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시드노벨 토론게시판에도 작성되었습니다) 

  우선 자극적인 제목에 끌려 클릭하신 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이 글은 속칭 어그로가 아니며, 그저 진지하게 논의를 나눌 목적으로 적혔습니다. 그럼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한국적 라이트노벨’. 아마 대한민국 서브컬처 사회에서 이보다도 끝이 안 보이는 논제가 있었을까요. 사실 이 논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만큼 명료해 보이고 설득력 있는 조커들도 없을 겁니다. “걍 (라이트노벨에) 한국적 전통 요소를 도입하면 그게 한국적인 것이다!(한국적=전통적)” 내지는 “한국 장르문학 시장 특유의 색채를 가미하면 된다!(한국적=양판소적)” 내지는 “한국 사회/문화를 잘 작품 속에 반영하면 그게 한국적이다!(한국적=사회문화적) 내지는 “한국적 창작자에 의해 써지면 그게 자연스레 한국적이 된다!(한국적=작가적)” 아니면 또 뭐가 있을까요. 아, 가장 강력해 보이는 조커가 한 장 남아 있었군요. “라이트노벨부터 정의를 못 내리는데 무슨 한국적 운운이냐? (한국적=무용(無用)론)”

  그러나 저는 이 모든 대답을 정답으로서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대답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한국적’이라는 속성에 대한 해명에 앞서 라이트노벨 자체에 대한 뜻풀이가 요구되는 듯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국적 영화’나 ‘한국적 (순)문학’이라고 하면 그것을 하나의 경험적 느낌, 절차적 지식으로서 이미지화하기 쉽지만 반면에 ‘한국적 라이트노벨’이라고 하면 두루뭉술한 감각에 혼란부터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일단 라이트노벨이라는 범주의 독특한 특수성을 먼저 짚어보겠습니다.

  라이트노벨이라는 범주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데 팩트 기술(description)로서의 역사는 실상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연원에 대한 추적은 대단히 유의미합니다. 무슨 소리냐면, 단순히 라이트노벨의 흔적만을 따라갈 게 아니라 라이트노벨이라는 하나의 거대개념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요소에 대한 가설적인 통찰을 시도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래서 라이트노벨의 연원을 일본 서브컬처의 고전시대와 일치시킵니다. 그것은 JRPG를 위시한 일본 콘솔 게임과 6~70년대 일본 만화가 지배하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 일본 서브컬처의 풍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섬’이라는 키워드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이를 심화-구체화하자면 ‘모험’과 ‘누드’입니다. 풀어 쓰자면 이런 말입니다. 일본 서브컬처의 ‘섬=일본적’인 전통의 고립적인 고유성이 바로 모험의 스토리와 누드의 캐릭터라는 것입니다. 사실 좀 더 지면을 할애해서 이 부분에 대한 논증을 심도 있게 하고 싶지만 우리의 목적은 일본 서브컬처의 본질/역사에 대한 천착이 아니라 그것으로써 연유된 ‘라이트노벨’이라는 정체성의 확인이므로 우선은 ‘모험의 스토리와 누드의 캐릭터’를 제 사견의 전제로 선취하겠습니다(라이트노벨의 연원이 일본 서브컬처 고전시대와 일치하는 이유에 대해선 라이트노벨의 현재가 증명하듯 그것은 오덕 컬처 데이터베이스의 총체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라는 답변으로 일단 대신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라이트노벨의 범주의 특수성에 대한) 저의 연역적 결론은 이렇습니다. 라이트노벨이라는 하나의 테두리는 희미한 울타리,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경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때로 환상이듯 라이트노벨이라는 ‘세계’ 역시도 하나의 현실적 환상일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근대적인(언어라는 이성=확실성의 도구로 단순명쾌하게 포착할 수 있는) 보편성(<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와 <키노의 여행>의 예외 없는 공통성)은 없지만 대신 현대적인(대개 어째서인지 그 둘이 어느 정도 닮은 것 같다고 느껴지는) 동질성은 존재한다. 그 동질성을 이제는 가족 유사성이라고 부르자. 즉, 한 가족의 구성원은 확실하게 같은 점은 없지만 적어도 총체적으로 군데군데서 서로를 닮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 유사성의 토대를 이루는 ‘부모’가 앞서 말한 ‘모험의 스토리와 누드의 캐릭터’인 것이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어느 정도’ 유전된다. 이것은 소수의 수치적 차이가 두 생물의 눈에 보이는 차이를 결정하는 DNA와도 유사한 맥락에서 역전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전 문제의식으로 돌아 가보겠습니다.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이미지상 모호성을 언급했었죠. 그것은 ‘한국적’이라는 수식어에서 야기되는 혼란 이전에 라이트노벨에 대한 경험적 지각이 불충분하게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불충분하게 이뤄진다는 걸까요? 제가 내놓을 답을 이미 예측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라이트노벨이라는 카테고리를 구성하는 경험=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는 즉 ‘모험의 스토리와 누드의 캐릭터’라는 라이트노벨의 가족 유사성을 우리가 체화할 경험 기회가 문화적 분리로 인해 실상 주어지지 않아왔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겠죠.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더욱이 60~70년대를 군사 독재 시절이라는 단절의 시대 속에서 지내온(그렇게 역사적으로 발전한) ‘한국인’이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의문, 혹은 반론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라이트노벨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 아니냐? 근데 그건 지금 즉시 생생한 증거 자료로 부정될 수 있는 취약한 주장 아니냐?”

