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악명 높던, 잊혀진 그 이름 라이트노벨
올드비라면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시드노벨에는 환상처단자라는 소설이 있었다.
시드노벨이 막 시작되었던 2007년, 스트로베리 UFO의 뒤를 이은 두 번째 공모전 입선작 출발하여, 출간 직후 밀리터리 관련 고증 오류 논란, TRPG 세계관 표절 논란에 휩쌓이며, 끝내 작가가 절필을 선언함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버린 시드노벨 최초의 문제작이다.
당시 본인은 고등학생으로서 미얄의 추천 정도만 사서 읽는 라이트급 오타쿠였기 때문에, 작품 제목과 그에 관련한 논란만 들어봤을 뿐 이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모든 것이 잊혀져버린 현재, 간만에 학교 도서관을 둘러보던 본인은 잊혀진 금단의 이름을 발견한다. 분명 작년까지는 발견할 수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 책을 빌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당 작품의 광고에도 장르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장르는 '약간 다크다크한 분위기의 전기 배틀물'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뭐, 이런거 꽤 흔하지 않나. 현대에 마법사라던가 악마 등이 나와서 총 들고 땅땅땅빵? 뭐, 이런거 흔하잖아. 옆 나라 월희 같은거라던가, 우리 나라 월야환담 같은거. 여하튼 그런 종류라 생각하면 되겠다.
1.본문에 대해.
최대한 작품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고 노력했고, 혹평 받은 작품을 재평가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솔직히 그닥 좋은 점수는 못 주겠다. 설령 환상처단자가 몇 가지 면에서 부당하게 까인 면이 있다 해도 그렇다.
일단 세계관. 작가가 세 명이나 투입된 공동 창작 세계관이라 들었는데, 그런것치곤 별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한 현대 중2 세계관이었다. 적어도 환상처단자 1권에 나타난 세계관은 그랬다. 표절 시비가 걸린 이유도 알만 하다. 겉멋에 치중해서 거대한 틀을 짜다 보니, 다른 겉멋들과 별 다를게 없어져버린 것이다. '과학'이 즉 '이능'인게 참신한 설정이라고? 그래서요? 깔깔깔. 결국 그래봤자 다 겉멋이다.
캐릭터와 플롯은 단순하다. 예쁘고 쿨하고 폭력적인 여주인공 짱짱걸이 나쁜 놈들 때려부순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지만, 사실 옛날에 죽었던 악마의 환생체로서 어쩌구 저쩌구 한 남주인공은 자신의 일상이 깨져나간 것에 찌질거리다가 끝난다. 이게 끝이다. 뭐, 다른 자잘한 캐릭터도 나오고 여주인공 과거 떡밥이랑 기타등등 플롯이 나오기는 한데 중요한건 결국 이거 뿐이다.
이런것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사실 세계관, 캐릭터, 플롯 다 필요 없다. 현대 전기 액션의 꽃은 누가 뭐래도 액션! 액션씬만 좋았더라면, 난 이 모든 것을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 붉은 장발 누님이 담배 물고 코트 입고 대구경권총 들고 나와서 땅땅땅빵! 이 것만 제대로 보여줬다면, 난 환상처단자를 비운의 명작이라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 솔까, 조잡했다. 비슷한 시기 출간된 송성준 작가의 '안테노라 사이크'가 우월한 액션씬을 자랑했기에 더 눈물겹다. 아니, 생각해보면 안테노라 사이크는 환상처단자의 완벽한 상위 호환 아닌가? 세계관, 플롯, 캐릭터, 액션... 헐, 대박.
2.프롤로그노벨.
이러한 문제점을 통틀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환상처단자 1권은 라이트노벨이 아닌 프롤로그 노벨이었다.
