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점
+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태향
+ 놀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축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성
+ 팽팽하게 격돌하는 긍정과 부정의 힘
+ 불편하고 기분이 나빠도 결국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클라이막스
+ 이미 벌어진 상처에 생크림을 발라주는 애프터케어 에필로그

단점
-- 인간불신이 생기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강도높은 현실반영

호불호
+- 엄청나게 비틀린 클리셰
+- 여자든 남자든 이제 그딴 건 상관어벗어



■
표지 뒤 소개글에 '어브노말 청춘 그래피티!' 라고 적혀있기에, 주인공과 그에게 일편단심인 쭉빵 소꿉친구 사이에 변태인 척하는 로리 치녀가 끼어들어 열심히 자신을 어필하는 달착지근한 러브코미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근데 읽고 보니 확실히 두 가지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하나는 변태인 척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인생자체가 변태인 인간들 투성이라는 점.
또 하나는 러브코미디는 커녕, 피 토할 정도로 쓰디 쓴 100%현실 속에서 너도 상처받고 나도 상처받는 청춘 성장물었다는 점.

아니, 요즘 세상에 청춘 그래피티! 라고 해놓고 내용도 진짜로 청춘물인 작품이 다 있나? 주인공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여자애들이 조건없이 반해주고 그렇게 알콩달콩 지내는게 요즘 청춘물을 가장한 러브코미디 아닌가?

달착지근함이 어느 순간 씁쓸함으로 변하고, 빵빵 터졌던 농담들이 갑자기 돌직구 같은 현실로 바뀌고, 성별이고 미소녀고 할 것 없이 서로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는가 싶다가도 결국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사람의 선함과 긍정의 힘을 믿는 소년과,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증오해 마지 않으면서도 그렇기에 소년에게 손길을 뻗는 소녀의 불편하면서도 눈을 떼기 힘든, 뭐 그런 이야기였다.


■

본 작품의 키워드 중 하나인 '변태'요소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자면.

딱히 의식해서 어브노말한 요소를 집어넣기 위해 연구 했다기보다는, 편집되지만 않을 한도 내에서 그냥 정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비정상적인 언행을 마구 녹여냈다는 점이 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신기했다.

18금 급으로 에로하거나 뭐 누굴 피떡 만들고 달을 바라보며 큭큭거리거나 딱히 그런 자극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것도 아닌데, 얘들 행동거지 말투 하나하나를 보고 있으면 '와, 얘네들 진짜 정신머리가 좀 나갔네'같은 감상이 절로 나온다.

무리하지 않고 어깨에서 힘을 뺀 채로 술술 흘러나오는 변태의 자연체 같은 느낌이랄까?


■

이미 광고에서도 차마 못보여줄 부분 빼고거의 다 드러냈다시피, 이 버들이란 아이는 주인공을 자신의 주인자리에 앉히고 싶어 안달이 난 진성 바바리코트 스토커 치녀다.

아니, 치녀인지 치○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람은 누구나 S와 M의 양쪽 성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불변의 법칙을 그대로 옮긴 다음 가식을 빼고 나머지를 백배 정도 증폭시켜 둔 정도의 훌륭한 노예이자 여왕이다.

그러니까 이런 캐릭터가 단순히 노예성향이기만 해서는 안되는거다. (그런 면에서 본 표지를 살짝 벗겨내면 나오는 어나더커버의 자태는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초판한정을 놓쳤다면 울고 싶었을 정도로.)

노예 속성하면 그냥 비굴할 것 같아 보이는데 실제 인상은 꽤 달랐다. 당당하면서도 어둡고 삐뚤어졌으면서도 현명하고, 망상가 같으면서도 현실적이다.

아무튼 중후반을 넘어서며 점점 자신의 진의를 내보이는 버들이지만, 초반에 삐뚤어진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주인공을 선택했을 땐 다소 의아하기도 했다. 호구필리아라는 새로운 기호증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들러붙는 치녀 히로인과 그러든 말든 아무런 고민없이 경찰에 신고하는 주인공의 밀땅 만담 덕분에 초반부는 몇 번이나 빵빵 터지면서 즐겁게 넘길 수 있었다. 변태니 호구니 어쩌니 해도 뭐 양념 정도에 기본은 가볍고 말랑말랑한 학원 코미디 분위기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렇게 치녀랑 어울리다가, 나중엔 그 꼴을 보다 못한 소꿉친구가 가세해서 즐거운 삼각관계 라이프가 펼쳐지려나 보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중반부 직전까지는.


■

이 작품에서 다루는 호구란 마음씨 좀 착한 주인공 속성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정신 나간 현실의 흔한 호구를, 어장관리녀란 단순히 빗치인 척 해도 사실은 츤데레 뭐 그런 게 아니라 내숭을 무기로 진짜로 호구의 등골까지 다 빼먹는 벼슬 높으신 분을 지칭하고 있다.

