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점 + 쉽고 잘 짜여진 세계관 + 기승전결과 희노애락이 확실한 스토리 +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 + 격렬한 감정의 배틀과 달착지근한 러브 코미디의 유기적인 조화 + 억압되고 금지되었기에 더 불타오르는 전개 + 미려한 일러스트
단점 - 살짝 빈약한 액션 묘사 - 오타 몇 개
■ 번역작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국내작이라길래 호기심만으로 샀다가 대만족한 작품.
처음에 소개 광고와 표지를 봤을 때는 일본의 판타지 계열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러스트나 제목의 타이포그래피 같은 요소들이 어쩐지 그런 이미지를 풍겼기 때문이다. 그런 첫 인상은 책을 펼쳐 든 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태껏 나온 국내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잘 기획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 분위기를 한마디로 설명하긴 쉽지 않은데, 마치 기획 단계부터 애니화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중견 작가의 작품 같은 인상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작품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모범적인 도입부하며, 명확한 테마와 유려한 전개. 심지어 챕터 사이에 있는 세련된 레이아웃의 해설 페이지 같은 세세한 부분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정말 신인작가의 처녀작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비일상 작품은 그리 선호하지 않는 편임에도 취향을 넘어설 정도로 무척 재밌었다.
■ 작품의 세계관은 지구에 떨어진 거대 외계운석 '레어메탈'과 이를 이용하게 된 신인류 '검사'들이 현 세대의 과학적 가치관을 뒤엎고 세상을 반쯤 지배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이에 반발해 기계문명의 광신도가 된 '기계교'와 대립하기는 하지만 1권의 현재상으론 성지인 검산에서 각국에 파견된 검사집단이 사실상 각국을 쥐락펴락하는 중. 그 이외의 생활상은 현대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장르적으론 모던 판타지에 가깝다.
검사들의 총본산이자 거대한 레어메탈이 처음으로 낙하한 검산으로 불려온 주인공 시엔은 과거 때문에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검사를 매우 싫어하는 일반인 소년이다. 시엔은 검산으로 향하던 중 일반인이 탄 배를 공격해 오는 기계교의 습격에 단신으로 맞서는 고결한 은의 소녀기사 세실리아와 만나게 된다.
세계관과 설정은 처음 접하는 사람도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게 짜여있다. 길고 긴 설명조의 설정놀음을 최소화 하고 도입부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작품내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쳐 나가떨어질 일은 없다. 뿐만 아니라 잘 잘펴보면 비일상 세계관임에도 은근히 독자에게 상당히 친숙한 설정이 숨어있다.
세실이 다니는 검사학교인 기사학원 하이랜드는 특히 수도원 처럼 엄격한 교풍이 특징이다. 중학생 남짓한 나이부터 철저히 통제된 교칙의 학원 안에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연애금지, 자유시간은 하루에 딱 두시간 남짓이란 삭막한 일상 속에서 오로지 검술만을 배워야한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참아라. 성과를 내서 남들을 밟고 위에 올라서야 한다. 등등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반감이 마구 솟아오르는 데... 왜 그런가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겪어온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일상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그렇다보니 좋게 좋게 가자는 기존의 룰에 반감을 가지고 이를 타파하려는 주인공의 안하무인격 행동에도 상당히 공감이 갔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호구가 아니다. 억압된 가치관에 대항하는 반항아적 이미지에 쿨한 성격의 전형적인 히어로상을 가지고 있다. 어떤 면에선 전형적이라 뻔해지기 쉬운 조형이기도 한데, 이를 입체적인 성격과 공감이 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연출의 힘으로 극복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인물간의 자연스런 감정선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특히 세실과의 첫 만남에서 시작해 서로를 알아가는 장면은 대놓고 하렘물을 표방한 작품임에도 고전적이고 풋풋한 보이 밋 걸의 향취가 느껴졌다. 작 내에서 등장한 라이트노벨의 내용을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드러냈듯, '한없이 호구에 가까운 남자애한테 여자애가 이상한 논리를 들먹여가며 밑도 끝도 없이 달라붙는 그런 내용'과는 차이가 있었다.
정 히로인 세실은 정 히로인인 주제에(?)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범재지만 노력하는 마음가짐, 수줍음 많은 소녀다운 성격, 가사만능이란 실로 스탠다드한 조형이 기본이지만. 거기에 실은 조금 야한 서브컬쳐 소설광에 틈만 나면 야한 상상이 입으로 나와서 폭주하고 만다는 비전형적인 변태성(...)이 코미디 파트를, 절대로 꺾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는 히어로적인 전형성이 배틀 파트를 살렸다. 주인공으로부터 구해지는 공주님이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의지로 싸우는 소녀로서의 모습도 보이는 입체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물론 그런가 하면 위에서 언급한 '이상한 논리를 들먹여가며 밑도 끝도 없이 달라붙는 여자애'도 나온다. 세실이 입으로만 에로에로 거릴뿐 쑥맥이라 서비스신은 거의 없었던 반면, 육감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천재 검사 메이린이 나오는 파트는 첫 등장부터 서비스 장면이 마구 폭발한다. 이 아이 역시 단순히 생각없는 에로 요원 역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에게 가지고 있는 복잡한 감정과 진지한 면모를 바탕으로 자신이 주역이 아닌 1권 내에서도 독특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꽤 마음에 드는데다 비중있는 히로인이었으니 만큼 2권은 아마 메이린이 주역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제 3의 히로인인 프레이, 프레야 자매는 이 작품의 잡았다 요놈과 개그를 담당한다. 연령과 분위기 문제 상 연애 라인에 합류할 리는 없겠지만 심각함의 수렁에 빠져들기 쉬운 상황에서 등장해 귀여움과 멍청한 개그로 값을 톡톡히 해낸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각 히로인이 연애, 에로, 개그 파트로 겹치는 일 없이 역할 구분이 잘 되어있어 공기화 되는 일 없이 나름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 거대한 학원도시의 억압에 대항하는 이능력 배틀과 세실을 위시한 히로인들간의 러브 코미디는 각각을 놓고 보면 마치 각자 다른 작품처럼 어느 쪽도 완성도가 높다. 그러면서도 능력 배틀과 러브 코미디 간의 분위기 전환이 무척 자연스럽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결말로 말끔하게 수렴된다는 점은 여타 유사한 일본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세련미가 있었다.
코미디 파트는 과도한 개그 욕심 없이 딱 끊을 부분에서 끊어 과한 느낌이 없었고, 세계관 및 배틀 파트 역시 밸런스를 잘 맞춘 덕분에 유치해지지 않고 신나게 불타오를 수 있었다.
인물 사건 배경의 모든 부분에서 클리셰를 적극 활용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모난 부분 없이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기본은 방대한 세계관의 능력자 배틀물이지만,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잘 짜여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달착지근한 러브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폭 넓게 추천해 줄 수 있는 작품이다. 뭣보다 전체적인 기획이나 완성도 측면에선 거의 독보적인지라, 국산 라이트노벨의 발전상을 확인하고 싶다면 꼭 접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