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이후의 세계 -하렘 관리편- (노블 엔진) 글 류세린 그림 Juke 장르 일상
러브코미디
실제 장르 비일상 러브코미디
글 ★★★★ 그림 ★★
세계관
수 많은 라이트노벨에서
일상속의 남자 주인공이 히로인과 만나 비일상의 세계로 넘어가는 플롯을 따르며, 대개 오컬트적인 소재와 연관되어 물리쳐야할 악의 무리들이
등장하며, 대개 주인공 일행이 고난과 역경을 잘 극복하며, 그 과정에서 하렘이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라이트노벨을 별로 접하지 못한
독자라면 다소 낯설 수 있으나, 나름 많이 읽어봤다는 사람들 눈에는 지겨우리만큼 뻔한 이야기다. 막상 찾아보면 이걸 동시에 다 만족하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크게 보면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굳어질대로 굳어진 틀이다. 중간 중간에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봐야 결국
대체로는 비슷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가 식상하다는 걸 알아도 굳이 지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것보다는 앞에서
언급한 '중간 중간에 조금 다른 부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은 아예 틀 자체를 부숴버리는 작품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들은 소재가 좀 참신한 정도가 아니라 시대를 바꾸든지 지도를 바꾸든지 뭔가를 뒤집든지 하여튼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야한다. 당연하지만
이런 변혁은 상당히 어려운데, 시대를 과거로 옮기면 역사 고증이, 미래로 옮기면 과학 고증이 기다리고 있고 지도를 바꾸면 그냥 작가 빼고 다
달라진다고 보면 된다. 뭔가를 뒤집는 건 쉽고 어렵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안될 방식이다. 막상 뒤집고보면 별로 대단치
않아보이는 게 특징이다.
'엔딩 이후의 세계'는 일상 속의 주인공 '시하'가 천재 발명가 소녀 '맥거핀'을 만나 비일상의 세계로
넘어간 뒤 범죄 조직이자 오컬트 단체이자 초과학 집단이자 사이버 종교인 비밀결사 '다크 네뷸러'를 '천재 발명가와 재벌 아가씨와 정부기관 소속의
누님과 소꿉친구와 신원불명의 소녀 등등'과 함께 물리치고 이들을 구성원으로 하렘을 세우는 내용이다.
근데 책을 보면 저 이야기가
없다. 뻔하지만 흥미로워 보이는 이 모험이 그냥 하나도 없다. 위에서 언급된 내용은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책 속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엔딩부터 시작'한다. 언뜻보면 가장 중요한 것 같은 내용을 다 갖다 버리고, 대부분은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부분을 글감으로 잡은 것이다.
작가는 흔한 이야기를 바꾸지 않고, 시대를 바꾸지 않고, 지도를 바꾸지 않고, 오직 발상만 뒤집어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썼다. 근본부터
대단하지 않다고 할 수가 없는 작품이다.
그까짓게 뭐 대단하냐고? 적어도 내가 볼때는 대단해보인다. 남들이 엔딩 전의 세계에서
흥미로운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전투신, 밸런스 있는 하렘 건설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 류세린은 전부 과거에 맡겨버리고 자기가 쓰고 싶은 것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점이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급전개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그러고보니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지라고 복선을
'만들어' 쓰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과거일인데 싸움이 꼭 박진감 넘칠 필요도 없다. 그냥 이건 이런식으로 이겼다는 회상 한마디면 된다.
첫만남부터 사랑의 감정이 싹틀 때까지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그냠 넘어가도 된다. 결국 하렘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니까. 이렇게 멋진 소재를 잡아내는 것이 대단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 대단하단 말인가?
시작은 처음에서 한다는 상식을
버리고 끝에서 시작한다. 이 단순한 차이가 뻔한 소재를 참신한 소재로 바꿨고, 가장 어려운 부분을 가장 쉬운 부분으로 바꾸었다. '엔딩 이후의
세계'라는 제목은 그 기발한 발상들을 단 일곱 글자에 함축한 멋진 제목이다.