소꿉친구(속성이)니까 내가 어떤 여자애랑 달라붙어 있건 언제나 나만을 바라봐 줄거라는 지고지순의 절대영역 같은 건 이 작품에 없다.

평생을 같이해 온 소꿉친구는 이미 다른 엄친아랑 눈맞아서 짝짝꿍 중이고, 이를 보며 어두운 마음을 불태우고 있는 건 오히려 주인공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연심을 못이겨,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을 댓가로 알바까지 해가면서 밥 사주고, 옷 사주고, 영화 보여주고, 자기 방 침대에서 나란히 함께 하루를 끝마쳐도 털끝하나 못 건드린채 뜬눈으로 한숨만 쉬고 있는 사람 역시 주인공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다.

야이, 미친 연놈들�聞빱빱빱�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는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장난으로 끝날 줄 알았다. 실은 소꿉친구인 솔이 진짜 좋아하는 건 주인공이고, 그런 주인공을 한번 떠보려고 꾸민 연극이라던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도 했었다.

근데 현실은 그딴 거 없고 그냥 진짜로 친구인 여자한테 빨아먹히는 호��ㅋㅋㅋ 어딘가의 밥순이랑 좋은 승부가 될 정도의 레알호구왕ㅋㅋㅋㅋ

와, 진짜 보다 보다가 이 정도로 진심으로 열받아서 패버리고 싶은 레벨의 호구는 처음 봤다. 끝까지 한다는 말이 오해다, 내가 잘못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 아이에게도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거다, 나는 사람을 믿는다, 믿고 싶다 등등. 아주 가관이다.

이 솔이라는 소꿉친구야 뭐, 혼과 색기가 담긴 표지 일러스트에 비해 너무 떨어지는 첫번째 흑백 일러스트의 등장 신부터 살짝 마음에 안들었고, 초반부터 명백히 빗치같은 포스를 노골적으로 뿜어내고 있어서 당연히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서도.

태어나서 18년 동안이나 뭐든지 함께 해왔기에, 몇 달전에 눈맞아서 끌려다닌다 같은 류의 레벨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그 인연의 힘이 너무나 강하고 소중하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주인공의 놀랄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인간 긍정에 짜증이 나고, 한심하고, 그러면서도 무심코 저 정도까지 좋아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해버리는 자신의 숨겨진 호구성에 놀라서 또 짜증이 나버리는 무한 네거티브 지옥이 한동안 펼쳐졌다ㅠㅠ

그렇게, 이야기는 해결책이고 구원이고 없는 어둠을 향해서 끝도 없이 달려간다.

딴 사람은 [다 깨달았는데 나중의 나중에 가서야 간신히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의 마음은 너덜너덜해지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초반부에 보여줬던 그 비정상적인 행동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줄줄 알았던 변태녀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채 그가 스스로 선택해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영화에 나오는 완벽한 악당상조차 아닌 소꿉친구는 자신의 행위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채 깊은 상처의 늪속에 빠진다.]


■
비극은 이 작품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당신을 좋아할 여자는 없다'로 시작하는 버들 선생의 어장관리녀의 심리와 진실에 대한 명강의는 어딘가의 화술, 인간관계 학원에 프린트해서 붙여놔도 좋을 정도로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같은 현실을 담고 있다.

서브컬쳐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쏟는 히로인'같은 건 작품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단지 이야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움직이는, 지극히 이해타산적이지만 그렇기에 극히 현실적인 캐릭터 뿐이다.

알고는 있지만 눈을 돌리고 싶은 날것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서 이토록 스트레이트로 던져대는 이야기는 그리 흔치 않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의 호구짓을 마냥 남의 일인양 태연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쉽게 타인의 말에 현혹되고, 별 근거없이 사람을 믿고,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거절하지 못해 애만 태우고, 생각없이 잘해줬다가 뒤통수 맞고 했던 그런 자잘한 경험들 때문에. 결국 나는 주인공을 욕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론 깊이 공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뭐 동족혐오... 시발 내가 호구라니ㅠㅠ

아마 작품은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심각하게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고단함을 전부 잊고 대리만족으로서 즐길 수 있는 픽션이라기보다는, 픽션이라는 울타리 안에 쓰디쓴 현실을 잔뜩 풀어놓고선 독자가 지칠때까지 궁지에 몰아넣는 그런 극단적인 스타일이라고 할까.

처음엔 짜증나고, 거북했던 감정이 점점 더 극한으로 치달아가다 보면 결국 아픈건 처음뿐이고 나중엔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그만큼 갈등이 해소되었을 때의 쾌감도 커지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어느 순간, 답이 없어보이던 이야기와 갈등은 거짓말처럼 신기할 정도로 해소된다.

결국, 해냈다 해냈어 우리 호구가 해냈다!

주인공의 어설픈 긍정을 잠식해버렸던 버들의 부정을, 다시 한번 뒤집어 엎어버린 초긍정의 힘 만세!

