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 작가의 작품은 리뷰하기에 힘이 많이 듭니다. 작품 자체는 아기자기한 편인데, 그 안에는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한 포인트를 집어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요. 작품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리뷰할 포인트를 잡기 힘듭니다. 큼직큼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할 이야기가 없는데, 작은 것들을 하나씩 꺼내서 이야기하려다 보면 책 전체를 놓고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저는 글 하나에다가 이것저것 담으려고 하다보면 초점을 놓치는 편이라서 리뷰 한 편에는 한 개에서 두 개 정도의 꼭지만 담으려고 합니다만, 반월당이나 유랑화사 같은 경우에는 그게 잘 안되는군요.
뭐, 이건 리뷰어로서의 단순 투정이고, 작품을 읽는 독자의 입장으로서는 기쁩니다. 그만큼 작품의 속알맹이가 꽉 차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정연님 작품을 읽으면 참 좋아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무엇을 리뷰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만, 심플하게 가기로 했습니다. 리뷰 시작합니다.
●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
이 작품은 별 힘도 없지만 온갖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유단이라는 고등학생이 신령한 여우요괴 백란이 살고 있는 전통찻집 반월당을 들락날락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기묘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는 슬픈 이야기도 있고 행복한 이야기도 있지만, 어떤 에피소드든간에 읽는 사람에게 진한 여운을 줍니다. 읽을 때는 재밌게 봤지만, 읽은 후 내용을 반추하는 도중에는 스님의 설법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 책 정말이지 진국이야...
● 등장인물들에 대한 짧은 평
-유단
: 작가가 잘 못 쓴게 아니라 그냥 제가 싫어하는 건데, 개인적으로 되게 싫어하는 인물상입니다. 약간 삐딱하고 화를 잘 못 참으며 멍청한 고등학생. 능력도 없는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일을 크게 벌리는 스타일. 그래서 도입부에서는 “아 주인공 극혐...”이러면서 봤습니다. 괴로웠어요...
하지만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니까,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라는 작품의 주인공은 얘가 아니면 굴러가기 어렵겠구나.”하는 느낌이 들더구만요. 올곧고 고지식하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백란한테는, 이렇게 능력은 없지만 고집쟁이고-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철부지여야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채우&채설 남매, 도씨, 흑요
: 유랑화사 읽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정인 작가님은 인간 캐릭터 만들때는 안 그런데 요괴 캐릭터 만들때는 이상할 정도로 “평면적인” 캐릭터를 만드려고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간이 아니라 행동패턴이 123밖에 없는 종이인형 같달까... 뭐 생각해보면 인간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납득했음.
생동감 있는 캐릭터로서의 매력 같은 건 없었습니다만, 대신에 2D캐릭터에서 얻을 수 있을 듯한 그런 귀여움은 철철 넘쳐흘렀습니다. 캐릭터들의 만담이 재미있었어요.
-백란
: 이 작품이 맘에 들었던 이유 Best 1. 백란이 매력터졌습니다. 이건 앞에서 말했던 2D캐릭터 같은 그런 매력이 아니라, 얘 보면 사랑스럽고 껴안고 싶고 할짝할짝하고 싶고 연애하고 싶은 그런 매력입니다.
작품을 보면 볼수록 느껴지는데, 백란이 참 입체적인 캐릭터고 뜯어보면 요소 하나하나가 매력적입니다. 고고함과 유치함이 어우러져서 나오는 매력의 심포니라고나 할까요. 완전 좋음. 자세한 건 후술합니다.
● 백란의 매력에 대해서 짧게 논하다.
백란의 어느 부분이 매력적이냐? 한 마디로 말해서 갭모에지요. 모두에게 고귀한 여우요괴라고 떠받들어지는 존재지만, 유단이랑 얽히는 와중에 자기 페이스가 흐트러지면서 허둥지둥 하는 모습이 매우 좋습니다.(침 줄줄)
백란의 끝이 보이지 않는 매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저는 그 근원을 백란의 “애늙은이”스러운 모습과 그의 외로움이 유단을 만나 발생하는 미친 케미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백란은 “애늙은이”입니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어요. 백란의 친구 없음이 밝혀지...엣헴. 2권의 곡두기 놀이를 보면 나오는 내용이지만 백란은 어릴 적부터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과의 어울림에서 발생하는 “성장”이라는 과정이 없었어요. 백란이 어른스러운 것은 내면의 성장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그냥 남들이 그렇게 대해주니까 거기에 맞춰서 행동한 것이 몸에 밴 것 뿐입니다. 백란에게 인간관계란 생소한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거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죠.
이것과는 별개로 백란은 외로움을 계속 겪어왔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아무리 인간을 위해 행동해도 인간은 그 사실을 까먹기 때문이죠. 백란은 잊혀질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인간을 돕습니다. 그 행동의 원인을 두고 작중에서 유단은 이러저러한 이유를 생각해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전 백란의 행동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도 있었다고 봅니다. 애정이 있어서 이 일을 시작했든, 아니면 이 일을 하면서 애정이 생겼든간에 말이죠.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할까요. 설령 그게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죠.
여기에서 등장하는 게 유단입니다. 유단과의 불꽃튀기는 케미가 있었기 때문에 백란의 매력이 빛을 발할 수 있었겠지요. 유단은 유일하게 백란의 노력을 알아줄 수 있던 인간이었고, 백란을 숭배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신경쓰고 달라붙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백란은 유단에게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안 그런 척 하면서도 유단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뻐하거나 삐치거나 하는 갭모에 캐릭터가 된 것입니다!
사실 이건 뭐랄까 백란도 남자고 유단도 남자라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케미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틱틱대지만 사실은 굉장히 신경쓰고 있고, 그래서 한쪽에 무슨 일이 생기면 궁시렁궁시렁거리더라도 결국은 몸을 던져서 구해주는 남자놈들의 그런 우정-! 아마 한 쪽이 여자였다면 연애스토리로 빠졌을테니 이런 것은 못 봤겠지요. 연애스토리도 그 나름대로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이건 너무 흔해서....
● 총평
이건 사실 노블엔진 팝에서 출판된 거의 모든 소설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만, 반월당은 작지만 속알맹이가 탄탄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스케일이 크지 않아서 대작은 되기 힘들지만, 대신에 한 권 한 권의 완성도는 타 작품들에 비해 높지요. 벌려놓은 게 많이 없으니 “나는 이 작품만 죽어라 파겠다!”는 불가능합니다만, 대신에 “이 작품을 샀는데 돈이 하나도 안 아깝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추천해주고 싶다!”는 가능하다는 느낌일까요.
결론이요? 님들 제가 백란 찬양한거 못봤음? 빨리 반월당 사세욧!
사족. 사실 각 에피소드별로 감상을 넣고 싶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리뷰가 아니라 리뷰를 빙자한 수필이 될 것 같아서 뺐습니다. 뭐라고 해야하나,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아서, 감상을 넣다보면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얻은 깨달음에 대해서 줄줄줄 쓰게 될 것 같달까요... 역시 스님의 설법집 같은 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