이 뒤집혀 있네?”

“특별히 부탁했어. 우리 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까 열쇠가 없어도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어.”

“으응. 그냥 일반 교실처럼 미닫이문으로 해도 되잖아?”

“글쎄, 언제 들킬지 모르는 짜릿한 플레이도 좋지만, 처음에는 좀 은밀하게 하고 싶달까?”

헉, 이게 무슨 말이지? 그녀는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갔고 부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둘 뿐이었다.

“어때, 괜찮지? 구석에 있고 조용한 곳으로 달라고 하니까 여길 줬어. 이거 봐. 방음벽이야.”

“어? 진짜 방음벽이네. 생각났다. 여기 밴드부 부실이잖아?”

밴드부는 우리 학교에서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CA부였다. 그런데 부실 안에는 스틱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밴드부는 어디로 간 거야?”

“글쎄, 알 바 아니잖아.”

지아가 웃으며 답했다.

“이제 부실도 생겼으니까 오늘부터 부활동을 시작하고 싶어.”

“지도 교사도 정해진 거야?”

혹시 작년에 없어진 등산부 지도교사가 아닐까 싶었다.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럼 부원은?”

“나.”

그녀가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내 가슴을 콕 찔렀다.

“그리고 너.”

“나?”

“응. 한시혁.”

그녀가 또박또박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내 이름이 낯설었다.

“나는 이미 CA부가 있는데.”

전교생이 그랬듯이 3월 달에 가입했다.

“아 정말? 어딘데?”

“수학반.”

“우움, 그게 CA야? 방과 후 과외활동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걸. 주로 뭘 하는데?”

“아무 것도 안 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뭐야, 그럼 왜 가입한 거야?”

“아무 것도 안 하니까.”

당연했다. 밴드부 같이 활성화된 몇몇 CA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하는 게 없었다. 그 중에서도 수학반이 가장 아무 것도 안 했기 때문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래. 그럼 상관없네. 나랑 같이 암벽 타기부 하자.”

그녀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관심도 없는 암벽 타기부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학기 중에 CA부를 옮길 수 있는 지가 의문이었다.

“나는 암벽 타기에 관심이 없는데 …….”

“히잉. 나랑 같이 부 활동 하기 싫은 거야?”

그녀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고개를 살짝 돌려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암벽 타기는 여기서 할 수도 없을 것 같고 …….”

“관심 있을 줄 알았는데!”

암벽 타기 관심이 있는 고등학생이 몇이나 있을까. 설마 내가 담 넘어가는 걸 좋아하니까 가입하라고 한 걸까.

“후웁. 좋아. 그럼 암벽 타기부가 아니어도 괜찮아. 나랑 같이 부 활동을 해줘.”

내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지능지수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이미 암벽 타기부를 만든다고 신청한 거 아니야?”

그래서 누구나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하아, 시혁아. 잘 들어. 나는 너와 방과 후 활동을 하고 싶어. 어떤 활동이 아니라, 나는, 너와, 방과 후에 이렇게 단 둘이 부실에 남아서 그걸 하고 싶어. 네가 암벽 타기를 좋아할 것 같아서 암벽 타기부라고 했던 것뿐이야. 부 이름은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는 우리 둘만이 할 수 있는 걸 할 거니까. 이런 거 말야.”

그녀가 내 목덜미를 감싸 안더니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쪽 키스했다. 여기까지 오면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는 멍청이도 이해할 수 있다. 확실히.

가장 최근에 본 영화를 지침서로 삼았다. 그녀를 품에 안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붙였다. 어디선가 야생화 냄새가 났다.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내 입술을 촉촉이 적셨고 나도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그녀는 깜찍하게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당기더니 갑자기 혀를 집어넣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꽉 껴안았다. 내 가슴이 그녀의 커다란 가슴을 짓눌렀다. 뜨거운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나인지 그녀인지 알 수 없었다. 손을 쓸어 올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내 혀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허리를 비틀어 빠져나갔다.

그녀의 눈동자에 갇혀서 숨을 골랐다. 미칠 듯이 뛰고 있는 가슴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옷이 조금 흐트러진 것을 제외하면 평온해 보였다.

“확실히 하고 싶어.”

확실히랑 끝까지는 동의어겠지? 그녀는 가방 속에서 서류 뭉텅이를 꺼내서 들이밀었다. 족히 수백 장은 되어 보였다.

“입부 신청서랄까? 서명 해줘!”

그녀가 마지막 장까지 넘겨서 서명란을 가리켰지만 난 그녀의 젖은 입술만 바라봤다. 이어가고 싶었다. 끊어진 채 식어가는 건 싫었다.

“다음에 할게.”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쪼르르 빠져나갔다.

“지금 해줘. 여기에 서명해줘야만 우리가 함께 갈 수 있어. 끝까지.”

역시 확실히랑 끝까지는 동의어였다.

“좋아.” 나는 다시 그녀의 어깨 위로 팔을 올렸다. 그녀가 크게 눈웃음 지으며 빠져나갔다. 몸에 비누라도 칠했는지 정말 잘 빠졌다.