비록 그것이 [사랑이 시작되는 이야기가 아닌, 실연으로 끝을 맺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진짜 울고 싶어질 정도로 여운이 남는 결말이었다 하더라도.

결국 호구는 끝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을, 의지를 고수해 낸다. 호구가 고통을 겪고 끝나니 성장해서 호구를 탈출했더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영향은 받아도 결코 변하지는 않았다. 호구는 여전히 호구지만, 긍지높은 호구가 되었더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현실에 치이고 상처받고선 호구라는 칭호와 함께 순수하게 인간을 믿었던 긍정의 힘까지 같이 전부 버려버린 어설픈 호구입장에서 보기엔 얘처럼 끝까지 호구임을 고수한 호구는 정말 빛나는 호구처럼 보일 지경이다.(하하 호구판이네)

그 과정을 통해 상실하고, 상처받았지만, 자기 자신은 잃지 않았다. 그 절대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성이 너무나 상쾌했다.
결국 유약함 속의 강인함이 주인공 자신을 구하고, 다른이를 구했다.


■ 슈퍼누설타임

솔에 대해서. [현실 반영이 좀 약하게 되었고, 그랬기에 어느 정도는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솔이 발휘한 어장관리력이 사실 실제의 그것에 비해선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다는 점이랄까.

주인공을 진심으로 좋아'했었'고, 딱히 이 남자 저 남자 다 들러붙어 먹은게 아니라 단지 집안몰락 이후에 기댈곳이 없던 차에 오직 주인공을 향해서만 그 진상짓어리광을 부렸다 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말기로 했다.

결말의 고백아닌 고백이 꽤 애절했고, 마지막의 키스장면 역시 끝도 없이 하락했던 이 아가씨의 주가를 몰라볼 정도로 회복시켜 주긴 했다. 내가 호구라서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좀 많이 귀여웠다. 결말의 결말인 편의점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이 아이도 결국 주인공의 하렘전선에 자기도 모르게 뛰어들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여전히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이런 타입의 여자는 폭탄이나 다름없어서리... 치, 치유ㄹ...]

예인에 대해서. [얘 진짜 캐릭터 뭐��ㅋㅋㅋㅋ 버들이 스토킹, 치녀, SM으로 작품내 어브노말도를 절반 올려놨다면, 나머지 절반은 얘 혼자서 벌인 네토리, 네토라레, BL 3관왕으로 점ㅋ령ㅋ 과연 한 핏줄의 힘은 대단해! 가문의 영광!

사실 저 위에선 쏙 빼놓고 있었지만, 진정한 감초 역할은 예인이 아니었을까 한다. 처음 올라온 광고만 봤을 땐 키 차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이 아이가 여장하고선 버들로 행세하는 줄 알았는데, 예상은 벗어났지만 결과적으론 더 재미난 전개가 된 것 같다.

절대 보답받을 길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주인공을 -> 무시한 채 절대 보답받을 길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솔을 -> 무시한 채 역시나 영 보답받을 길 없는 사랑을 다시 주인공에게로 쏟아붙고 있는 예인ㅋ 이 무슨 저주의 트라이앵글ㅋ 솔 꼴좋�い빱�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네가 내버린 그를 사랑하고 있지. 후...슬ㅋ퍼ㅋ��]

버들의 성별에 대해서. [예인과의 동일인물 설은 초반부부터 확실하게 깨졌으니 아 아이가 남자가 될 확률은 전혀 없다. 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냐 하면 또 아주 그렇지도 않은 것이...

일러스트의 골격이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설을 비롯하여, 일러스트에서 한번도 중요 부위가 제대로 보여지지 않았다는 점, 본문에서 본인 스스로 지나가는 말투로 '한번이라도 내가 여자라고 한적 있음?'같은 대사를 내뱉었다는 점, 이외에도 심지어 노엔쪽 스태프의 입에서도 심심찮게 혹은 대놓고 떡밥을 던지곤 했다는 점 등등. 떡밥은 2권에서도 계속될 것 같다.

근데 뭐 사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으...려나? 달려있던 달려있지 않던 버들은 버들이잖아?]


■
결론적으로, 앞서 언급했던 중반부터 클라이막스로 치닫기 직전까지의 높은 네거티브의 벽 때문에 누구에게나 쉽게 추천할 수 있을 만한 가벼운 작품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아무렴 어때 나만 좋으면 됐지! 좀 더 해라!

보나마나 다음 권도 끝도 없이 땅파고 가슴졸이게 될 게 뻔하지만, 그래도 기꺼이 함정카드를 밟고 싶다. 이런 리스크 넘치는 작품을 내준 노엔이란 괴작전문레이블이 사랑스러울 지경이다.

엔이세와 함께 심장쫄깃하게 다음권의 발매를 기다리는 작품이 또 하나 추가되어서 기쁘기 그지없다.

이글루스

standaloner.egloos.com/567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