  라이트노벨에 대한 ‘규정’은 비단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섬’의 주민인 그들일지라도 단언컨대 ‘불가능’합니다. 조금 철학 얘기를 하자면, ‘규정’은 언어의 산물이고 언어는 앞서 말했듯 근대성=이성의 나팔수인데, 라이트노벨은 이미 말했듯 근대와는 먼 탈근대 즉 현대의 첨단으로, 언어로써 단순명쾌하게 정의되기를 거부합니다(그리 따지면 다른 문학 장르는 안 그렇겠습니까만은, 아무래도 ‘근대’의 문학 카테고리들과 비교했을 때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했듯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인 현대의 살아있는 현재 그 자체인 라이트노벨은 언어라는 규범성에서 보다 많이 이탈해 있는 것이죠). 굳이 보충하자면 모든 문학 장르가 보편성이 아닌 동질성 즉 가족 유사성을 매개로 카테고리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라이트노벨 만큼 파편적인(가족 스펙트럼 상에서 비교적 밀집되어 있지 않은 편인) 문학 장르는 없다고나 할까요.

  결국 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비언어적인(체화적인) 경험 능력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인들은 적어도 마치 우리가 ‘한국적 영화’에 대해 비교적 선명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듯 ‘(일본적) 라이트노벨’에 대해서 그 흔적(가족 유사성의 역사적 축적)의 종합을 통해 전반적인 느낌적 이미지를 뇌로부터 출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라이트노벨이 뭐냐? 하는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지는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도 이성의 주박으로 인해 무언가의 규정은 언어라는 정태적인 규범의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라이트노벨은 (다른 문학 장르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서) 안정 속에서 정주(settle)해 있지 않고 불안정성의 스펙트럼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환기한다. 스펙트럼(가족 유사성 요소의 산발적 집합)은 언어로 말해질 수 없고, 단지 스펙트럼이라는 그림(이미지)으로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라이트노벨을 ‘규정’할 수는 없어도, 라이트노벨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라이트노벨은 말이 아닌 행위이다.”