현대 전기물의 프롤로그를 최대한 정석적으로, 클리셰적으로 구성해보자. 여기, '평범한 고등학생' 주인공이 있다. 어느날 주인공은 갑작스럽게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일상'에 노출된다. '여주인공'이 아닌 비일상이란 곧 주인공의 위기. 궁지에 몰린 주인공 앞에, '무진장 멋진 짱짱걸' 여주인공이 나타난다! 짱짱 쎈 능력으로 악당을 쳐부순 여주인공! 또다른 '비일상'인 여주인공은 주인공 학교에 전학오거나, 주인공 집에 동거한다던가, 뭐 여하튼 갖가지 이유를 붙여가며 주인공 곁에 머무르게 된다. 자, 이정도면 라이트노벨 프롤로그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디 틀린거 없지?
그럼 이제부터 상상력을 발휘해보시라. 라이트노벨에서 이 프롤로그 부분만 뚝 잘라낸다. 이 전개를 엿가락처럼 길게 쭉 늘어트리고, 여러번 비비 꼰다음, 약간의 편집과정을 거쳐 프롤로그 전개만으로 라이트노벨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그 것이 바로 환상처단자 1권이라는 소설의 정체다.
물론 환상처단자 1권은 나름대로 라이트노벨의 형식을 갖추고 있고, 단권 완결도 제대로 적용되어 있다. 그러나 환상처단자의 본질을 최대한 압축하면 결국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것멑든 세계관을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프롤로그. 일종의 프랙탈 구조를 떠올리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근거없이 얼렁뚱땅 만들어낸 이론이긴 하지만, 이 설명대로라면 왜 작품의 내용이 이렇게 허술한건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이 1권은 프롤로그를 길게 늘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세계관도 깊이 보여줄 수 없고, 캐릭터도 단편적일 수 밖에 없고, 플롯도 그리 대단하게 만들 수 없다. 결국 아무리 제대로 만들어도 1권은 프롤로그, 본편에 들어가기 전에 짧게 보여주는 서장에 불과하니까.
만약은 만약일 뿐이지만, 그래도 만약 환상처단자에 2, 3권이 나올 기회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면 아예 안테노라 사이크처럼 벽돌노벨로 나와서, 한 권 안에 모든 이야기를 집약시킬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설령 이 작품이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한들 그 나름대로의 빛을 볼 수 있지는 않았을까?
아, 생각해보니 현대전기물인데 액션을 재미 없게 쓴 건 아무리 프롤로그라 해도 변명이 안된다. 만약같은거 없다. 2, 3권에서 액션씬이 확 나아지지 않는 이상에야 빛을 보기 힘들었을거다.
3.환상처단자의 탄생 배경.
2007~2008년, 시드노벨이 시작된 초창기는 동시에 시드노벨이 갈 길을 찾아 어둠 속을 헤메던 암흑기이기도 했다. 당시의 편집부는 아무래도 미숙했고 라이트노벨 장르 경험도 부족했다. 시드노벨 심사단이 꽤 오랫동안 징징거렸듯 라이트노벨 인재가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부족한 인재를 별다른 관리 없이 대충 뽑아다 쓴 편집부에게 더 큰 문제가 있던게 아닌가 싶다. 일단 입선작의 기록을 통해 뭐가 문제였는지 살펴보자.
시드노벨 대망의 첫 입선작, 이신영 작가의 스트로베리 UFO. 2007년 5월에 입선되었는고 이 소설이 출간된 것은 겨우 두 달이 지난 2007년 7월. 두 달이다, 두 달. 요즘 뽑히는 입선작이 적어도 반년 정도의 텀을 거친 후에 출간 되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이 때는 입선작을 바로 뽑아서 바로 출간한 거나 다름없다. 이거, 퇴고 과정을 거치긴 거친걸까? 공모전 원고에 일러만 붙인 다음 바로 출간한 건 아니겠지?
둘 째 입선작, 환상처단자. 2007년 7월 입선, 세 달 후 10월에 출간. 두 달에 이어 이번엔 세 달, 세 달이다. 아니, 편집부 이 사람들 일을 제대로 한 건 맞나? 설마 양판소 두 달에 한 권씩 숨풍숨풍 뽑아내던 습관을 그대로 가져온거 아냐?!