스토리
엔딩 이후의 세계는 주인공의 능력이 그냥 단순하게 뭘 죽인다 뭐 안
통한다는 식이 아니라 '타이밍에 맞춘다'라는 두리뭉술하고 골치아픈 능력인지라 작가의 수준이 곧 작품의 수준이 된다. 저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면 복선을 좀 대놓고 쓰거나 행운에 관대해지는 대신 내용이 좀 엉성할때 열혈이라고 우기지도 못한다. 소재 자체는 좋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망쳐버리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류세린은 저 소재를 충분히 다룰 수 있는 그릇인 것 같지만, 저 좋은
소재가 작가를 잘못 만났으면 어떤 꼴이 났을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나는 그렇게 망한 소설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픈 적이 있었다.
초중반엔 너무나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의 능력 덕분에 적당히 복잡한 맛도 있고, 러브 코미디 특유의
분위기도 은근 잘 살려낸데다가 만담도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복선으로 구성을 탄탄하게 받치는 기술은 적어도 이 작품에 걸맞는 수준은 됐고, 뭔가
지저분하게 남은 것 없이 딱 깔끔하게 정리되어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부제에다 하렘 관리편이라고 딱 박아놓은만큼 정신나간 점 역시 딱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물론 그 상태로 시작했으니 아무리 잘 써도 별 다섯개는 무리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걸 알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멋진 찬사를
생각해야할지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후반. 후반을 읽으면서는 생각이 확 달라졌다. 속에서 온갖 쌍욕과 당장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내가 라이트노벨을 읽으면서 이렇게 격렬한 분노를 느껴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뭘 어떻게하면 이 책의 쓰레기같은 점을 알릴 수
있을까? 뭘 어떻게하면 이 책이 팔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뭘 어떻게하면 나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수가 있을까?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의
멘탈은 허약해져만 갔고, 캐릭터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 나는 이 책을 포기할까하는 생각까지 했다. 원래부터 다들 미쳐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여기 캐릭터들은 그렇게 흔히 써서 의미가 약해진 표현 말고 정신병이 있다거나 장애가 있다는 식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읽었다. 책의 한 부분이 재미 있고 없고를 말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한 책을 평가하는 건
일단 다 읽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빨든 까든, 하다못해 까기 위해서라도 어쩄든 읽기는 다 읽어야했다.
그리고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이렇게 읽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것도 실력이라는 생각을 했다.
캐릭터
* 시하 : 세계를 구한 영웅이자 그때의 파티원들로 하렘을 세운
주인공. 워낙 개성이 뚜렷하다보니 장단점도 딱 보인다. 우선 장점은 스토리 파트에서 미리 언급했듯 참신한 능력이다. 간단히 말하면 절대
늦지 않는 능력인데, 이 녀석은 카운트다운만 들어가면 미리 대비하든 발악을 하든 운이 좋든 어쨌든 모든 장해를 넘어 모든 걸 정확한 타이밍에
맞출 수 있다. 무식하게 강해지면서 우정! 노력! 승리!를 외치는 녀석들은 반도고 열도고 할 것 없이 이미 많이 있지만, 생전 이런 능력자는
처음 본다. 스스로 나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각자의 능력을 적절하게 이용해 승리를 쟁취하는 리더형 능력자인 것이다. 조금만 말을
달리하면 진정한 의미의 무능력자가 되겠고, 또 조금만 더 바꾸면 희대의 사기캐릭이다. 단점은 생각한것 이상으로 멘탈이 쓰레기였다는
점이다. 사실 이야기를 이렇게 굴리려면 어쩔 수 없고, 어느정도는 예상했던 전개였지만 그래도 직접 보니 영 불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좋은 소리를 듣는다(상대의 마음이 상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마음대로 휘두르는 점이나, 누군 자기가 꽉 잡고
있다느니하면서 건방지게 지껄이는 점이나, 거짓말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분명 방금 다짐해놓고 속으로 후회하는 점이나, 하여튼 여러가지로 인간
말종같은 모습이 너무 많이 보였다. 이것도 그나마 어느정도 각오했으니 망정이지, 달달하고 평화롭기만 한 러브코미디를 기대하는 독자들이라면 열이
뻗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맥거핀 : 표지를 장식한 히로인이 한마디도 안한 건 메이드 인 코리아 이후로 처음봤다. 뭐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닌데, 그도 그럴 것이 '맥거핀'이라는 단어 자체가 전체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독자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트릭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적절한 작명이다.