  이제는 본래의 주제로 돌아갈 순서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적 라이트노벨이라는 기표가 담고 있는 기의는 무엇일까요?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앞으로의 결론은 사실상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라이트노벨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더 이상 근대적 장르(form of genre)=언어가 아니라 현대적 장르권역(range of genre)=스펙트럼으로 엄밀하게 재정의한 것에서 그 전모가 암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발제문의 도입부에서 제가 한국적 라이트노벨에서 ‘한국적’이 지시하는 본의를 나름대로 정의한 여러 문제제기들을 소개했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모든 문제제기들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고도 했었죠. 이제 그 점을 밝히자면 바로 ‘경험성’입니다. 여기서 경험이란 다시 말해 ‘실천경험’입니다. 실천경험이란 실천하지 않는 경험 즉 ‘말’에 대비됩니다. 실천이란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행위 개념으로, 단지 현실 내에서 행위함을 가리킬 뿐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발생하는 행위는 모두 실천입니다. 그리고 말은 철저히 사변(경험에 의하지 아니하고 관념 속에서 머무름)의 세계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말은 근대적이고, 실천경험은 현대적입니다. 물론 과거에도 실천경험은 있었지만, 지성의 좌표가 이제는 말로부터 실천경험으로 이동했음은 영미철학계의 실용주의 학파, 일상언어학파, 심리철학, 공동체주의, (대륙철학계도 포괄되는) 포스트모더니즘, 대륙철학계의 해석학(가다머주의), 현상학, 네오-마르크스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의 득세가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대 동양철학계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거두인 노장자도 실천 그 자체로서의 삶을 중시했습니다. 갑자기 철학 이야기로 넘어가버렸는데, 요는 지성의 축적-발달이 곧 말(언어적 규정)이라는 근대성(이성)의 한계를 자기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라이트노벨이건 한국적 라이트노벨이건 이제는 실천적으로 새로이 조명되어야 합니다.

  가족 유사성 역시도 실천경험으로 환원됩니다. 그래서 라이트노벨을 아까 ‘라이트노벨은 xx다’라는 방정식이 아니라 뜬구름 잡는 듯이 가족 스펙트럼으로 ‘애매하게’ 정의했었죠.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국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한국적이라는 것은 라이트노벨과 마찬가지로 현실적 환상입니다. 아니, 어쩌면 라이트노벨보다도 더욱 관념적인 유령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규범=언어의 세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탈규범=비언어=실천경험의 세계에서 유령은 실체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유령을 비실체로 규정하는, 말이라는 독단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한국적’을 실천경험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한 그것의 존립이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단지 ‘한국적’이 경험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것을 말(단순명쾌한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다면 그것이 수식하는 ‘한국적 라이트노벨’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적 라이트노벨’은 ‘한국적’에는 방점을 찍을 필요가 없는, 아니 오히려 찍어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라이트노벨의 유전자적 ‘부모’가 ‘모험’과 ‘누드’라고 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철저히 ‘섬’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라이트노벨’과 ‘한국적’이 결합할 수 없는 배타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둘은 자연스레 섞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섞이고 있구요. 다만 ‘라이트노벨’이 우선적이지 ‘한국적’이 우선적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저 우리는 지금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생생한 현장을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본 라이트노벨과의) 질적 동등성과 가상적인 한국적 고유성을 멋대로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전제로 두고서 말이죠.

  뭐, 한국적=전통적도 사실 일리는 있습니다. 단지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진리치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죠. 한국적=양판소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적=사회문화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적=작가적은, 제 사견과 일견 동일해보이나 ‘라이트노벨’의 가족 유사성을 이탈하는 창작물까지 한국적 라이트노벨의 범주로 포함시키는 전체주의적 결함을 지녔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한국적=무용론은 이미 라이트노벨을 실천경험적으로 정의(조심스러운 표현입니다만, 일단은 너그러이 패스해주시길)해보았으니 저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 주장인 것이지요.

  조금 급하게 마무리로 이행한 감이 있습니다만, 사실 좀 더 밀도 있게 글을 쓰려고 해도 오히려 더 난해하고 복잡해질 것 같아서 이 정도로만 서술해보았습니다.

  자, 저의 발제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