“나와 같이 가고 싶지 않은 거야? 난 너를 정말 …….”

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 단어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서류 뭉텅이만을 내밀 뿐이었다. 으아, 타 죽게 생겼다. 그녀가 다시 한 번 서명란을 가리켰다.

「상기된 계약에 전부 동의하였으며 계약의 효력을 발생키 위해 kAmijana와 anuyojya의 서명을 날인함. kAmijana (인) anuyojya (인)」

그리고는 붉은 만년필을 내밀었다.

“다 읽어봤어? 아누요쟈라고 쓰여 있는 곳에 서명을 하면 돼.”

anuyojya를 말하는가 보지? 펜을 받아서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잉크가 나오지 않았다.

“계약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봐야 해.” 그녀가 두툼한 서류를 싹 훑었다.

“이걸 다 읽으라고? 이게 뭔 데?”

“나랑 방음 처리가 잘 되어있는 은밀한 부실 안에서 그걸 하기 위해서 꼭 서명해야 되는 거.”

나 …, 이제 동정 떼는 거구나. 바로 어제까지 짱파일과 오른손만 있다면 여자 친구 같은 건 없어도 된다고 주장했던 내가 미련하게 여겨졌다. 서류에는 anuyojya니 대리인이니 동기화니 하는 알 수 없는 단어들이 가득했다.

“잉크가 안 나와. 가방에서 펜 좀 꺼낼게.”

“됐어. 그 만년필 잉크 잘 나와. 이거 총 이백오십 장인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 읽고 내일 다시 만나도 돼.”

“잉크가 안 나오는데?”

다시 한 번 꾹꾹 눌러 서명해보았지만 조금도 써지지 않았다.

“난 분명히 세 번 말했어.”라며 그녀가 만년필을 뺏어서 내 손바닥을 쿡 찔러 피를 뽑았다.

“뭐, 뭐하는 거야?”

날카로운 펜촉으로 얼마나 세게 찍었는지 손바닥이 다 얼얼했다. 펜촉은 스펀지처럼 내 피를 흡수해 붉게 변했다. 지아는 나에게 다시 만년필을 돌려주었다.

“혈서야?”라고 물으며 (인)에 서명을 하였다. 하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남자와 하기 전에 혈서 정도는 쓸 수 있겠다 싶었다.

“다 됐지?”

“거의.” 그녀가 너무나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상의 블라우스 단추를 빠르게 풀어나갔다. 티셔츠가 드러났다. 얇고 하얀색이어서 브래지어가 꽤 비추었다. 어, 어떻게 해야 되지? 나도 지금 벗어야 되나. 그녀는 티셔츠를 반쯤 벗다가 날 쳐다보고는 몸을 뒤로 돌렸다.

“불, 불이라도 끌까?”

간신히 한 마디 내뱉었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눈부신 여름 햇살을 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햇살이 없다면 가느다란 브래지어만이 남은 그녀의 매력적인 뒷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지구가 타원 궤도를 돈다는 사실, 지축이 기울어져 있다는 시살, 그리고 지금이 7월이라는 사실에 만족했다. 우주는 나의 성욕을 지지하고 있었다.

“만년필 좀, 아니다.”

그녀가 양팔로 가슴을 가린 채 뒤돌아섰다. 그러나 가슴이 너무 커서 절반도 가리지 못하였다. 낮에 본 팬티와 종류의 검분홍색 브래지어였다. 우윳빛 가슴과 잘 어울렸다. 허리를 숙여서 내 발 밑에 떨어져있던 만년필을 주워들었다. 비디오에 담았다면 평생이 외롭지 않을 장면이었다. 아니, 지금 고작 비디오 이야기나 할 때인가? 팔 한 번만 뻗으면 그녀의 가슴을 만질 수 있었고 손 한 번만 움직이면 진짜 그녀와 마주칠 수 있었다.

“보지 마.”라고 말하며 그녀가 내 고개를 한 쪽으로 돌렸다. 물론 아직 신축성이 잃지 않은 나의 목 근육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지아는 뒤돌아서 브래지어를 내리더니 오른손으로 만년필을 쥐고 뭔가를 했다. 신음소리를 살짝 내는 게 자기 몸을 찌른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그녀는 대답 없이 서류에 서명을 하였다. 어찌나 깊게 찔렀던지 펜촉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다시 입은 브래지어도 붉게 젖어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서류를 높이 쳐들고 웃었다. 천천히 터져 나오는 웃음은 광소로 뒤바뀌어 부실을 뒤흔들었다. 다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꺼내 “섹스 직전에 미친 듯이 웃는 여자”로 검색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좀 진정해 봐.”

맨살이 드러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든든한 남자 친구로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귀는 거 맞겠지? 효과가 있었는지 웃음소리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마침내 미소마저 소멸했다. 응?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치워.”

“뭐?”

“어딜 아누요쟈 주제에 감히 카미야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가 본 영화는 B급 판타지 영화임에 틀림없었다. 정신 나간 여자에게 지금까지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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