* 희진 : 자신이 로리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소설을 꼭 읽길 바란다.
* 미연 : 시하와 함께 드립으로 맞부딪히며 만담가의 길을 걷는 괴도 소녀,는 아니고
그냥 유쾌한 바보다. 말이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웃긴 말을 하는 일도 많다. 부잣집이라는 점과 도벽이 있다는 점이 서로 모순되는데, 그냥 그게
전부라면 그다지 잘 만들어진 캐릭터라고 보기는 어렵다. 앞으로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달린 것이다.
* 은주
: 183
* 야니 : 야니야니야니...! 캐릭터 디자인 자체는 그냥 평범하지만 병적인 집착이나 특이한 말투 모두 참 잘
가져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적인 집착이라는 건 그냥 쉽게 말해서 얀데레라는 건데, 이 얀데레가 꽤 순도 높은 얀데레라 놀랐다. 야니는 그냥
눈에서 초점만 사라지고 칼만 들고 말로만 협박하는 가짜 얀데레랑은 격이 다르다. 물론 야니가 진짜 얀데레는 아니지만, 정말 그런 캐릭터를 만들
수는 없고 어느 정도 수위 조절을 해야하는데 그게 참 적절했던 것 같다. '~이어요.'나 '~사와요.'처럼 예쁜 말씨를 선점했다는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많은 작가들이 안타까워할 일이다.
문장
흡입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냥 한 줄 두 줄 읽다보면 어느새 휙
빨려들어가 미친듯이 읽게 된다. 게다가 초반부터 후반까지 큰 기복 없이 안정적인 문장을 구사하기 때문에 특별한 일만 없으면 그냥 앉은 자리에서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흡입력은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장점이라고 보기도 단점으로
보기도 애매해서 그냥 한번에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류세린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우선 다른 라이트노벨에서도 많이
활용되는 볼드체나 별★, 자유로운 문단 변경은 물론이고 게임 판타지 소설 등에서 흔히 쓰이는 글상자, 대사 속에 대사를 넣어 두 상황이 동시에
진행되는 걸 묘사하는 등 직관적으로 알아보기 쉬운 표현을 잔뜩 사용한 것이다.
필자는 소설 속의 한글에 대해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 족족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들 덕분에 조금 더 재미있어지고 읽기 편해진 것 역시 사실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 다른 것 같아 내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는 않겠다. 그냥 책을 고르는데 참고 정도만 됐으면
좋겠다.
일러스트
뭐 긴 말 필요
없고 딱 한마디만 하겠다.
표지빼고는 대체로 아마추어 같았다.
오디오
놀랍게도, 엔딩 이후의 세계 특설 페이지에서
캐릭터들의 목소리와 CM송을 들어볼 수 있다. 노래는 기구하게도 시드 사운드에서 제작했으며, 성우분들은 필자도 아는 바가
없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대체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 왜, 거상이나 그라나도 에스파다 같은 게임은
움직이면 캐릭터들이 말을 하지 않는가. 딱 그 느낌이다. 근데 맥거핀만은 다르다. 맥거핀은 쩐다. 맥거핀은 책에선 한마디도 안하지만 목소리로는
계속 듣게 된다. 맥거~핀이라고 하는 부분이 정말 최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