후... 침착하자. 셋 째 입선작, 녹턴 아르페지오. 2007년 9월 입선. 2008년 1월 발매. 네 달이면... 조금 아슬아슬하긴 해도, 그나마 일이 좀 될 것 같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은 환상처단자와 동일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인데, 이를 환상처단자 발매 직전에 입선시켰다는 건 확실히 뭔가 앞뒤가 맞는 이야기다. 환상처단자가 그럭저럭 잘나갔더라면 아마 동일 세계관이니까 이러쿵저러쿵 뿅뿅 했겠지. 결과적으로는 대차게 망했지만, 덕분에 시드노벨은 나승규라는 인재를 손에 넣었으니 그렇게 큰 손해는 안봤을거다. ...2012년에 이중국적으로 돌아오는건 일단 보류하자.
동시기에 입선된 넷째 입선작, 꼬리를 찾아줘. 2007년 9월 입선. 마찬가지로 2008년 1월 발매. 근데 이건 공모전 입선이라고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기성 작가를 받아들인 케이스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다섯 째 입선작, 망향교회. 2007년 12월 입선. 발매는 2008년 6월. 그래, 이 때부터 발매 텀이 여섯 달을 넘기기 시작했다. 시드노벨이 이제야 한숨 돌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일까? 나는 둘 다 였을거라 생각한다.
여섯 째 입선작, 정의소녀환상. 2008년 1월 입선, 2008년 7월 발매.
일곱 째 입선작, 링. 2008년 2월 입선, 9월 발매. 뭐, 더 이상의 케이스는 조사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니 생략하도록 한다.
이러한 입선작의 기록을 쭉 살펴보면, 암흑기의 시드노벨은 요즘 기준에서 볼 때 장난 아니게 막 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막나가는 기세를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이후, 그러니까 환상처단자와 보이드 워커라는 두 권의 진통을 겪은 뒤다. 그냥 근거 없는 추정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 두 권의 책이 시드노벨 편집부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시작부터 이렇게 대차게 까였는데 조심스러워질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환상처단자는 이렇게 시드노벨이 철 없는 유아기였던 시절에 나왔던 작품이다. 환상처단자 자체는 인터넷에 연재되던 작품이고, 편집자들은 막 라이트노벨을 담당하기 시작해 아직 그 틀에 익숙하지 못했다. 환상처단자가 실패한 원인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라이트노벨을 써내기엔 아직 미숙했다. 독자들은 이런 미숙함을 놓지지 않았고, 그들 나름의 언어로 이를 질타했다. 그렇게 해당 작품, 아직 프롤로그까지밖에 나오지 않았던 환상처단자는 그대로 막을 내린 것이다.
4.결론
환상처단자를 내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시드노벨은 보이드워커라는 괴작을 세상 앞에 드러냈다. 안그래도 환상처단자로 달아오르던 냄비는 아예 까맣게 타버렸다. 사실, 이 둘 만은 아니다. 시드노벨의 초창기는 무수한 실패의 역사다. 2007~2008년을 통틀어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작가 대부분이 기성작가라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이 기간동안 시드노벨이 발굴해낸 신인 작가 중 최근까지 활동하는 사람은 거의 한 두 명. 나머지는 순삭 완결을 내버리거나 연중, 아예 절필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실패를 축적하며 경험을 쌓아온 시드노벨은 2009년 이후로 넘어가며 점차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를 긍정적인 성장이라 평가하겠다. 적어도 요즘 작가들은 라이트노벨을 쓰고 있다. 작가도 편집자도 나름대로 성장한 것이다.
환상처단자는 물론 두말 할 것 없는 실패작이다. 그러나 달리 말한다면 이 실패작이 있었기에 시드노벨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말이 절필 당해버린 작가와 환상처단자에게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최소한 나는 환상처단자를 단순한 망작이 아닌 실패작으로 기억하고 싶다. 이상, 막장감상을 마치겠다.
